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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덴시학의 철학성
홍문표 박사는 ‘에덴시학’의 철학을 일생동안 주장한다. 이 에덴은 환희와 즐거움과 쾌락이라는 사전상의 뜻이 있다. 그러고 보면 즐거움을 찾아 떠나는 신앙영웅의 신화를 쓰려는 철학인데 성경은 에덴이라는 성경상의 문법을 현재진행형으로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거기 (창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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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두시고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하나님이 여호와
현재진행형의 에덴의미는 그렇다면 성경 구약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의 에덴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이 되는 것이다. 이 현재진형은 가장 시적일 때 현재 진행형이 됨과 동일하다. 현재진행형의 시적 어법은 현재를 춤추기, 곧 즐기기이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이유는 과거의 일이건, 미래의 일이건 현재를 즐기는 시적 어법으로 하여 가장 행복한 시인이 된다. 즐겁게 사는 삶 또 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며 이를 즐기는 시인이 이 세상을 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1. 에덴 시학
1). 에덴의 ‘에’
길 떠나기의 새로운 도전을 늘 하는 홍문표 박사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인 하나님 바라기의 눈을 가진다. 눈은 히브리어로 에덴 ן의 글자 ((아인)에서 발견되어 진다. 눈은 히브리어로 ן(아인, Ayin/눈)이다. 발음은 ‘아인’이다. 수치는 70이다. 사람은 올바른 대답,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열리면 온 세계가 다시 보인다. 이 도전의 장은 한국말에서 ‘보이네’ 혹은 ‘뵈네’가 있다. 히브리어에 는 브에네, 뵈네가 있다.
성경 창세기는 하나님이 첫째날 - 일곱째 날까지를 지으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하나님이 행복을 느끼시는 단계이다.
홍 시인은 이에 관하여 시를 지었다.
처음으로
하늘 땅 만드시고
빛이 있으라
만물들이 빛을 따라 일어났으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늘엔 궁창이 있고
그 위엔 커다란 물 보따리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달빛으로
저 눈부신 별들의 보석상자
보시기에 좋았더라
숲속엔 노루 사슴 뛰어 놀고
바다엔 파닥이는 물고기들
공중엔 새들의 노래
정말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나
당신의 형상대로
모두가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렇게 펑펑 복을 내리셨으니
이제는 당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여호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은 세상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눈을 가진 홍 시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좋은 눈이다.
이 눈은 마태복음 5장 3절에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하였다. 이때의 가난은 순수한 예수님에게로 발 돋음 하는 마음의 순수를 말한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눈이다.
눈은 하나님 은혜를 받고 감사하는 때의 눈이다. 여호와의 선히 여기심에서 둘째 날의 노아는 여호와의 눈 안에 있는 하나님 은혜를 발견함으로써 방주를 짓는다. 노아는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홍시인은 평생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에덴시학을 철학으로 하여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눈 안에에 들어 에덴시학을 실천하려 한다.
홍 시인은 이 눈으로 물위를 걸어가는 삶을 산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마 5:14) 하였듯이 홍 시인의 눈은 밝음, 곧 불을 켜고 이 세상의 험한 파도 위를 걸어간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한 좌우명으로 살아간다.
(1) 에덴동산의 눈
홍문표 시인이 신앙영웅 신화를 쓰는 특징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하나님 일을 하려 한다. 전적으로 집중하는 말씀전하기의 설교 「얍봅강 가에서 다리를 절며절며」라는 한국문인교회 예배설교를 통하여 제시한다. 그것은 성경에서의 신앙영웅 야곱이 자신의 가솔들을 얍봅강을 다 건너 보내고 즉 모두 얍봅강을 건너게 한 후 자신은 밤새도록 얍봅강 가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자신의 신앙심을 돋우는데서 나타난다. 이 때의 눈은 하나님 바라기이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하나님을 간절히 바랄 때에 하나님을 만나, 밤을 지나면서 아침이 밝아오는 이 메지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된다. 하나님 바라기 눈이 될 때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 주시고 이전과는 다른 야곱이 되어 있다.
