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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한인 이민의 역사. | |
2012.11.29, 16:01:53 브총연 조회수 : 137 |
사진설명: 1962년 12월 부산항을 떠난 이란국적의 이민수송선 Tjialengka호(1만 9백톤)의 전경으로 브라질 1차 이민자들은 이 배를 1962년 2월12일에 산토스항에 도착 했다. 일제 강점기때 브라질에 온 한국인.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흔히 “미다 할아버지”로 알려진 고 장승호 씨이다. 남자 상속자가 없던 일본계 가족의 유리 미다 여사와 장승호 씨가 결혼하면서 <미다 할아버지>라고 불려지게 되었다.영동 지역에서 1907년 3월 23일에 5형제중 막내로 출생한 미다 할아버지는 가난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았고 12세때 일본으로 건너 갔다.그 곳에서 니시즈미 선교사를 만났고, 일본이민 자들의 선교목적으로 브라질로 오는 그를 따라 이곳 브라질까지 오 게 (1923) 된 것이다. 깊은 신앙심과 헌신적 동포애 덕분에 반공포로나 초기이민 자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한국정부(박정희 대통령 당시)는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한 예로 이분의 쌀(특히 한국쌀)을 얻어 먹고 아직 지불을 안 했거나 까맣게 잊어 먹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슬하에 7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있으며 딸중 애미 미다 씨는 반공포로 김 창 언 씨와 결혼했다.2000년 5월 10일, 93세로 별세 하셨다.
유엔이 정식으로 개입하여 참전한 한국전쟁이 1953년 7월 27일에 관문 점에서 휴전 협정을 맺고 동포간의 살행 행위가 중단되고 그 이후 포로교환 문제가 논의되면서 일부분의 인민군(현북한)과 중공군(현 중국) 포로들이 본국을 거절하고 인도로 가서(1954년 2월 22일) 중립국배정과 출국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회망대상인 미국을 참전국이라, 또 스위스는 거절을 당해 가지 못하고 남은 나라들이 브라질, 아르젠틴과 멕시코이었는데,멕시코는 수속이 늦어져서 지장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이 브라질과 아르젠틴으로 행선지를 정하게되었다.1956년 2월 4일 , 55명의 청년들이 인도항공 특별기편으로 인도의 뉴델리를 출발하여 2월 6일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 도착했다.55명중 50명이 인민군 출신이었고 5명은 중공군출신이었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인도의 집단수용소에서 언어와 기술을 배운 상태이라 비교적 빠른 적응을 할 수 있었다. 이 들은 차후 대량으로 들어오는 초기이민자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했다. 정식1차이민의 이념 한국 건국이후 브라질에 온 두 특사의 추진은 한국전쟁으로 성공이 안 되었지만, 그 반면 이 당시 이민이라는 말은 극히 생소했을때였다. 실제로 이민사업이 성공된 것은 1961년 5.16 혁명이후 등장한 제3공 화국때이다. 당시 세워진 국가재건최고회는 1961년 10월 18일에 이민정책안을 혁명정권의 5대작업으로 책정하고 보사부에 이민과를 설치하였고 이민업무 담당관으로 정달민 대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민업무 전담보좌관(오응서 씨)을 통해 해외이주법을 준비하였고 정일권 주미대사를 시켜 교섭을 추진하였다.당시에 이미 형성되는 이민 분위기를 배경으로 군사정부는 이민사업을 국가정책의 하나로 채택하고 추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인 사이에<이민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돌기 시작하였다.