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6 : 민란 발생과 고려-몽고 외교 설전
04.09.18
고려와 몽골간에 화친이 성립되자 몽골군은 철수하면서 다루가치를 남겨두었다. 다루가치란 몽골어로 '진압하는 자'란 뜻인데 점령지에서 행정 감독관이 되었다. 몽골군은 72명의 다루가치를 개경 및 북계의 여러 지역에 잔류시키고 고려의 내정을 감시하도록 했다.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이들 다루가치였다. 이들은 서북면 지역의 변방에 머물면서 고려 조정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필요한 경우 개경에까지 들어와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최이가 천도를 전격적으로 단행하는 데는 이들 다루가치의 존재도 한몫했다. 다루가치의 내정 감독은 최이의 권력을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이는 이 다루가치 문제를 정면으로 대응했다. 최이는 강화도로 거처를 옮긴 후인 1232년 7월 초, 비밀리에 장군 윤복창을 불러 약간의 군대를 이끌고 서북면으로 가서 여러 성에 머물고 있는 다루가치들을 무장해제시키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윤복창은 그 임무를 수행하던 중 선주(평북 선천)에서 다루가치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국왕 고종이 결국 강화도로 옮긴 직후인 그해 8월 초, 최이는 다시 한 번 다루가치 제거를 계획하였다. 이번에는 무장해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서경순무사로 있는 민희와 그 부하 최자온 등은 최이의 밀명을 받고 군사를 동원하여 다루가치를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런 낌새를 알아챈 서경의 관리와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행여나 보복당할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민희가 이를 무시하고 계획대로 일을 벌이려 하자, 서경 사람들은 결국 반기를 들고 말았다. 서경 유수 최림수를 비롯한 그 휘하 관리들은 최자온을 옥에 가두고, 자신들은 대동강 하구의 저도라는 섬으로 도주했다.
몽골군의 주침입로인 서북면에서는 당연히 몽골과의 전쟁을 전혀 원치 않았다. 강화도로 피신한 최이 정권은 안전할 지 모르지만, 다른 지역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특히 침략의 길목에 있는 서북면 사람들은 강화도 천도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천도가 몽골의 침략을 다시 불러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이 정권의 천도는 전혀 부적절한 시기에 오직 정권 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당연히 그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고종과 문무관료, 백성들이 빠져나간 개성 안은 무방비 상태였다. 강화도의 강도 정부는 아직 자리도 잡지 못했고, 개경은 이미 행정과 치안이 정지된 상태였다.
민가는 더욱 처참했다. 당시 개경의 호수는 총 10만 호, 약 50만명이 넘는 거대 도시였다. 이러한 개경의 민가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어지러웠고 을씨년스러웠다.
천도에 대한 반발은 강화도로의 이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나타났다. 국왕 일행이 도성을 빠져나간 직후, 어사대에서 잡역을 담당하던 이통이란 자가 경기도의 초적과 도성 안의 노비들을 불러모아 왕경유수병마사로 임명된 김중구와 김인경을 내쫓고 반군을 조직하여 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개경 주변의 여러 절에 첩문까지 띄워 승려들을 불러들이고, 관청이나 개인 저택의 곡식을 약탈하였다.
강도 정부는 황망한 와중에도 신속히 3군으로 편성된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토벌군의 선봉대가 바로 도성 안으로 밀고 들어가 주모자 이통을 잡아 죽이고 뒤이어 토벌군의 본대가 들이닥치자 반군의 세력은 대부분 잡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천도하기 이전인 1232년 1월, 충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앞서 몽골의 1차 침략 때 충주에서는 관청의 노비와 천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힘을 합쳐 몽골군을 막아낸 바 있었다.
헌데 이들 노비와 천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우선 관리들이 몽골군과 싸우지 않고 도망쳤고 그런 자들이 몽골군이 물러간 뒤에야 돌아와, 관청에서 쓰던 은그릇 등을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씌워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려 하자 여기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충주의 노비와 천민들은 반란을 일으킨 김에 평소 자신들을 학대하고 착취한 토호세력들까지 죽였다. 이들은 피억압계층으로 평소 갖고 있던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 순으로 보아서 충주의 반란은 천도하기 전의 일이니 처음부터 천도에 반발한 것은 아니었다.
최이 정권은 우선 안무사를 파견해 회유에 나섰다. 처음에는 이런 방식이 성공했는지 노비들의 지도자인 지광수와 승려 우본은 전공을 인정받고 최이의 포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천도가 단행된 후인 1232년 8월, 충주에서는 다시 반란이 터졌다. 주모자는 승려 우본이었다. 마침 그때는 천도에 반발하여 일어난 개경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였다. 혹시 개경에서 토벌군에 맞서 싸우다 살아남은 반군의 잔당이 충주로 내려와 반란을 선동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개경의 반란을 진압한 토벌군이 바로 충주로 내려오자 난을 일으킨 노비들은 당황하여 승려 우본을 죽여 토벌군에게 수급을 바치고 자신들의 구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토벌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충주성으로 들어와 남아 있던 노비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자, 난의 주모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충주의 반란은 1232년 9월 진압되었다.
천도가 끝난 후인 1233년 (고종 20년) 4월, 또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고려의 조창 가운데 하나인 개경의 선의문 밖에 있던 곡식 창고 용문창에서였다.
