고대신라가 지배한 왜 왕궁의 신상제新嘗祭, 제사문화
檀國大學大學院 招聘敎授 홍윤기洪潤基
왜倭는 본래 미개한 야만인들의 터전이었다. 그 “섬나라 왜倭로 고대조선에서 쌀농사인 벼심기가 처음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천 8백 년 전, 이른바 ‘야요이’ 시대이다”라고 고증한 것은 1980년대의 도쿄대학의 이노우에 미츠사타井上光貞 교수를 비롯하여 와세타 대학의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교수 등 수많은 저명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공통된 연구였다.
어디 벼농사뿐이랴
문자문화를 비롯하여 음악 미술이며 불교문화, 신도제사神道祭祀 문화 등등 선진국 고조선의 온갖 눈부신 문화는 미개한 왜나라 섬 고장마다에 문명의 새 빛을 듬뿍 고루고루 깔아주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백제왕족 박사왕인博士王仁(6∽7C)이다.
그는 그 무렵 백제로부터 배를 타고 일본 내해로 깊숙이 들어가, 오늘의 난파진難波津[남바] 바닷가에 당도한 위대한 문명인이었던 것.
그 당시 왕인이 읊은 왜 땅 최초의 시가詩歌는 〈난파진가難波津歌〉다. 그 율조는 75. 57조이다. 필자는 〈난파진가難波津歌〉가 75. 57조라는 사실을 한일 양국 최초로 고증한 바 있다.(《韓國近代詩 詩史的背景小考》(日本專修大學, 人文學年報, 1993.3),《일본 와카[和歌]를 창시한 왕인王仁 박사와 한신가韓神歌》(現代文學, 1997.2)
물론 고대 왜 왕궁에서 왜 나라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만주와 조선반도의 고대 신라, 백제, 고구려인들이었다.《일본문화사》(홍윤기, 1999.4, 서문당)
일본 왕실의 신상제新嘗祭 제사
일본 왕실의 신상제新嘗祭 제사는 해마다 11월 23일에 일본 왕이 공주와 함께 단 둘이서 그 해 가을에 수확한 햅쌀 벼이삭을 얹은 쟁반을 두 손으로 엄숙하게 떠받들고 신전神殿(神嘉殿)에 들어가, 천지신명에게 감사의 의례를 올리는 장중한 제례이다. 말하자면 왜 나라가 농업국으로서, 백성들을 대표하여 왕과 왕비 또는 공주가 엄숙하게 제사 지내는 일이 곧 신상제新嘗祭[니이나매사이] 이다.
신상제를 쉽게 풀어 밝힌다면 새 곡식을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며 감히 혀로 핥는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사항이 있다. 이 때 신전 안에서는 왕비 또는 공주가 제단 앞에 엎드려 계속 잇대어 큰절을 올린다. 그런가하면 천황은 네모진 커다란 붉은 보자기를 얼굴과 온몸에 길게 뒤엎어 쓰고 신전바닥에 누워버린다. 이 때 천황은 의식을 잃고 정신없이 까무라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에게 전혀 공개된 것이 아니며 궁중 제례의 극비사항이다.
이런 사실은 일본의 대표적인 저명한 고대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가 지난 날, 필자에게 귀띔하여 주어 필자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일이기도 하다.
천황이 붉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기절한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연유가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 점을 스스로 추찰하건데 이것은 고대 한반도 서남단의 ‘가야왕국’과 왜 왕실의 깊은 연고를 추찰된다고 보고 있다. 즉 고대 가야왕국의 김수로 왕은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붉은 줄에 매달려 가야 땅의 ‘구지봉’으로 하강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왕은 가야왕족의 후손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고 보는 게 어떨런지. 이는 조선민족이 왜 섬 열도로 건너 가 그 곳에서 지배의 터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유추시키는 역사적 발자취는 아니런가. 김수로 왕릉 앞 나지막한 산 위에는 〈구지봉〉 빗돌이 세워져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
포항 앞바다 ‘호미곶’에서 고조선 당시에 “어부였던 연오랑과 세오녀가 왜 섬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은 과연 고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런지. 문자가 없었던 고대 조선 당시의 구전설화의 진실을 우리는 함부로 농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일본 니이가타 서북쪽 해안 지대를 답사하다가 〈신라왕묘〉라는 석비가 세워진 나지막한 산언덕을 찾아내고 몇 번 되풀이하여 살펴본 일이 있다.
