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⑴ 당파와 신유(辛酉)박해(1801)
동인⇒북인 서인⇒소론
남인→攻西派 노론→僻派 (정순황후)
信西派 (채재공) 時派 (사도세자)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 싸움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먼저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훈구파는 공신전을 받아 세습하면서 부와 권력을 유지했다. 이에 대해 반발 했던 세력은 사림(士林)이었다. 훈구파는 여러차례의 사화를 일으켜서 사림세력의 권력진출을 막았다.
그후 사림이 집권에 성공한 이후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북인은 주로 경남 진주에 뿌리를 둔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이었다. 이들은 잠시 광해군 때에 집권한 이후 권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서인들 가운데 노론(Old School)은 전통 주자학을 지키려고 했고, 소론(New School)은 새로운 학문적 개혁을 원했다. 그러나 주로 권력은 노론의 손에 있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구분되었다. 벽파는 영조를 지지했던 왕당파 그룹이고, 시파는 사도세자를 옹호하며 따랐던 개혁파였다. 벽파는 정순황후를 중심으로 천주교를 박해하는 세력이 되었다. 남인 계열도 서학에 대해 공격적이었던 공서파와 우호적이었던 신서파로 나뉘었다.
영조의 어진 정조의 어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집권하면서 정조는 남인 신서파와 노론의 시파를 자신의 중신으로 등용했다. 이들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묵인하는 입장을 택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천주교 박해가 없고 천주교는 크게 발전했다. 반면 정조가 죽고 나서 벽파가 재집권하면서 천주교 박해는 다시 강화되었다.
정조의 신임을 얻었던 우의정 신서파의 체제공이 1799년에 사망했다. 설상가상 1800년에 정조가 승하했다. 그 뒤를 이어 순조가 11세의어린 나이로 등극하면서 정순황후(벽파)가 수렴첨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남인 시파를 박멸할 목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지시했다. 이것이 신유박해(1801)이다.
당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부활시켜 천주교인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게 했고 사학(邪學)을 뿌리 뽑으라고 교서를 반포했다. 300명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정약용은 19년간 유배를 떠났다.
순교자: 주문모 신부, 권철신,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황사영, 황심,
사 약: 왕족 은언군, 부인 송 마리아, 며느리 신마리아
배 교: 정약전, 정약용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조선천주교회는 목자없는 30년의 세월을 박해 가운데 보냈다.
주리-영조때 사용을 금지했으나
후에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
⑵ 황사영의 백서(帛書)와 초기 천주교인의 대외인식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천주교회 박멸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이 강구되었다. 그것은 황사영이 충청도 제천 배론의 한 석굴에서 쓴 편지안에 담겨 있었다. 황사영은 62cm×38cm 비단에 13,000자의 편지를 붓으로 써서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가지고 가던 황심이 체포되면서 편지가 발각되었고 이 편지는 조선 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9월 25일 황사영도 체포되었다.
황사영
황사영의 백서
백서의 산실, 배론의 토굴
백서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 조선 천주교 박해의 경위,
둘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적
셋째: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
ⓐ 淸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를 감호할 것
ⓑ 淸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아 천주교를 확산하도록 주선할 것
ⓒ 수 백 척의 서양함대와 5-6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정부가 전교(傳敎)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할 것
황사영은 끝 부분에서 “나라가 망해도 성교(聖敎)의 표는 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천주교가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夫) 종교, 대역부도(大易不道’)한 사학(邪學)이라는 조선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
황사영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는 유교국가 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외국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사영은 당시 교황청이 서구국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에 외세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도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
사실 폐쇄된 조선 사회 안에서 국제 사회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힘으로 풀려고 한 것도 오류가 많았다. 이 사건은 신앙의 양심과 국가 권력이 충돌할 때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 많은 시사점을 준다.
2. 조선교구의 창설과 기해ㆍ병오 박해
⑴ 조선교구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신유박해로 인한 조선천주교회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인들은 모여들었고 재난을 당한 교인 가족을 돌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1세대의 고난을 닫고 2세대는 교회재건 운동을 일으켰다. 그 주도자들은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등이었다.
1811년 이여진은 중국사신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 북경에 입국하여 신부 영입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시기 중국의 천주교회는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삐레스 신부가 주교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공해서 교황을 감금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선천주교회의 요청은 무산되었다.
1816년 말부터 정하상은 신부 영입운동을 전개했다. 1827년 교황 레오 12세는 중국의 포교지에 소속되어 있었던 조선을 독립 포교지로 선포하고 "파리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조선 선교를 담당하게 했다.