난을 일으킨 주모자는 인근의 초적인 거복과 왕심이란 자였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아마 창고의 식량 약탈을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최이는 상장군 이자성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토록 하였다. 거복과 왕심이 참살되어 용문창의 난은 진정되었으나 한 달도 안되어 같은 해 5월에 이번에는 저 멀리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경주는 최씨 정권과 악연이 깊은 곳이었다. 김사미, 효심의 난으로 시작된 신라 부흥 운동은 이의민 정권과도 연계된 것이었는데, 최이의 아버지 최충헌은 집권 초기 이를 진압하기 위해 무진 애를 먹었다. 진압하기는 했지만 경주 지역에는 여전히 반 최씨 정권의 성향이 남아 있었다.
(무인시대에서 이의민이 황룡 운운하며 신라 부흥에 연관된 장면이 나오는데 단순히 픽션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이의민이 반란 세력과 손을 잡고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은 적도 있었고 또 최충헌 정권이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건 민란이 빈번히 일어났으니까요. 나중에 몽골군의 2차 침략이 벌어지자 전남에서는 백제 부흥운동까지 일어납니다)
경주의 민란은 최산과 이유가 중심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경주의 토착 세력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으나 그 규모가 수만명이 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만만치 찮은 세력이었음은 분명하다. 최이 정권과 갑작스러운 강화 천도에 대한 반발이었으리라.
최이는 민란 진압에 경험이 많은 이자성을 다시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급히 경주로 파견하였다. 이자성은 진압군을 이끌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영주(경북 영천)에 입성하였다.
이자성은 바로 반란군을 선제 공격하였다. 반란군은 채 전투 태세를 갖추기 전에 급습을 당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진압 후 그 시체가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나 참상이 짐작된다.
용문창의 반란이나 경주 민란이 강화 천도에 직접적으로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이의 갑작스러운 천도가 그 계기로 작용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앞서 이통의 반란과 충주의 반란은 모두 최이 정권의 천도에 직접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도는 민심을 배반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강화 천도의 소식은 몽골에게도 알려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대사가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몽골은 사신을 보내 천도 문제를 추궁해왔다. 이에 대해 고려 조정은 앞으로 몽골군이 대규모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런 말을 퍼뜨린 자는 몽골 군영에서 도망쳐 나온 송립장이란 사람이었다.
송립장은 1232년 3월 살리타이에게 사신을 파견할 때 통역관을 수행했던 하급장교였는데, 그런 그가 살리타이 군영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같은 해 6월 15일이고, 최이가 사저에서 천도 여부를 강압적으로 결론짓고 천도를 공식 선포한 날은 그 다음날인 16일이었다. 그러니까 송립장의 말은 천도를 전격적으로 단행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몽골은 다시 사신을 파견해 고려를 힐책했는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였다.
1. 송립장의 말로 핑계대지 말고, 강화도에서 어서 나와라.
2. 다루가치들을 체포해 죽이려고 했다는 데 사실인가?
3. 투항하려면 섬에서 나와 우리를 맞이하고, 싫으면 군대를 동원해 서로 싸워보자!
이같이 강경한 첩문을 받은 고려는 1232년 9월, 고종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1. 몽골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으로 백성들은 모두 흩어져 숨었다. 많지 않은 백성으로 대국이 요구한 공물을 조달하려면 남아 있는 백성들을 강화도에 모아야만 한다. 다른 뜻은 없다.
2. 개경과 서북면에 주둔한 다루가치들에게 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는데,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3. 섬으로 들어간 일을 미리 알리지 못해 송구스러우며, 투항하려는 마음은 한결같으니 부디 이해해 달라.
그러나 이런 답서를 받아든 몽골은 더욱 구체적인 요구 사항과 질책성 첩문을 다시 써서 보냈다.
1. 국왕이 직접 오고, 그렇지 않으면 최영공(최이)를 보내라.
2. 요구한 공물은 빠짐없이 정확하게 진상해라.
3. 조숙창을 보내고, 진상을 알아볼 테니 송립장도 함께 압송하라.
4. 동진국을 정복하는 데 군대를 보내어 협조하라.
5. 호구를 정확히 헤아려 보고하라.
6. 송립장은 말은 거짓이다. 천도한 진짜 이유가 대체 뭐냐? 혹시 우리와 끝까지 싸우려는 속셈은 아니냐?
고려에서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는지 이번에는 답서 외에도 많은 진정성 문건과 공물을 함께 갖추어 보냈다. 1232년 11월의 일이었다.
모두 뭉뚱그려서 몽골 측의 요구에 대한 고려 측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1. 우리가 오히려 바라는 바이나 왕위는 하루도 비울 수 없으니,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 달라.
2. 성심껏 준비하였으나 적은 수의 백성으로 거둬들인 공물이 적어 정성만을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 추가로 보내겠다.
3. 조숙창은 상국(몽골)에서 돌아온 뒤 병에 걸려 보내기 어렵다. 송립장에 말에 놀라 천도하였으나 상국의 뜻이 아님을 알고 그 죄를 물어 먼 섬으로 유배 보냈는데, 파도가 심하여 그 소식이 끊어졌다.
4. 우리는 본래 소국이고 전란까지 겹쳐 남아 있는 군사가 적고 살아남은 자들도 다치고 병에 걸려 대국의 용병에는 쓸모가 없으니 그 사정을 헤아려 달라.
5.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대부분의 백성들이 도망쳐 산과 들은 무성한 풀밭으로 변했다. 국가의 존립만 허락해 준다면 남아 있는 백성들을 모아 대국을 섬기겠다.
6. 남아 있는 백성들을 모아 상국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다.
몽골 측의 요구에 대한 고려 측의 답변은 이처럼 대부분 일시적인 회피성 답변이거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런 눈가림식의 해명을 받아 본 몽골은 더욱 의구심을 품었다.
고려와 몽골간에 이처럼 외교적인 설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것이 2차 침략인데 1232년 8월에 침략하여 그해 12월에 물러났으니 침략 기간은 약 4개월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