이때의 보건사회부 차관은 한국진 씨(현재 교포목사님)이었고 특별보좌관이 정달빈 씨, 이민송출총지휘관으로 우응서(브라질 한인회 사무장으로 장기간 근무)씨가 활약하였다.그리고 1962년3월15일에 한국정부는<정부조사단>을 브라질에 파견했는데 단장으로는 한국진 보사부차관이었고,당시 이민협회회장 한종민,외무부교민과장현 훈,통역직원 조기성이었다. 당시 한국이 민협회 회장은 한종민씨었으나 별도로 브라질에 가서 국제 사격대회에 참가했던 예비역 대령출신의 정인규 씨가 민간 차원에서 이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아직 양국간의 협약이 형성되지 않은 채,정인규 씨는 1962년 1월5일에 14명<문화사절단>을 형성하여 브라질을 방문했고 앞서 언급한 일본계의 김수조 씨가 이끄는<브한 문화협회>와 관계를 맺으며,영농정착지 구입 및 계획을 제출하여 1962년5월17일 부로 브라질정부로부터 116가구의 이민허가를 받아냈다.반면 한국측에서는 1962년3월9일에<해외이주법>을 공포함으로써 해외이민사업은 법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고 이민사업이 활발해 지며 이민희망자를 모집할 수 있다는 당시 이주법의 조항에 의거하여 정인 씨는 문화사절단의 모체인 한백문화협회를<한백진흥주식회사>로 바꾸었다.이것이 제1차 이민의 뒷 배경이다. 동 계획은<제1차 브라질 한국영농 이민 116세대의 이주 계획으로 사전준비 대 17세대 100명을 제 1차로 입국케 한다> 것과 <4년간 농업에 종사한 후에는 자유로히 직업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 브라질 정부의 조건이었다.당시의 문화사절단의 구성인원은 다음과 같다. 단장 – 정인규; 한배진흥주식회사가 일본에 있던 브라질 영사관을 통해 33가구의 선발팀의 자격심사를 맞추었으나 여러 이유 때문에(집을 못 팔았다던가,서류 불충분등)17가구의 92명만이 이민 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다.92명중 3명이 빠진 89명이 이민배(찌째랑카호)에 입선을 했으며 이 외에 11명의 예비장교들로 구성 된 사전준 비대도 같이 이 배에 탔다. 이들이 흔히 불리우는<선발대>이었다 나머지 3명은 나중에 항공편으로 입구 하였다.이1차 이민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단장 김승한(운항 도중 고 계순 씨로 바뀜) 명단:한용전,안동협,한승일,김덕조,유재선,안계승,김철현(이민비자 제1호),김중혁,고계순(이민단장 및 전 한인회회장),조중한,양승갑,윤명섭,서재옥,서재성,장상기,정명자(이상17대,89명)
박선관,김해곤,둰태영,김상현,주성철,김명익,이정수,김종한,강종수,윤봉선,한승엽,(이상,단신 승전자 11명) 이민선은 네델란드 국적의 찌짜렝카호(TJITJALENGKA)로서 1962년12월18일에 대대적인 환송 속에서 부산항을 떠났으며 한국정부는 시험적인 첫 공식이민이기 때문에 한국보사부장관을 환송식에 참가시키고 이민협회로 하여금 일체의 수속을 대행하는 편리를 봐 주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이민단장은 김승한 장로이었으나 같이 배를 타지 못하고 나중에 비행기로 브라질에 입국했다.대신<한용전>씨가 이민 단장으로 선임되고 출발하게 외었다.그러나 항해 도중,당시 여행자로 입선한 11명의 사전 준비대원들과 이민자들이 합동회의를 열어 이민 단장에 <고계순>씨로 임명하였다. 제1차 이민객을 실은 이배는 부산,오키나와,홍콩,싱가포르,페낭,모리셔스,로렌소 마르께스,더반,엘리자베스 항,남아프리카 공화 국의 케이프 타운,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를 걸쳐 1963년2월23일 쌍 파울로 주 산토스 항에 도착했다.이 56일의 이민선 생활은 비교 적 편했고 앞날에 대한 희망의 여러 불편함을 덜어 주었다. 노래,춤,오락,운동,게임,간단한 브라질에 강좌등에 즐겁게 참여 했으며 여러 항구에 정박할 때 도시 관광도 즐기곤 했다.브라질 도착당시 김수조 씨, 이미 먼저 와 있던 문화사절단원들, 그리고 박동진 주 브라질 대사가 나와 환영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제 1차 이민은 농업이민이었다.브라질의 농지를 구입하여 이민 정착지를 마련하고 농장을 짓고 운영하는 것이 기본 예정이었다. 일본 농민과의 차이점은 한국인 농업이민은 자영농업이민이었고 최초 일본이의 경우는 농장에 취업을 하는 영식이었다. 