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비원..
중앙아시아 ~ 카라코롬 14일 차(23. 7. 6 / 목) 중국 카슈가르 / 향비묘, 올드시티
09시 택시(19위엔)를 타고 향비묘(香妃墓)로 향했다. 우리 택시가 조금 돌아와서 4위엔이 더 나 온 것 같다. 향비묘에는 다소 많은 사람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서 기다린 후 입장료 30위엔을 지불하고 향비묘로 많이 알려진 아팍 호자(Abakh Khoja 阿帕克霍加) 묘로 들어선다.(나중에 확인을 하니 65세 이상은 그냥 입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향비묘(원)로 들어갑니다..
향비묘로 향비의 묘는 없고 아팍 호자 일가 5대에 걸친 72명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은 향비묘이지만 원래 명칭은 아팍 호자(阿巴加墓:1622~1685년)의 묘이다. 이슬람의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의 종교적·세속적 지도자를 '호자(Khoja 스승)라 칭한다. 아팍 호자는 17세기 카슈가르 수피즘의 대표자이자 정치 지도자였다. 호자는 이곳 신강 지방의 귀족으로 카슈가르에 작은 궁전을 가질 정도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호자 집안에 무하마드 호자는 사우디에서 유학을 하고, 카슈가르에 이슬람대학을 세우고 위구르어로 번역한 코란을 가르쳐 위구르 민족을 단합시켰다. 그의 아들 아팍 호자가 부친의 뜻을 기려 부친의 묘를 네 개의 첨탑과 돔을 앉힌 이슬람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이것이 아팍 호자의 묘이다.
아팍 호자 일가의 묘가 안치된 모스크(황비묘는 없습니다)..
향비묘가 있다는 곳에 도착하여 안을 살펴보니 향비의 묘가 없고 아팍 호자 일가 5대에 걸친 72명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아팍 호자의 묘이다. 보통 이슬람식 묘는 가족묘로 만든다. 왕족의 직계자손일 경우 이곳 아팍 호자의 묘처럼 사원식으로 모스크를 지어 그곳에 관을 일렬로 보관한다. 이곳을 향비원이라고 공원으로 표시하고 있었는 것이 향비묘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팍호자 일가의 묘..
아팍 호자(Abakh Khoja, Apak Khoja, Āfāq Khwāja, ? - 1693/94)는 위구르의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이다. 아팍 호자는 수피즘의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위그루 무슬림 중에는 그를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 있는 사이드로 여겨지기도 했다. 아팍 호자는 달라이 라마와의 비밀외교를 통해 중가르 침략자를 불러들임으로써 아르칸드의 차카타이 왕조에게서 권력을 빼앗았다. 아팍 호자는 호탄, 야르칸드, 코를라, 쿠차, 아크수와 카슈가르까지 동튀르키스탄을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였다. 이스카키 호자(카라 타 글리크스, 검은 산악인을 뜻)와 충돌의 결과로 아팍 호자는 카슈가르에서 한발 물러났고, 1678년에 이교도인 제5대 달라이 라마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10만 탕가스(은화)를 대가로 준가르를 불러들였다. 갈단 보슈투 칸(1670-1697)이 이끄는 준가르는 차가타이 (무굴) 군주 이스마일 칸을 쫓아내고, 아팍 호자와 그의 아들을 카슈가르의 명목상의 군주로 만들었다. 아팍 호자는 1684년에 죽었으며, 1695년 그의 아들 야흐야 호자(1694-1695)에 의해 야르칸드 칸국으로 계승되었다. 향비는 아팍 호자의 손녀로 준가르를 정벌하고, 서역을 장악한 청나라 건륭제에게 예물로 바쳐진다. 카슈가르에는 ‘아팍 호자의 묘’라고 불리는 가족묘가 있는데, 이 가족묘는 일명 ‘향비묘’로 불리기도 한다.(출처 ; 위키백과)
아팍 호자 일가 5대에 걸친 72명의 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예전에는 향비의 관이 오른쪽에 노란색 천으로 덮여 있었고
'향기가 나는 여인'이라는 뜻의 위구르어 ‘이파르한(Iparhan)’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향비묘에 대한 진실..
