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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문화권역의 개념과 문화광역권의 설정 1. 문화권역이란? 2. 문화광역권의 설정 Ⅲ. 호남동부문화권 문화적 특성과 문예콘텐츠 1. 호남동부문화권의 지리적 특성 2. 호남동부문화권의 역사·문화적 특성 3. 남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동부문화권의 문예콘텐츠 Ⅳ. 나가는 말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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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주어진 자연환경에 의존하고 동시에 극복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창조한다. 문화란 인간의 한 집단이 갖는 생활양식의 총체로서,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문화는 자연과 생활환경에 따라 곳곳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역문화는 땅의 경계와 일정한 구역 안의 토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안에서 특정한 시대에 그들만이 만들어 낸 문화를 말한다. 지역문화의 경계는 동질성과 응집성에 의해 구분된다. 따라서 인류학·지리학·역사학·정치학·사회학적 특징에 따라 구분된다.
21세기를 흔히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는 각 국가, 민족, 종족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문화를 상품화하여,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데 문화를 이용하는 상황을 말한다. 지구촌 시대에 국제화 정보화는 더욱더 문화 간의 경계를 허물면서 문화의 혼성과 분절을 가속시키고 있다. 이제 특정문화가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공유된 생활양식이나 상징체계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 근거한 문화의 개념은 정치적, 경제적 쟁점으로 등장하여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세계 속에서의 한국, 한국 속에서의 남한, 남한 안에서의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대대로 전승해온 고유한 생활양식인 지역문화연구는 탈지역화현상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본고에서는 우선 문화권역과 문화광역권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내리고 나서 그 설정 기준과 실제 구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호남동부문화권에 대한 문화적 특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문화권역의 개념과 문화광역권 설정
1. 문화권역(文化圈域)이란?
문화는 인간 삶의 흔적으로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공간은 환경을 만들고 인간은 그러한 환경의 지배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공간은 환경적 특성에 의해 경계가 그어지는데, 경계에 의해 성격을 달리하는 문화권이 형성된다.
권역(圈域, catchment area)은 동물의 우리를 나타내는 권(圈)과 토지나 사물의 경계나 범위를 나타내는 역(域)을 합친 합성어로 넓게는 어떤 종류의 기능이 그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보통은, 물적인 시설의 이용 또는 운영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 물건, 정보가 집산하는 지리적 범위 또는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문화권역이란 문화의 영향이 미치는 어떤 특정한 범위 안의 지역을 말한다. 행정권역은 산이나 물 등 지형적인 특성을 중심으로 나눈다. 하지만 문화권역은 공간적 경계와 구성원의 공감대, 그리고 집단에서 중심을 이루는 정신세계 등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문화권역은 행정적 편의에 의해 기계적으로 나누는 행정권역과는 크게 다르다.
문화권역 안에는 규모에 따라 대문화권과 소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다. 한민족문화권은 서로 다른 문화광역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다. 문화광역권(文化廣域圈)은 보다 넓은 지역의 문화권을 타나내며 소문화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대문화권을 말한다. 즉, 문화광역권은 하나의 권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며 그 설정은 일정한 지역 안에서 보편적인 동일성을 가지는 문화현상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문화광역권은 다른 광역권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에 다른 광역권과의 문화적 차별성이 뚜렷이 나타나야 한다.
2. 문화광역권의 설정
문화광역권의 설정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문화의 특수성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따라 연구자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광역권으로 나눌 수 있다.