1829년 브루기에르(B. Bruguiere)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 1831년 교황은 조선 교구를 설정(vicariate apostolic)하고 브루기에르를 초대주교(vicariate apostolic : 선교사 주교)로 파송했다.
초대교구장 브루기에르
원래 중국과 조선은 포르투갈 교회의 치리권 아래 있었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의 천주교회 선교를 담당하게 되면서 북경천주교회와 파리외방선교회 사이에는 조선 선교권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되었다. 포르투갈 신부들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조정하여 프랑스 신부의 입국을 방해 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조선의 전교는 중국인이 맡아야 무리없이 진행될 수 있는데 서양인 신부는 활동이 어려다는 주장을 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대주교 브루기에르는 조선 국경을 떠돌다 조선에 들어와 지도 못하고 1835년 만주에서 사망했다. 신부 영입운동을 벌리던 조선교회는 중국 천주교회의 농간으로 신부 영입을 방해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후에 조선교회는 중국신부의 농간을 알고 다시 신부를 파송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을 하게 되었다.
조선신자들이 교황 그레고리 16세에게 보낸 편지 (1835.1.19)
“주(문모) 신부님이 처형된 후 우리나라에는 30여 년 동안이나 목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중략) 저희가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갈 수 있도록 구원의 손을 뻗쳐주실 것을 의심치 않겠습니다. 그러면 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나이까. 이후 다른 서양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기를 원하시면, 다 같이 성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모셔 들이겠습니다. 저희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고 지키겠습니다.”
⑵ 기해(己亥) 박해(1839)와 병오(丙午) 박해(1846)
조선천주교회의 신부영입운동의 결과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집행했다. 1837년 1월 샤스땅 신부가 입국했고, 같은해 12월에 앙베르 주교가 입국했다. 앙베르 주교는 1836년 4월 교황에 의해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모방 샤스탕 앙베르 주교(2대교구장)
세 사람의 프랑스 신부들의 활략으로 1836년에는 교인들이 9천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1836년 말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조선 청년들이 마카오에 가서 신학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천주교 박해는 정치 동향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1805년 벽파의 대모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시파)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조선의 정치는 문벌 정치에서 족벌 정치로 더 악화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시파의 집권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 되었고 그 시기 천주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는 풍양 조씨 세력은 음모를 키우고 있었다. 충양 조씨는 효명세자의 외척이었다. 효명이 헌종으로 즉위하는 순간 순조의왕비 순원 황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풍양 조씨의 은퇴 압력이 거셌다.
1839년 풍양 조씨 세력은 순원 황후에게 끈질기게 천주교 박해를 요청했다. 그 결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졌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조선천주교 2세대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참수 54명, 옥사 60명, 배교자 40-50여명이 발행했다.
결국 앙베르 주교가 체포되었다. 앙베르 주교는 서양신부를 찾기까지 박해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모방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였다. 그의 편지에는 "좋은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감동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조정에서는 〈척사윤음〉문서를 발표했다. 윤음은 임금의 교지로서 천주교가 유교의 천륜과 인륜에 벗어난 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응답하는 내용의 〈상재상서〉를 조정에 올렸다. 이 글은 조선교회 최초의 변증서로서 속꼽히는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황사영의 백서가 외세를 의지하려 했던 반면 이 글은 변증과 호소로서 신앙을 지키려 했다는 점이 큰 평가를 받고 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 부분인용
* 천지 위에는 주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물이요 둘은 양심이요 셋은 성경입니다. *공자는 "하늘에 죄를 얻으면 기도를 바칠 곳이 없나니라" 고 하였습니다. *경교비를 세우고 위성(魏徵) 방현령(房玄齡)같은 대가들도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았나이다. * 계명이란 천주께서 계시로서 가르쳐 주신 열가지 계명입니다. *무릇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이요 둘째는 각혼이요 셋째는 영혼입니다. *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나리는 결정이 한번 이루어지면 다시는 변경할 도리가 없습니다. *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 대군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는 더욱 커 비할 데가 없습니다. *[천주교가]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나라에 해를 끼쳤습니까? 그 하는 일을 보고 그 행실을 살피면 그 인간이 어떠함을 알 수 있고 그 가르침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역적질을 하였습니까? 도둑질을 하였습니까? 일직이 간음을 하였습니까? 살인을 하였습니까? * 아 저 성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홀로 우리 임금님의 백성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 젯상을 차려 놓음이 헛된 일이 아니면 거짓된 일입니다. 양반 집의 신주라고 하는 것도 천주교에서는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신의 기백과 육체의 골격이 서로 연결된 것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비라 어미라 함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목수가 만든 것이요 분을 칠하고 먹을 찍은 것을 가지고 참 아비와 참 어미라 부릅니까? 바른 이치에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지 아니합니다.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
병오(丙午) 박해(1846)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우강면, 순교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방 신부에 의해 신부 후보생으로 선택되어서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고 1845년 8월에 서품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로 신부들이 전부 순교하였기 때문에 교황청은 1843년 1월 페레올(J.J. Perreol)신부를 조선의 3대 주교로 임명을 하였다.
