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상감매죽문장진주명매병의 목독木牘 외
사윤수
그날밤 소쩍새 소리에 처음 눈을 떴습니다 검은 허공이 실핏줄로 금이 가 있었습니다 사깃가마 속 사흘밤낮 회돌이치는 불바람이 나를 만들었지요 흙이던 때를 잊고 또 잊어라 했습니다 별을 토하듯 우는 소쩍새도 그렇게 득음하였을까요 나는 홀로 남겨지고, 돌아보니 저만치 도기盜器 파편 산산이 푸른 안개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모서리에 기러기 매듭 끈이 달린 국화칠색단 남분홍 보자기가 나를 데려갔습니다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아래 슬기둥 덩뜰 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거문고 소리 깊은 집이었습니다 달빛 애애한밤 오동 잎사귀 워석버석 뒤척이면 나는 남몰래 사수 겹머리사위체 춤을 추곤 했습지요 대숲에 댑바람 눈설레 치고 지고 내 몸에 아로새겨진 버드나무도 당초호접무늬 봄이 수백 번 오갔습니다
여기는 커다란 하나의 무덤 그 속에 작은 유리무덤들, 이제 나는 침침 불빛에 갇혀 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인지 산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 들어와 나를 쳐다봅니다 밖에는 복사꽃잎 붉은 비처럼 어지러이 떨어지는지** 전해주는 이 아무도 없고 그 사이로 천년의 강물 흘러갑니다 때로는 내가 흙이던 날의 기억 아슴아슴 젖어옵니다 누가 이곳에 대신 있어 준다면 나는 잠시 꿈엔 듯 다녀오고 싶건만 아, 그 소쩍새는 아직 울고 있을까요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 책 <슬기둥 덩뜰당뜰 저 소리 들어보오> 에서 빌림
**매병에 새겨진 시문 장진주 가운데 挑花亂落如紅雨.
빨래 마르는 시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가 널려있다
이동 건조대 가득 큰 대자로
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
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운다
세탁기 속에서 혼비백산
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을 통과한 기억이
빨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머릿속까지 표백되었을지도 모르니
세상에는 매달려서 견디는 것들이 많다
나도 어떤 것이 매달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
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
양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
수령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
은결든 물기와 구김을 다림질해 주듯
햇볕이 자근자근 빨래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
어느 어진 이의 심성과 순교의 윤회일까
제 본분인 양 빨래는
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간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배경에 잠풀 향기 은은하다
착차스*
줄줄이 꿰인 짐승의 회색 발톱들이
반질반질 매끄럽다
안데스 라마들은 죽을 때
제 발톱이 잘 뽑혀서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며 안간힘으로
제 생의 기억을 밀어 넣어 준 발톱의 안쪽이 깊다
흔들면
오래전에 살점과 물렁뼈가 빠져나간 흔적이
흙바람 속을 저물도록 걸었을
착-착-착 찰찰 기억의 껍질들이 부딪치는 소리
찰찰찰찰찰
소리가 소리를 자꾸 흔들게 만드는 소리
그것은 살아서 이룰 수 없는 구음이므로
돌아오지 못할 협곡을 맨발로 건너간
라마 떼가 물끄러미 이쪽을 돌아본다
파란 잉카의 하늘이 짐승의 속눈썹에 젖어 잇다
차르르 차르르르
야윈 뒤편에서 와락 안고 싶은 소리
맑은 물살처럼 뒤집어쓰고 싶은 소리
죽어서 나도 악기가 되고 싶은 소리
*착차스: 안데스 지방의 민속 타악기
벽에 박힌 못이 흘러내렸다
거듭 내리치는 우레와 불꽃을 품고 돌이킬 수 없는 절벽 깊이 박혔다 단 한 걸음도 허락되지 않는 견고한 부동의 곡예 실핏줄 균열마저 움켜쥐어야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므로, 피가 거꾸로 솟는 자세를 묵묵하게 버텨내는 것에 너의 지극함이 있었다
벽의 지층에서 못의 뿌리가 갈래갈래 자랐다 어둠을 먹고 못은 붉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싶었을 것이다 이마가 은색인 족속이 저무는 나의 기슭과 마주칠 때마다 유난히 빛난다면 그것을 저녁별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 못도 오래 박혀 있으면 누군가 거는 외투만으로도 그 사람 생의 무게를 잴 수 있다
배호(裵湖)의 음성 같은 가을, 등에 못이 박힌 사람들이 서성인다 등이 벽인 줄 알고 잘못 일어난 일일까 귀뚜라미 노래로 만든 목걸이를 못에게 걸어주자 굵은 첫 빗방울처럼 박혀있던 못이 툭 떨어진다 시간의 어금니 하나 빠지듯 허공 아래 풍덩! 그토록 드팀없던 한 세계가 해탈 와불(臥拂)이다 빈 동굴 한 채 유적지 되어 벽에 서리다
구름대장경
위에 위에 허공 위에
그 위에 더 위에 구름나라
여기엔 구름이 산다
가없는 말발자국구름
하늘 솥 가득 수제비구름
긴긴 띠구름
구름 마을 구름집들
굽이굽이 구름굽이
사래 긴 구름밭
울울창창 구름숲
일파만파 구름파도
천 권 만 권 구름책
구름 안도 구름
구름 바깥도 구름
구름 아닌 것을 찾으려 한다면
구름은 허락하겠지만
나는 구름문을 열고 어디로 나서겠는가
이룩하기 전에 흩날려 보낸 문장들이
저기 구름으로 변해 있다
구름 나라에선 그름을 빋어야 한다
호호망망 오천오백 마일 로마행
나는 말[言]의 나라에 왔으나
구름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전부가 구름이며 하나의 구름인 구름대장경
한 필 오려서 장삼 만들어 입고픈
사윤수: 1964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