제 1세대 이민자들의 적지 않은 수가 농민 출신이 아니었지만 당시 유일한 이민사업의 조건을 받아 들이고 또한 농업으로서 적응하여 생계를 꾸며갈 마음 준비를 하였다. 당시 김수조씨가 농업이민 정착지 목적으로 구입한 땅은 쌍파울로 시 근교의<미라까뚜 – MIRACATU>농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주재 한국대사관의 박동진 대사의 현장조사는 미라까뚜 농장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다.사람이 거주할만한 기본시설이 전혀 없었고 구입한 농지의 소유권 문제가 불확실하다는 점이었다.현재에도 서류상의 토지구매자와 장기무저항 거주자사이의 갈등이 법원에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한국정부는<김수조>씨의 농지구입서류만 믿고 이민 추진을 승낙했었고 박대사의 보고가 갔을 때에는 이미 이민선이 브라질로 향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리오에 배가 이항했을 때 박동진 대사는 이미 배에 올라와 이민대표들에게 입주 불가능에 대해 알렸으며 쌍파울로에서 거주지 문제로 난처한 곤경에 처 했을 때 대사관의 끈질긴 배려로 이민국의 숙소에 머물수 있게 되었으며 그 버스를 동원해 교통문제를 해결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많은 액수의 외화를 갖고 출국하기가 힘들 때라서 많은 이민자들이 가지고 온 물품을 팔아 기본 정착비로 사용했으며 당시 쌍파울로 중앙시장에서 일본인에 끼어 식료품 사업을 하던 민간사절단 출신의 홍관순씨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반면 산토스 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그 귀중한 이민보따리를 찾아 내려 논 다음에야 갈 곳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민선에 같이 온 미혼자 11명(사전 준비대)은 문화사절단의 일원이었던<이철희>씨의 안내로 쌍파울로 시내로 직행하였지만 89명의 제1차 이민자들은 가져온 이주 화물을 통관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낯선 이국 땅의 모습이 평화롭고 신기해서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희망과 걱정이 엇갈리며 마음이 들떠 있었다.그러나 통관 절차가 끝나고 생각지 않았던 현실에 접하게 된다. 맨 처음 허락되었던 지정지<까뽕 보니또 – Capao Bonito>의 땅은 먼거리에 습지대이고 많은 독충 때문에 정착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김수조>씨가 구입계약 해놓은<미라까뚜 – Miracatu>땅으로 지정지 변경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게다가 그 곳 현지에 합숙시설이 없기 때문에 당장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이래서 대사관 주선의 방책이 쌍파울로 주립 이민수용소 이었고 그 때 이들을 마중하고 수용시킨 담당자가 현재 같은 장소에서 주립이민박물관의 담당책임자인 일본계 여성<미도리>씨이다. 그 때 당시 24세의 갓 결혼한 여성으로서 배가 임신 만삭이었고 당시 처음 본 하얀 한복의 여인이 얼굴에 생생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 이민 수용소는 현재의 주립이민박물관이며 쌍파울로 중심가에서 약간 동쪽의<모까 – Mooca>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3층의 벽돌 건물이다. 이 발언에 모든 사람들이 수긍했다고 전해진다.또한 이 자립정착 결정의 이유와 결정을 전해 들은 쌍파울로 주지사<아 데말 데 바호스 – ADEMAR DE BARROS>씨는 정착지의 구입현지 조사도 하지 않고 이민 허가를 준 브라질 연방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고문 변호사 Dr.Mileno씨의 제안을 받아 들여 주정부의 도움을 쾌히 승낙하였다. 