1843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는 주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M. Daveluy) 신부와 함께 서해안 강경을 통해 입국하여 서울과 충청도에 포교활동을하였다.
페뢰올 (3대 주교) 다불위 신부(후에 5대 주교)
김대건 신부의 뼈를 근거로 한 복원된 얼굴 상
김대선 신부의 친필 서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을 밀입국시키려다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기에 프랑스 함대는 기해박해(1839)때 처형당한 세명의 신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그 인품과 학식으로 인해 병졸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함대가 어설프게 력시위를 하고 물러난 사실을 알고 그것이 다시 화를 부를 것임을 직감했다.
1846년 7월 김대건 신부는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임군집과 함께 새남터에서 25세로 처형당했다. 기해ㆍ병오 박해로 순교한 교인 중 79명이 복자로 시복(1925)되었고 성인으로 시성(1984)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회는 상민, 여성계층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번호 |
박해사건 |
결과 |
1 |
을사추조적발사건 (정조 9년, 1785) |
이벽의 가택감금, 김범우의 유배생활과 그 여파로 사망 |
2 |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 |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
3 |
신유박해(순교 1년, 1801) |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
4 |
을해박해(순조 1년, 1815) |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
5 |
정해박해(순조 1년, 1827) |
전라도 교우 240여명을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명 체포당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
6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명 순교 |
7 |
병오박해(헌종 12년, 1846) |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
8 |
병인박해(고종 3년, 1866) |
대원군에 의해 8,000 - 2만 여명 순교 |
9 |
제주도 교난(고종 3년,1901) |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
3. 병인(丙寅)박해와 조선후기 사회변화(1866-1873)
⑴ 교회의 재건과 발전
사약을 받아 죽은 은원군의 손자 강화도령 철종이 등극하였다. 이때 풍양 조씨 세도가 몰락하고 순원 왕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시파의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부상했고 천주교의 박해가 중지 되면서 천주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1852년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하였고 1854년에는 장수(F.S. Jansou) 신부가 입국하였다.
1853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했고 1855년 베르뇌 주교와 4명 신부가 입국을 하게 된다.
1856년 충청도 배론에 신학당을 설립하고 다블뤼 신부가 원장, 쁘르디에 신부가 교수로서
1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신학수업을 시작했다.
1857년 교인 13000명으로 교세가 증가했다.
베론 신학교 1855-1866년 (1931년 촬영)
1863년 철종이 승하학 고종이 즉위했다. 철종 시대는 천주교는 박해 없이 성장했으나
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는 다시한번 박해의 피바람을 맞게 된다.
1865년 천주교의 교세는 2만3천여명의 교인 외국인 신부는 12명으로 증가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총20명의
프랑스 신부가 입국하게 된 것이다.