문화광역권의 설정기준으로는 우선 산과 물을 중심으로 하는 지형적 특성, 다음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적 특성, 그리고 과거의 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구성원의 의식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특성과 구전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적 특성도 고려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삶의 질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다음은 한민족문화권을 18개의 문화광역권으로 나눈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호문화권, 부여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문화권,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동부문화권, 남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동부문화권,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서부문화권,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제주문화권, 해남을 중심으로 한 호남남부문화권,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북부문화권, 진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서부문화권,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동부문화권, 김해를 중심으로 한 영남남부문화권, 상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북부문화권, 양양을 중심으로 한 영동북부문화권,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남부문화권, 영월을 중심으로 한 영서남부문화권,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북부문화권, 남해의 도서문화를 중심으로 한 다도해문화권, 서해의 도서문화를 중심으로 한 서해문화권
이상의 문화권역의 구분은 광역권과 광역권을 연결하여 우리나라 전체의 문화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연결망이 된다. 각각의 문화광역권 아래에는 소광역권을 두고 다시 그 아래에는 더 작은 소문화권을 둔다. 길이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문화광역권과 소문화권의 연결이 필요하다. 가장 작은 지역의 문화에서부터 가장 큰 문화까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연결망인 ‘문화고속도로’를 제안한 것은 한국방송통신대학원의 ‘지역문화와 문예콘텐츠과목’을 담당하는 손종흠 교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따라서 다음은 전남 곡성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전라북도의 한 도시인 남원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동부문화권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Ⅲ. 호남동부문화권의 문화적 특성과 문예콘텐츠
1. 호남동부문화권의 지리적 특성
호남동부문화권의 중심도시는 남원이다. 남원은 한반도의 서남부 내륙 지역으로 행정구역상 전라북도에 속한다. 소백산맥 서사면의 넓은 분지에 위치해 있고 지리산의 주능선을 경계로 경남 하동군 및 전남 구례군과 북동부는 경남 함양군과 접하고, 서쪽은 임실군·순창군, 북쪽은 장수군과 인접하고 남쪽의 일부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 곡성과 접하고 있다.
88 고속도로, 순천-완주 고속도로와 전라선 철도가 통과하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내륙의 관문이자 문화적·경제적 접촉지대로 노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의 중산지인 남원의 지형은 지리산과 천황산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의 고원과 섬진강 길인 요천을 낀 남원평야 등이 있다. 기후는 내륙성 기후대에 속하며 겨울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추운 날이 많고 여름에는 아열대 저기압 및 지리산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온다.
지리산(智異山)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롭게 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별칭인 두류산(頭流山)은 백두대간의 주맥이 한반도를 타고 이곳까지 이르렀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며, 방장산(方丈山)은 도교의 삼신산 중 하나로 지칭한 말이다. 지리산은 3도(전남, 전북, 경남) 5개 군(구례, 남원, 하동, 산청, 함양)에 걸쳐 있으며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에 이르는 동서로 길게 뻗은 주능선은 한반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편마암 산지로 전체 사면이 넓고 평평하고 일정한 두께의 토양층이 발달한 토산으로 울창한 수목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리산 팔량치> <지리산 계곡> <지리산 능선>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마을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광양만에 이르기까지 3개도 10개시군에 걸쳐 218.6km를 흐른다. 이 강은 고운 모래로 유명하여 모래가람, 다사강, 사천, 기문화, 두치강으로 불리어왔으며, 섬진강(蟾津江)이라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우왕 때 왜구가 강을 거슬러 오르며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쳤다는 전설에서 생겨났다.
남원 중심에는 장수의 지지계곡과 덕산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합쳐져서 남원 하도리에서 섬진강에 합류하는 요천(蓼川)이 있다. 요천은 천변에 여뀌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천은 금지면과 송동면의 경계에서 수지면에 흘러온 수지천과 만나 곡성읍 동산리 앞을 흐르는 적성강과 만나 순자강을 이룬다. 순자강(鶉子江)은 풍부한 곡식과 강의 수많은 물고기들과 강변의 무성한 수풀은 철새들의 낙원이다. 춘하추동 갖가지 철새들이 날아와 서식하는데 특히 가을에는 메추라기가 성시를 이룬다. 순자강의 유래는 어느 날 남원시에 전주판관을 지낸 사람이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되자 백약이 무효하던 참에 더운 여름날 메추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효성이 지극한 그의 아들이 천지신명에게 기원하여 메추리가 많이 서식한다는 강을 찾아 부친에게 공양하니 병환이 나았다.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효성을 표창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그 강을 순자강이라 부르게 하였다. 순자강은 강폭이 700m나 되고 많은 계곡물이 합쳐져서 넓은 백사장을 이루며 지역민들이 여름철 삼복더위를 식히던 곳으로 특히 은어는 임금님 수라상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남원의 지리적 특성을 살린 향토음식으로는 추어탕이 관광 상품으로 유명하다. 남원 추어탕은 섬진강의 지류인 소하천이나 개울에서 자라는 미꾸라지를 잡아 남원 지역의 토란대와 운봉 지역의 고랭지 푸성귀를 말린 시래기를 주재료로 넣어서 탕을 끓여 만든 보양식으로 남원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다. 1959년 남원시 조산동에서 ‘새집’이라 간판을 걸고 추어탕 집을 경영해왔던 서삼례씨가 처음으로 요천 추어탕 등을 선보이면서 오늘날 관광객이 찾는 광한루원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약 50여 개의 추어탕 전문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호남은 북쪽으로는 금강이,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이 경계를 이룬다. 소백산맥은 영남지방과 경계를 이루어 생활권이 고립적으로 형성되어왔고, 호남지방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호남정맥은 서쪽은 해안의 평야지대로, 동쪽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로 또 다른 생활권을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금강을 통해 지역교류를 촉진시켜 호남지방과 호서지방의 생활문화권을 통합시키기도 했다.