에덴동산의 히브리글자 눈은 히브리어 모음 부호 ‘체레’ֵ가 더하여 되었음으로 장모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안이라는 접속어두가 덧붙으면서 베에덴으로 발음된다. 베에~덴하고 길게 발음되는 에덴동산을 향한다. 하나님을 뱃속에 베에 된 홍 시이은 결사적인 하나님을 따라가는 눈을 가진다. 이 에덴 안에의 삶은 ‘베’가 불분리 접두사가 되어 앞의 ‘에’를 구속하면서 눈앞의 현실이다.
(2). 에덴의 ‘물고기’
에덴의 글자 에서는 물고기가 두 마리가 되어 있다. 성경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 명을 먹이고도 다섯광주리가 남았다. 홍시인은 물고기 뱃속, 하나님 눈 안에 든 사람이 된다. 요나가 물 고기 뱃속에서도 기도하였듯이 홍 시인은 하나님 바라기의 눈이 되어 있다. 혼자가기가 아닌 물고기가 되어 시집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에덴의 엔이 되어, 물고기의 ‘눈’이 되어 물 속을 유영한다.
라딘 박사는 영숭신화의 주기를 제시하였다. 영웅신화 주기는 트릭스터 주기, 토끼주기, 붉은 뿔 주기, 그리고 쌍둥이 주기이다.
① 트릭스터 주기
트릭스터 주기는 인생의 가장 초기의 미숙한 시기에 해당한다. 트릭스터는 자신의 행동이 육체적인 욕구에 따라 지배되는 인물로 정신 년령은 유아에 해당한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잔인하고 냉소적이며 냉정하다. 처음부터 동물의 형태를 띈 이 트리스트너는 계속해서 약탈하며 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길을 떠난다.
② 토끼주기
아직 성숙하지 못한 두 번째 영웅은 토끼 Hare이다. 토끼도 트릭스터와 같이 처음에는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 미숙성이 있다. 그는 아직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문화의 변환자로서의 모습이다. 위테바고족들이 의식양식을 치러줌으로써 토끼가 지닌 문화적 영향력이 하도 커서 그리스도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레이오우트 의식의 회원들은 토끼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토끼와 그리스트의 모습과 일치하여 가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리스트의 모습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이 인물은 트릭스터가 발전한 인물로 사회적 존재로 되면서 트릭스터 주기에서 나타난 본능적이며 유아적인 충동을 고쳐나간다. 라딘박사는 토끼는 개화된 이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영웅상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인 아버지가 토끼주기의 남성이다.
③ 붉은 뿔 주기
영웅주기의 세 번째 인물은 붉은 뿔 Red Horn이다. 애매모호한 사람으로 열 형제중 막내이다. 붉은 뿔은 경기에서 싸움하여 이기고 전투에서 뛰어난 인물이다. 시련을 거쳐서 영웅적인 요건을 갖추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붉은 뿔은 경제의식의 교활한 꾀를 부려서 굉장한 힘을 보인다. 붉은 뿔에게는 폭풍을 일으키는 새라고 불리는 번개새의 형상을 한 동반자가 있는데 그 새는 붉은 뿔의 약점을 들어낼 때면 도와준다. 이들이 힘을 합해 하는 일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악의 힘을 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힘과 수호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들의 업무가 끝나면 영웅은 붉은 뿔과 그의 아들들을 지상에 남겨 놓은 채 떠나 버린다.
④ 쌍둥이 주기
쌍둥이 주기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가 희생물이 되지 않고 이 지상에서 오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영웅이다. 쌍둥이는 원래 어머니 뱃속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있는 인물로 출생하면서 억지로 떨어져 생과 사가 같이 있는 인물이다. 쌍둥이는 언제나 친하며 다만 외형적으로만 다르지만 한 쪽이 너무 힘을 써버려서 병들고만 환자가 되어 버리고 한쪽이 이를 구해주는 영웅이다.
영웅신화의 특징은 이 지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기본 상징으로 한다. 영웅신화의 상징은 계절의 주기에서도 발견되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지만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나는 풀들이 은유적으로 되는 일이며 사람의 일생주기신화는 사람, 아버지는 이 지상에 아이들을 남기고 사라지는 예들의 신화가 존재한다.