향비는 아팍 호자의 외손녀이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으로 몸에는 항상 특이한 천연향이 풍겨나 사람들은 그녀를 향비(香妃)라 불렀다. 청나라군이 천산남로를 평정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향비는 이미 정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현혹된 건륭제(乾隆帝)는 그녀를 자금성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를 위해 궁 안에 이슬람식 집과 모스크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신강의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그녀가 위구르 전통복장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향비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절개를 지켰다.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 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 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나 최근 어떤 중국학자들은 향비가 건륭제의 용비(容妃)였으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반란평정전쟁에 참가하는 등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단결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받아 귀인에서 빈으로 승격하였다가 더 나아가서 용비가 되었고, 위구르족 전통 복장을 하고 회족 음식을 먹으며 황제를 따라 각지를 주유하는 등 자금성에서 28년간 생활하다가 58세에 병으로 죽어 동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두 이야기는 어쩌면 향비를 바라보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구르족은 향비를 자기 민족의 자존심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한족은 중국 민족의 단합이라는 목적의식적 입장에서 향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저 멀리 하북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슈가르 사람들은 124명의 카슈가르 사람들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호자가문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도 카슈가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그래서 모스크의 바로 옆에는 위구르족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큰 것은 어른의 묘, 작은 것은 아이들의 묘, 꽃 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부부가 합장된 묘라고 한다.(출처 : 오마이뉴스 2007년/ 향비묘에는 향비가 없다)
황비묘를 보고 바깥으로 나오면 모스크의 바로 옆에 위구르족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카슈가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묘지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큰 것은 어른의 묘, 작은 것은 아이들의 묘, 꽃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부부가 합장된 묘라고 한다.
모스크의 바로 옆의 위구르족들의 공동묘지로 큰 것은 어른의 묘, 작은 것은 아이들의 묘, 꽃 봉우리 모양은 부부가 합장된 묘라고 한다
향비묘를 나와 발길을 돌려 찾은 곳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강경당(讲经堂)이다. 바깥은 여름에, 실내는 겨울에 종교적 교리를 가르치던 공간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는 주마 모스크(Juma Mosque 加滿淸眞寺)가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무늬로 이루어진 62개의 나무로 된 기둥이 특이하였다. 각 기둥의 디자인은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위그루 목재 문화의 현현된 구현이라고 믿고 있다. 천천히 둘러보고 수박 하나(20위엔)를 사 먹었는데 냉장고에서 끄집어내어 잘라 주어 시원하고 당도가 아주 좋아 만족도가 높았다.
종교적 교리를 가르치던 강경당(讲经堂)..
금요일 모스크/ 주마 모스크(Juma Mosque 加滿淸眞寺)로 62개의 나무로 된 기둥이 특이하다...
수박 하나(20위엔)를 사 먹었는데 냉장고에서 꺼집어 내어 잘라 주어 시원하고 당도가 아주 좋았다.
특이한 공간입니다..
향비묘가 정말 멋지고, 이제 는 향비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반영이 멋집니다..
향비원을 나와 택시(15위엔)로 호텔로 돌아와 1시간 휴식 후 위구르족 전통 식당에서 만두 두 접시와 넓적한 편으로 된 국수 등을 시켜 먹었는데 소통이 잘 되지 못해 만두는 커다란 두 판이 나왔는데 최소 6인분 이상은 될 것 같아 거의 먹지 못하고 다른 음식도 역시 많이 남겼다. 이곳 식당 종원원들이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 이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만두 한판이 최소한 세명이 먹어도 남을 것 같습니다..
