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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고사와 전설
가리산리의 하우고개
가전리의 개고개
갓쉰동이의 전설
고사리의 장수터
귀둔리의 용소
김부대왕각 동제
김부리와 군량리(軍糧里)
김부리의 옥새바위
남면의 송도령(松道令)
내린천의 수진암(水鎭岩)
내설악의 대승폭포
도깨비 항아리
미륵불암과 보살암
미산의 용바위와 용마(龍馬)
미산의 파리먹이
방동 김용관(金龍寬)과 토성(土城)
방태산의 배 닿은 돌
백담사(百譚寺)
백운과제후
부자가망한 대흥동(大興洞)
북리(北里)의 인명곡(麟鳴谷)
비석거리
상남 수동(水洞)의 황룡등천(黃龍登天)
서화(瑞和) 천도리(天桃里)
서흥리 장가(張家)바위
선녀쫓긴 옥녀탕(玉女蕩)
설악산과 길두목(吉頭目)
설퍼덩과 머슴
신남의 닭바위와 망한 부자
심뫼마니와 방동약수
열녀김씨 기일제
영시암(永矢庵)의 애화(哀話)
영시암(永矢菴)과 호식동(虎食洞)
오개탕(五個蕩)과 빗적바위
오세암(五歲菴)
용각석(龍角石)과 장군석(將軍石)
점봉산 고주전
조롱동서생(鳥弄洞書生)과 장홍노(張弘弩)
천도리(天桃里) 범바위
추갑산(秋甲山)과 구미호(九尾虎)
토끼봉의 전설
풍년을 점치는 합강수(合江水)
하마로(下馬路)와 박대감
학칠령 골
황조막(黃鳥幕)과 박진사(朴進士)
귀둔리의 용소
인제읍(麟蹄邑) 귀둔(貴屯) 2리에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용마가 바위에서 울고 없어진 뒤로 자연소가 생겼으며 깊이 약 600척으로 짐작되고 지금도 비가 2-3일 계속 오면 용마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하며 개를 잡아넣으면 급작스럽게 날씨가 흐리며 소나기가 내린다고 하는 한가한 산중의 야화(野話)가 이곳을 처음 찾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해준다.
가리산리의 하우고개
인제읍(麟蹄邑) 가리산리(加里山里) 하우고개(下英山고개 또는 下雨峴)에 얽힌 전설로 옛날 600여년전 <피래>라는 고장의 주민들간에 사소한 언쟁으로 사람을 죽인 과실치사가 있었다.
잘못하여 사람을 죽인 쪽과 죽음을 당한 가족 사이에는 잘잘못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관가에서 이 사실을 가리고자 피래를 출발하여 원(院)님께 소송하러 백여리 길을 걸었다.
양쪽 사람들은 서로 적의를 가지고 마을을 떠났으나 백여리를 걸어서 이 고갯 마을에 오르고 보니 서로 피곤하고 기진맥진하여 서로 옆에 앉아 쉬게 되었다.
관가에 까지 가자면 앞으로 갈길이 아득한 데다가 또 사소한 언쟁으로 과실치사를 한 사이이고 보니 서로 상대방의 사정을 듣고 협의한 끝에 서로 하우(和解)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이 고개를 「하우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이 고개는 인제읍(麟蹄邑) 관내에 OO부대가 주둔함에 따라 인제(麟蹄),기린(麒麟)간을 잇는 30Km의 군용도로가 1972년 개통되었으며 잣바치에서 덕적(德積)으로 넘어가는 큰고개를 하영고개 또는 하령산 고개라고도 부른다.
가전리의 개고개
인제군 서화면 천도(天桃)4리에서 북쪽으로 12㎞지점인 미수복지구인 가전리(加田里)에 소재하고 있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이다. 중부에서 서화리로 가는 고개로 큰 포(浦)가 하나 있는데 이 개(浦)에 얽힌 전설이다.
60년 전 가전리 마을에 사는 촌 어른이 술을 마시고 석양 길을 되돌아오다 고개 밑 잔디밭에 누워 잠이 든 사이 원인 모를 산불이 발생하자 따라오던 검둥이 개가 주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냇가로 달려가 털에 물을 묻쳐 되돌아 와 잔디를 적시기를 수없이 하여 주인을 불 속에서 살린 뒤 개는 쓰려져 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고개 밑에는 주인을 위해 죽은 개 무덤이 있다고 한다.
갓쉰동이의 전설
고구려때 연국혜(淵國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50이 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여 항상 슬하에 혈육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는 항상 부처님께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빌었는데. 이들의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했음인지 그의 나이 오십이 되던 해에 마침내 귀여운 옥동자를 하나 낳았다.
갓쉰에 낳았다하여 갓쉰동이라 이름지은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갓쉰동이가 일곱 살 되던해 봄 행각승 한사람이 뒤뜰에서 놀고 있는 갓쉰동이를 보고 <아까운 지고, 정녕 아깝고 녀>하고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연대감은 그 연유를 행각승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 행각승은 갓쉰동이는 장성하면 반드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나 타고난 수명이 짧아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행각승은 갓쉰동이의 명을 길게 해주려면 15년간 부모의 슬하를 떠나 집을 그리워 하게되면 그 액을 때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연대감은 즉시 하인을 불러 곱게 키어온 갓쉰동이를 두메산골로 보내고 뒷날 아들을 찾기 위해 표적 삼아 먹실로 등위에 갓쉰동이란 석자를 새겨 두었다. 갓쉰동이를 버린 곳은 인제땅 두메산골이었는데 그 동리에는 큰 부자인 유씨가 살고 있었다. 유씨는 갓쉰동이가 버려지는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커다란 황룡이 구름을 타고 자기 집 우물가에서 하늘로 나는 것을 보았다. 유씨는 당장에 우물가로 달려가 주위를 살펴보고 또 한번 놀랐다. 한 사내아이가 우물가에 기대서서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씨는 이 아이를 집에 데려다 귀엽게 여기고 키우기 시작했다.
갓쉰동이는 자랄수록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영특했으나 그의 내력이 알려지지 않아 천인대접을 받고 있었다. 갓쉰동이가 머슴으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하루는 뒷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청아한 퉁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빈 지게를 내려놓고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백발의 도사가 앉아 퉁소를 불다가 갓쉰동이를 보고 <너는 언제까지나 남의 머슴살이를 할 것이냐? 사내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기세를 펴지 못하면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니라>고 나무라고 자기에게 와서 공부하라고 일러주었다.
갓쉰동이는 그 날부터 도사에게서 글과 무술을 배웠다.
해가 질 무렵 갓쉰동이는 나무를 하지 않은 것이 걱정이 돼 지게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지게에는 누가 해주었는지 이미 나무가 한 짐 지워져 있었다. 갓쉰동이는 도사에게 감사하다며 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부터 갓쉰동이는 매일 도사를 찾아 공부를 했으며 공부가 끝나면 누가 해주었는지 지게에 한 짐 실려있는 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원래 주인 유씨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그중 셋째 딸인 연화라는 아가씨가 제일 아름답고 착했다.
연화와 갓쉰동이 사이에는 어느덧 사랑이 움텄다.
갓쉰동이는 연화의 격려에 힘입어 사내로서의 포부를 세상에 펴고자 주인 유씨의 집을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연화는 지니고 있던 패물을 팔아서 갓쉰동이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고구려는 달달국의 침입에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갓쉰동이는 달달국에 들어가서 그나라 왕의 비복이 되었다. 갓쉰동이는 그 나라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나라의 문물을 몸소 익혀 가지고 그 나라를 벗어나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 고국에 돌아온 갓쉰동이는 연화아씨의 내조의 힘을 입어 부모를 다시 찾고 벼슬을 얻었다. 그는 연화아씨와 결혼한 이듬해 달달국에 쳐들어가 크게 승리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사리의 장수터
인제읍(鱗蹄邑) 고사리(古沙里)에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전 유리알 같이 맑은 내린천(內麟川)이 흘러내리고 복지개봉 골짜기에 촐촐 흘러내리는 도랑 옆 양지 바른 언덕위에 중년부부가 한가로이 살고 있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김덕용이요, 아내는 안옥녀였다. 봄이면 봉숭아 살구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고 가을이면 오색찬란한 단풍잎이 곱게 물드는 이곳 두 부부는 나이 45세가 되도록 슬하에 자식하나 없어 이웃집 최첨지가 손자를 업고 오면 부러워서 늦게라도 자식하나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개탄하여 자식하나 점지하여 주십시오 하고 매일같이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정성껏 기도를 드린 보람이 있어 안(安)씨 부인은 태기가 있게 되었다.
아들 낳기만 고대하던 중 마침 소망이 이루워져 사내아이를 낳게 되어 이름을 칠성이라 지었다. 온 동리의 축복을 대단하게 받은 그 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람하고 귀골도 장대하여 장사(將師)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구경오는 사람들도 많게 되었다. 그런데 괴이한 일은 출생한지 삼일만에 어머니가 재워놓고 빨래갔다 돌아와보니 칠성이가 문고리를 잡아 뽑으려고 힘을 쓰고 있지 않겠는가? 그 후 8일만에 높다란 선반 위에 올라가 매달리고 뛰어 내리는 것이다.
이 엄청난 장난에 놀란 어머니는 이 사실을 남편에게 늘어놓았더니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지"하면서 기뻐하기만 하였다. 다음날 일터에 나간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에게 자랑이나 하듯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큰일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 그것 큰일났네 틀림없는 장사(將師)를 낳았는데 장사를 낳으면 다섯살 안쪽에 부모를 해치고 집을 뛰어나가 인적없는 심산구중에 들어가 道를 닦고 무술을 연마한다네. 그러니 어서 크기전에 처치해 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화를 입을 걸세"하고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자랑 삼아 이야기를 한 것이 오히려 등골이 오싹해지고 무서워졌다. 김씨는 아내에게 이 내용을 이야기하여 칠성이를 없앨 것을 결정하고 아랫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칠성이 가슴위에 큰 돌짝을 짓눌러 놓았다. 이순간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맷돌짝이 굴러 떨어지고 칠성이는 한번 뒤집어 눕는 것이 아닌가? 이에 당황한 김씨는 어차피 저질러 놓은 일이라 노끈으로 다시 수족을 묶어놓고 맷돌짝을 또 올려 놓았다. 그리하여 칠성이는 난지 9일만에 부모의 손에 숨지고 만것인데 그날 저녁에 이상하게도 하늘에서 서기가 뻗치고 하늘에서 용마(龍馬)가 와서 집주위를 돌며 뇌성벼락같은 목소리로 울기를 3일 마침내 용소강을 뛰어 넘어 산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용소(龍沼)앞 벼랑에 치솟은 바위에는 돌두껑을 한 장수우물이 생겼다고 하여 그후 부터는 이곳을 장수터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김부대왕각 동제
대왕각은 김부리 일대에 3곳이 있었는데 매년 단오(음력 5월 5일)와 중량절(음력 9월 9일)에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리는 행사를 천년간이나 이어오고 있다.
제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리 자체로 기금을 마련하고 그 기금을 운용하여 그 이자로 재물을 만들어 동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김부대왕각 동제에 빠짐없이 마련하는 제물중에 미나리적과 취떡이 있었다고 한다.
미나리적은 김부대왕이 무척 즐겨먹던 음식이었으므로 꼭 제상에 놓았다고 하며, 취떡은 동제가 끝난 후 갈잎에 싸서 몰래 근처의 나무가지에 올려 놓은 것을 젊은이들이 서로 찾아 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자가 찾아 먹으면 글공부를 잘하게 되고 여자가 찾아 먹으면 길쌈을 잘하게 된다고 하였다 한다.
제사 지내는 방법은 동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제물을 차려놓고 향을 피웠으며 축을 고하였고 온 동리 사람들이 함께 절을 하면서 동리의 안녕과 집안의 복을 기원했다. 제사가 끝난후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1983년 부터는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 문중에서 그들의 관 시조인 김부 마의태자의 사당으로 모셔 제향을 올리고 있다.(9월 9일)
특히 항병골 대왕각에는 위패가 있었는데 위패를 쓸 사람이 없어서 창호지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에 쓸 술은 미리 대왕각 옆 땅속에 항아리를 묻고 술을 담갔다가 사용하였고 향로는 오목한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소원이 있으면 이곳에 뫼를 지어놓고 빌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부리와 군량리(軍糧里)
신라가 고려에 항복을 한 뒤의 일이었다. 김부왕 마의태자는 부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천년 사직을 경에게 내놓을 수 없다하여 항의하다가 실패하니 천추의 원한을 가슴에 품은채 비빈과 수십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하여 왕도경주를 떠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남면(南面) 김부리(金傅里)까지 와서는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이곳을 금보옥촌(金寶玉村) 금보동(金寶洞)으로 부르다가 김부리(金副里)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수족병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맹(孟)장군이란 의병을 초모하여 왕건(王建)의 군사를 쳐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부왕(金副王)께 주달하자 김부왕(金傅王)도 이것을 찬성하여 곧 좌우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어서 의병을 초모해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금의 양구군(楊口郡) 북면(北面) 군량리(軍糧理) 넓은 벌에서 초모해온 의병을 훈련시키고 한편으로는 그곳에다 군량고(軍糧庫)를 쌓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둬 들였다. 그러나 이 거사(巨事)를 하기 전에 맹(孟)장군은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장군을 잃은 수백인의 의병들은 비통한 나머지 가슴을 쳤을 뿐이고 맹(孟)장군의 유골을 묻은 뒤로는 산지 사방으론 흩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뒷날 군량고(軍糧庫)가 있던 곳을 군량리(軍糧里)라 하였다.
