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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대로.文化大路. (최상대의 건축공간 산책) 원문보기 글쓴이: 思空 최상대
<칠곡문화 2020,12> 칠곡의 전통건축- 농암정사, 귀암종택 최상대/ 건축가, 대구문화재단 이사, 전 대구경북건축가회장 고속도로 칠곡IC를 내려서 내비게이션을 따라 칠곡군청 방향으로 접어든다. 농암정사(聾巖精舍) 귀암종택(歸巖宗宅)을 찾아가는 길이다. 시가지에 접어들어 긴 블록담장을 따라서 가는 길은 직선을 그은 듯 반듯하다. 칠곡 읍내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미군부대 캠프캐럴(camp carroll) 담장이다. 큰길 담장 벽에는 6,25전쟁의 정서를 표현하는 벽화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블록담장을 돌고 돌아서 캠프캐럴의 북쪽 편에 농암정사 석전종택이 위치한다. 왜관으로도 불리는 칠곡 읍은 여느 도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시가지 서쪽 가까이에는 낙동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시가지 중심을 가르며 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그 오른편 영역을 미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과거의 미군부대는 시가지 외곽에 자리했지만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그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300여 년 전부터 석전종택이 들어서 있었고 100여 년 전 농암정사가 세워질 때에는 주변은 넓은 논밭과 벌판이었고 큰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고택과 정사의 배치와 평면구성에서 옛날의 주변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캠프캐럴은 6,25동란 휴전이 되고나서 1959년 5월 건설되었다.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품격 높은 고택의 존재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집에서의 ‘품격이 높다’라는 말은 집의 규모나 외형만을 두고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가문의 인격 학문 명예와 함께 역사가 배여 있는 그런 집을 말한다. 품격이 있는 집에는 시간(時間) 공간(空間)의 흔적과 모습이 배여 있는 것이다. <농암정사> 1910년대 건립으로 추정하는 농암정사(聾巖精舍)는 귀암고택 의 북서측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이씨 농암(聾巖) 이상석(李相奭)[1835~1921]이 고향 종택에 건립한 작은 별채건물이다. 조선 말기 나라의 어지러운 형세를 보며 스스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에 은둔하면서 후학에 힘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한일 합방 이후 호적령이 시행되던 시점인 1910 이후부터 농암 서거1921년 사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역 명문가인 광주이씨 귀암종택에 모범적으로 일제는 창씨개명 단발령을 강요하였다. 이에 항거 듣고 싶은 것이 없다하여 호를 농암(聾巖)이라 하였다. 스스로 귀머거리를 자처하며 바깥활동 조차도 금했다고 한다. 호를 농암(聾巖)으로 짓고는 이집에서 은둔하며 오로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다가 향년 87세에 사망하였다. 집의 역사와 유래를 기록하는 것은 집의 상량문이다. 5칸 집 6개 들보라는 상량문 기록과 현재의 건물과의 차이는 일부 개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농암정사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서재 서고기능과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강학기능 공간이다. 과거 서측담장에 외부로 출입하는 작은 문이 있었고 북측담장 너머로 솔밭 뒷동산이 있었다. 지금 미군부대가 있는 자리에는 넓은 들판과 큰 연못이 있었다. 농암정사는 80년대 중반 ‘용비어천가’ 고서도난사건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용비어천가’는 숙종이 장성부사 이원정에게 하사한 내사본(內賜本)이며 도난당한 서책은 대부분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였다. 솔밭 뒷동산 담 넘어 서고 뒷벽을 뚫고는 많은 고서를 훔쳐갔던 일이다. 다행히 다시 찾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2500여 점의 고서들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농암정사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단순한 일자형 한옥이다. 그러나 평면구성에서는 편당형(片堂形)건축이라는 특이함이 있다. 정면의 3칸 그대로 3부분 평면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좌측의 마루공간은 비워져(陰,네가티브negative ) 있고 중앙의 반은 비워지고 반은 채워진다. 우측은 방으로 채워져(陽, positive) 있다. 마치 태극역학 형태와 유사하여 편당형 평면을 태극형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ㄱ자와 ㄴ자가 어울린 형을 이루는 음양오행의 공간 구성을 하고 있다. 좌측은 비워진 대청공간이다. 축면과 후면 여닫이문(바라지창)을 열면 3면이 개방되며 계절에 따라 통풍을 조절할 수가 있다. 가운데 방은 전면에 들 문을 들어 올리면 시원한 마루공간으로 확장된다. 남 서측으로는 멀리 외부 경관을 조망할 수 있었던 마루의 배치이다. 