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시절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하는 책이 있었으니 그 책이 바로 이화여대 이어령교수가 쓴 「흙속에 저 바람 속에」이었다. 물론 나는 그때 나이가 어렸으니 읽어 보지는 못했고 다만 책표지는 기억이 난다. 책은 무려 몇년에 걸쳐 그야말로 인기폭발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기존의 틀을 깨는 참신하면서도 비판적인 이어령교수의 외침은 대한민국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그 책을 읽지 않으면 마치 반지성인 취급을 받기라도 하듯 고등학생이었던 둘째형도 대학생이었던 누나도 늘 그 책을 끼고 다녔고 나는 옆에서 책표지를 볼 때마다 이어령? 남자이름치곤 참 예쁘고 특이하네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어린시절 그때 처음 알게되었던 이어령이란 이름 석자는 일평생 동안 우리 곁에 있어 주었으니 그 분이 한국인에게 끼친 정서에의 함양과 문학적 공헌은 감히 내가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양주동박사에 버금가는 신라향가에 대한 통찰과 일본어에서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내는 추리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2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숭실대학 안병욱교수님이 강연을 왔다. 아마도 강연주제는 「젊은이의 가치관」이었던 것 같다. 학교는 온통 화제가 만발했다. 그 당시만 해도 국가적 저명인사나 유명교수가 지방에 소재하는 고등학교에 내려와 강의나 강연을 하여 받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교 학생들과 선생님 모두 기대와 환호 속에 강당에 모였다. 안병욱교수의 철학강의는 아주 명쾌하였다. 화법이 마치 삼단논법이라고 할까 연역적이라고 할까. 내용이 딱딱한 듯 하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특이한 스피치이었다. 강의를 들으며 학생과 교사들은 모두 감동했다. 다음 날 수업에 문장표현이 정확하기로 소문난 국어선생님(김태순님)은 「야~안병욱교수 대단하제? 말씀 도중에 우째 토씨하나 더듬는거 없이 그렇게 매끄러울 수가 있노」라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아마 학교 측에서도 강연을 녹음하여 일부교사는 그것을 듣고 또 들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분의 강연은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지성과 감성의 단비를 뿌렸고 우리는 자신에게 스며든 단비를 마시며 암암리 조금씩 조금씩 성장했나 보다.
70년초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나의 적성에 따라 문과대학 사학과를 지망했다. 필기시험을 거쳐 면접시험을 위해 면접실에 들어서니 교수 세분이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가운데 앉은 분이 두꺼운 영어원서책을 내 앞에 펼쳐보이며 내용을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하였다. 긴장속에 읽기를 끝내고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그 분이 바로 김동길교수님이었다. 그는 웨이브진 헤어스타일에 중저음의 껄꺼러우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에 얼굴생김새가 몽골인을 닮은 마치 큰바위얼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70년대 초는 긴급조치철폐 민주인사석방등 민주화열기로 한참 시끄러운 때이었으니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는 김동길교수의 강연과 행사가 많아 우리들은 그를 향해 열광했다. 그 당시 마광수는 국문과 대학원에서 청록파시인 박두진의 총애를 받으며 학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mc임성훈은 연고전 응원단장을 「머나먼 쏭바강」의 저자 박영한은 마치 사이비종교 교주인양 언제나 한 무리의 학생들을 몰고다니며 캠프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토론하고 박장대소하고 깔깔 거리는 낭만이 흐르는 한 때이기도 했다. 시대와 더불어 저항하는 분위기가 그때는 경이롭고 자유롭게만 보였다.
어느 여름날 명동에 위치한 흥사단건물에서 함석헌. 김동길. 법정. 세 분의 강연이 있었다. 첫 번째 연사는 함석헌선생이었다. 길고 흰 수염의 함석헌선생은 유명하기 때문에 김동길교수는 해학때문에 청중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김동길교수는 강의하기 전에 늘 하는 멘트가 있다. 꽉 메운 청중 뒷자석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혹시 종로경찰서나 중앙정보부에서 나오신 분 있습니까? 앞자리가 비었으니 뒤에 숨어 있지 말고 앞으로 오세요. 앞으로 」라고 하면 청중들은 속이 시원한 듯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는 그런 발언 조차도 상당히 위험수준에 가까웠다. 문제는 법정스님이었다. 그 당시 법정스님은 젊었고 아직 전국적으로 알려진 스님은 아니었고 또 법정스님은 글에 비해 스피치가 좀 약했다. 그는 설법할 때도 늘 원고를 순간 순간 쳐다보고 말씀하시는 편이라 청중들의 흥미와 집중도가 좀 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법정스님 차례가 되어 연단에 서면 청중들의 절반이 빠져나가 버려 주최측이 난감해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법정스님이었는데 이후 민주화운동을 그만 두신 즈음부터 빠르게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저서 「무소유」발간 이후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는 불교계의 큰스님이 되었다. 그 외 한신대학교 안병무교수님 등등 모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운 분들 이었다.
대학 2학년 1학기가 지난 어느 날 나는 남의 학교인 명륜동소재 성균관대학교 야간대학에 가서 청강을 시작했다. 청강이 아니라 도강이었다.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법학 경제학의 지식이 있어야 할 듯 그 이유는 복잡하지만 낮에는 학교수업을 들어야 했으니 저녁시간을 이용하는 위험하고도 나름 기발한 생각을 한 것이었다. 도강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아예 하숙집을 신촌에서 명륜동으로 옮겨 낮에는 신촌으로 밤에는 금잔디광장으로 달렸다. 그 당시 야간대학은 직장인이 대부분 이었고 야간대학 학생들은 자기 공부가 바빠 누가 같은 과 학생인지 누가 낮의 학부생인데 야간대학에 수강신청을 한 학생인지 신경쓰지 않았으니 나는 장장 1년반
즉 3학기 동안 아주 느긋한 마음으로 도강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성균관대학은 고려대학 다음으로 사법시험합격자 수가 많았고 교수진도 정말 대단했다. 그때 영국유학에서 막 돌아 온 김명호교수(이후 한국은행총재 역임)가 화폐금융론을 가르치셨고 오호근교수(이후 대우구조조정추진 협의회 회장역임 2006년 타계)는 거시경제학을 가르치셨다. 김명호교수는 열띤 강의와 더불어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격의없이 경제학에 대해 토론의 꽃을 피웠고 오호근교수는 불과 서른 중반의 나이로 미국 페이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경제학자로 수업중 IS-LM곡선을 도출할 때의 강의는 거의 신들린 듯 명쾌하여 그의 번득이는 천재성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라를 걱정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정열을 불사른 분들이 어디 이분들 뿐이랴. 그들은 인연처럼 도약의 70년도 한 때 약속한 듯 손잡고 모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진리를 추구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불태웠던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분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만 그 분들이 뿌린 씨앗이 오늘의 한국을 이룬 저력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젊은 한 때를 서울에서 보낸 인연으로 나는 멀리서나마 그 분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감동입니다. 동숭동 길거리 공연을 구경했던 1980년 초 어렸지만 멋과 힘이 느껴졌고 소박했지만 느낌은 꽉 찼습니다. 아주 잠깐씩 구경하다 갈 길이 바빠 떠나오면서도 그 느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스님은 역시 글로 접해야 잔잔하고 고요하고 편안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곁에서 큰 일을 하셨네요. 내 마음속 영웅은 누구인지 연필을 들고 생각해 봅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학로 길거리공연. 작년에 김철민은 타계하고 지금은 윤효상씨가 혼자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언제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