남면(南面) 김부리(金傅里)에는 당시를 입증하는 대왕당(大王堂)과 애화(哀話)가 전해오고 있다.
김부리의 옥새바위
남면(南面) 김부리(金傅里)의 거릿말 북쪽 골짜기인 하단지곡(下丹芝谷) 북쪽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가 있으니 약 1,000년전 부터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신라 경순왕 9년 10월에 왕이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열고 고려에 귀속하기를 제의 하였을 때 군신중에는 혹 가하다고 하는 파가 있었고 혹 불가하다는 파도 있었다 한다. 특히 왕자(麻衣太子)는 비분한 어조로 말하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때에 말것이니 어찌 천년사직(千年社稷)을 일조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가 보냐』하였다.
그러나 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고려에 가서 귀부(歸附)를 청하였으니 신라는 역대 56王 992년으로 붕괴하였다.
왕자는 통곡하여 부왕을 작별하고 개골산(皆骨山:지금의 金剛山)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치기 전에 남면(南面) 김부리(金傅里)에 여러해 동안 머물었다.
이때 신라의 뒤를 이으려고 김부대왕(金副大王)이라 칭하였는데 이곳 김부리(金副里)에는 형태가 두개로 포개져 있는 바위가 있었으니 이 바위에다 옥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인 옥새를 감췄던 것으로 여러 빛깔의 뱀이 가끔 나와 돌아 다니는데 옥새를 지키는 것이라 하여 그후부터 이 바위를 가리켜 옥새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인근의 거릿말 서북쪽 산에는 대왕당(大王堂)이 있어 김부왕을 위하여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에 취떡과 제물을 차려 놓고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는 등 이곳에 얽힌 옛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남면의 송도령(松道令)
남면(南面)의 소재지인 신남리(新南里)에서 신풍리(新豊里)를 지나 어론리(於論里)로 들어서는 초입 새의 국도 건너 오른편에는 기암절벽의 남성적인 육중한 산이 옹립하고 있으니 이 산을 옛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송도령(松道令 473m)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그런데 아득한 100년전 이 고장에는 매우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송도령(松道令)이라는 초부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늘 산야를 찾아 다니면서 땔나무와 풀나물과 석이버섯등을 따서 생활을 해 왔다고 한다.
어느날 이 초부는 이 산의 중턱에 발달한 5,000평 가량 될득한 평탄한 놀이터로 올라가 그 정상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석이버섯을 따기 위해 생각한 나머지 줄을 매놓고 작업을 계속하였다. 의외로 석이버섯을 많이 따내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이 송도령은 곤충류의 다족류(多足類)에 속하는 지네가 줄을 끊어 버려 그만 추락되어 죽게되자 그후부터 이고장 사람들은 초부의 이름을 부쳐 송도령(松道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완고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론(於論)1리 경주인(慶州人) 김성규(金聲奎 1922~1983. 6월 사망)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여러번 들었다고 전해준다.
정상에는 마치 무당의 흰옷을 펼친 모습과 같은 모양을 한 무당굴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산신제를 지내왔다는 산제굴이 절벽에 위치하고 있어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신풍냉천(新豊冷泉)과 함께 주위의 자연경관이 하도 저승하여 봄부터 가을에 이르러 관람객들로 줄을 잇는다. 뿐만 아니라 이 무당굴과 산제굴에 얽힌 일화도 너무나 많이 담겨져 있어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날이 개인날 이 정상에 오르면 멀리 맑게 푸른 소양호(昭陽湖)가 보이니 청록으로 반사하는 호면(湖面)은 과연 조망풍요(眺望豊饒)에 충만해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고도 남음이 있는 한편 다기(多岐)한 능선을 따라 발달한 설악산(雪岳山)의 웅장함과 절승의 산악미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산따라 물따라 시가 저절로 흘러 나올듯 그 조망은 가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니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내린천의 수진암(水鎭岩)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 2,5리 경계선에 소재한 조롱동 쪽으로 200~600m 지점간은 내린천에 접하고 있는 데다가 기암괴석의 단애와 높은 고개가 발달하여 방동 쪽으로 가자면 매우 험한 오솔길로 알려진 곳이다.
연대미상인 먼 옛날 어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 가다가 암벽에다 " 수진암(水鎭岩)"이라고 새겨 놓고 어느 때에 가서 이곳이 물로 침수된다는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 지나갔으니 그로부터 그 바위를 가리켜 "수진암(水鎭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스님은 과연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현리 앞들의 밭을 논으로 개간하면서 수로가 수진암을 지나갔고 1930년과 1965년 1966년 3차에 걸친 대수마로 수진암(水鎭岩) 부근까지 물이 도달하였다. 그러나 1974년 10월부터 4개월 간에 걸친 육군 공병대의 도로확충이란 대역사로 기암괴석의 험한 단애와 높은 고개마저 붕괴되어 옛 자취를 전혀 찾아볼수 없을 만큼 평토화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만 하여도 이 부근의 유서 깊은 전설이 얽힌 150~200년 생의 소나무가 무성하였던 곳인데 주변의 각종 신축 건물은 도시의 인상을 풍기고 있어 옛 자취를 반추해 볼뿐이다
내설악의 대승폭포
옛날 대승이라고 불리워지는 총각이 북면 한계리에 살았다 한다. 대승은 석이(石耳)를 따서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 하루는 폭포가 있는 돌기둥 절벽에 동아줄을 매고 내려서서 석이를 땄다. 잔뜩 석이를 따 놓은 참인데 절벽 위에서 『대승아! 대승아!』하고 부르고 있었다.
대승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외침에 소스라쳐 동아줄을 타고 올라갔으나 어머니는 간곳없고 동아줄에는 신짝 만한 지네가 매달려 동아줄을 뜯고 있었다. 동아줄은 막 지네에 뜯겨 끊어지려는 참이었다. 대승은 동아줄을 급히 타고 오르느라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죽어서도 아들의 위험을 가르쳐준 대승의 어머니의 외침이 메아리 친다하여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승폭포는 88m로 북면(北面) 한계(漢溪)3리에 있는 폭포로 내설악(內雪岳)의 장수대(長帥臺)입구에서 2Km 지점에 있는 한국 3대 폭포의 하나로 특히 최장(最長)으로 알려져 있음
도깨비 항아리
인제군 서화면(瑞和面) 서흥(瑞興)2리의 밭 가운데 있다.
이 마을에지금도 함부자가 살았다는 집터는 서흥리에 있다고 당시 살았던 김수배(金壽培 1904~)는 전해준다.
함부자로 통하는 대농의 가족이 살았다. 근면 성실한 함부자는 자기집 앞에 있는 밭 가운데다 돌을 주워다 쌓아 큰 형체의 돌무덤을 만들었다.
어느 해 겨울 이 돌무덤을 들어내기 위해 온 집안 식구가 나와 작업을 했는데 제일 중심부를 치우게 될 단계에서 6척 정도의 뿔이 달린 뱀이 둥지를 틀고 동면(冬眠)을 하고 있었다.
함부자는 설상사(雪上蛇)가 몸에 특효임을 아는 터라 즉시 잡아 토막을 내어 뱀술을 담갔다.
100일 이후 뱀술을 먹으려고 항아리를 열었는데 모두 발효가 되었어야 할 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생생하여 기이하게 여긴 함노인은 그것을 항아리째 강물에 띄워 버렸는데 밤마다 석 달 열흘을 흉흉하더니 10년 내에 그 마을에 살던 함(咸)씨 일가 22명이 모두 시름시름 죽어 갔으며
미륵불암과 보살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2,5리 조롱고개에서 3㎞가량 가벼운 보행을 하면 국도연변의 절골과 오류동(梧柳洞) 두마을 사이의 왼편에 높이 20m 넓이 5m쯤 되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암석이 옹립되어 있다.
옛부터 촌어른들은 마치 서있는듯 하다 해서 "선바위(선바우)"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이 고장을 처음 지나는 행객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바위를 바라보기가 일쑤이고 인근 주민에게 이 바위에 얽힌 고사와 전선을 캐물었다.
저 바위는 서 있다고 해서 선바위라고 설명하면 기불유명호(豈不有明乎)아라. 어찌 유명한 암석에 이름이 없읍니까하고 반문한다는 것이다. 두번 다시 물을때 대답할 밑천이 없어서 수치감을 면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이고장의 정기를 이어 받고 멀리 타향으로 이사간 사람들이나 혹은 출가한 아낙네들이 고향의 향수를 달래며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나는 선바위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친정은 선바위 있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고 제각기 고향 이야기를 할때마다 선바위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 높고 골이 깊은 대자연 속에 위치한 이 바위를 김우성(金禹成)은 한탄한 나머지 그 늠름한 모습이 미륵과 같아서 미륵불(彌勒佛)로 개칭하고 병술년 3월 1일(1946년)에 석공을 불러 사재를 털어 절골 어귀에 흡사 승려와 같은 암석이 있어서 미륵불을 배필로 삼아 "보살암"이라고 새기고 매월 4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이면 아침 일찍 기도를 드려왔다고 그 후손인 광화(光和 1930~)는 전해주고 있다.
인근에는 방동약수를 비롯하여 한진사(韓進士)의 방동송림유람지(芳東松林遊覽地)가 소재하고 있어 춘추 유람객들로 길을 메운다.
미산의 용바위와 용마(龍馬)
인제군 상남면 미산(美山)1리 빈지동(賓地洞)에서 20㎞가량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연동(龍淵洞,용늪)은 그 면적이 3,000평이나 되며 조선말엽 산길가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아기를 낳았는데 3년 만에 뜀박질을 하며 산을 오르고 한번 집을 나가면 며칠씩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일쑤였다고 한다.
이상히 생각하여 이런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더니 마을이 망할 흉조라 하여 부부가 잡아 죽였다. 그 때 그 아이의 겨드랑이에는 3개의 비늘이 달려 있었다고 하며 그 후부터 용바위에 용마(龍馬) 한 마리가 나타나 며칠동안 밤낮 없이 울어대자 마을 사람들은 그마저 잡아 죽여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 이 용연동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 옛날 장사(將師)를 낳으면 문중에서는 길사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당시의 역적이라 누명을 쓰고 삼족(친척, 처가, 외가)까지 학대받게 된다는 세습으로 압사시켰다. 용마(龍馬)와 용연(龍淵), 용소(龍沼)등에 얽힌 전설은 고대로부터 공동전기(共同傳記)로 전해오고 있다.
미산의 파리먹이
인제군 상남면(上南面) 미산(美山)1리 소재지인 빈지동(賓地洞)에서 1.5㎞쯤 되는 곳에 위치한 고목동(古木洞) 어귀의 파리먹이에 얽힌 전설이다.
조선 선조(宣朝)때 이율곡(李栗谷)선생의 부친이 아들을 데리고 철령(鐵嶺)을 넘어 이곳을 지나다 때마침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하룻 밤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율곡선생 부친의 현몽(顯夢)에 갓을 쓴 도사가 나타나 "너의 아들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고 하였다. 부친이 비법을 묻자 도사는 호랑이로 변하면서 " 이 마을 뒷산에다 1,000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떠나라"고 일렀다.
시키는 대로 며칠동안 밤나무를 심었더니 어느날 한낮에 꿈에 본 호랑이가 나타나서 밤나무를 세어보니 999그루 밖에 되지 않았다 한다. 한그루는 어디에 있느냐고 으르렁대자 율곡부친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때 옆에 있던 잡목 하나가 튀어 나오며 "나도 밤나무" 라고 외쳐 화를 면했다고 한다. 튀어나온 그 나무는 밤송이는 열리나 열매가 없으며 지금도 그 나무는 여러 밤나무와 함께 있다고 한다.
그로부터 오래 묵은 밤나무가 도처에 많이 분포되어 있음에 따라 고목동이라고 불러 왔으며 현재 파리먹이의 형국에 유래하여 이것이 와전되어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현재 이율곡 부친이 한때 머물렀다는 옛 터에는 슬하에 5남 5녀를 둔 김종철(金鐘哲 1919~)만이 외로이 살고 있다.