신앙영웅신화를 쓰는 홍시인은 하나님 바라기의 눈이 되어 이 지상에서의 에덴을 실현하려 한다. 성경상에서의 히브리어로 그 수치는 50이다. 의미는 풍요이다. 푸르름을 늘 지향하는 홍시인의 눈은 『지상의 연가』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강물이 늘 푸르게 떠남에 매혹되어 있다.
에덴의 음가 n/ㄴ이 지닌 입 천장에 붙는 음가, 하늘바라기의 삶을 들고 홍시인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큰 뜻, 삶의 사역으로 늘 물고기의 눈이 된다. 홍 시인의 시집 『지상의 연가 -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물고기는 히브리어로 보면 두 마리 물고기이다. 처음 어두에서 한 번 그리고 어미형에서 한 번 더쓰이는 ןוּנ(눈/물고기)이다. 이 물고기 히브리어 눈 ןוּנ(눈/물고기)은 물고기 가운데 하나님 손이 있다. 그러기에 신앙영웅은 두렵지 않다. 길 떠나면서 홀로가 아닌 삶, 하나님이 도와주는 삶이 있다.
노벨 문학 수상 작품이기도 한 51년 영화 『쿼바디스』에서 베드로가 남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길을 모색한다. 그 시작은 비니키우스가 소국 공주 리기아에게 한 눈에 반해 정원에서 만나면서 막대기로 모래에 물고기를 그려 서로들 기독교인임을 알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둘은 이미 하나님 나라 이루기의 주인공이 된다.
신앙인은 혼자가 아니다. 물고기 그 쌍이 되어 에덴으로 가는 사람들은 처음 물고기 ן(엔)이 두 번째의 물고기 נ(엔) 사이에 하나님이 계셔서 평생 에덴시학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부합시킨다. 두 번째 사람으로서 거듭나는 삶에 충실하고자 이를 본받고 따라가는 이 때 신앙영웅의 신화가 쓰여진다.
믿는 사람들의 징표였던 『쿼바디스』에서 리기아가 그려 보인 물고기는 성경에서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4000 ~ 5000명)을 먹이고도 남는 사랑 나눔이 있다. 홍문표 교수는 언제나 그의 삶 앞에 대중이 있다.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그리고 강의를 하면서 늘 앞에 놓인 대상은 다수이다. 하나님 일을 함에 성숙되어진 홍교수는 잌크튜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눈이 된다. 물고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눈(영속자)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대상 7: 27)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곧 ÏΧθΥΣ로 Ϊησού(예수) χριστού(크리스토) θεός(에오스) ϒυίός(위오스) Σ의 약자 곧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믿는 신앙영웅 신화를 쓴다. 홍문표 교수는 늘 길 떠나면서 청년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의 실천으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에 감동한다.
목적성 있는 길 떠나기는 즐겁다. 행복하다.
창세기 2장 8절에서 보여주듯이 항상 현재진행형의 항상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거기 (창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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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창 2:10)
תוֹק ן אר ר
P.VHNG P.NE VQPA C.NMS
적시고 에덴에서 발원하여 강이
이 길은 성경에서 12회 반복된다. 이 에덴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막연하게 에덴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떠나기는 자가 된다.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가며 그들을 이끌어 에덴동산을 지키며 에덴을 갈고 닦아 생명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사명을 잊지 않는다.
성경 에덴의 길은 사막같은 길이라도 하나님으로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다. 지정된 장소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은 어디나 에덴이 실현되는 곳이다. 에덴은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 된 곳으로 소고와 비파가 있다. 가지가 많아 꽃이 아름답게 핀다. 물 대임을 받은 자들이 위로를 받는다. 이 에덴은 하나님에 의한 에덴동산이다.
이 에덴에 대한 학설에서는 노아의 식구가 올라간 아라라트산이 에덴이라는 학설도 있다. 고도 3,500 - 1,500 사이 중간지대는 훌륭한 목초와 향나무로 덥히어 오늘날도 주민들이 양떼를 방목한단다. 홍시인이 방목하는 잡지사는 늘 홍시인의 많은 자가비용을 보태어 작품을 실어주며 방목한다. 이 자부심은 시대를 넘는 하이퍼의 연결로 논문이며, 시비평에서 그대로 노출된다.