남원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인 호남동부지역은 지리산을 등에 업고 남원의 요천과 곡성의 보성강, 구례의 섬진강 등 물길을 통해 일찍부터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중환의「택리지」<팔도총론>에 의하면 신라 말엽 후백제 견훤이 차지했던 전라도는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 위태했던 땅으로 견훤을 평정한 후 차령 이남의 물은 모두 산세와 어울리지 않고 엇갈리게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 마이산 남쪽 골짜기 물이 임실을 지나 남쪽 남원에 이르러 요천과 합쳐지며 압록진이 되고, 서편은 옥과 곡성을 이루며 동쪽으로 굽이쳐 악양에 이르러 남해의 조수와 만난다. 남원성은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함락되기도 했고 동쪽으로 지리산 팔량치에 있는 운봉현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를 통행하는 큰 길이 된다.
고도가 높은 지리산은 좁고 깊은 골짜기들이 많아 서쪽으로 섬진강 협곡을 건너 백운산으로 이어지다가 남해안을 따라 길게 펼쳐진 호남정맥의 산지들과 연결된다. 하천과 고개는 교통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부터 문화전파와 정보통신, 물자이동 등 교통로로 적의 침입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2. 호남동부문화권의 역사·문화적 특성
전라남북도를 이르는 전통적인 지명인 ‘호남(湖南)’이란 말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신돈의 모함으로 파직되기도 하고 이제현·정몽주·이숭인 등과 교유하였던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의 문집에 ‘해동형승천호남(海東形勝擅湖南’이라는 시구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후 변계량, 정극인, 박팽년, 신숙주의 문집 등에서도 언급되었고, 조선시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점차 보편화되었다.
호남동부문화권은 마한에 속하였으며 지리산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남원은 백제(온조왕 34) 시대에는 고룡군(古龍郡)이라 하였다가 대방군으로 개칭하였고, 평안도 한사군의 대방군이 설치되자 남대방군으로 바꾸었다. 660년(무열왕 7)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대방도독부를 두었다. 전국에 5소경을 설치할 때 남원경이 설치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대방을 남원이라 고쳤다. 남원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에 순창·임실·운봉·장수·장계의 5현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남원도호부는 1896년 지방개편 때에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분리되었고, 전라남도의 관찰부를 남원부에 두었었으나 이듬해에 전라북도로 편입되면서 관찰부는 광주로 옮겨졌다. 근대에 와서 1914년 남원도호부가 폐지되고 운봉군을 통합하여 남원군이 되었다. 이때 남원군은 19개 면을 관할하였으며 인구는 약 9만 2,000여명에 이르렀다.
8세기에 세워진 화엄도량인 구례 화엄사는 남원과 고부 경주까지도 그 영향력이 미쳤다. 9세기에는 남종선 계통의 남원 실상사, 동리산문인 곡성의 태안사 등이 세워졌다. 특히 실상사는 3천여 명이 넘는 스님들의 기거했던 대사찰로 스님들의 바리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면서 목기제작의 시초가 되었고 옛날부터 왕실 진상품으로 유명했다. 남원 운봉목기는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노각, 괴목, 오리목, 물푸레나무를 원자제로 사용하여 목재의 독특한 향과 함께 모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다. 실상사는 운봉과 인월을 거쳐 흘러가는 만수천변의 하안단구에 위치하고 있어 평지에 위치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인월(引月)은 팔량치가 있는 곳으로 전라·경상 지역 주민들의 상업 및 물산의 매매활동이 활발한 곳으로 고려 말 황산대첩의 현장으로 캄캄한 밤에 달을 끌어 올려 승리하였다는 의미로 붙은 지명이다.