방동 김용관(金龍寬)과 토성(土城)
기린면 방동2리 대골로 들어서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매봉령 기슭에는 지금으로부터 약100년전 장사인 김용관(金龍寬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다.
평소에 말타고 칼을 휘두르며 인가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양시과 술을 약탈하는 행패를 즐거운 낙으로 삼고 있었다. 가끔 피해를 받고 있는 70호의 가까운 곁가리 주민들은 이 원흉의 행패에 못이겨 70호의 주위에다 토성을 쌓아 방어를 해왔다 한다.
그러나 '이놈을 언젠가 살해하고야 말겠다'는 주민들은 지혜를 모은 끝에 교제술에 뛰어난 최씨를 시켜 먹음직한 음식과 뇌물을 갖고 찾아가 모의한 그대로 큰절을 올리고 대접하였다. 푸짐한 음식과 술을 대접받은 이놈은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숲속에 은신한 곁가리 마을 청년들은 재빨리 뛰어나와 밧줄로 동여매고 불태워 죽임으로서 화를 면했다 한다.
그후 김용관의 아들도 차츰 성장하여 1907년 무렵 의병에 가담하므로 이 마을 사람들은 두려운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아무런 행패도 없었다고 당시 방동(芳東)2리 석전골(石田村)에 76년간 살고 있다는 김순봉(金順鳳 1902~)은 소상히 알려주었다.
▲곁가리에는 추(秋)씨가 60여호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화전정리로 인가가 없으며 다만 토성(土城)의 자취만은 찾아볼 수 있다.
방태산의 배 닿은 돌
기린면 현리 하마로는 1908년 7월에 지방의 의병장인 민득보가 왜장(倭將)인 암원의행(岩元義行)이란 자를 칼로 쳐죽인 곳이다.
표고 1,435m의 방태산 정상에 약 2톤 가량 보이는 암석이 있다. 여기에는 순전히 예전에 정으로 쪼아 뚫은 구멍이 있는데 옛날 어느 때 대홍수가 났을 때 이곳에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밧줄로 매달았다고 하여 그 돌을 가리켜 "배닿은 돌"이라고 부른다. 마치 그 당시를 입증해 주기라도 하듯 방태산 정상바위 틈바구니의 흙이나 모래 속에서 조개껍질이 지금도 출토돼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 암석 이름을 "배(船) 닿은 돌"로 부르고 있다.
날씨가 맑게 개인 날 이 산 정상에 오르면 동해가 육안으로 보여서 매우 장관이며 지금도 정상에 큰바위 몇 개가 뒹굴고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백담사(百譚寺)
당초 이 사찰은 낭천(浪川, 지금은 화천)땅에 비금사(比琴寺)라는 이름으로 있었다고 한다.
당시 포수들이 짐승들을 잡으러 자주 몰리는 불동에 어긋난 일들이 이 절 근처에서 자주 일어나 할 수 없이 북면 한계리에 절을 옮기고 한계사(寒溪寺)라 칭하였다 한다. 이 절을 옮길때 낭천에서 한계까지 하루 저녁에 옮겼는데 도중 청동화로 하나와 절구를 떨어뜨리고 왔다 한다.
춘성군(지금은 춘천시로 통합됨)의 절구골은 이때 절구가 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한계리 부근의 청동곡은 청동화로가 떨어진 곳으로 전해진다.
한계리에 온 이 절은 이곳에서 다섯차례나 화재를 만났는데 화재를 만날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절터를 옮기고 이름을 고쳐 보라고 일러주곤 했다고 한다. 화재를 자주 만난 이 절은 그 부근인 용대리 암자 등에 옮겨 영취사(靈鷲寺)라고 이름을 고쳤으나 이곳에서도 또 화재를 만났다. 여기서 또 다시 화재를 보자 주지스님은 절 이름이 잘못 되었기 때문인 것을 알고 그 이름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그러던 하루밤 주지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靑峰)에서 절까지 담수를 세어 보라 』고 일러 주었다. 여기서 암시를 받은 스님은 그 이튿날 청보에서부터 절자리까지의 물굽이를 세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수는 꼭 일백개였다. 그래서 주지 스님은 절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우고 그 절의 이름을 백담사(百譚寺)라 명명하였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는 이 절에 화재가 전처럼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이 절은 신라 선덕왕(善德王)55년 자장(慈藏)이 율종(律宗)을 개창할 당시에 창건 되었다는 고찰로 인제(麟蹄),속초(束草)를 잇는 국도변의 외가평(外加平)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지점에 위치한다.
백운과제후
삼국이 통일된 후 한창 시국이 안정되어 태평성세를 누릴 때의 일이다. 신라 진평왕 24년 인제에는 우애가 두터운 두 친구가 아래윗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아내는 같은 때에 모두 아기를 배었다. 그들은 어느 쪽이건 딸을 낳으면 서로 약혼을 하여 두 집의 정의를 계속하자고 다짐했다.
두 이웃은 갓난 어린애를 그 자리에서 약혼해 놓자고 말했다.
백운과 제후는 차츰 자라서 백운이 어느덧 국선(國仙)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백운에게는 이때부터 비운이 닥쳤으니 그의 부모가 이름모를 괴질에 걸려 앓게 된 것이다.
백약을 구해 부모의 병구완을 했으나 결국 그의 부모는 가산을 다 탕진하고 1년만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백운이 주야로 상정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눈앞이 캄캄하여 통곡하기를 49일 바로 그날 백운은 까무라치고 말았다. 백운이 깨어보니 권진사의 집에서 간호를 받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백운이 불행히 실명하게 되자 제후의 아버지는 마음이 변했다. 딸을 재산도 없고 눈먼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후의 아버지는 백운의 아버지가 살았을때 맺었던 약혼을 깨고 딸을 금산 태수로 있던 이교평에게 시집보내기로 한 것이다.
나이 15세가 되어서야 철이 들은 제후는 생각다 못해 어느날 밤 백운의 집을 찾아갔다. 제후는 금산으로 백운이 따라오기를 당부하고 부모가 보내는대로 금산 태수에게로 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좋은 날을 택하여 성혼을 하기로 하고 그동안은 별거하자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 백운이 금산으로 찾아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두 사람은 개녕군 송방리란 곳에 자리를 정하였다.
앞못보는 백운은 제후와 함께 논밭을 일구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백운과 제후가 밭을 가는데 오래된 석불 하나가 나왔다. 백운은 석불앞에 앉아 그 석불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제후의 생각도 한가지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백운의 눈 앞에는 희미하게 석불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백운은 자기 때문에 고생을 하는 아내를 위해서도 부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 주시기를 빌었다. 그는 석불을 보고 합장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신기하게도 밭에만 나가면 희미하던 눈이 광채를 받아 조금씩 앞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달이 지나자 백운은 멀쩡하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부부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들은 석불을 고이 집 근처에 모셨다. 그러자 그 후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에 의해 이 석불이 신통력이 있음이 널리 알려졌으며 석불이 밤에는 서광을 비친다는 소문까지 났다. 석불이 있는 백운 제후부부의 집에는 병을 비는 사람,자식을 원하는 부부 등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석불에게 빌면 이루어 진다고 믿어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찾아들었다. 이들은 공양으로 쌀을 가져오느니 베를 가져오느니 향촉과 음식을 올리느니 하여 법석이 됐다.
그리하여 백운부부는 주인노릇을 하며 시주가 늘어 기와집을 짓고 석불을 모실 큰 절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게 됐다. 양반집이나 대가집에서도 노소부녀가 모두 와서 기도를 올리고 심지어는 현감과 조정대신까지 석불앞에서 자식을 빌고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정성을 들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암행어사가 지나게 되었다. 암행어사는 이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민가에 큰 피해가 될 것으로 여겨 아졸을 보내어 집을 부수었다. 그러나 암행어사도 백운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그래서 백운부부는 다시 집을 짓고 석불을 모셨다. 그랬더니 해가 거듭 할수록 집안은 더욱 번창하였고 자손들도 늘어났고 흥성했다고 한다.
부자가 망한 대흥동(大興洞)
남면(南面) 관대리(冠垈里)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부자(富子) 김대흥(金大興)에 얽힌 전설이다.
부러울 것 하나없이 살고 있던 김대흥(金大興)에게 하루는 남루한 옷을 걸친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했다. 때마침 외양간을 치우고 있던 그는 『무엇을 줄게 있어야지. 외양간에 있는 쇠똥이나 가지고 가시오.』하며 쇠똥을 스님의 바랑에 담아 주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다가 이것을 본 며느리는 경황질색(驚惶失色)하여 만류하는 말 『개도 안 먹는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 죄송스럽습니다. 등겨(쌀겨)가 있으니 그것이나 한바가지 주어서 보내지요 』하고 며느리는 그것도 아까워 하는 시아버지를 설득하여 광에 들어가서 시아버지 몰래 쌀을 큰바가지에 가득 뜨고 그위에 등겨를 덮어서 스님의 바랑에 넣어 주었다. 그랬더니 스님이 감동하여 『댁에 화가 급습할 것이니 자녀가 있거든 업고 나를 따르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시각을 지체마시오 』하고 알려 주며 무슨일이 있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며느리는 아기를 업고 스님을 따라 가던 중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무시무시한 뇌성벽락이 일며 소나기가 퍼부어 큰 홍수가 나려 했다. 집안일이 근심이 된 며느리는 스님의 다짐도 잊고 떠나온 집을 뒤돌아 보았다.
홍수는 이미 집을 뒤덮고 집의 흔적도 없었다. 이를 본 며느리는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순간 며느리는 마침 스님의 말을 어긴 탓인지 화석화(化石化)가 되고 말았다 한다.
후세의 사람들은 인색한 부자 김대흥(金大興)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대흥동(大興洞)이라고 부른다 한다.
현재 대흥동(大興洞)은 소양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관대리(冠垈里) 선착장에서 배편으로 2㎞쯤 되는 것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북리(北里)의 인명곡(麟鳴谷)
아득한 예전에 기린면 북리(北里)의 어느 골짜기에서 개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짐승이 밤마다 시끄럽게 울었다고 한다. 그 동물이 흡사 기린처럼 생겼다 하여 지금의 기린(麒麟)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고 전한다.
이 골의 길이가 4㎞이상이나 되며 옛날 사람은 사슴이 100년 이상 묵으면 기린이 된다고 믿은 하나의 토착과학에 연유한 까닭으로 이 골짜기를 가르며 기린이 울었다 하여 인명곡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또한 이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장수바위"에는 조선말엽 명장들이 한양에서 영동지방으로 넘어 갈 때면 들러서 자연을 구가하며 놀다 가곤 했다고 하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옛 전설을 반추해 볼뿐이다.
비석거리
인제읍(麟蹄邑) 합강(合江)2리 합강정(合江亭)아래 국도인 포장국도에는 조선에서 일제시대에 걸처 선정을 베풀었던 인제고을 현감(懸監)인 박종복(朴宗福)을 비롯한 이세억(李世億), 김창국(金昌國), 한배후(韓配厚), 김현섭(金顯燮), 이인회(李仁會), 박종영(朴宗永), 정숙조 등의 선정(善政), 송덕(頌德), 유사비(有思碑)가 20基 가까이 서 있는데 연유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옛부터 석비(石碑)거리라 불러왔다.
그러나 최근 국도의 확장과 포장공사로 인해 파손되어 한基도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소월, 차평(車坪), 덕산(德山), 덕적(德積)마을의 장꾼들이 오고 가고 할 때마다 유일한 휴식처로 고인(故人)들의 행적들을 반추해 보았건만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상남 수동(水洞)의 황룡등천(黃龍登天)
약 100년전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상남1리 수동에서 사는 한 노파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 나를 보려거든 내일 아침 일찍 늪으로 오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깨어보니 기이한 꿈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노파는 손녀를 앞세우고 마침 딸의 집 잔치를 보러가는 길에 이 늪이 있는 곳에 가보았다. 늪이 있는 곳에 닿자 손녀가 "할머니 저게 뭐예요"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할머니는 손녀가 손가락질을 하는 곳을 보았더니 그곳에는 황룡(黃龍)이 돌기둥을 칭칭 감고 있었다. 할머니는 무서움을 참지 못해 "용이다!"라고 손녀에게 대답해 주고 놀란 할머니와 손녀는 10리가량 뜀박질을 했다. 그 때 맑은 하늘에서는 천둥이 치며 안개가 자욱이 퍼지더니 오색무지개 속에서 황룡이 일어나며 서서히 하늘로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 후부터 이 폭포를 용폭(龍瀑) 또는 용소(龍沼)라고 부르며 이 전설을 듣는 이로 하여금 괴이함을 던져주고 있다 한다.
서화(瑞和) 천도리(天桃里)
인제군 서화면(瑞和面) 소재지인 천도(天桃)4리에 얽힌 전설이다.