농암정사는 곧 자연 속에서의 정자와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가운데는 전면 1칸 마루에 후면 1칸 온돌방(뒤로는 벽장이 있다)이며 우측의 2 칸 온돌방은 지금은 내부가 연결되어서 고전강의 공부방으로 활용하고 있다. ‘亦樂書堂’ 현판처럼 학문에 힘쓴 농암의 정신을 이어서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정면 ‘농암정사(聾巖精舍)’ 현판 유려한 필체가 단정하다. 농암정사 건축에서 특이한 의문점 2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측 전면으로 쪽마루를 밖으로 달아냈다. 좌우 양측에는 마루바닥에서 30센티(1자) 정도 높인 쪽마루가 있다. 쪽마루를 대청마루 보다 한 단 높인 특이함은 의문을 갖게 한다. 기단중앙 바닥에 굴뚝(연구煙口)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굴뚝 연도는 집 뒤쪽에 위치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귀암종택> 종택이 있는 ‘칠곡군 왜관읍 석전 2리’ 이곳의 옛 이름은 ‘귀바위 마을’이었다. 입택조 문익공 이원정(李元禎)의 호가 귀암이었다. 따라서 귀암종택(歸巖宗宅) 석전종택(石田宗宅)으로 불리기도 한다. 석전문중은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가문이다. 1606년 이윤우를 시작으로 아들 이도장, 손자 이원정, 증손자 이담명이 잇따라 과거에 급제했다. 특히 이원정은 효종3년 문과에 합격 대사간,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형조판서, 특히 경상도 출신으로 드믈게 이조판서를 거친 인물이다. 솟을대문 왼편으로는 농암의 작은댁 이택기 가옥이 있고 별도의 출입문이 있다. 귀암종택은 경상북도 비지정문화제이며 5년 전 증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귀암 문익공 종택은 17대 종손 이필주(73)님이 7년 전 지금의 주거에 맞게 증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지 않았기에 많은 부분을 개축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종택의 사랑채 마당에 들어서면 왼편 뜰에는 고택을 지키는 아름드리 고목이 눈길을 이끈다. 마당의 회화나무와 함께 농암정사와 사당에 이르게 하는 정신적공간이다. 사당 앞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향나무는 마치 용트림하듯 상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사당마당에는 그늘을 드리우고 서있는 배롱나무는 오랜 시간의 말하는 듯하다. 300여 년 동안 종택을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 향나무 배롱나무 경상북도 지정보호수(2009년)로 등록되었다.종택의 사당(祠堂)은 정신적 상징적으로 집의 어르신 격으로 가장 윗쪽이나 동쪽에 위치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서쪽에 위치하는 사당은 결과적으로 농암정사와 근접하며 종택의 품격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10년 전 중건하였다. 우리의 전통한옥은 마당 공간이 중심으로 귀암종택은 바깥마당영역 사랑마당영역 안마당영역으로 마당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바깥마당 영역- 옛날 농경시대의 바깥마당은 농번기에는 타작마당이요 곡식을 말리고 소달구지에 두엄을 쌓아두기도 하는 다목적 작업공간이었다. 5칸 위용을 갖춘 솟을 대문이 서있는 지금의 바깥마당은 방문객을 영접하는 주차공간이다. 담장 안에 포함되는 소유의 영역이 아닌 외부를 배려하는 공공영역이 되었다. 솟을대문 인방에는 ‘門止禎原李巖歸公益文’ 가로현판이 걸려있다. 귀암종택 임을 내세우는 당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마당 영역- 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다. 정면5칸 사랑채는 오른편의 4칸의 종 사랑채와 연결되어서 길다란 건물로 앉아있다. 종 사랑채는 안채마당으로 진입하는 안대문 기능을 한다. 사랑채 2칸 대청마루은 미닫이문이 설치되어있고 3칸 온돌방이 연접하고 있다. 사랑채에는 종손 이필주님이 기거하며 종택과 문중 일을 보살피고 제사를 관장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처마 밑 하얀색의 현대적 느낌을 주는 ‘귀암고택’ 현판이다. 서예가 오세창의 전서 글씨이다. 대청마루에도 똑같은 현판이 걸려있어 질문을 드리니 도난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현답을 하신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일 뿐 아니라 조선말기 계몽 운동가로써 정치인, 언론인, 3,1독립운동 33인민족대표의 1인이다. 위대한 인물의 귀중한 현판 작품이 존재하는 집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게 된다. 안마당 영역- 안채가 있는 안마당은 집안 살림을 맡는 부녀자의 영역이다. 평면은 중앙2칸 대청마루 중심으로 좌측부엌 2칸안방 오측2칸 방 전면 반칸 퇴칸마루 유리미닫이문 종사랑채의 안대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안마당이 보이지 않는다. 전통한옥에서는 남성들의 공간인 바깥사랑채와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를 구분하고 있다. 그 중간에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내외 벽이 있다. 밖에서 안으로의 시선을 가리기 위한 사람 키 높이 담장은 휴먼스케일이다. 내외 벽은 우리나라 전통건축에만 존재하고 다른 나라에 없는 남녀유별의 경계이다. 외형적으로는 안팎을 차단하지만 밤중에는 은밀히 통하는 샛길이 있음도 한국전통건축의 해학이다. 안마당은 장방형ㅁ자로 여느 한옥보다 규모가 크고 반듯하다. 안채건물은 정면8칸으로 동측건물과 남측사랑채와 이어져있다. 마당 동측에는 부속동 광채가 독립으로 있다. 