9세기 말 당나라 유학자 최치원은 쌍계사에 머물면서 화엄종 승려인 의상과 법장의 전기를 쓰고, 선종승려인 혜소의 비문을 지으면서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면서 사상적 융합에 이른다. 신라 말 풍수지리사상은 도선이 곡성 태안사와 광양의 옥룡사에 머물면서 만들고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곡성의 압록지역은 섬진강과 보성강의 합류점이라는 수운상의 요충지이면서 주변에 대가람인 태안사가 위치해 있는 곳으로 후삼국이 쟁패하는 시기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견훤은 신라의 무장출신으로 무진주(지금의 광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곡성 구례 순천 등 동남쪽의 군현을 아울렀다. 이 지역은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으로 곡성을 제외하고 ‘동부6군’이라 하여 오늘날 순천 승주지역을 말한다. 승주지역의 호족인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가 된다. 신숭겸은 <고려사>에는 광해주(춘천)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지만 곡성 목사동면 구룡리에 용산재와 오곡면 덕산리에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는 덕양서원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곡성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는 박영규에게 밀려 곡성을 떠나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박영규는 견훤 정권이 붕괴하자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한반도의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 내륙을 진입하기 위해서는 호남의 4대 관문인 구례의 석주관, 진안의 웅치, 함양의 황석산성, 남원의 팔량치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결국 외침과 항거의 역사이며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하구나 고갯길에 산성을 쌓고 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광양과 하동을 맞닿는 섬진강 하구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였고, 고려말엽 왜구들이 호남 내륙을 침략하는 길목으로 치열한 싸움터였다. 구례 석주관은 그 목이 짧은 곳으로 고산자 김정호가 영호남의 인후(咽喉:목구멍)에 비겼던 곳이다.
고려시대 1379년(우왕 5)왜구가 경상도지방을 노략한 뒤 함양을 거쳐 운봉에 주둔하였을 때 이성계는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황산대첩을 거두었다. 1577년 선조는 이성계의 왜구 섬멸을 기념하기 위해 황상대첩비를 세웠고 그 부근 남천에는 왜장 아지발도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흘렸다는 핏물이 말라붙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피바위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 장군은 운암에서 조경남은 운봉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었고, 만복사 광한루 등이 모두 불탔다. 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남원시 향교동에는 만인의총과 충렬사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섬진강은 왜구들의 호남내륙 진출 통로로 구례를 거슬러 남원으로 이어지며 전주로 쳐들어가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김개남의 활약이 컸다. 봉건적 신분체제의 모순을 절감한 그는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농민군의 연합전선이 형성될 때 전봉준 다음의 직책인 총관령을 맡았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때 지리산 남원을 근거지로 산적들과 연계해서 천민부대를 만들고 남원성을 점령해서 교룡산성을 거점으로 활약하다가 여원치에서 관군에게 패하였다.
1907년 내장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동신 의병부대는 산포수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김동신은 대한창의대장으로 선임되었고, 삼남창의소라 하여 지리산 사찰을 근거로 경남 함양, 전북 남원·정읍, 전남 곡성·구례 등 3개도에 걸친 폭넓은 활동을 했다. 특히 구례연곡사를 거점으로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천연요새의 지형을 가진 화계동 등을 누볐다. 또한 고광순의병장도 지리산 연곡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했다. 구례읍에 살던 매천 황현은 연곡사로 달려와 초라한 무덤 앞에서 시를 지었다.
연곡의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평생을 나라위해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숲 사이로 날아 앉는다.
나 같은 놈의 글 무엇에 쓸거나
이름난 조상의 집 그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쪽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 옆에 국과가 향기를 뿜어 올리네.