먼 옛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큰 복숭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것을 본 마을의 한 사람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 생각해서 복숭아가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한다. 그랬더니 그곳에 집을 짓고 산지 불과 몇해 되지 않아 그 지방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인근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모두 모여와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지 몇 해 가지 않아 이곳에 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웃마을에서는 이 마을을 하늘로부터 복숭아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천도리(天桃里)라고 불렀다 한다.
▲ 원래 서화면(瑞和面) 소재지는 당촌(堂村)이나 민간인 출입 통제선 설정에 따라 수복후 천도리(天桃里)를 소재지로 정하고 오늘에 이른다.
서흥리 장가(張家)바위
인제군 서화면 서흥(瑞興)1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밑 수심이 21층이나 돼 명주실 한타래가 모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어느날 길을 가던 나그네가 황소를 바위옆에 메어둔 채 주막으로 갔다와 보니 황소는 보이지 않고 쇠고삐만 물에 잠겨 있어 잡아 당겨보니 커다란 이무기 한 마리가 물속을 맴돌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장(張)씨 성을 가진 노총각이 이곳 물에 빠져 죽었다 하여 장가(張家)바위로 불려지고 있다.
선녀 쫓긴 옥녀탕(玉女蕩)
인제군 북면 한계3리 장수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소재하고 있는 옥녀탕에 먼 옛날 대승폭포 월궁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곳에 지네라는 괴물이 있어 옥선녀를 보고 해치고자 하여 선녀는 쫓기어 다른 소(沼)로 옮기었다. 둘째소까지 쫓겼으나 지네가 다시 쫓아와 여전히 해코자 하였다. 선녀는 갈곳이 없어 지네로부터 막 해침을 당할 판국이 됐다. 그 순간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옥선녀의 편을 도와 벼락을 내렸다. 지네는 그만 벼락을 맞아 죽고 옥선녀는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 옥선녀가 놀았다고 하여 옥선녀탕이라 이름지어 부른다고 한다.
또 이곳을 지나는 국도 중앙에 큰 바위가 위치하고 있는데 벼락을 칠때 떨어진 바위라고 해서 선호암(仙護庵)이라 명명하였다.
설악산과 길두목(吉頭目)
본래가 씨름을 하여 수십마리의 황소를 끌어오기도 한 길길도(吉吉道)두목은 지략(智略)까지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양반이 되지 못하여 자신을 비관한 한 영특한 사내가 결국 세상을 등지고 설악산 설악동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깍아지는 듯한 기암절벽의 암석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권금성(權金城)에 숨어 비적질을 하며 울분을 달랬다는 전설이다.
길두목이 이끄는 비적떼들이 권금성을 은거지로 삼아 활약하게 된 시대는 조선시대 연산군(燕山君 1495 ~ 1505)때다. 성이야 누가 언제 어떻게 쌓았던 길두목 일당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도록 훌륭한 근거지가 되고 있었다.
당시 동해안 양양, 속초 등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하여 꼭 그 길을 지나야만 했기 때문에 권금성은 더욱 비적들의 근거지로 적소였다. 정소평, 마등령, 원통, 인제, 홍천을 거쳐 한양으로 향하였고 또한 이곳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가기 위해 넘나드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암석위 정상에 자리잡은 비적들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계곡밑의 관도(官道) 옆 주막촌과 은밀한 연락을 취하며 비적질을 했다. 원래가 첩첩 산중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지나는 나그네는 꼭 주막촌(현재의 무명용사비)에 들려 시장기를 채우고 걸죽한 탁주에 컬컬한 목을 축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멀고 험한 계곡을 넘을 수가 없었으며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형편이면 그 주막촌에서 하룻밤을 쉬어야만 넘어 갈수 있기도 했다. 인접한 곳에 다른 마을이라곤 전혀 없었으며 깊은 산골에 그렇게 자리잡고 있는 주막촌과 긴밀한 연락이 취해 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비적들로 보아 다시 없도록 좋은 조건이었다.
그 주막촌의 주모들 가운데는 남편이 있는 여자 보다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더 많았으며 비적들과 공공연히 정을 통하여 그 마누라 구실을 했는데 이 여자들이 바로 비적들의 소식통이 되어 있었다.
관도는 지나는 손님이 주막에 들어오면 불을 피워 비적에게 그 사실을 알리므로 위로는 마등령 밑으로는 살인재가 바로 비적들의 활동무대로 되어 있었다. 비적들은 힘이 더 월등한 과객을 만나 오히려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적들은 우선 지나가는 과객들을 세워놓고 수중에 든 돈을 털기도 하고 또 소문날 우려가 있으면 죽이는 것이 상습이었다. 그러면서 보안상 조정의 정보를 입수해 가면서 행패하는 것이 상습으로 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나날이 거센 폭풍이 이는 가운데 강원도 산골의비적들은 그야말로 호경기를 만났다는 것이다.
길비적 두목은 심복부하로 떡쇠 외에 많은 졸개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정고부락의 『분』이와 성대하게 혼인을 하고 3년이 지나다 보니 어느 듯 자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 뒤를 이어 20세가 넘었다.
중종 즉위 14년 (1519)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마침 일어나자 이때 청빈하기로 소문이 난 강원도 감찰사이고 그 전에는 양양도호부부사를 지낸 이광열(李光烈)은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양양군 서면 갑천리에 초라한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길두목은 이대감의 집 앞에다 고래등 같은 80칸 집을 지어 놓고 살다가 어느덧 대감과 인연이 닿게 된 후 많은 것을 배우고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모든 죄상을 뉘우치고는 그 인간성이 완전히 변해 버려서 비적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이다.
양양군 서면 갑천리 마을 입구에는 부사와 감찰사를 역임한 이광열 대감의 비석이 있었는데 그 산소옆에 또 하나의 산소가 생겼고 비석에는 엉뚱하게도 〈백장 길길도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여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면 용대리에 소재하고 있는 세칭 『도적소』도 이 무렵에 도둑들이 미시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은 뒤 소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 인해 부쳐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설퍼덩과 머슴
인제군 서화면 소재지인 천도4리에서 북서쪽으로 태백산과 최북단의 명산인 향로봉(香爐峰 1,299m) 중턱에 설퍼덩이란 곳에 얽힌 전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전 서화리 당촌(瑞和里堂村)에 한 머슴이 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낳을때부터 얼굴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털로 덮여 있어서 자기를 대해 주는 사람이 없자 소와 친해서 계곡을 누비며 놀았으나 동네사람들이 이를 알고 놀려대자 머슴은 부락을 등지고 향로봉의 「설퍼덩」으로 들어갔다. 몇 달이 지나도록 산으로 들어간 머슴이 소식이 없자 궁금히 여긴 동네 사람들은 그를 찾아 향로봉(香爐峰) 중턱을 헤매다가 통나무집을 발견하여 안에 들어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옷이라고는 걸치지 않은 털복숭이 머슴 옆에는 키가 9척이나 되는 산사람(山人)이 누워 있는데 그의 모습은 생리적 조건이 여자를 닮았으나 말을 전혀 못하는 여인이었다. 여체의 괴물은 동네 사람들의 놀림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털복숭이 머슴을 가볍게 업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벌거숭이는 그 후 열흘이 못돼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그 뒤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바보 」와 「미화 」라는 표현으로 「미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당지에서 70여년 살아왔다는 목격자 김수배(金壽培 1904~)는 전해준다.
신남의 닭바위와 망한 부자
남면(南面) 신남(新南) 1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형태가 닭같이 생긴 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신라시대에 김(金)씨라는 부자집이 있었는데 하루에도 지나는 길손이나 손님이 20여명씩 찾아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집 며느리가 매일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기에 골머리를 앓던 중 하루는 노승이 들러 시주를 원하니 시주는 얼마든지 할 터이니 손님이 안드는 묘책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노승은 앞산에 있는 닭처럼 생긴 바위를 가르키며 닭벼슬로 보이는 곳을 도끼로 깨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며느리는 즉시 도끼로 깨어 버리자 피가 흘러 내렸다고 한다. 그후 이상하게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따라서 몇해동안 계속 집안에 변고가 생겨 김(金)씨 집안은 망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지역 노인들은 첫새벽에 닭우는 소리가 들리면 흉년이 온다고 믿어 불길해 하고 있다.
▲ 닭바위에는 1972년 7월 소양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관대리(冠垈里)에 있던 [남북통일로(南北統一路)] [삼팔교(三八橋)]석비를 이전해 놓아 행인들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심뫼마니와 방동약수
기린면 현리 면소재지에서 7㎞가량 떨어진 방동2리에 약수가 소재하고 있으니 옛부터 방동약수(芳東藥水)라고 불리우는 승지(勝地)가 있어 해마다 도처에서 피서를 겸한 행객으로 가득하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어떤 심뫼마니(산삼을 캐러 깊은 산을 찾아 다니는 사람)노인 한 사람이 이 산에 이르러 매일 산신에 정성을 드리면서 심뫼를 보러 다니기를 여러 날 지내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홀연히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산 산신령이다. 빈한 중에도 너는 정직하며 지성을 다하니 내 너에게 산삼을 주리라. 그리고 그 삼을 뽑은 지하에 만병통치수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니 이를 널리 세상에 알려 중생이 제도(濟度)받게 하라"하고 사라지거늘 다음날 다시 심뫼를 보러 가려는데 동자가 나타나 오라고 손짓하기에 그곳에 가보니 동자는 간 곳 없고 그 동자가 있던 자리에 육구만달(제일 큰 산삼)의 산삼이 있어 이를 캐고 얼마를 파니 과연 약수가 솟아났다고 한다. 이 약수가 바로 방동약수(芳東藥水)이다.
열녀김씨 기일제
조선 인조14년 병자호란(1636)때 경기도 양주군 풍아현에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고귀한 조옥립이란 장군이 있었다. 병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는 이 장군은 병자호란때 관군을 지휘하고 되놈(胡軍)과 분투하였으나 대세가 불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의 기회를 보기 위해 인제면의 원대리에 은신하였다.
이 장군에게는 삼척 김씨의 부인이 있었다. 조옥립 장군의 뒤를 따라 들이 닥친 되놈들은 김씨에게 조장군이 있는 곳을 밝히라고 두 손바닥에 쇠로 구멍을 뚫는 등 갖은 고문을 했다. 그러나 김씨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되놈들은 마당에 장작을 쌓아 놓고 김씨를 화형에 처하려고 불을 질렀다. 그 순간 돌연 폭우가 쏟아져 뇌성병력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이렇게 되자 되놈들은 무서움에 떨며 모두 도망을 쳤으며 김씨는 끝내 남편이 있는 곳을 적에게 알려주지 않아 남편을 구했다는 것이다. 조장군의 후손들은 삼척 김씨가 10여일 후 죽자 그녀에 의해 그들이 대(代)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하여 김씨의 기일(忌日)로 陰曆 10月1日이면 문중에서 제사를 매년 올리고 있다
영시암(永矢庵)의 애화(哀話)
조선 숙종 15년의 일이며 이 해는 나라에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되니 이 사건이 유명한 장희빈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 민씨는 왕자가 없고 숙빈 장씨가 숙종 14년 9월에 왕자를 낳았다.
숙종이 장씨에게 혹해지니 서인들이 간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영의정 김수흥과 같은 분은 『세자를 가르치는 문제가 급하지 세자 책봉이 급하지 않다 』고 김수항, 송시열을 귀향 보냈다가 그해 3월에 김수흥의 관직을 박탈하고 윤 3월에 사약으로 죽였다.
이때 송시열도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이해 6월에 사약을 받았다. 이때 김수항의 아들인 삼연 김창흡은 세상의 인연을 끊고 설악산의 영시암을 찾아 산수를 즐기고 영원히 세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곳에 정사를 짓고 영원히 맹세한다는 뜻으로 영시(永矢)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삼연은 아버지 김수항의 영을 위해 조석으로 기도를 드렸다 한다.
영시암(永矢菴)과 호식동(虎食洞)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 ~ 1722)이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인 북면 용대리 내설악 영시동의 영시암 근처에는 지금도 호식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 호식동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었다 하여 호식동이라 한다. 삼연이 이곳에 와 있을 때 밥 짓는 종을 한사람 데리고 와 있었는데 어느 날 영시암 뒤에 있는 골짜기에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이리하여 이 곳을 호식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밥 짓는 사람이 없고 보니 침식에 불편도 있었지만 자기 때문에 와 있다가 불의의 환을 당한 종이 불쌍하여 인정으로 차마 그곳에 그대로 머물 수 없어 여기 온 지 6년 만에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 이곳은 유심(幽深)한 계산(溪山)이기에 양기(養氣)하기가 알맞아 암기(庵記)에 『휴식하려는 사람들이 만리 밖에서 찾아오고 양기 하려는 사람들이 구름 모이듯 찾아든다 』라고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 들었다 한다.