넓은 터에 큰 규모의 한옥과 넓은 마당은 그동안 보아왔던 여염살림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불천위 귀암종택은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낸다. 유교에서 4대봉사(四代捧祀)라고 하여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 제사가 기본이다. 4대가 넘어가면 사당에서 옮겨 신위를 땅에 묻고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특별히 출세했던 위인이거나 덕망이 있는 조상의 경우에는 신위(神位)를 옮기지(遷)않고(不) 후손들이 계속 제사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지역유림에서 옹립한 향불천위(鄕不遷位), 문중에서 지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가 있다. 귀암종택은 향불천위를 지낸다, 고택을 지키고 있는 종손 이필주님은 118불천위 가문으로 조직된 영남불천위회(영천회) 회장을 최근까지 역임하였다. 동산재 귀암종택에서 동쪽으로 400여미터 언덕받이에 동산재 (東山齋)가있다. 동산재는 귀암종택의 선현 삼대분(三代分) 제사(齋舍)를 지내는 제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03호이다. 선현 낙촌공 이도장의 낙촌정(落村亭), 장자인 귀암공 이원정의 경암제(景巖齊), 장손인 정재공 이담명의 소암재(紹巖齋)와 그 별묘가 한 담장 안에 배치되어있다. 솟을 대문 밖에는 방지형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 윗쪽의 솟을 대문과 연못 죄측 관리소 우측에는 귀암공신도비 (歸巖公神道碑)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낙촌정, 좌측에 소암재 우측에 경암재가 위치하며 전체적으로 품자형(品字型)을 이루고 있어 마치 전통서원의 배치가 좌우로 펼쳐진듯하다. 귀암고택의 보호수, 고택을 지키는 종손 이필주 어르신, 경상관찰사 정제공 이담명의 이야기를 명리학자 조용헌이 쓴 글이 있다. 관찰사의 결단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201년 04월 28일자) 경북 왜관읍에 있는 광주이씨(廣州李氏) '돌밭종가'에는 수백 년 세월의 풍상을 겪은 고목 세 그루가 나그네의 방문을 반겨주었다. 고택에 서 있는 회화나무, 백일홍, 향나무는 선비 집안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회화나무는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던 어사화(御賜花)를 상징하고, 백일홍은 선비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향나무는 인품에서 우러나는 향기를 상징한다. 콩기름을 바른 한지 장판과 고서(古書)와 전적(典籍)이 서가(書架)에 가득 찬 종손(李弼柱)의 방은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영남 선비 집안의 소박한 품격은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쟁이 치열했던 숙종조. 종손의 12대조인 이담명(李聃命·1646~1701)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영남 남인들이 조정에 복귀할 무렵 경상관찰사로 임명됐다. 당시 영남의 기근이 심각해 매일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구휼(救恤)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이때 마침 서울 조정으로 들어가는 세금을 실은 세곡선(稅穀船)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순천, 구례를 비롯한 전라좌도 지역의 세금으로 받은 쌀을 실은 배 여러 척이 서해안 바닷길로 가지 않고 내륙인 낙동강을 거슬러 상주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관찰사 이담명은 이 세곡선을 대구 서쪽의 화원 나루터에다 정지시키고 기민(饑民)들에게 쌀을 나눠 주었다. 서울 궁궐로 들어가야 할 국가 세금이었지만 우선 당장 굶어 죽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위험한 결단이었다. 임금의 결재를 받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다. 국가 세금을 관찰사 마음대로 썼다는 죄를 뒤집어쓸 수 있는 모험이었다. 반대 당파인 노론이 십중팔구 이 사건을 문제 삼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담명은 '서울까지 이 세곡이 갔다가 다시 영남으로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그동안에 다 굶어 죽는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조정의 탄핵을 감수하고 세곡선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그 결단 덕분에 수만 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종손의 말에 따르면 나중에 이담명이 탄핵을 받았지만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영남 유림(儒林)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다. (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201년 04월 28일자) |
첫댓글 오래전 가본 곳인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건축으로 다가옵니다. 다시 가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까지 감탄하게 됩니다.
ㅎ 감사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시대의 건축에 관한 상식도 함께 얻었네요. 감사합니다.
네. 도움되셨다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