점심식사를 과하게 먹은 후 더위를 피해 오후 8시까지 숙소에서 머문 후 올드시티를 구경하러 갔다. 가는 길에 인민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과 야외에서 탁구를 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진행하니 길 건너 어제 구경했던 모스크가 보였으며, 그 앞에 '문명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편에 있는 올드시티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각종 먹거리를 파는 전통시장(칸 바자르)에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시장에는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으며, 다양한 먹거리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인민광장에서 야외 탁구를 치고 있습니다..
어제 다녀 온 모스크 앞에 사람들이 많고, 그 앞에 '문명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란 글이 적혀 있네요..
칸 바자르로 들어갑니다..
과일과 쥬스, 오징어 구이 등 각종 먹거리 가게들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많은 인파로 북적거립니다..
천천히 구경을 하면서 과일을 사먹었는데사 먹었는데 당도가 끝내 주었으머, 땅콩과 완두콩도 사 먹었는데 땅콩은 간이 되어 있어 짭조름하였다. 인파가 계속 밀려들었으며, 한참을 진행하니 우리나라 냉면을 파는 가게가 있어 들어갔다. 주인은 지린성 조선족으로 남편은 한족이라고 하며 한국에 6년 거주한 바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은 아직 한국 대림동에 있다고 하였다. 가게에서 냉면 을 시켜 먹으면서 이런 저련 얘기를 나누었다. 냉면은 타 지역에서 진공포장으로 들여온다고 하며 메밀로 만들었는데 먹을 만하였다.
모둠 과일과 주스를 파는 가게인데 과일을 먹어보니 정말 당도가 끝을 냅니다..
멜론을 자르는 모습..
구운 통양고기도 팔고..
오징어구이, 양고기 구이, 계란 수공예품, 고치구이 등 다양한 먹거리를 팔고 있습니다..
정말 인파가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붐비네요..
조선족 여인이 한국 냉면을 팔아 먹어보니 맛이 먹을만하더군요..
육포가게 와 찻집도 있고..
그리고 계속 진행하니 커피가게가 있어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마셨는데 그동안 여행하면서 먹었던 커피 중에 가장 맛이 있었던 것 같았다. 먹자골목을 지나 의류 등을 파는 거리가 나왔고 그곳에서 위그로족 전통가옥에서 생활하는 가구를 볼 수 있었는데 입장료가 30위안이라 겉만 보고 통과하였다.
커피를 팔고 있는데 아이스커피를 시켜 먹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커피 중에 가장 맛이 있었다..
전통가욕으로 입장료가 30위안이라 겉만 보고 통과하였다.
마당에 전통복장을 착용한 주인장이 보였다..
계속 진행하다 보니 야외공연을 하면서 주류를 파는 곳이 나왔다. 예전에 퇴근 후 야외에서 맥주 마시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기분이 업됩니다. 조망처가 나와서 잠시 구경을 하였으며, 타워에도 조명이 들어와 멋진 야경이 펼쳐집니다. 조금 더 진행하니 동상 뒤로 멋진 건축물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맥주 한잔을 하면서 라이브 공연을 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꼬마아이가 나와 춤을 추는데 춤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고성의 멋진 야경과 공연을 본 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내일 점심거리를 장만하고 위챗으로 출국신고서를 작성하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사진관과 보석세공품..
야외공연을 하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야외에서 공연을 하면서 주류를 팔고 있습니다..
조망처가 나와서 잠시 구경을 합니다,,
서서히 조명이 밝아오면서 멋진 야경을 볼 수 있습니다..
멋진 탑이 보이고..
타워에도 조명이 들어오면서 밤이 더욱 흥겨운 축제 속으로 들어 갑니다..
동상이 있는 곳 앞에서 라이브 공연이 펼쳐져 여기서 맥주 한잔을 하면서 라이브 공연을 즐깁니다..
말 탄 장수와 사원..
사원입니다..
타워에서 계속 불빛이 변하면서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이브 공연에 맞추어 아이가 춤을 추는데 정말 잘 추더군요..
공연 구경을 마치고 도로로 내려와 택시로 호텔로 이동합니다..
타워 바로 앞에서 본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