오개탕(五個蕩)과 빗적바위
남면(南面) 어론리(於論里) 44번 국도에서 화탄쪽으로 6㎞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탕으로서 산정(山頂)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암반에다 구혈을 뚫어 5개의 탕을 만들어 놓았다. 굽이돌아 흘러내리는 물과 암반의 조화가 신비하리 만큼 수려하여 여름이면 찾아오는 피서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 하나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그것은 먼 옛날 선녀가 목욕하러 오개탕(五個湯)에 내려 왔다가 목욕한 후 머리를 빗고 참빗을 바위를 밀어 열고 그 속에 넣어 두었다는 빗적바위도 있다.
남면(南面) 일대의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유람지로서 탕에 깃든 산의 정기는 세속에 젖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오세암(五歲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불교가 국교로서 인정될 무렵 선덕여왕 시절에 자장(慈將)이 자경(慈經)을 전하고 구영(救靈)의 대도(大道)를 찾고져 창건하였던 것을 조선 인조때에 설정선사가 증건하고 부모를 잃은 자기 조카인 다섯살 난 옥동(玉童)을 데리고 심산유곡을 찾아 들었으니 이곳이 곧 백담 계곡인 설악 산하로서 매월암(梅月庵)이라 칭하고 어느해 늦가을 스님은 눈이 쌓이기 전에 겨울날 양식을 마련하려고 영동지방의 양양도호부로 떠나게 되었다.
스님은 산중암자에 혼자 있게 될 어린 조카에게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거라, 그러면 3일 이내에 돌아오겠다 』고 이르고 령을 넘어 양양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날부터 눈이 내려 산과 같이 쌓여져 령(嶺)길이 통할 수 없게 되자 스님은 하는 수 없이 통탄속에 그해 겨울을 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듬해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암자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망경대에 올라 매월암을 굽어보니 신기하게도 그윽한 종소리가 들리고 불측의 기적에 측은한 마음을 먹고 암자에 이르니 동자는 대사를 반겨주고 동자가 있던 방에는 영향(靈香)이 그윽히 차 있고 방에서는 청조(淸鳥) 한마리가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음에 대사가 그 연유를 조카에게 물은 즉 자애스럽고 인후스러운 여인의 품에 포옹되어 젖을 빨고 있었으며 그 여인의 말이 나는 너의 어머니라고 하며 동자가 다시 반문하기를 그러면 관음보살이시나요? 하였더니 오냐 너와 명춘까지 같이 있겠노라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매월대사(梅月大事)는 다섯살 된 동자가 불법에 오득통달(梧得通達)한 것이라 하여 그 후부터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백담사(百譚寺) 부속 암(庵)인 이암자는 통일후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세운 암자로 당초의 이름은 관음암(觀音庵)이었다.
용각석(龍角石)과 장군석(將軍石)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1리의 촌락(村落)엔 막구두평(莫九斗坪)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당시에 부촌(富村)이었다고 한다.
시대 미상이나 그 옛날 하루는 평화스러웠던 이 마을에 한 승이 제일 가는 부자집을 찾아가 시주를 권하다가 하는 말이 "앞 산에 있는 저 산을 무엇이라 합니까?" 하고 묻기에 주인이 대답하기를 "용각석(龍角石)이라고 합니다."하였더니 그 승이 하는 말이 "그 바위를 용각석이라고 하는 것보다 장군석(將軍石)이라 개명하면 이 마을이 지금보다 더 부촌(富村)이 되고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이며 그 명망이 사해에 떨치게 되리라"하여 이 주인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어 많은 시주를 하고 개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승은 '이름을 고치려면 바위 밑을 통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큰잔치를 베풀어야 개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마로 마을 사람들은 재산의 다소유무(多小有無)를 막론하고 금전과 백미를 거출하여 약 1개월동안 노상을 통행하는 행객에게 잔치를 베푼후 그 바위 이름을 장군석(將軍石)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 후 훌륭한 인재와 부촌은 고사하고 여러해가 경과하지 못하여 마을에는 재해가 꼬리를 물고 발생하여 인명의 피해는 말할 수 없고 파산하여 망하는 집이 속출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논쟁끝에 바위 이름을 고친것이 이 마을의 폐망의 길이라고 하여 다시 용각석(龍角石)이라고 고쳤다고 전해오고 있다.
점봉산 고주전
인제읍(麟蹄邑) 귀둔 2리와 기린면(麒麟面) 진동(鎭東) 1.2리를 경계하고 있는 점봉산(點鳳山 1424m)에 얽힌 일화이다.
조선시대 상평통보(常平通甫)의 엽전을 나라에서 만들어 백성에게 쓰게하던 시절에 이 점봉산(속명 덤붕산) 깊숙히 들어있는 골짜기의 암굴(岩窟)에 숨어 어떤 사람이 사주전(私鑄錢)을 했다고 한다.
깊은 산 속에서 이렇게 엽전을 만들었으나 이 비밀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져서 뚝딱 뚝딱 망치질하는 소리가 마치 <덤붕산 돈 닷돈, 덤붕산 돈 닷돈>하고 울렸다 하여 동요가 되고 전파되니 이 기이한 동요에 관인(官人)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자 사주전(私鑄錢)하던 일당이 발각되어 포박 되어간 후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인근에서 <꽹과리>를 처음 배우는 이들이 <덤붕산 돈 닷돈, 덤붕산 돈 닷돈>하고 친다고 한다.
▲ 이와 유사한 전설은 양양군(襄陽郡) 서면(西面) 오색약수(五色藥水)터 인근의 <주전곡(鑄錢谷)>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롱동서생(鳥弄洞書生)과 장홍노(張弘弩)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소재지에서 2㎞가량의 조롱고개를 넘으면 500m의 국도변 자연석에다 새겨 놓은 "장홍노(張弘弩)"라는 큼직한 글씨를 행인들은 볼 수 있다.
현재의 80대 촌어른들도 연대를 추정할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것은 조롱동 서생들과 장홍노에 얽힌 일화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옛날 어느 곳에서 살다가 이 곳을 찾아왔는지 그 신분을 소상히 알 수 없는 장홍노는 이곳에 와서 후진들의 한학교육에 여생을 보낼 것을 굳게 다짐하고 스승의 이름 장홍노를 큼직하게 새겨놓고 가까운 곳에다 묘를 마련해 놓았으니 지금도 찾아 볼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
제자들은 생전시 스승님의 은혜를 영원히 추념하고 또한 연고인이 언제라도 이곳을 지나면 찾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와 같이 미거(美擧)를 이루었다고 그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이병준(李炳俊 1939~)은 전해 주었다.
스승님은 영영 가셔도 고색 짙은 그 이름만은 풍우를 가리지 않고 선명하게 보여주어 빚을 잃어 가는 현대인의 애향심을 복 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천도리(天桃里) 범바위
인제군 서화면(瑞和面) 천도(天桃)2리에 있다.
옛날 한 무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던 중 호랑이 한마리가 바위에서 벼랑 밑을 내려다 보며 멧돼지를 노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니 벼랑으로 떨어지던 호랑이가 멧돼지의 목을 물고 죽어 화살 한발에 두마리의 짐승을 죽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뒤로 부터 「범바위 」로 불리워지고 있다.
추갑산(秋甲山)과 구미호(九尾虎)
인제군 상남면 하남(下南)2리 선래동(仙來洞)이란 마을에 위치한 추갑산(秋甲山)에 대한 설화가 있다.
때는 조선(朝鮮)중엽이었다. 이 마을에는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추(秋)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있었는데, 추씨가 사냥을 나간 몇 시간 후에 총성이 계속해서 들려오자 그의 아들인 갑산(甲山)이 걱정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그의 아버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러져 있고 좀 떨어진 곳에는 흰털로 덮인 커다란 짐승이 앉아 있는 지라 연유를 아버지께 물으니 " 저 짐승은 총을 아무리 쏘아도 죽지 않고 실탄을 받아 땅에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짐승이다" 라고 하시면서 아비는 이미 죽은 몸이지만 자식만은 살아야 할것 아니냐고 싸움을 포기하고 빨리 도망가라고 권하였다. 의지가 강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사연을 다 듣고 난 후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짐승과 싸우겠다고 총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청에 못 이겨 총을 건네 주었다.
아들은 총에 실탄을 넣지 않고 화약만 넣어 여러 차례 짐승을 향하여 쏘아대니 짐승은 갑산의 총 솜씨에 놀라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추씨의 성을 따고 갑산의 이름을 붙여 추갑산이라 하였으며 죽은 짐승은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호랑이라 하여 구미호(九尾虎)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토끼봉의 전설
갑둔 초등학교 동쪽 천지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해발 680m의 조그만 산이 있다.
마치 토끼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이 산앞 북쪽 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두꺼비 바위라고 부른다.
먼 옛날 이 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결혼한 지 3년이 되어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 한이었다. 이 부부는 생각다 못해 김부대왕께 찾아가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김부대왕은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들은 후 이들 부부에게 절을 짓고 부처님께 백일 기도를 드려보라고 일러주었다.
그 날부터 두 부부는 지금의 토끼봉과 두꺼비 바위 사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웠다. 절을 다 지은 다음 곧 백일 기도를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깨끗한 물과 뫼를 지어 부처님 앞에 놓고 정성을 다하여 빌었다. "부처님께 비나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과 토끼 같은 딸을 얻게 해 주십시요....." 이렇게 빌고 또 빌어 백 일째 되는 날에는 하얀 시루떡을 해다 놓고 마지막으로 빌었다. 이 때 인근 천지산(天志山)에 있던 토끼와 천지곡(天志谷)에 있던 두꺼비는 매일같이 자기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 보면 부처님께서 밥을 혼자 먹어 치우기 때문에 항상 입맛만 다시고 돌아갔었다. 백일째 되는 날도 토끼와 두꺼비가 와 보니 먹음직스런 시루떡이 있었다. 그런데 왠 일인지 여느 날과 달리 부처님은 그 떡을 먹지않고 토끼와 두꺼비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토끼와 두꺼비는 어찌나 반가왔던지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었다. 부처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생들의 못난 짓들이구나"라고 하시며 떡시루를 집어서 개울 건너로 던져버렸다. 토끼는 부끄러워 머리를 돌렸고 두꺼비는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앞발을 쳐들었다. 이때 하늘에서는 번개가 일고 천둥이 쳤다.
그러자 토끼와 두꺼비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던져버린 시루떡은 세 조각으로 갈라져 큰 바위가 되었다. 그 후 이들 부부에게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과 토끼같은 딸 쌍둥이를 낳아 잘 기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년을 점치는 합강수(合江水)
인제읍에 소재한 합강리(合江里)부터 멀리 소양강(昭陽江)하천을 옛부터 미륵천(彌勒川)이라고 블러왔다. 이 미륵천을 고기(古記)에 在縣北自官門5里一波麒麟來一波自雪岳來至元通合驛瑞和 水流至亭前合江名稱彌勒川(재현북자관5리일파기린래일파자설운래지원통합역서화 지류지정전합강명칭미륵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강물이 합강정 앞에서 합류하므로 대부분의 이고장 사람들은 합강천으로 통용되고 있다. 천년을 하루같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이 하천은 장마철에 들어서면 합류지점은 그 수심이 10여미터나 되며 지형적인 특수한 성인(性因)으로 강물이 역류하고 있음이 기이하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는 신비한 감동적인 인상을 갖게 한다.
합류지점에서 건너편 만호대(萬戶臺)기슭 강변을 지나는 내린천 암물·자수(雌水)수색이 흐리면(이기면) 홍수가 나고 반대쪽인 서화에서 내려오는 물(숫물·웅수(雄水))수색이 맑으면 풍년을 기약한다. (또는 晴天) 전설이 촌어른들의 구전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옛부터 강을 왕래하는 뱃사공에 얽힌 사연 그리고 1930년 경오수난(庚午水亂)을 비롯한 수재(水災)가 빚어낸 갖가지의 숱한 애화를 담고 있는 이 강물은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인근에는 많은 선사(仙士)들과 묘객들이 찾아와 시가(詩歌)를 남기고 간 300년전에 창건하였다는 합강정이 있고 석양이 비치는 강물과 고을 주변의 경색과 솟아오르는 연기는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그림의 한폭으로 묘경(妙景)이다.
하마로(下馬路)와 박대감
고려 말의 충신인 박원굉(朴元宏)은 임금을 받들고 섬겨왔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李成桂)가 개성으로부터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끝내 이를 거부하자 왕명을 거역한 역적으로 몰려 그때 가장 험한 땅인 강원도(江原道)에 귀양오게 됐다.
귀양에 오른 박원굉(朴元宏)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것을 결심하고 밭을 일구어 그곳에서 한 많은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부부는 세상을 떠났는데 그 시체는 자손들에 의해 하마로 (下馬路)언덕에 합장되었다 한다.
