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13)
낙과(落果)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와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정호승(1950- )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
낙과는 땅을 향합니다. 무릇 익은 것은 모두 땅을 향합니다. 그것이 감이든 대추든 밤이든, 흙과 물과 바람을 마시며 태양을 향하여 섰던 것들은 제대로 익으면 모두 땅을 향합니다. 땅을 향하여 떨어집니다. 떨어져 자신을 키웠던 물과 바람과 흙과 태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 다시 새 생명으로 움틀 준비를 합니다. 양식이 되어 다른 생명들의 움틀 힘이 됩니다. 익은 것의 도리는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을 떠나, 하늘을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제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힘이 되어 준 것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가 돌아보며 깊은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뜨겁던 태양이 눈치껏 알아서 뒷걸음질을 치기도 하는 만물이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돌아가는 계절, 만물의 순환을 돌아보며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계절입니다. 낙과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듯 땅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계절입니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낙과는 책임을 지기 위해 땅으로 떨어집니다. 익었어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버티는 것들이 없지는 않으나, 이것들은 뭇새들을 먹이니, 땅을 향한 것들과 다름없이 익은 것의 도리를 다합니다. 하니 낙과는 땅을 향합니다. 떨어져 익었음을 증명합니다. 땅을 향하여 떨어짐으로써 비로소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 곧 성숙을 완성합니다. 추석입니다. 풍성한 한가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0927)
첫댓글 아- 좋습니다!!
내가 지상에 떨어지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은
내가 아직 여물지 않아서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