이래서 결국 이 들은 스스로의 자비로 새로운 농장이나 농업용 땅을 구입하거나 아니면 브라질생활의 기반을 다른 방법으로 구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아리랑 농장과 서울농장. 그 해 2월 21일부터 세대주들은 땅을 구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고,3월8일에는 17세대중 5세대가 독신 여행자와 같이 쌍파울로에서 약 50Km떨어진 곳에 38알케르 면적의 땅 구입을 계약하였다. 그리고 입주는 3월 13일에 이루어 졌다. 이 곳이 마지막 10가구 중 3가구는 쌍파울로 시내로 나가 버렸으며 그중 돈이 모자랐던 7가구는 일본인 소작인으로서 쌍파울로 근교도시인 이렇게 해서 이민 수용소에 들어간지 2개월 만에 각자 삶의 길을 떠났다.당시 수용소 규칙상 3개월 안에 떠나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 사건은 제1차 이민 사업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민 초기에는 미다 할아버지외에도 생활안정이 된 반공포로 나 일본인의 많은 동움을 받았다. 더러는 거침없는 일본어를 이용해 자칭 일본인이라며 일본계 단체나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이익을 꾀했던 사람들도 있다. 제1차 이민의 기본조건이었던 농장 정착이 이렇게 분산되자 브라질 정부는 대한민국정부에 한국인의 브라질입국을 허용치않을 것이라고 통고했다.하지만 개인 상대로는 여행비자 발급이나 개인으로 입국한 사람들의 가족초청을 허락해 주었다.당시 개인으로 입국한 사람들은 문화사절단 사람들,1차이민때 같이 배에 탔던 이민사찰단의 예비역장교 11명,그리고 제1차 이민 직후에 입국한 7명의 독신남자들이었다. 이 후로 한국인의 브라질이민은 어떤 이민정책에 의한 집단 이민이 아니라 이민업자들의 초청이민과 독신이민자들의 가족 초청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에 여행자 자격으로 입국했던 한국인들은 가족을 초청하기 위해 여행자신분에서 영주권자의 신분으로 탈바꿈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착이 확증되어야 하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농지를 구입하고 영농정착을 입증시켜야만 하는 긴급한 처지에 있었고 이때 리오 에 있었던 한국대사관의 적극적인 협조와 몇몇 분의 헌신적인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예를 들어 초청상대자의 보증인 역할이 필요한데 브라질에서 이미 경제적 능력을 갖춘 영주권 소지자라야만 하기 때문이고 이때 이런 조건은 소수의 반공포로나 한국계 재일교포 밖에 없었다) 이 당시는 공인 번역사가 없을 때이었고 또한 생활이 안정이 안된 때이라 여러 가지의 언어해소나 문서작성에 많은 애로가 있었고,결국 집이나 가게를 임대 할 때나 취직을 할 때나 자녀들을 학교에 입학시킬 때 필수적으로 브라질언어를 하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당시 도움을 주신 분 중의 한 분이 현재 생존해 계시는 반공포로 출신의 강석근 목사이다.당시 인도에서 브라질로 출발하기 까지 약 2년간 신학공부를 하던 강석근 씨는 리오에 도착한 후 그 곳의 신학교에 입학해서 신학의 꿈을 키우고 있었으나 당시 너무 힘들어 하던 반공포로 동료들과 문화사절단 및 제1차이민자들을 돌보기 위해 상파울로로 내려와서 교포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특히 위해서 언급한 초청장은 적지 않은 양이 이 분에 의해 작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준비 안 된 이민 경험 때문에 한국정부는 이민협정체결이 가능한 대상국과의 교섭을 추진했으며 당시 이미 여러 이민추진관련자들이 한국의 이민법 공포이전부터 추진해 오던 사업이라는 이유로 이민법 구제책을 강구해 달라고 강력히 표면화에 나섰다.일부는 이민 추진에 관련자들이 이미 여행수속을 취하고 브라질로 떠 났다.김윤문,이종무,김영묵 씨들이 먼저 떠났고 뒤따라 차신모,권순국,이인길 박순,이성현 씨가 떠났다. 1. 한국이민은 적격 대상자 선정이 되어 있지 않는 한받아 들일 수 없다. 2. 일반 여행자들의 비자 발급도 통제하겠다. 3. 