그 후 세월이 흐르자 이 부부가 합장되어 있는 묘(墓)주변에 영월 엄씨를 비롯한 많은 묘가 생겨서 이들의 후손들이 선조의 묘를 찾을 수 없게 됐다. 그러던 무렵 기린면(麒麟面) 현리(縣里) 하덕(下德)에 살고 있는 이들의 장손 한 집안 사람의 꿈에 박원굉이 나타나 후손을 꾸짖고 「주변의 다른 묘는 옮기라 」고 말했다. 꿈에 선조를 만난 이 후손은 다른 묘를 전부 이장해오며 이 때 박원굉(朴元宏)의 묘(墓)와 망두석(望頭石)까지를 전부 되찾아 냈다.
그후 이 묘 부근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널면 꼭 한가지씩 없어졌는데 그 다음날 볼 것 같으면 빨래에 「다음부터는 이곳에 빨래를 널지 말라 」는 금기의 글이 쓰여져 묘 앞에 걸려있는 것을 찾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이 부근 사람들은 지금까지 묘 앞에는 빨래를 널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 앞에는 길이 나 있는데 이 묘가 생긴 후부터는 가마, 영구, 말 같은 것이 지나면 꼭 어떤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평장사 박원굉을 모시고 얼마 안되어 이곳 인제 현감이 새로 부임할 때의 일이었다.
신임현감은 심산유곡(深山幽谷) 호젓한 벽지에 꺼릴 것이 무엇이랴 싶어서 나귀 등에 높이 올라 앉아 오만하게 평장공 묘앞을 지나려고 했더란다. 그때 묘 앞까지 온 나귀의 발굽이 갑자기 땅에 못 박힌듯 붙어서 도무지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한다. 놀란 현감은 금새 얼굴 빛이 질렸다. 뒤 따르던 아전 구실아치 무리들도 눈이 휘둥그래지자 「이 어찌된 연고일고 뒤 까닭을 아는 자 없겠느냐?」 현감이 안타까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어 보았다. 「예, 소인이 아는 바를 아뢰려고 하옵나이다. 현아(縣衙)에 전부터 있던 벼슬아치가 현감 앞으로 나와 읍하였다. 「네 아는바를 직고하라 」「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기는 승마고좌하고는 지나 가지 못하는 곳이옵니다. 간좌원에 평장공이 현영 하시옵기로 하마보행 하여야만 비로소 통과 보행할 수 있나이다.」 그제야 현감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얼른 나귀등에서 내렸다. 「옳도다. 평장공(平章公)께서 예 계신 줄 미처 몰랐었노라.」 현감은 깊이 깨우치고 이곳을 걸어서 지나갔다. 현감은 다음날 이곳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놓았다 한다.
이로부터 누구나 이 길을 지날 때는 반드시 나귀에서 내려 걷게 되었고 하마로(下馬路)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칠령 골
인제군 상남면(上南面) 상남(上南)3리에 살던 어떤 사람이 아버지 상을 입었다. 그는 아버지를 명당에 모실 생각으로 지관(地官)에게 산소를 보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 지관은 「산소자리를 내가 잡아주되 내 말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됩니다 」라고 먼저 다짐했다. 상주는 그러마고 쉽게 약속했다. 지관은 양지바른 한 골을 묘지로 잡아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산 자리를 파들어 갈 때 넓적한 돌이 나오면 더 이상 파지 말고 하관을 하십시오 그러면 자손 중에 귀인이 나와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묘지를 팔 때 아무리 친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아는 체 하지 말고 인부들이 바위를 뒤적이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하고 일러 주었다.
장삿 날이 와서 그 상주는 지관이 가르쳐준 골에 묘를 팠다. 상주는 인부들이 묘지를 파고 있을 때 처음에는 지관의 말을 지키느라고 살펴보았으나 평평한 돌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관의 이야기가 차츰 믿어지지 않게 됐다. 그럴 즈음 찾아온 이웃 사람이 있었다. 상주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묘지를 지켜보지 않았더니 그 속에서 학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올라 고개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묘지에서 학이 날아간 후 묘자리를 보아준 지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그 상주의 후손 중에는 지관의 말처럼 그 집안을 일으킬 만한 인재는 영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상주가 지관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학을 날려보냈기 때문에 그 후손 중에는 등용되는 인재가 태어나지 않고 있다고 믿었으며 묘지에서 학이 나와 산 너머로 넘어 갔다고 해서 이곳을 「학칠령」이라 부른다 한다.
황조막(黃鳥幕)과 박진사(朴進士)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이 넘는 고종황제(高宗皇帝)때의 일이다.
때는 늦은 봄이었는데 나라에서는 과거를 실시하고 있을 무렵이다. 박(朴)씨들의 씨족촉인 인제현(麟蹄縣) 하추리(下楸里)에 서로 육촌간인 삼형제가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다. 이 세사람은 준회(準會),준희(準熙),순칠(舜七)이었다. 준회(準會)는 어려서부터 조숙(早熟)하더니 청년이 되자 힘이 천하장사였고 키는 구척장신이었다. 그리고 순칠(舜七)은 집이 빈곤하여 어깨 너머로 축구권이나 읽은 처지였다.
이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 많은 짚신과 노자를 짊어지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한양(漢陽)을 향해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 늦은 봄이건만 한여름 장마처럼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흙탕의 장마물을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구척 거구인 준희(準熙)의 허리에 순칠이와 준회는 밧줄로 연결하여 매고 개울을 건너는데 급류의 물살이 너무 강해서 준회와 순칠이가 넘어져 물위에 뜨게 되었다. 그러나 밧줄을 당겨 두 사람의 멱살을 양손에 움켜쥐어 번쩍들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정말 천하장사였다. 그들은 오늘날의 경기도(京畿道) 청평(淸平) 고을에 이르러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다. 인정 많은 주막주인 덕택에 편히 잘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순칠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꿈 자랑을 했다. 꿈에 푸른 버드나무 숲에서 황금 같은 꾀꼬리 두 마리가 날아와 양어깨에 앉더라는 것이었다. 쫓아도 날아가지 않고 노래를 계속 부르더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며 순칠이는 자기가 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할 징조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얘기를 듣고 있던 주막 주인이 허허 애석합니다 하면서 해몽을 하는데 꾀꼬리가 머리에 앉았으면 당신이 급제하는 것인데 양어깨에 앉은 것은 옆 사람이 급제할 징조라고 했다. 그 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꿈의 해몽이 막중하여 준회(準會)는 소과에 급제를 하고 준희(準熙)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제수 받았다.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주막에 다시 들러 주인에게 많은 사례를 하고 그 주막을 황조막(黃鳥幕)이라고 했으며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집에서 황조(黃鳥)의 꿈을 꾸고 과거에 급제했다 하여 황조막(黃鳥幕)또는 황조가(黃鳥家)라 불렸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지금도 하추리(下楸里)에서 그들의 후손들은 꾀고리 꿈만 꾸면 길조라고 믿고 있으며 경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채미헌이 있는 점봉산과 주변 볼거리
점봉산
위치 /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
남설악의 점봉산(1,424m)일대에 펼쳐진 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시림에 가까운 곳이다. 아름드리 전나무를 비롯해 모데미풀 등 갖가지 희귀식물이 무더기로 자라며 산나물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점봉산은 참나물 곰취, 곤드레, 고비, 참취등 10여가지 산나물이 밭을 이룬듯이 돗아나 있다.
점봉산은 한반도 식물의 남북방 서식지의 한계선이 맞닿아 우리나라 전체 식물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54종의 꽃과 나무들이 모여 자생하는 보고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구역이다.
곰배령
곰배령은 점봉산 남릉상의 작은 점봉산과 호랑이 코빼기 사이의 광활한 안부인 곰배령은 산나물과 야생화 탐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점봉산에서 곰배령 능선의 서쪽 지역이 설악산 국립공원 지역으로 2000년 1월 1일부터 2002년 12월 31일까지 제4기 자연휴식년제 시행구간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 곰배령 가는길-
1. 인제읍 귀둔리 양지말 버스종점에서 곧장 마을을 가로질러 군부대 정문까지 가면 여기서부터 포장도로를 따라 1km 들어가면 갈림길목이 나옵니다. 왼쪽편이 곰배골로 향하는 길이다.
곰배골 마을 마지막 인가를 지나 200m쯤 가면 비로소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골 왼쪽으로 매우 뚜렷한 길이 줄곧 이어지며, 마을에서 1시간 30분쯤 부지런히 걸으면 "곰배령"안내팻말이 선 삼거리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20분쯤 갈짓자 길을 오르면 곰배령이다. 곰배령 마루 직전에는 산채꾼의 산막이 있는데, 수통은 이곳에서 채우는 것이 좋다.
2. 기린면 진동리 진동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첫번째 비포장구간을 지나 조침령3거리까지 가면 다시 포장구간이 4km정도 이어진다.
상부댐 3거리에 도착하면 다시 비포장구간이 나오는데 이때 곰배령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오르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곳부터는 도로상태가 매우 안 좋아 일반승용차는 어려우며 짚차를 이용하신다면 가실 수 있는 구간이다.
진동분교를 지나 3km를 가면 강선리 입구 삼거리(단목령 갈림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에서부터는 차량을 세워놓고 도보로 걸어 오르면 곰배령에 다다르게 된다.
.내린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내린천, 양양군 서면 복령산에서 발원하여 홍천군 내면 광원리에서 내면 창촌리로 흘러 들어오는 자운천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하천이다. 홍천군의 응봉산에서 내려오는 내린천과 인제군 점봉산에서 발원하는 방태천이 합쳐지는 상남면 미산리에서 기린면 현리까지가 흔히 말하는 내린천 계곡인데 특히 아름다운 인제읍 고사리 지역을 피아시라고 부른다.
이 물줄기는 여울과 넓은 소(沼)담(潭)과 하천변 경관이 조화를 이루면서 상남쪽에서 들어오는 시냇물과 또 한차례 합류해 인제군 상남면 하남리에서부터 31호선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흐른다. 31호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내린천 강변로는 넓은 백사장과 함께 합강유원지, 피아시유원지, 장수터유원지, 궁동유원지, 솔밭유원지 등 수많은 절경이 이어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연출하고 있다.
굽이굽이 감도는 30리 계류 어느 속이든 여름 한낮의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숲과 넓은 바위들이 있어 좋은 쉼터가 되고 물 속에 발을 담근 채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는 멋은 선경의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봄에는 철쭉 군락, 여름에는 푸르른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 등 내린천의 사계는 철마다 다른 모습으로 삶에 지친 사람들을 맞는다.
특히 이속은 레프팅(급류타기)의 최적지로서 인근 민박에서 2∼3일 묵으며 레프팅·민물낚시 등 특별한 경험을 할수 있다. (국내 최고의 래프팅 코스)
위치 / 인제군 인제읍 고사리 31호국도 ~ 상남면 미산
합강대교∼고사리∼피아시∼궁동유원지∼황소유원지~미산계곡
내린천의 물길주변에는 많은 산과 오염되지 않은 하천이 있다. 내린천에 합쳐지는 방태천 상류에는 오지탐험지로 유명한 진동계곡의 설피마을이 있다. 설피마을에는 매년 정월보름 주민들과 환경단체 회원들이 모여 고썰매타기, 횃불놀이, 지신밟기놀이 등 민속경기를 펼친다. 진동계곡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 보존지역인 점봉산이 있다. 방태산 주변에는 방동약수, 방태산 자연휴양림, 활엽수림으로 유명한 방태산이 있으며 북쪽으로 필례약수, 한계령, 설악산 국립공원의 백담사, 12선녀탕이 있다. 남쪽으로는 위장병에 좋은 약물로 유명한 개인산 약수가 있다.
서울과 춘천에서는 홍천을 거쳐 인제에 이르고 인제읍을 벗어나 1Km쯤 달리다가 합강교 앞 검문소에서 우회전 해 다리를 건너 현리쪽으로 들어선다. 내린천 물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인제읍 합강리~기린면 현리~상남면 하남리~70여Km를 달리면 된다.
※ 내린천댐 건설반대 투쟁
내린천은 환경부가 지정한 특정 야생동물인 꼬리치레도롱룡, 열목어, 수달, 어름치, 금강모치, 황쏘가리, 어리버들치등이 살고있어 어류학자들은 무주구천동 10개와도 바꿀 수 없는 민물고기의 보고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자연생태계의 최후의 보루이고 또한 3~4백년간 인간의 훼손 없이 잘 보존된 국내 최고의 원시림을 갖고있는 지역임.