박해에 대한 정리
사건명 |
신유박해 |
기해박해 |
병오박해 |
병인박해 |
시기 |
1801 |
1839 |
1846 |
1866-1873 |
배경 |
정조 승하
채재공 사망
정순황후의 수렴청정 |
정하상 신부영입운동
파리외방전교회가 포교
모방, 샤스탕, 앵베르 주교 입국
천주교의 성장 |
김대건신부의 체포
프랑스함대의 무력시위 |
천주교의 성장과 외세의 침략
1860 영불 연합군의 북경함락
1866 제너럴셔먼호
병인양요, 오페르트도굴사건,
1871 신미양요 |
가해자 |
정순황후/노론벽파 |
풍양조씨세력 |
|
대원군 |
피해자 |
남인시파 전멸 |
안동김씨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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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방법 |
오가작통법 |
사학통치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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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황사영의 백서 |
척사윤음/ 정하상의 상재상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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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순교자 |
주문모 신부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강완숙
은언군 부인 며느리
순교 100명/유배 400명 |
앵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땅 신부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참수54, 옥사 60, 배교자 40-50여명/
79명 성인 |
김대건 신부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임군집 등 |
베르네 주교, 브르뜨니에르,
도리, 블리외, 다블위, 위앵,
오메뜨르, 홍봉주 남종삼
장주기 황석두/ 2만3천 교인 |
천주교의 문서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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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유학자에서 중인, 상인, 천민으로 전파되어 가면서 한글교리서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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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절요》, 《성교요리문답》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1840년대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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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은 《성교요지》를 정약용은《주교요지》의 교리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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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불뤼 신부는 조선인 순교자들의 자료를 모아 천주교회사의 근거를 남겼고 천주교의 기본교리서인 《신명초행》《회죄직지》《령셰대의》《셩찰긔략》등을 번역 혹은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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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교리서들을 필사 했으나 1864년 서울 두 곳에 목판 인쇄소를 설치하고 10여종의 교리서를 인쇄했다.이로써 천주교의 확대는 한글문화를 재창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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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는 〈천주가사〉4.4조 민요조 노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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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성직자들은 후대를 위해 조선어 교육, 문법책, 사전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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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루띠에 신부는《조선문법》과 《라틴-조선-중국어 사전》을 지었으나 1866년 병인교난 때에 소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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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불위 신부느 1891년 《조선어-라틴어 사전》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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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델은 《조선문법책, 조선어-불란서어 사전》(1880)을 출판했다.
⑵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 선박들의 출현
철종이 사망한 후 풍양조씨 신정왕후는 대원군의 아들 고종을 즉위시켰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서원을철폐했고, 청주의 만동묘를 철폐했다. 그리고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을 증건했다. 이러한 행동은 보수 유림의 반발과 민중 계층의 사회적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흥선대원군
바로 이러한 때에 영국ㆍ프랑스ㆍ러시아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고 이양선들이 침략을 하기 시작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북경을 침략하여 함락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대원군을 쇄국 정책으로 이끌었고 다시 천주교 박해를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⑶ 병인박해와 봉건세력의 몰락
1866~1873년까지 대원군은 장기간 집권했으며 실각할 때까지 8년 동안 전국적으로 8천~2만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했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평양공격,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공격과 약탈, 오페르트의 남연군 도굴사건, 1871년 미국함대가 일으킨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천주교 박해는 장기화 되었다.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1866년 2월 정부는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이후 천주교회의 전국적 교세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12명의 신부, 2만3천의 교세, 배론의 신학교, 목판인쇄소 등) 정부는 9명의 신부를 체포하여 교우들과 함께 처형하였다.
1866년 6월말 리델 신부는 조선을 탈출하고 산동성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 함대 로즈 사령관을 찾아가서 페롱과 깔래 신부를 구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병인양요 (1866. 10.11~11.11) 7척의 프랑스 군함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 달간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무장 함대의 길안내 겸 통역을 담당한 자들은 리델 신부와 3인의 한국 천주교인들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강화성에서 은괘 888.5kg과 귀중 사료와 문화재를 약탈해서 강화도를 떠나게 되었다.
병인양요 프랑스 군인
1868년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E. Oppert)는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 묘소를 도굴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왕족의 묘소에 보화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이때 천주교 신부들은 조선이 조상의 묘를 끔찍이 귀히 여기는 것을 알고 남연군의 시신을 도굴에서 천주교회의 자유를 줄 것을 조건으로 교환하겠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을 하였다. 그래서 페롱, 깔래, 최선일 등 조선인 교인들은 오페르트의 도굴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도굴에 실패하였다.
그후 대원군의 분노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66-68년 사이에 약 2천명의 교인이 살해 되었다.
신미양요
1871년 6월 미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4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했다. 그들은 많은 관민을 살상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1964년 24명이 시복되었고 1984년에 시성되었다.)
로스제독의 강화도 상륙 작전회의 1871
강화도 초지진을 공격하는 미군들 초지진을 정령한 미군들
미군 함대에 포로가 된 조선병사들
광서진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미군들
미함대의 병사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물리쳤다고 생각하고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펴나갔다.
척화비
천주교회는 '무군무부의 종교',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의 선봉'으로 인식되어 척사적 보수세력으로부터 잔혹한 박해를 받았으나 민중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로 정착했다. 천주교회가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끼친 공헌과 순교자의 신앙정신에 대해서는 평가할 부분이 크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고난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