이 언덕은 해발 20미터 정도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으로서, 〈신라왕묘〉라는 석비는 일제하 1930년대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묘지가 축조된 뒤 오랜 후대에 와서 석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다. 나는 몇 번이고 이 〈신라왕묘〉를 찾아가 답사하면서 어쩌면 고조선에서 왜 섬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의 연오랑과 세오녀의 역사적인 흔적은 아닐런가 연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 땅인 지금의 터전을 파헤쳐, 발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고구려에서 왜 왕실로 보내준 ‘거문곳’
왜 왕실의 신상제 제사에서는 고대 조선의 각종 악기가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그 사실은 필자가 해마다 4월에 거행되는 도쿄 천황궁 안의 〈일본아악연주소〉의 아악 연주 현장을 직접 관람하면서 확인한 바 있다.
그 옛날 고구려에서 왜왕실로 보내준 최초의 악기는 ‘거문고’다. 그 무렵 고구려에서는 ‘거문고’를 ‘거문곳’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왜인들은 고구려인 대신에 백제인들이 직접 왜왕실로 가져다준 ‘거문곳’을 가리켜, 고구려가 아닌 백제, 즉 ‘야마토코토[和琴]’, 다시 말해 ‘백제금百濟琴(和琴)’이라고 칭송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금琴’을 일컬어 ‘코토’라고 부른다. 즉 ‘곳’이다. 화금을 ‘야마토코토’라고 부르는 까닭은 백제왕가의 가문인 화씨和氏로부터 왜왕에게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코토’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본다. 이 ‘금琴’을 가리키는 일본어 ‘코토’[琴,こと]는 한국 ‘거문고’[玄琴]의 고구려 때의 옛말 ‘곳, kot(琴)’에서 일본말 ‘코토, koto’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저명한 음악 학자 타나베 히사오田邊尙雄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논술했다.
“화금和琴은 왜금倭琴이라는 글자로도 쓰며 이것을 ‘와곤’ 또는 ‘야마토 코토’라고 부르면서, 신락神樂[카구라]이라는 왕실 제사에 써왔으며, 종래부터 일본 고대의 특유한 악기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구조며 연주법으로 살필 때, 조선으로부터 전래한 게 아닌가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일본의 ‘금’인 화금和琴(倭琴)으로 호칭되어 왔는지, 또한 그것을 신사神社에서 제사에 사용해 왔는지에 관해서 잘 몰라, 그 설명에 괴로워해 왔었다.
타나베 히사오 교수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왜 왕실이 사실은 조선인들 지배하의 왕실이었기 때문이다. 왜 왕실 제사에서는 고조선의 백제신과 신라신을 제사로 모셔온다. 물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왜 왕실의 ‘카라카미[韓神]’ 제사는 다음 기회에 상술한다.
여기서 화금에 대해 밝히자면 몸체의 길이가 1미터 반 쯤 되는 것이 보통이다. 6줄의 현이 평행으로 매어있으며, 기러기발(琴柱)로 엇갈리게 놓여 있다. 연주자는 그의 오른 손으로 가늘고 긴 술대(琴軋)를 가지고 퉁겨서 소리를 낸다. 특히 유별난 특징은, 현을 금의 끝 쪽에다 거는 방법이 고조선의 거문고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화금은 일본 고대의 금이 아니고 한국에서 건너 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화무和舞[야마토마이] 라는 왜 왕실의 제사춤은 일본 고래의 것이 아니며 조선에서 전래된 ‘화씨의 춤[和氏の舞]’이라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화금和琴도 일본 고대의 금이 아닌 ‘화씨의 금[和氏の琴]’에서 생긴 명칭이라고 생각해야할 것 같다.