이곳에 댐을 건설하게 되면 주변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수백년간 생태적인 안정을 유지해 왔던 동.식물 생태계가 모두 파괴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고 내린천을 살리고자 4만 인제군민 모두는 혼연일체가 되어 생업을 뒤로 한 채 투쟁하였으며, 주요 활동상황으로는 군민총궐기대회, 청년사수대 발대식, 사랑의 헌혈, 부녀사수대 발대식, 초.중,고웅변대회, 전국 문인 시낭송회 등을 통한 극력반대투쟁과 함께 각 정당 및 경실련, 환경단체 등을 통한 연대로 댐건설의 부당성과 내린천의 생태계보존 가치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켜 마침내 98.1.30 정부에서 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는 쾌거를 얻게 되었으며 그동안 대다수 군민들은 자연생태계 보존보다 지역개발에 더 많은 중요성을 갖고 있었으나, 댐 건설 계획 백지화를 위한 투쟁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린천의 보존가치와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가꾸는 군민으로 거듭나게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음.
방태산
기린면 방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섬세한 운치에 가득찬 방태산은 그 높이가1,435m로 주변에 인접하고 있는 주억봉(1,443m)구룡 덕봉(1,388m)개인산(1,321m)과 함께 북쪽에 위치한 점봉산, 가리봉과 대치하고 있는 이 고장의 고봉으로 옛부터 산수의 신비와 조화를 장식하였으며 많은 시가(時歌)를 남겼다
방태산자연휴양림
구룡덕봉(1,338)과 주억봉(1,443) 계곡이 발원지로서 본 휴양림의 주수계를 이루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특히 마당바위와 2단폭포는 절경이라 할 수 있으며, 천연림과 낙엽송 인공림으로 구성되어 자연경관이 수려할 뿐 아니라 야생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마당바위와 2단 폭포 절경과 다양한 천연김과 4개절의 경관이 좋아 매년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주요 편의시설은 복합산막(1등/9방), 오토켐프장, 야영태크(마루), 텐트장, 주차장, 삼림욕 등이 있다.
방동약수
약 300년전 어느 심마니가 이곳 기린면 방동리에서 커다란 산삼을 캤는데 그 산삼을 캐낸자리에서 약수가 치솟기 시작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탄산, 망간등을 함유하고 있어 위장병과 소화증진에 좋다고하는데 엄나무 아래 깊이 패인 암반사이에서 나오는 약수와 아담한 계곡은 가족단위 쉼터로 적격이다. (주변의 자연풍경은 노송과 함께 300년생의 엄나무가 무성하여 수양하기에 최적지로 이름이 나 있음)
기린면 방동2리 약수터에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차도로 7㎞동남쪽에 있으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경향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으며 보통 복용하면 소화촉진 작용을 일으켜 식욕을 증진케 하며 아무리 다량 복음하여도 배탈이 생기는 일이 없다.
최근 인제군에서는 이곳에 숙박시설, 위락시설 등을 갖춘 약수터로 개발하고 있다.
합강정
인제읍 합강 2리에 있는 정자(亭子)로서 이 고장에서 유서(由緖)가 가장 깊은 것으로서 소양강 상류인 내린천이 기린방면에서 흘러내리고 서화강이 한계천과 원통에서 합류된데 연유하여 명명(命名)된 정자(亭子)로서 나루터에서 양지류(兩支流)가 합류하여 이조중엽부터 합강정으로 불러오고 있다. 특히 우수기(雨水期)에는 내린천 물이 합강지점에 와서 그 수류방향(水流方向)을 원통쪽으로 100m쯤 흘렀다가 합강지점으로 역류(逆流)하는 수류현상(水流現象)과 어군(魚群)의 서식(棲息) 또한 특이하여 조어지(釣魚地, 낚시터)로 태공(太公)들이 많이 찾아온다. 합강정은 인제고을에 향교가 광해군 2년(1610)에 창건되어 66년이 지난 숙종 2년 병진(1616)에 금부도사를 역임한 바 있는 현감 이세억 재임(1675~1677)시에 지형적으로 전망이 가경(佳景)인 합강리(현 위치의 아래인 아스팔트 국도)에다 합강정이 세워졌으니 이것이 이고장의 누정(樓亭) 건립의 효시(嚆矢)라 하겠다. (이세억, 有善政碑)
미산계곡
상남면 미산리에 위치한 개인산 자락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계곡으로 대·소개인등으로 마을이 구분되는데 대개 인동 일대는 인적이 드문 원시림이 형성되어 있으며 오염되지 않은 시원함 바람은 피서지로 적격이다.
또한 가족단위로 가벼운 등산을 겸하여 인근에 있는 개인약수를 찾을 수도 있고 민박을 찾아 훈훈한 시골인심과 고향의 정을 느낄수 있다.
개인동계곡
상남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12㎞ 점에 위치한 개인산(開仁山)은 미산1리에 속하고 있으며 편의상 소개인, 대개인동으로 부르고 있다. 대개인동 일대는 인적이 드문 미답지역(未踏地域)으로 풍부한 임산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개발도상에 놓여있다.
대개인동에 소재한 10㎞ 에 걸쳐서 전개된 계곡일대는 특히 향기 그윽한 100~200년생의 주목, 가문비나무 전나무를 비롯하여 잡목이 무성하며 깊은 계곡의 노송과함께 기암사이에서 세속을 씻을 수 있는 곳으로 발이라도 담그면 찌는듯한 무더위도 순간에 사라진다.
개인약수
상남면 미산1리의 빈지동(賓地洞)을 지나 곁가리, 고목동 (古木洞)을 우회하여 소개인동을 지나 대개인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개인산(開仁山) 중복의 아늑한 한곳에 발달한 약수가 개인약수다. 1891년 지덕삼(池德參함북인) 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발견. 주변에 거목의 침엽수림대가 형성되어 있어 가슴을 시원하게해주며 약수터를 오르는 약2km의 코스는 순탄하므로 가족과 함께등산을 겸하여 찾기에 좋고 미산계곡에서 쉬어 갈 수도 있다.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위장병을 비롯한 만병을 다 치료하였다 하여 군내는 물론 타지방에도 이 효과을 만끽하기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길을 메운다.
진동계곡
기린면 현리 면소재지에서 4km지나면 진동1리 추대에서 설피밭에 이르는 장장여 20km의 발달한 계곡으로 영봉이 천자만상의 기태를 보여주고 있는 원시림의 진동계곡은 휘귀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상태계의 보고이다.
봄철이 되면 진달래, 봄철쭉이 온산을 덮어서 천자만홍의 경색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으며 여름철에는 수많은 진한 향기가 탐스러운 꽃들이 자생하고 있어 아름다운 극치는 더할것이 없다. 또한 가을철이면 단풍이 온산을 금수로 장식하고 있어 오는 이의 마음을 설래이기도 하며 피서지로 적격이다.
용소폭포
상남면 상남1리 차도연변으로부터 1㎞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장의 유일한 폭포로 고래로부터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봉아대로부터 낙하하는 폭포수는 매우 장쾌하여 마치 한폭의 그림이며 그 용궁은 조물주의 교치(巧緻)로된 일대옹형(一大甕形:항아리)으로 그 수심을 헤아릴수 없으며 그 옹내부(甕內部)에는 몸부터 일포(一抱)씩이나 되는 용이 꿈틀거려 들어가는 듯한 자취가 완연히 나타나 있으며 또한 폭포수는 수척여이며 원통형 천연석주가 서산을 바야흐로 표하려는 자세로 육박하는 산을 떠받들어 제지하고 있는 사이를 광음을 일으키면서 분류(奔流)하고 있다.
필례약수
이 약수는 인제읍 가리산리에서 동북쪽으로 군량동을 지나 필례에 닿는데 이곳의 작은 개울가 성황당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인제읍 소재지에서 16㎞지점인 가리산리 쌍다리를 지나 동북쪽으로 군량동을 지나 4㎞지점 개울가에 성황당이 보이는데 바로 그 옆에 소재하고 있다.
1930년경 인제출신인 김모씨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이 약수는 천혜의 영천(靈泉)으로 철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 맑은 탄산수의 매움은 그 어떤것과도 비길것이 없다.
고래로부터 피부병,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가리봉(1,519m)답사와 피서를 겸하여 각 도처에서 많이 찾아온다.
위치 / 인제군 인제읍 귀둔1리
남전약수
남면 남전1리 국도변에서 약 200m지점의 양지바른 기슭에 소재한 약수이다. 고래로 쪽이 무성한데 연유하여 이름 지은 쪽발곡(谷)에 위치한 이 약수는 당지에 토착하고 있는 함북 명천군 출신인 이태근에 의해 1969년 6월 15일 발견. 이 약수는 철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약수를 복용하면 속병이 낳는다고 한다.계절을 가리지 않고 각지에서 유람과 호반의 낚시를 겸하여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약수를 마시기 위해 남녀노소가 운집하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인근 지역의 작은 계곡들을 찾아 쉬어 갈 수도 있으며 또한 소양호 낚시를 하며 잠시 들러 약수의 신비한 맛을 느껴볼 수도 있다.
용대자연휴양림
한반도의 등허리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 북쪽의 진부령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국립공원 설악산과 동해로 통하는 46번 국도와 연접하고 있다. 매봉산(1,271m),철정봉(1,172m)으로부터 형성된 크고 작은 계곡을 따라 맑고 깨끗한 물이 휴양림 중앙으로 흐르고 있고 인공 낙엽수림과 천연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제74호 열목어와 멧돼지, 토끼, 꿩 등 야생동물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으며, 휴양림인 연화동은 지형이 "연화분수형"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현상이라고 부르는 지역임.
주요 편익 시설은 산막(2동), 정자, 주차장, 야영장, 오토캠프장, 야영테크(마루), 삼림욕장, 취사장, 자연관찰장 등이 있어 가족단위의 자연 휴식공간으로서 피서객이 많이 찾고 있다.
설악산
한반도의 중추인 태백산맥 중 가장 높은산(대청봉 1,708m)인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맑고 깨끗한 계곡,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태로 옷을 갈아 입으며 절경을 이룬다.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쪽의 미시령과 남쪽의 점봉산을 잇는 설악산맥이자 태백산맥이기도한 주능선을 경계로 동쪽은 외설악, 서쪽을 내설악이라 하는데 인제군에 속한 내설악은 백담·가야동·수렴동계곡등의 우아하고 빼어난 계곡미가 일품이며 또한 희귀 동식물과 자연그대로의 원시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찾는이의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된 설악산은 1965년11월5일에 지정되었다. 인제와 속초 양양군에 접하여 있는 이 구역은 북위38° 5′24″에서 38°12′ 36″ 동경 128° 18′ 6″에서 128° 30′ 43″에 이르는 곳이다. 설악산의 연중평균 기온은 남한에서의 최저를 기록하며 비교적 저온지대에 속한다.
십이선녀탕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십이선녀탕 계곡이 있다. 폭포와 탕의 연속으로 구슬같은 푸른 물이 우뢰와 같은 괴성으로 갖은 변화와 기교를 부리면서 흐르고 있다.
옛말에 12탕 12폭을 흔히 십이선녀탕이라고 불러 왔으며, 탕의 모양이 장구한 세월에 거친 하상작용에 의해 오목하거나 반석이 넓고 깊은 구멍을 형성하는등 신기하고 기막힌 형상을 이룬다.
계곡에는 단풍나무.전나무.박달나무.소나무등 거목이 우거져 있어, 계곡의 미가 황홀하기 그지없다.
십이선녀탕계곡은 물을 건너는 곳마다 많은 철다리가 놓여있으나, 전형적인 V자 협곡이므로 폭우가 내린 경우에는 상류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
도적폭포
북면 용대3리 미시령 정상에서 용대리로 이어지는 미시령 계곡의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걸어서 미시령을 넘어다니던 시절 이곳에 도적들이 숨어있다가 지나는 길손의 재물을 빼앗고 이 폭포에 빠뜨려 죽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도적폭포 또는 도적소라 불린다.
커다란 산자락이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미시령 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원한 바람과 차고 깨끗한 계곡물이 좋아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며 특히 동해안을 잇는 466호 지방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는 길에 들러 쉬어 가기에 좋다.
백담사
외설악을 찾는 사람들이 신흥사를 거쳐 설악산을 구경 하듯 내설악을 찾는 사람들은 으례 백담사 를 찾게 된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자리잡고 있는 백담사는 내설악의 첫 관문이다. 외가평에서 들길을 걸어 공원관리 사무소를 지나 백담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백담사가 나온다. 고찰 백담사의 창건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이 지은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1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절을 지어 미타상 3위를 조성, 봉안하고 이름을 한계사라고 했다. 한계사는 자장이 창건한지 50여년만인 신문왕 10년인 690년에 실화로 불타 없어졌지만 곧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백담사는 1919년 4월에 당시의 주지 인공선사가 복구한 것이다.외가평에서 들길을 걸어 공원관리 사무소를 지나 백담계곡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백담사가 나온다.