이민 수용소에 수용 된 제1차 이민의 해결책을 책임 지라는 것이었다. 당시 초대 브라질 대사이었던<박동진>대사의 건의는 즉시 브라질 이민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고 전달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백협회,남미공사 관계자 및 개별 이민추진자들에 대한 일체 조사가 시작되었고 정부당국에서도 자체적으로 수사기관을 통해조사에 나섰다.당시의 한국사정은 빈약한 경제사정 때문에 이민을 장려해야 하는 실정이었고 또한 한국정부 자체가 합법적인 외환조치나 이민사업에 따르는 확고한 뒷받침이 부족한 상태라 이민을 통한 해외진출을 어느 정도 안에서는 묵인하고 허용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한다. 그것은 당시 정보,수사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은 한국 보건 사회부 이민과 실무담당관의 진술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불투명하고 불법적일수 있는 이민 정책을 폐하고 당시 현행 불법행의를 법으로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이 번사건을 묵인하고 국가장래를 위해 이민정책을 지원할 것인가?>였다고 한다.이에 따라 브라질 이민 현황조사가 사실 되었고 이때 보건사회부의<오응서>씨가 이민계획담당으로,농지조사담당으로 농림부의<이예민>씨와 같이 브라질에 오게 되었다. 이 들은 당시 리오 데 자네이로에 있던 한국 박동진 대사와 면담하는 기운데 한백진흥 주식회사(한백 문화협회의 후신)의 이성용 사장으로부터 ESPIRITO SANTO주의 이민 허가조치에 대해 접하게 되었고(나중에 빅토리아 이민 케이스)한국이민을 받지 않겠다는 브라질 정부의 통고를 받고 그 현황을 조사하러 나온 조사관의 입장으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사실이었다. 6.정식 2차 이민 브라질 정부의 집단이민의 조건인 농업이민에 부합되는 차원에서 여러 번 더 집단 이민이 있었다.흔히 빅토리아 케이스(Caso de Vitoria)라고 불리는 제2차 이민이다.1964년에 68세대의 480명이 “Fazenda Ponte Limpa = 깨끗한 다리 농장”에 입주하게 된것이다.이 중 선발팀은 31세대의 224명이 1964년3월5일,후발팀은 37세대의 256명이 1964년5월10일에 이스비리토 산토(ESPIRITO SANTO)에 있는 항구도시 비토리아(VITORIA)시에 도착했다.대사관의 환영안에서 임시 수용소에 머물며 현장을 답사한 이민단 대표자들은 장소가 농사 짓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려 농장 입주를 포기하고 리어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등으로 분산되어 이동했다.거부이유는 지형적으로 제방공사가 필요한 땅이었고 또한 독사가 많다는 것들이었다.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반공포로 출신의 백영훈 씨의 안내로 적지않은 수가 쌍파울로로 이동되었다. 하지만 이 이동행동의 결과는 브라질이민관계법의 위반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또한 그래서 이동과정에 여러 어려움을 초래했으며 브라질 당국의 한국의 농업이민 자체에 대한 불신을 높이게 만들었다.이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인성,김주방,김창현,김창득,김보운,김현학,김형필,김응국,김용복,김연,김지산,김윤수,김복순,김은식,김계현,김현진,강재성,강윤만,강억규,강성덕,유학진,이문협,이완엽,이명호,이동수,이석재,이덕하,이호영,이정근,이덕삼,이승규,이성용,안두식,양판암,한경희,한기연,황점석,홍구표,홍사영,홍인식,홍종호,홍운형,오홍근,오윤준,연원복,최총완,최덕화,장의근,정태운,정희봉,정천덕,조종대,조중철,조남훈,박경곤,박재영,박걸채,박동열,배도흥,백문규,배영춘,서병선,송극상,곽영호,정인구. 7.