화금을 일본의 신사에서 쓰는 곳은 야마시로[山城](京都府의 동남부 지역)며, 야마토[奈良縣]에 있는 수많은 신사인데, 그곳은 진씨秦氏, 신라인 호족 가문이며 아씨阿氏, 백제인 호족 가문 등 고대 조선에서 건너 간 사람들이 제사 지내던 곳이므로 화금을 연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금’이라는 호칭은 나라[奈良] 시대(서기 710∽784) 이후의 것으로서, 옛날에는 단순히 ‘고토’[琴,こと]라고 불러 왔다. 소화昭和(1926∽1989 재위) 초기 무렵, 도요음악학교에서 〈음악사〉를 강의하던 무렵에, 청강생 중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나에게 “금은 고구려의 옛말로서, kot(곳)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고 밝혔다.(《日本音樂史》(1937)
타나베 교수는 《일본음악사》를 비롯해서 《동양음악사東洋音樂史》(1940), 《일본의 음악(日本の音樂》(1947) 등 여러 권의 역저를 남겼으며, 1937년부터 〈동양음악학회東洋音樂學會〉를 창설해서 그 회장직에 있었던 권위 있는 음악 학자이다.
‘화금’이 ‘화씨의 금’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부연할 것조차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시가詩歌로서 왕인이 최초로 지은 〈난파진가〉(6∽7C) 등의 시가도 화가和歌 즉 ‘와카’로 일컫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화가’라는 것도 ‘화무’나 ‘화금’등과 같이 곧 조선 고대 ‘백제’에 뿌리를 둔 시가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일본 나라[奈良] 땅의 토다이지[東大寺](동대사)의 유명한 보물 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는 고대 조선의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잘 보존되어 온다. 이를테면 현재 ‘신라금新羅琴’으로 부르는 일본 국보인 ‘가야금伽倻琴’ 3대를 비롯해서 ‘백제금百濟琴’으로 부르는 ‘공후箜篌’며 고구려의 ‘횡적橫笛’과 장구[腰鼓] 등등 수많은 고대 조선 악기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여기에는 이른바 ‘화금和琴’[야마토 코토, 와콘]도 있다. 이 화금이란 물론 비단실로 만든 6현의 현을 퉁기는 악기며, 역시 6현의 고구려 악기인 거문고와 형태상으로도 매우 유사한 현악기이다. 모름지기 이 화금도 고구려의 거문고가 백제를 거쳐서 왜 나라로 건너 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화금도 고대부터 왜 왕실에서 거행하는 궁중 조선신 제사인 어신악御神樂 등에 반주 악기로 써왔기 때문이다.
왜 왕실의 음악 부서를 아악료雅樂寮라 호칭했다. 여기서 ‘백제금’을 위주로 왕실 음악을 연주하도록 이끈 음악가는 백제에서 왜왕실로 건너간 미마지味摩之(6C∽7C, 음악 무용가)이다. 충남 부여 백마강 나루터 인근에는 일본에 기악伎樂을 전수시킨 미마지를 기념하는 석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여기 한 가지 굳이 밝혀 둘 것이 있다.
일본의 국수주의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라는 사람이 이른바 《고사기전古事記傳》 등에서 백제 왕인 박사를 다음과 같이 비아냥대기도 했던 것을 지적하여 두련다.
“왕인은 4세기 말엽에 백제로부터 왜 나라에 건너 왔다. 그런데 6세기에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502∽549)가 처음으로 《천자문》을 지었는데 그가 어떻게 그 책을 가지고 왔다는 것인가. 〈급취장急就章〉과 같은 《소학小學》 책일 것이다”
그러면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 이들 일본학자들은 최초의 《천자문》은 6∽7세기가 아니고 이미 고대인 2세기경에, 위魏나라의 학자 종요鍾繇(151∽230)에 의해서 지어진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다행이도 타니카와 코토스가[谷川士淸](1709∽76)는 가장 먼저 《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 18C)에서 지적하기를, “왕인은 종요의 《천자문》을 베껴 쓴 필사본을 일찍이 일본에 가져왔다”(《音樂から見た古代日本と朝鮮》(田邊尙雄, 1973)) 라고 명쾌하게 고증하기도 했다.