백담사의 현존건물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山靈閣) 화엄실법화실 요사채 만해기념관과 함께 3층석탑도 1기가 있다. 백담사는 여러 차례 절이름이 바뀌었고 위치도 달라졌기 때문에 그 전모를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화엄학이나 천태(天台) 등 교학계통을 연구하는 사찰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오세암 봉정암 등은 모두 유명한 기도도량이다
오세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2리에 있는 이 사찰은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당초 2층 박달나무 제암으로 옛 이름이 관음암이라 하는데 신라시 대설악산에 불원을 개창한 자장율사가 삼국통일 후 불교가 국교로서 숭봉 왕성한 무렵 자경을 전하고 구영의 대도를 찾고져 선덕여왕 13년에 창건한 고사로 내설악의 심장부라 할 명승지이다. 조선 인조때 명승 설정대사가 이를 중건하여 오세암이라 개칭하였는데 그 연유로는 설정대사의 질아가 5세로 여기서 견성득도하여 동국 제일 선원 오세암이라 하였다는 설과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속진을 벗어나 대도를 갖고 이곳에 단발입사하여 오래 있었던 탓으로 그 오세신동의 칭호를 따서 오세암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대승폭포
옛날에 부모를 일찍 여윈 대승이라는 총각이 이 고장에 살았는데, 집안이 가난한 대승은 버섯을 따서 팔아 연명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폭포 돌기둥에 동아줄을 매고 버섯을 따고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절벽 위에서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정신없이 올라가보니, 어머니는 간데 없고 동아줄에는 커다란 지네가 달라붙어 동아줄을 썰고 있었다. 덕분에 대승은 목숨을 건졌는데, 죽어서도 아들의 생명을 구해준 어머니의 외침이 들리는듯하다해서 대승폭포라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꼽히는 대승폭포가 설악산에 있다. 이 폭포는 떨어지는 폭포수의 물보라와 이 물보라에 이어지는 무지개가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대승폭포는 신라 경순왕의 피서지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폭포 아래쪽에 중간폭포라는 것이 있어 또 다른 자연미를 선사한다.
봉정암
봉정암은 설악산의 대소사암중 제일먼저 창건한 백담사 부속암자로서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입당하여 세전사리를 얻어와서 오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고 하는데 이 석탑은 암자서측석대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암자는 전국불교사찰 및 암주중 제일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청봉
설악산의 정상인 대청봉(1708m)은 인제군과 양양군 사이에 위치하며, 연중 많은 등산객이 찾는 유명한 등산코스이다. 설악산의 거의 모든 등산로는 이곳 대청봉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어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가 다양하다.
정상에 오르면 내, 외설악과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다. 대청봉은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정상에는 백설이 덮혀있고, 6,7월에는 진달래, 철쭉, 벚꽃이 만발한다.
장수대
설악 전투의 대승을 기념하고 인근의 대승폭포,옥녀탕,가마탕,한계산성,하늘벽을 찾아드는 관광객들의 휴식처로 세워진 한식건물은 규모로 보나 건물의 우수성으로 보아 근래에 보기드문 훌륭한 산장(48평)이다. 더욱이 기암괴석과 낙락장송이 우거진 속에 위치하고 있다.
제3금강이라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설악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이 산장은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사철을 통하여 이 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장수대란 이곳에서 6.25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그 옛날을 회상하며 전몰 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명명한 것이며 제3군단장인 오덕준 장군의 후의로 설악산의 개발을 위하여 건립되었다.
인제 팔경
대청봉
대암산용늪
대승폭포
십이선녀탕계곡
내린천
방동약수
백담사
합강정
http://www.injetour.com/index.asp
문화예술단체
인제문화원
▶주 소 : 강원 인제군 인제읍 상동 3리 346-2번지 (우편번호:252-800)
▶전 화 : 033-461-6678
▶팩 스 : 033-461-0220
▶설치자/운영자 : 인제 문화원장
▶규 모 : 전용면적 150평
▶주요시설 : 사무실(9평), 향토사료 전시실(78평), 문화사랑방(45평), 자료실(9평), 원장실(9평)
▶주요사업 : 합강문화제 주관, 향토사료 수집 발굴, 전시사업, 효행상시상, 예술제, 문화학교운영, 각종 강좌, 사료집 및 문화재발간, 전통문화계승사업
인제예총지부
내설악 예술인촌
산촌 박물관
만해 기념관
축제 및 레저
빙어축제
인제군 남면 소양호. 내설악의 맑은 물과 방태산을 휘감아 도는 내린천이 만나 소양호가 시작되는 곳. 겨울이면 거대한 얼음평원이 생겨나 빙하천국으로 변하고 호수의 요정 빙어천지가 된다.
주요행사
레포츠참여마당(얼음축구, 스노우산악자전거대회 등), 눈과 얼음마당(빙어낚시, 빙어시식회, 눈조각경연대회 등), 민속놀이 참여마당(전통썰매타기 등), 공연전시 및 어린이마당(얼음조각전시, 페러글라이딩 등), 먹거리, 놀이마당(농특산물, 모닥불카페 등)
행사일시
매년 1월말 ~ 2월초 (03일간)
*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남면소양호일원
* 문의처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 전화번호 033-460-2366
황태축제
-행사개요
한류, 난류가 교차하는 깊은 바다에서 잡아올린 명태를 무공해 청정지역 용대리에서 투명한 태양빛에 융해되는 과정을 재연하는 용대리 황태축제는 황태를 이용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져 황태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주요행사
싸리깎고 매기, 황태기네스대회, 관태, 짝묶기, 황태투호, 황태포만들기, 울트라게임, 황태가요제 등
행사일시
매년 2월말 ~ 3월초 (03일간)
*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북면용대리 미시령 삼거리
* 문의처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 전화번호 033-460-2366
레프팅
인제 내린천에서는 1920년대부터 산림이 울창하여 내린천 주변의 좋은 목재를 벌목하여 한양으로 운반되었는데 특히 방태산의 황장목은 뗏목으로 엮어져 내린천-합강 함수머리-소양강수로-춘천-한양 광나루-뚝섬- 노량진-마포에까지 운반하여 건축재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원목을 나르던 뗏목군들의 후예가 지금 내린천 래프팅이다. 내린천 래프팅이 다른 강들보다 각광을 받는 이유는 소양강 상류의 아름다운 경치, 맑은 물, 풍부한 수량, 내린천 계곡의 절경, 여러 난이도의 급류 코스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제군 기린면 북3리 궁동유원지를 시작으로 인제읍 고사리 밤골까지의 16km구간의 코스는 S자형 계곡과 수직하강이 많아 자연에 대한 도전과 모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급류타기의 최적지이다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고사리일원
문의처 내린천래프팅협회(033)462-5859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366
이용시간 매년 4월말 - 11월 초
o 평일 : 08:00-06:00
o 주말, 공휴일 : 08:00-06:00
페러글라이딩
인제시내에서 약 15분정도 거리에 있는 기룡산 활공장에서 유유히 흐르는 내린천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면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정도롤 아름다운 풍경을 접할수 있다. 일상생활에 찌든 현대인에게 이런 풍경속에서 하늘을 날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생활의 활력소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
문의처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관광기획 (033-460-2082)
이용시간 평일, 주말, 공휴일 : 오전 8:00 - 오후 : 6:00시 까지 개장
휴무일 연중무휴
산악 자전거
혼탁한 도시환경을 등지고 험난한 자연환경(비포장도로, 산악지대 등)을 자전거로 헤쳐나가는 스릴만점의 도전적레포츠 MTB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진 인제에 설치되어 많은 메니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메인코스에서 A코스, B코스까지 전문가는 물론 초급자도 체험할수 있는 코스가 마련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내린천래프팅도 함께 즐길수 있어 모험관광을 마음껏 만끽할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다.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문의처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366
o 평일 : 08:00-06:00
o 주말, 공휴일 : 08:00-06:00
휴무일 연중무휴
캠핑
46호 국도를 따라 용대천을 앞에두고 한적하고 조용한 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주변으로 푸르른 산과 맑은 물을 접하고 있어 타이트한 생활로 공부에 찌든 학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서로간의 우정을 돈독히 할수 있는 곳으로 적당하다.
장수대숲속수련장은 부지면적4,767㎡으로 400명을 수용 할 수 있다. 주변이 장수대 및 장수대계곡의 관광명소가 있어 관광연계 수련활동에 적합한 시설이다.
백담 학생 야영장 장수대 숲속 수련장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용대리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문의처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366 설악산관리사무소 장수대분소
(033)463-3476
번지점프
인제의 번지점프는 호주의 리닝타워형 번지점프입니다. 국내 최초로 도입한 리닝타워형 번지점프는 기존의 T자형 타워와는 다른 60도 경사진 타워에 두 대의 승강기가 교차되어 오르락, 내리락 하며 기다림의 지루함을 해소하였다.
또한 번지점프대까지 떨면서 걸아가는 위험 없이 승강기로 점프대까지 오르면 바로 승강기의 문만 열고 점프할 수 있어 안정성이 매우 뛰어나다.
국내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55m!. 그리고 그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 바로 내린천과 함께 굽이도는 계곡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인제 번지점프는 '합강'이라는 내린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합강정 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어, 휴식과 볼거리를 제공한다. 물론 점프는 맨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합강인 큰 하천을 향해 점프하게 된다.
철저한 사후관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호주의 번지박사의 기술과 서비스로 인제 번지점프장을 찾는 모험매니아들을 맞이한다.
지금 인제의 세계적인 번지점프를 경험해 보시길...........
소재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 합강정공원내
문의처 (033) 461-5216
평일 : 09:00-22:00 주말, 공휴일 : 09:00-22:00
휴무일 연중무휴
번지점프 요금 개인 30,000원
단체 10인 이상 27,000원
단체 20인 이상 25,000원
관내주민 및 군장병 : 15,000원
이용가능연령 : 13세 ~ 50세
등산
1코스 : 용대리 - 백담사 - 수렴동계곡 - 쌍폭 - 봉정암 - 소청봉 - 대청봉 - 대청
(총 21Km, 약 8시간 40분 소요)
2코스 : 한계령 - 서북능갈림길 - 중청봉 - 대청봉 (총 11Km, 약 6시간 소요)
3코스 : 장수대 - 대승폭포 - 대승령 - 백담사 (약 6시간 소요)
4코스 : 장수대 - 대승폭포 - 대승령 - 십이선녀탕 - 남교 (약 7시간 소요)
5코스 : 남교 - 십이선녀탕 - 대승령 - 대승폭포 - 장수대 (약 7시간 소요)
6코스 : 외가평 - 백담계곡 - 백담사
산행시 주의사항
● 몇몇 코스는 반드시 먹는 물을 준비하자
설악산의 주요 등산로는 대부분 계곡이라 물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능선을 탈 경우에는 몇몇 셈터가 있기는 하지만 찾기가 쉽지 앟다. 따라서 능선을 탈 때는 최소한 4-5시간은 먹을 수 있는 물을 반드시 준비하자.
● 절대로 표시된 등산코스 외에 샛길로 가지 말자.
설악산은 자칮 샛길로 가다가는 조난을 당할 우려가 높다. 웬만한 유경험자는 한번 갔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설악산의 경우, 샛길로 들어섰다가는 천길 낭떠러지로 길이 끊어져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한번 샛길로 들어섰다 3,4시간 정도 내려간 다음에 길이 끊어지면 다시 돌아서 오기가 아주 힘들다. 그럴 때도 반드시 왔던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이 좋다. 자칮하면 지형파악조차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 코스를 여유있게 잡아서 산행하자.
설악산은 산이 가파르기 때무에 산행에 체력소모가 상당히 많다. 아무리 산행에 자신을 갖는다 해도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하며, 산행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야 한다. 무리한 무박 산행은 가급적이면 피하는것이 좋다.
● 특히 환경보호에 각별히 신경을 쓰자.
설악산은 가을철에 가장 많은 탐방객이 몰린다. 또한 이때 산이 가장 많이 훼손된다. 단풍이 아무리 곱다고 해도, 함부로 나뭇가지를 꺽지 말고 쓰레기는 반드시 가져오도록 한다.
채미헌 점봉산 등산
오작골에서 시작되는 등산길은 산야화가 만발한 능선을 따라 약 5시간 동안 이어진다. 이윽고 곰배령에 닿으면 5만평에 이르는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점봉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
산나물 천국, 자생화로 이어진 산길, 아! 점봉산
왜 유네스코가 점봉산을 자생화 보호지역으로 지정했는지 정녕 알 수 있으리라.
첫댓글 난 이제부터 고향 이야기 말자....와우 향토 사학자가 따로 없에요? 진정 놀랐어요....난 고향을 배신한 사람이네...요
오래전부터 고향에 관한 시를 쓰리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몰랐어요. 이제사 관심을 가지고 돋보기를 들이대니 이렇게 많은 전설이 숨어 있네요..그러나 우상 섬긴 우리나라..전래동화를 읽는 거 같아 가슴이 메어지네요. 그냥 참고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