제3차 이민 제3차 이민은 1965년 후반기에 46세대의 448명의 이민자들이 두 번에 걸쳐왔고 당시 도착한 도시는 리어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시이다 한국서는 카우사(CAUSA)케이스라고 알려진 이민이었으며 독일계통의 농지식민개발회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브라질정부 소유의 미개발 토지를 헐값이나 무상으로 불하받아 외국이민자들과 연결 지어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회사이었다.과거 문화사절단의 한 일원이었던<박종식>씨는 반공포로 출신의<백영훈>씨와 협동하여 카우사 회사의 8. 이과뻬 건 빅토리아 건과 카우사 건이 추진되던 동일 한 시기에 문화사 절단의 한 일원이었던 이 철희 씨의 이꾸아뻬(IGUAPE)도시 근교의 영농이민이 추진되고 있었다.당시 민간사절단으로 온<이철희>씨가 후일 여행자로 3명의 한국인과 시내에서 약 250킬로 떨어진 옛 항구 IGUAPE 시 근교에 농지 250알켈을 구입하고 단체이민계획을 추진했지만 이 계획도 지권의 분할단계가 명확하지 않아 포기가 되었다고 전해 들린다. 9. 부리찌 농장 건 또한 실패로 돌아간 이민추진건은 마또르고소주의 부리찌농장(Fazenda Buriti,Estado de Mato Grosso)건이다.이건은 이민사절단으로 브라질에 입국했던<최준덕>집사의 제안이었고 브라질기독교 연합회의 후원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이민계획이었으며 Mato Grosso주의 독일 계통의 농장 Fazenda Buriti를 주선했고 김윤문씨 박선관씨,권태영씨 등이 방문 답사까지 했으나 sjanm 먼 거리 문제로 중단 되었다. 10. 제4차 이민 이렇게 여러 실패의 전례와 이민희망자나 관계당국의 사전조사등이 이민주선자로들로 하여금 다른 방도를 모색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 첫 예가 제 4차 이민이라고 볼 수 있는 볼리비아(BOLIVIA) 경유 건이다.1964년11월15일에 8세대의 45명이 그리고 1965년까지 5번에 걸쳐 120세대으,ㅣ 720명이 리오 데 자네이로 항에 도착했다. 이 사업은 여러 이유로 진행이 잘 안 되는 단체이민을 포기하고 당시 손 쉬웠던 볼리비아 개인 초청장에 의한 이민 방법이었다.볼리비아로 가는 비자를 받은 뒤 경유지를 브라질로 해서 이 곳 브라질에 정식 입국 한 뒤 브라질에서 불법 정착하며 사는 동안 법적 요건을 구비하여 브라질의 영주권을 획득하는 것이 기본이었다.이러한 계획에 따라 볼리비아의 정부관계자와 브라질의 쌍파울로 주재 볼리비아 영사가 관여한 개인 초청창을 한국에 보내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초청장을 취급하는 전문 부로커 들이 많이 발생하여 초청장 장사가 재미를 톡톡히 봤다고 전해지며 또한 그에 따른 사회적 물의도 심했다. 이 제4차 이민은 처음의 농업이민과는 전혀 다른 초청장 이민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실행되었다.
11.제5차 이민 이 후 브라질이의 카톨릭 국가임을 착안하여 카톨릭 교단을 통한 단체 영농이민이 제5차이민이다.<카톨릭 이민건>으로 알려진 이 이민은 카톨릭 교단을 움직여 한국지부장을 맡은 신부의 동움으로 빠라나(PARANA)주의 농장을 물색하여 이민을 실현시킨 케이스이다. 150세대의 영농이민이 자격심의기관의 승인을 받았고,1차로 1966년4월에53세대의 313명이 브라질의 빠라나주의 빠라나과(PORTO de PARANAGUA-PR)항에 도착하여 빠라나 주의 싼타 마리아 농장(Fazenda Santa Maria-PR)에 들어가 건설하기 시작했다.2차는 1966년6월 빠라나주 뽄따그로사 지역에 13세대의 104명이 도착했다.(PONTA GROSSA,ESTADO DE PARANA). 이 것이 영농단체이민이 최초로 성공 된 케이스이다. 한국의 브라질 초기 이민의 특성은 첫째로 한국정부의 개입하에 공식적으로 추진한 연농 목적의 단체농업 이민이었고,둘째는 소위 이민회사들의 개입으로 브라질에서 보낸 초청장으로 이루어 진 집단적 혹 개인적 이민이었다.세 번째로는 먼저 이민에 성공 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 초청에 의해 이루어 진 혈연가족 초청이민이다.