<‘삼신산쌍계사’라는 현판이 있는 일주문> <호남중부지역의 논> <옥과 섬진강자연학습원>
지리산과 섬진강을 아우르는 남원 중심의 호남동부문화권은 역사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변방으로 인식되어 왔다. 지리적으로 중앙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군사적 긴장과 충돌이 빈번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찰이 들어섰고 16-17세기에 임병양란을 거치면서 은둔과 도피처로 삼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었다. 삼남지방의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고 자연 재해와 사회적 혼란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1970년대 이후 도시화·산업화를 거치면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교통망의 보급과 개량으로 산지는 여행과 관광의 주요 목적지로 탈바꿈하며 여가생활의 중요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3. 남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동부문화권의 문예콘텐츠
지리산의 성모신앙은 신라 때 노고단에 세운 남악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는 국토를 수호하는 다섯 산을 지정하고, 지리산을 남악이라 하였다. <남원지>에는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산이라 하여 남악사를 세우고 ‘지리산지신’이라는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왕명으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고유 신앙인 성모신앙과 산신신앙은 부처와 보살로 대체 한 것이다. 지리산의 불교 승려인 법우화상이 ‘무당의 시조’로 이야기되는 설화는 지리산 고유 신앙이 불교와 융합된 것으로 석장승이 사찰입구에 유독 많이 서 있는 것도 특징이다. 지리산의 암천사(巖川寺)에 있던 법우화상이 천왕봉에 이르러 여인으로 변한 성모천왕(聖母天王)과 부부의 연을 맺고 8명의 딸을 낳아 무술을 가르쳐 전국에 무업을 행하였다는 전설이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 전한다. 당시 사람들은 지리산인 이 성모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로 상징되었던 지모신(地母神)이라고 생각했다.
호남동부지역에는 ’달궁전설‘, ‘호성암전설’, ‘바람바위전설’, 산신바위전설‘등 다양한 설화가 내려온다. 그 중에 ’달궁전설‘을 소개하자면 우선 <용성지(龍城誌)>(조선 숙종 28년)에는 지리산 기슭에서 남원부까지는 50리나 되는 험한 길인데 마한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성이 황과 정인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고 그때부터 고개이름을 황령과 정령이라고 하였다. 그 도성터는 산내면 달궁리로 남원땅이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이 쓴 <황령기>에 의하면 달궁에 사람들이 와서 살기 시작하여 촌락 수십여 촌이 형성되었으나 신해년(영조 7년, 1731)에 한물이 지고 사태가 반야봉에서 무너져 내려와 마을 전체를 덮어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달궁터에 관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우리 소설사에서 작가가 명확하게 밝혀진 선구적 작품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든다.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작품 중 ‘만복사저포기’의 줄거리는 저포(樗蒲)라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지면서 하는 내기로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통해 간절히 바라던 배필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 여인은 고려 말 일본 해적이 섬진강 요천을 타고 올라와 노략질 하던 중에 억울하게 죽은 여인이다. 양생은 그녀의 환생담을 듣고 그 원을 푼다는 전기소설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 때 지은 사찰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사찰이다. 김시습이 23세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방랑 중에 남원을 찾아 와 ‘광한루에 오르니 피리 소리 들린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만복사저포기’에 남원 여인의 환신이 삼대를 통해 양생을 받들겠다고 약속한 것은 작가가 세종에게서 받은 은총에 보답하겠다는 염원을 보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조위한의 한문소설「최척전」에도 만복사가 나온다. 이 작품은 주인공 최척과 옥영은 전쟁 때문에 흩어진 가족이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고향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조위한은 자신이 남원 주포에 살 때 최척이 찾아와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밝혀 놓았다. 조위한은 광해군에 대립한 서인으로 벼슬길이 막혀 남원에 은거해 있었다. 서장관으로 중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그는 당시 남원성전투를 겪은 백성들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동아시아의 사정과 맞물려서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17세기부터 부녀자를 중심으로 널리 보급된 국문소설은 양반 사대부 여성들의 교양과 취미였다. 18세기에는 흥부전과 심청전, 군담소설과 애정소설 등이 유행하면서 일부가 판소리로 불려졌다. 춘향전은 판소리 12마당 중 하나로 18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소리를 정리한 사람은 신재효이다. 영조 때 유진한이 남긴 <만화집>에 1754년 호남지방을 유람하면서 보고 들은 판소리 ‘춘향가’를 한시로 번역해 실어 놓았다. 창극조의 본래 이름은 ‘판소리’로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에 따르면 한 사람은 서고 한 사람은 앉아서, 선 사람은 소리하고 앉은 사람은 북으로 장단을 맞춘다. 판소리를 부르는 광대들은 농촌과 어촌을 돌아다니며, 또는 서울에서 등과한 사람에게 취재되어 그들의 행하로 생계를 이었고, 사회에서 대접 받지 못하면서도 재주를 계승·발전시켜 왔다. 그렇게 판소리를 계승하여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호남 출신으로 지역적 특성과 계보에 따라 동편제와 서편제와 중고제로 나눈다. 전라도 남원 구례 등지의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 동편제는 지리산 자락으로 계곡과 폭포수 곳곳에서 소리공부를 하였기에 웅장하고 선이 굵은 남성적인 소리로 송흥록-송광록-송만갑계, 김세종계 등의 파로 나뉘면서 발전하였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가 있다. 광한루는 조선의 재상 황희가 세웠고 1626년에 개축했다. 원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으나 정인지가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 ‘광한청허부’와 닮았다고 하여 ‘광한루’로 고쳐 불렀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퇴기 월매의 외동딸 춘향의 로맨스로 이도령의 아버지가 서울로 옮기고 춘향은 새로 부임한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면서 춘향이 고초를 겪게 된다.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부사의 생일 잔칫날 각 읍의 수령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사출두를 하여 춘향을 구하고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로 처음에는 판소리로 불리다가 나중에 소설로 정착되었다. 춘향전은 근대 원각사 이후에 창극이 되었으며, 그 후 희곡 영화 시나리오 뮤지컬 오페라 등의 다양한 문예콘텐츠로 활용되었다.