그 후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보다 앞서는 시대의 ‘천자문’들이 나왔었다고 하는 여러 가지 고증들이 나왔다. 즉 그 대표적인 고증은 《토다이지헌물장[東大寺獻物帳》(黑川眞賴), 《眞草千字文》(黑川眞賴全集 ⑥, 1910. 85)에 기록되어 있다. 3세기 왕휘지가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203행’이라고 기재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오진천황 때 왕인이 가져온 《천자문》은 위나라 종요의 것을 누가 붓으로 썼는지 알 길은 없으나, 모름지기 3∽4세기 무렵, 고대 백제인들이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었다고 본다.
고대에는 활자본 인쇄술이 없어서 원전原典을 붓으로 베껴 썼던 것이므로 단 한 권뿐인 원전은 거의 구해볼 수 없는 것이다. 왕인도 백제에서 종요의 《천자문》을 몸소 붓으로 베껴 써서 읽던 것을 왜 나라로 가지고 건너갔을 것이다.
일본에 기악伎樂을 전수시킨 미마지
나라[奈良] 토다이지[東大寺]의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악기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대 한국의 장구인 요고腰鼓, 세요고細腰鼓 등이다. 이 장구는 고대부터 고구려에서 기악伎樂에 썼다고 하니, 장구의 발생지는 고구려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기악은 일본에 건너 온 백제인 미마지味摩之(6C∽7C, 음악 무용가)가 7세기 초에 고구려에 가서 기악을 배워, 서기 612년 말경부터 왜 나라의 왕실 음악으로 발전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스이코 여왕(6C∽7C)의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는 미마지에게 유능한 소년들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미마지는 제자로서 마노오비토데시眞野首弟子와 이마키노아야히토사이몬新漢濟文에게 기악을 가르쳤다.(《日本書紀》) 이 고구려 기악이 나라시대의 불교 가면무악假面舞樂으로 퍼지게 된 것으로서 ‘고구려 사자춤’이 그 기본이다. 그 뿐 아니라 이 기악이 또한 일본의 아악雅樂이라는 궁중 음악이 된 것이다.
미마지가 고구려에서 기악인 가면무악假面舞樂을 배워 온 것을 또한 《일본서기》는 “미마지가 오吳나라에 가서 배워 왔다”고 잘못 전하고 있다. 미마지는 서기 612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이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오吳나라는 중국에 3번 있었던 나라이다. 최초의 오나라는 춘추전국 시대에 양자강 하구에 있었다가 기원전 473년 부차왕夫差王 때 멸망했다. 그 당시 유명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를 만든 역사가 전한다.
두 번째의 오나라 역시 고대 국가로서 서기 3세기(서기 222∽280년)에 손권孫權이 강남江南에다 세운 유명한 삼국의 하나이다. 이 두 오나라는 7세기의 백제 사람 미마지와 시대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면 또 하나의 오나라는 어떤 시대적인 관계가 있는가. 그 오나라는 10세기에 중국 강동江東에 있었다. 서기 902년에서 937년까지의 국가였다. 그러므로 미마지하고 중국 오나라는 전혀 연관이 될 수 없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반쯤은 조작된 역사책”
어째서 《일본서기》에 미마지와 관계가 없는 오나라가 등장했는가. 고대에 일본에서도 이두[吏讀]식으로 음音 또는 훈訓만 서로 통하면 뜻이 다른 한자도 함께 기록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오나라의 오吳자를 일본어로는 ‘쿠레[吳]’로 읽는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高’자를 떼어놓고, 구려句麗를 일본 어음으로 흔히 ‘쿠레[句麗]’로 읽었던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인 고주몽高朱蒙(동명성왕, BC 37∽20)에 의해서 고구려의 국호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고는 형용사 구실을 하므로, 고구려를 그냥 ‘구려句麗’로도 썼던 것이다. 바로 이 ‘구레’라는 소리를 따온 음차에 의해 ‘구레’[句麗]가 어느 시기엔가, ‘구레[吳]’로 글자가 바뀐 것이다. 오늘날에는 일본 학자들도 공인하듯이 《일본서기》의 기록이 “반쯤은 조작된 역사책”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