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를 잡아라>
예술은 과연 절대적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처음에 마주친 우리의 경외감만으로 평가된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시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평가, 그리고 무한한 종류의 시상식을 보고 있자면 상대평가란 오히려 예술에게 더욱 냉혹하다고 생각됩니다. <마녀를 잡아라>는 이러한 상대평가에서 자신의 무고를 입증하기 더욱 어려운 작품입니다. 1983년 로알드 달 원작의 <The Witches>를 영화화하며 오는 원작에 대한 책임감과 1990년 니콜라스 뢰그 감독, 안젤리카 휴스턴 주연의동일 원작 작품에 대한 비교는 <마녀를 잡아라>를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로버트 저메키스라는 성공적인 테크니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거장인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이 공동집필에 참여했고 이 시대 최고 감독 중 하나인 알폰소 쿠아론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관객의 기대감을 높이기 충분합니다. 이러한 기대감 속에 <마녀를 잡아라>는 일종의 실패로 걸어 들어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녀를 잡아라>는 딜레마에 놓여있습니다. Child horror는 무슨 기막힌 장르일까요? 아이들 대상의 호러라니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를 훌륭하게 시각화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공동집필에 참여한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입니다. <판의 미로>는 제국주의가 가정을, 가부장제가 아이를 파괴하는 현실의 공포를 판이라는 신화적 존재가 인도하는 미로를 통해 훌륭하게 은유합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찍은 감독이 공동집필에 참여한 <마녀를 잡아라>는 원작 작가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채로 제작되었습니다.
<마녀를 잡아라>가 원작에서 가장 큰 자유를 발휘한 지점은 바로 1950년대 미국으로 배경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백 번 옳은 선택이었으며 이 선택에대한 근거를 발휘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포레스트 검프>를 통해 미국의 차별에 대한 근현대사를 아름답게 읊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는 영화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영화의 힘을 믿는다면 영화를 위해 내렸던 하나하나의 작은 선택들이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될 것을 믿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녀를 잡아라>에서 호러의 원소를 담당해야 할 grand high witch는 동유럽 억양 기반의 스칸디나비안 억양을 가지고 있는, 원작 그대로의 노르웨이 마녀로 보입니다. 원작은 영국 작가가 영국을 배경으로 영국 아이들을 위해 쓴 동화이기에 바이킹 족에서부터 비롯된 북유럽 마녀에 대한 공포가 문화적 공감대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을 인종차별이 두드러지는 1950년대의 미국으로 이주시킨 후, 북유럽 마녀를 유지하기로 한 결정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호러 장르의 주인공은 ‘괴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할까요? 일단 세계사는 우리가 미혼이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고양이를 키우는 독신 여성을두려워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영국은 일찍이 이 두려운 존재들을 익사시키고, 불태우고, 굶겨 죽였습니다. <마녀를 잡아라>는 이러한 미소지니를그대로 차용한 작품입니다. 아마 1990년 작품에서 안젤리카 휴스턴이 맡은 grand high witch의 캐릭터가 결국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저 끔찍한 괴물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은 이러한 원작의 미소지니에 대한 염려 역시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소지니를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은 우리 모두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마녀를 잡아라>가 조심했어야 할 또다른 함정은 뭘까요?
로알드 달입니다. 로알드 달은 너무나도 불편한 사람입니다. 단지 어린이를 싫어해서는 아닙니다. 그는 꽤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읽으면서 컸듯이 영국의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대단합니다. 특히나 세계 2차대전을 겪고도 반유대주의를 공고히 하는 작가의 독자에게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분리는 꽤나 열렬히 지지해야 하는 분리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특히나 이전 ‘유대인이라는 종족은 자신의 제사를 위해서 어린 아이를희생한다더라. 그래서 아이들을 몰래 훔치는 악행을 일삼는다더라’,는 기분 나쁜 그러나, 수많은 민간인을 탄압하는데 쓰였던 프로파간다의 원형을 기반으로한 예술 작품이라면 그러한 원작을 대하는 조심성은 대단히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Maus>가 원작이 쓰여지던 당시에 연재 중이라는 점과 <The Witches>의 결말이 많은 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Final solution과의 유사성에 대해 지적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정말 그 조심성은 과하기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앤 헤서웨이의 악센트, 그리고 그녀의 분명한 여성성은 문제입니다. 정치적으로 그릇되서가 아닙니다.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것을 <마녀를 잡아라>는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잔인합니다. <마녀를 잡아라>의 시대적 배경을 옮김으로써 원작의 맥락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매력은 공포의 대상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것은 마녀가 붙잡고자 하는 모든 외면 당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마녀에게 잔인합니다.
다만 작품이 주장하는 바는 있습니다. 그것은 묘하게도 ‘허무주의’입니다. <마녀를 잡아라>의 어른들은 무력하며, 플롯과 무관하고 평면적입니다. 물론, 비올라 데이비스의 존재감은 영화의 그 어떠한 미쟝셴보다 포근하게 그리고 따듯하게 우리를 안아주며 그녀가 훌륭한 배우로서 역할 소화했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마녀를 잡아라>는 주인공을 쥐로 영구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주인공이 한 명의 성숙한 자아를 갖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것을 제지할 뿐만아니라 관객에게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은 불필요하고 주장합니다. 주인공은 평생 할머니의 돌봄을 필요로 하고 어린이들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쥐로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한 명의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쥐가 되기 전에 한 명의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못한어린아이였기에 ‘인간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를 체감하지 못합니다. 즉, 주인공은 이야기를 통해 부모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할머니의 교육을 통해 죽음에 대한이해에 다가가던 어린아이에서 다시 할머니에게 죽음을 가볍게 입에 올리는 쥐 한 마리로 퇴보합니다.
저는 호러를 좋아합니다. 아이들 보다 호러를 좋아합니다. 한편, 아이들을 위한 호러 영화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태 감상문을 통해 사회의 통념이 사냥하는 악당에 대해 거론하긴 했지만 호러는 우리에게 ‘당신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나도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소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을 가장큰 빛을 통해 할 수 있는 예술작품은 아직까지 영화밖에 없습니다. 영화에는 그래서 더욱 큰 책임이 있으며 올가미가 있습니다. 1896년 뤼미에를 형제가 열차를 출발시킨 그 순간부터,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큰 책임이 지어져 있습니다. 영화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남에게 어떻게 들릴지, 를 고려하며 예술을 행해야 합니다. 이미 열차는 출발했으며 그 열차는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정효린/ 감상문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바로 허무주의를 이야기한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영화 속 아이가 변화에 적응하여 하고 싶은 바를 이루며 사는 모습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굴하지않고 행복을 찾고 목표를 이루는 긍정의 힘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공포장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공포 영화의 필요성을 느끼기에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