<화개장터의 김동리 소설 ‘역마’조형물> <곡성문화원 판소리대회> <곡성기차마을에 있는 추억의 영화촬영장>
춘향가처럼 지리산을 서사구조의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판소리는 그 외에도 흥보가 변강쇠타령 등이 있다. 흥보가는 남원군 인월면 팔량치 고개를 배경으로 하고, 변강쇠타령은 서도의 계집 옹녀와 남도의 사내 변강쇠가 각기 상당한 음란의 경력을 가지며 결국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산다는 이야기이다.
남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호남동부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현대문학은 김동리의「역마」를 시작으로 문순태의「피아골」, 박경리의「토지」, 이병주의「지리산」, 이태의「남부군」, 조정래의「태백산맥」, 최명희의「혼불」, 최정주의 「이화중선」등이 있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필자가 살고 있는 문화광역권의 문화적 특성과 문예콘텐츠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지역문화에 대한 고찰을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문화권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광역권을 설정하는 일이 우선적이다. 설정기준과 설정구분은 본 강의를 담당하는 손종흠 교수의 견해에 따랐다. 그 결과 필자가 고찰해야 할 문화권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한 호남동부문화권으로 정하였다.
호남동부지역의 중심 도시인 남원은 곡성에서 승용차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열차로는 곡성역 바로 다음 역에 해당된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이며 언어적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거의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 남·북도로 나뉘어졌지만 오랜 역사적 문화적 환경으로 보면 타 지역권과는 차별적이면서도 두 소문화권에서는 매우 동질적인 특성을 보인다. 곡성에 산지 10여 년이 된 필자는 대다수의 곡성사람들이 남원과 구례 등 거리상 가까운 지역민들과 문화적·경제적 교류가 지금까지도 매우 활발하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광주광역시와 남원시를 오가는 일이 많은 편이니 생활권역 면에서도 호남동부지역을 한데 묶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다.
한국에서 지역주의는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정치권력의 중요한 변수로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동남, 서남, 북의 대결 구도가 부족사회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한 부족시대 이후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들 지역 간의 사회적, 정치적 대결구도는 점차 굳어졌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그 갈등구조는 기득권 세력의 존속과 연관되면서 정책적으로 조작된 신화를 통하여 유지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왕조시대에 절대권력 밑에서 불평등한 지역구조에 대한 소외지역민의 잠재적 저항이 표면화되기도 하였으나, 절대 권력의 폭력 앞에서 무참히 진압되곤 하였다.
본고를 통해 호남동부지역권은 앞으로 필자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연구해 봐야할 문화권역이란 판단이 생겼다. 공공연하게 들리는 호남사람에 대한 차별적인 지역주의에서부터 벗어나 좀 더 넓은 안목으로 새로운 문예콘텐츠 개발을 위한 작업으로서 한민족의 문화권을 깊이 있게 탐구해 나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참고문헌
1. 원자료
손종흠,<3강 문화광역권의 설정, 문화고속도로, 문화키워드> 강의록.
2. 단행본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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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국사학과,「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지리산문화권」,역사공간,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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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2,438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4,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2.
3. 인터넷 자료
남원시 홈페이지(www.namwon.go.kr).
네이버 지식백과 용어해설.
4. 사진자료는 모두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임.
첫댓글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