에덴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 아르메니아 인들이 노아 홍수 이후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사람이 있듯이 홍시인은 그의 향토 부여의 농장을 항상 신성시 한다. 이곳을 오가며 천국을 체험한다.
에덴동산의 전설은 에덴동산은 아락세스(Araxes) 골짜기에 있으며 마렌트(Marand)는 노아의 아내가 매장된 곳이라 한다. 알구리(Alghuri)는 대협곡 근처의 마을로서 노아가 처음으로 재배한 포도원이 있다고도 한다. 홍박사의 부인께서는 충남 부여 밤매향 농원에서 밤을 생산하여 그 깊은 심산을 향유한다.
에덴동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 미시스(Massis) 혹은 아르리다그(Agridagh) 산은 반 호수(Lake Van)에 약간 북동쪽에 위치하였다. 높이는 대략 해발 1, 700 피트이다. 전통적으로 이산을 아라라트 산으로 부른다. 그러나 아라라트 산은 아락세스(Araves) 골짜기로 알려져 있고,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로 알려져 있으며 아락시스강과 반과 오루미아 호수 사이 아르메니아 동쪽 산지에 있어서 노아의 방주가 머문 곳이라고 디렉스 바이블에서 제시한다. 마렌트(Marand)는 노아의 아내가 매장된 곳이며 알구리(Alghuri)는 대협곡 근처의 마을로서 노아가 처음으로 재배한 포도원이 있다는 곳이다.
홍시인의 그토록 좋아하는 홍시인의 아내는 현재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녹간마을 103번지 밤매향 자연농원에서 밤을 재배한다. 홍문표교수의 눈이 머무는 곳이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2). 에덴의 가슴
(1). 에덴의 ‘데’
가슴이 중요함은 큰 뜻을 품어서이다. 성경에서 에덴의 ‘데’는 가슴을 의미한다. 문을 의미한다. 문이 되는 이 ‘데’는 히브리어에서 발음을 ‘달레트’로 하며 수치는 4이며 히브리어로 달레트 곧 문이다. 의미는 가슴이며 음가는 ㄷ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이며 다윗은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이다. 언제든지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그 답대로 행동하였다. 많은 잘못이 있었지만 인간의 나약성 그대로를 고하며 하나님의 답을 기다린 사람이다.
중동지방 유대 민족의 장막 문을 말하는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을 통과하여야 하는 가슴인데 이 가슴의 의미가 바로 다윗이다. 홍시인은 태어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여면 태양리(太陽里) 일역(日歷) 마을을 가지고 있다. 하늘 역사가 일어난 태양마을이다.
이 상징성에 대한 하이퍼성은 실제 홍교수는 많은 제자들의 시 해설을 맡는다. 이미 300여 분의 시평이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직장을 구해주는 숱한 일화를 가진다. 신앙영웅은 뒤따라가기보다는 앞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기에 신앙영웅신화를 쓸 수 있다. 주변의 사람들을 늘 예수라는 기둥, 문에 매달려 있게 하려 문을 열어 둔다. 문은 기둥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전제로 한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신앙영웅 신화를 쓰는 홍시인이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에 매달려야 하고 공부를 잘하려면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믿음이 좋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달려야 한다. 이 매달림은 성경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하였다. 그 사역을 신앙영웅 홍교수는 담당한다. 히브리어로 달레트인 하나님의 문에 매달려 평생 글인 문(文)으로 이름값을 한다.
히브리 글자 달레트는 관문의 의미이다. 무엇을 통과하여야 하는 이 달린 문은 하나님 눈을 닮으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닮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하여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함께 가야 하는 필수조건의 길은 에덴시학의 길이다. 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을 때 구원의 문학이 된다. 신앙의 구원형식을 문학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가슴을 닮아야 하는 숙제를 늘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신앙시를 쓰는 시인들이다. 이들을 만들기 위에 홍 목사는 예배시간에 시로 드림을 실천하는 시인들의 글과 시 드림의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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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에 맞는 신앙시를 준비하시어 예배시 낭송하도록 하겠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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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예배 설교 주제는 ‘화해의 신앙과 시학’(창 33장)입니다. 본문을 읽으시고 주제에 맞는 신앙시 또는 평소에 쓴 신앙 고백시를 준비하여 예배 시에 헌시로 낭송하겠습니다.