12. 사며특혜 1969년 과 1970년 사이에 브라질 정부가 베푼 사면 특혜의 혜택을 입은 수는 약 800세대의 4200명 가량 된다고 추정한다.이사면 특혜로 인해 브라질 영주권을 얻게 된 것이고 이 것이 첫 번째 사면령이었다. 13. 기술자 초청 이민 브라질 경제의 개발과 확성을 위해 브라질 정부가 셰게 여러곳의 기술자들을 초청형식으로 받아 들였다.1970년 1월 8일에 25세대의 120명이 쌍파울로 주의 깜삐나스 공항(현 CAMPINAS)에 도착했으며 이 이민단이 첫 번째로 비행기 타고 온 사람 들이다. 그 이후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약210세대의 1200명 정도가 같은 경로를 통해 브라질에 입국하였다. 14. 제2차 특혜 1981년 12월부터 실행된 이 특혜는 임시등록 2년이후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이때 혜택을 받아 수가 약 980세대의 4810명 정도라고 추정한다. 15.제3차 특혜 1989년6월에 있었던 이 특혜법은 영주권을 갱신하는 문제를 다루었고 이때 약 500세대의 2500명 가량이 혜택을 입었다. 그 외에는 혈연 관계나 결혼 및 선교사나 목사나 신부등과 같이 특별 초청에 의해 브라질에 입국이 허용되고,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파라과이나 아르젠티나와의 국경을 통해 밀입국을 하였고 혹시나 하는 사면령을 기다리며 생활하고 있었다. 16. 제4차 특혜 1998년6월20일 이전에 입국하여 불법 체류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허락하는 전반적 사면령이 발포되었고 덕분에 불법체류를 하고 있던 이민자들이 영주권을 얻는 기쁨을 맛 보았다.하지만 숫자는 전에 와는 달리 약 2000명 정도의 저조한 면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 것은 그만큼 브라질의 이민정책이 폐쇄된 상태이었고 불법 입국이나 체류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7. 현재 상황 한국인의 브라질로 이민 온 한국인의 수가 1995년 브라질한인회의 발표에 희하면 약 7500세대의 38000으로 추정하고 있었다.이 숫자는 이미 미국,호주,캐나다등의 외국으로 재 이민 간 사람들을 제외한 숫자이다.2003년 현재로는 브라질에 있는 한국이민자의 수를 약 5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측정이 안 되는 후손들과 외국으로 다시 이민 간 사람들의 수를 무시할 수 없어 정확한 한인사회의 숫자는 알 수 없다. 사진설명: 1. 한인회 경제구조 거의 대다수의 한인이 쌍팡울로에 집결되어 거주하고 있다. 60년대와 70년 대 초기에는 LIBERDADE 지역의 R.Conde de Sarzedas 거리를 중심으로 한국촌이 형성되었는데 이유는 그 곳에 값싼 창녀가 많았다.굉장히 불결하고 비도덕적인 일이 많이 생겼던 이 지역에서 한국 이민 선배들은 브라질사회에 대한 경멸심을 갖게 되었고 브라질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꼭 놈과 년짜를 붙여 말하곤 했다. 이 곳에서 한인사회의 의류제품업이 시작되었고,당시<세기>,<나가자>등의 회사들이 많은 한인여성들에게 옷을 제공해주었고 버스 마지막 정거장까지 가서 가가호호 방문하며 팔던<벤데>시스템은 한국인들이 의류제품시장에 진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반면 한국서 오자 마자, 한마디의 포어도 모르면서 벤데어 뛰어들던 여성들 중 이곳 남성들에게 욕을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이 것이 가정 파탄이나 부부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 알려진 유명한 말이 있다. 반면 이민 초기의 경제활동은 그 외 야채상, 꽃가게,담배가게,잡화상,바아르,빵집,등등 매우 기본적이며 생존유지 목적의 상업에 치중되어 있었다.오늘날 한인 경제는 의류제품업,제조업,봉제공장,의류소매,상등의 의류중심의 사업뿐만 아니라 전자산업과 통신산업,각종전문 기술사업,한국대기업의 진출,그리고 여러 형태의 자유사업(변호사,의사,계리사,식당,식품점등)등의 형태로 다양화 되고 있다. 2. 사회적 진출 이민초기의 겪는 언어장벽은 많은 젊은 학생으로 하여금 공대나 의대를 선택하게 하였다. 상대나 특히 법대는 언어가 걸림돌이었다.적지 않은 수의 공대출신이 의퓨제품업에 뛰어 들어 가족단위의 생산업이었던 의류제품업을 전문경영화 시키며 성공을 하였지만 전문기술을 버리는 역효과를 초래했고 후배들의 전문직업의 길을 열어누주는 구실은 하지 못했다.주로 70년대부터 왕성해 진 대학 진출은<일류대학에 들어 가려면 한국인을 죽여야 한다>는 유머를 만들어 냈으나 사실 이런 현상은 유태인계(60년대) 이민학생들이나 중국계(80년대),일본계(60,70년대)이민학생들 사이에서도 발생하였다.70년대 초기에 한 두명에 불과하던 의사의 숫자는 현재 약 300명에 달하고 거의 없었던 변호사는 대략 수십명이라 추정한다. 5명의 판사와,2명의 경찰서장,1명의 검사 등이 활약하고 있으며,약 50명 정도의 애학교 교수들이 매출됐으며 봉헤찌로 구역의 주치안국 소속의 지역치안위원장은 벌써 2대째 한국인이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지역치안을 돌보고 있다.한국모국과 지역사회의 소식은 4개의 일간지(동아,중앙,한국 조선)와 3개의 광고지,인터넷신문(www.hanin.com.br), 한 개의 크리스챤신문,한 개의 케이블TV(TV-COREIA-CANAL81-NET)등이 제공하고 있다. 3. 태권도 70년대 초기부터 시작 된 한국태권도 사범들의 이민은 그야말로 무인들만이 해 낼수 있는 역경의 사업이었다. 다행이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며 인정을 받기 시작한 한국태권도를 보급하기위하여 수많은 태권도장이 생겼으며 또한 경찰이나 군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도 허용되었다.스스로의 피곤과 싸움을 하며 태권도를 보급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브라질내에서 널리 대중화되었고 군인과 경찰들과의 스승-제자의 관계가 변호사가 많지 안았고 군권독재가 심하던 이민초기 시절에 큰 역할을 하여 많은 교포들을 도와 주었다.또한 스승-제자에서 시작 된 관계가 사업적 돌팔구의 기회도 제공하곤 하였다. 4. 교육과 종교 이민 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던 언어 문제가 2세와 3세가 출생하는 지금 부모와 자식간의 언어 소통마비 문제로 대등하고 있다,이민 초기에는 교회나 성당에서 주로 한국어를 가르쳤고 예배나 미사가 한국어로 행하여 지기 때문에 자연적인 한국문화와의 접촉이 있었으나,지금은 포어예배난 통역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한인교포가 한브교육협회의 주최로 양국 정규교육과정을 하는 초,중 등 학교(Colegio Polilogos)를 봉헤찌로 지역에 건설하였다.두 나라의 교육과 정을 동시에 하는 것이 넘어야 할 과제이나 지금 4년째 접어 드는 이 학교는 잘 진행 해 나가고 있다. 한인 사회는 약 45개의 개신교교희와 1개의 천주교회와 1개의 부교당(진각사)이 있다.종교단체는 신앙의 문제뿐만 아니라 40년의 이민 과정동안 한인사회의 집결체제와 안정체제의 역할을 해왔다.교회나 성당이나 절에서 만나고 듣고 배우며 도움도 주고 받으며 신앙뿐만이 아닌 봉사단체의 역할도 도맡아 했다. 5. 계(GUE) 한인의 경제적 급속성장의 원동력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가족단위의 공동노력,장기간의 노동시간(약 하루18시간,월-토),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수준,공동단체에서 주고 받는 빠른 생활정보 등인데 그 중 한국전형의 금융시스템이 계를 빼 놓을 수없다.이민초기의 불가능했던 금융대출을 계로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 한인경제발전의 비밀이라 할 수 있다.여럿이 잔돈을 모아 한 사람에게 목돈을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융자방법이다. 이 운영의 기본은 신용이기 때문에 계 많큼 또한 쉽게 손해를 볼 수 있는 것도 드물다.하지만 이민 초기의 적은 규모의 자본충당이 더 이상 확장된 현재 경제규모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고 이민1세들이 지켰던 신용거래가 시간이 지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벌써 하나의 추억으로 지나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