한국초유의 예배시에 시를 헌납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시 드림 시간을 갖는 그 힘으로 한국창조문학가협회와 창자조문학사를 운영한다. 이 신앙영웅 신화는 여전히 오늘도 계속된다. 다만 하나님의 가슴에 달려 올라가는 상승작용이다.
이 문제는 신앙영웅신화자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이 되겠다는 목적은 전연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트가 십자가에 달리듯이 삶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아드님의 길을 흠모하며 신앙의 힘을 얻어야 나아가는 길이다. 뜨거운 사랑을 길어 올리는 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뜨겁고 끓는 가슴으로 뭉치기를 소원하는 마음의 눈을 가지며 오늘도 예수님의 문을 드나들며 노력을 기울인다. 이 방법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입, 뱉아놓기 위해서이다. 전하기 위해서 쏟아놓는 설교이다. 한 달에 두 번하는 한국문인교회 예배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입에서 ‘페’하며 쏟아지는 홍문표 목사의 표는 말씀전하기의 표이다. 이름그대로 말씀표로 평생 강단에서의 문학 강의를 통해 익숙된 버릇을 그대로 말씀 전하기로 사용한다. 하나님 일의 입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름을 묻고 계십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홍문표라는 이름이 음성적으로 강하나 의미는 좋다는 자부심을 가질 경우가 있습니다. 넓을 홍, 글월 문, 자루 표 널리 문장으로 주도권을 잡는 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저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런 세상적인 의미의 이름이 아니라 너의 본심, 너의 내면에 도사린 참 모습이 무엇이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목회자로, 선생으로, 지아비로, 문인으로 너의 진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일금이 무엇입니까. 신실한 크리스쳔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대단한 문인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 절름절름거리고서야 자기의 실체가 사기꾼 야곱인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절박한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다스리기 위해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영웅의 삶은 말씀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천국에 들어감과 못 들어감의 차이를 전한다.
하나님은 그의 흔적을 남긴다. 말씀이, 입 밖으로 전해지며 돋아난 말씀의 싹이다. 야곱이 아침일찍 해가 돋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에 서서 번제 드리는 때이다. ‘다윋’처럼 ‘돋아’난 삶의 길을 가는 때이다.
(2). 결혼
성경에서의 결혼 은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와의 관계이다. 홍문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신용호와 결혼하였다. 신용을 제일로 하는 이 결혼은 홍문표의 가슴에서 돋아 합환체 2회와 관련 된다. 마음을 두는 그 깊이에 아내가 있다.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남편 따라 홍문표의 신부로서의 천국여인 시늉(신용호)을 하는 아내 신용호는 에덴을 좋아하는 이의 아내이다. 에덴에서 좋아함을 항상 ‘보라’는 듯이 홍시인은 아내를 자랑하는 일생이기도 하다. 아내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홍문표의 아내 자랑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다윋에게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길, 그 아래에 홍문표로 이어지는 길을 하늘 구름를 타고 에덴으로 날아든다. 비가 오게 하는 구름하늘을 맛보며 에덴동산에 물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구름 위로 오르신 분에 대하여 본 그대로 오심(히 12: 1)을 항상 신앙시로 쓴다.
2. 에덴에는
1). 에덴의 ‘엔’
히브ֵ글자 에덴의 ‘덴’에서 ‘엔’은 믿음세계를 가진 홍문표에겐 하나님이 주신 구름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 수레를 타고 날아오르는 홍문표 삶‘엔’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기가 전부이다. 큰 은혜 갚기는 문학박사에서 신학박사로 바뀌어 진다.
다윋의 자손 예수라는 의미를 얻은 다윗은 성전 짓기를 미리 감사예물로 드리었다. 다윋은 33년의 세월을 은혜 갚기 33년으로 하였다. 이 33년은 창세기에서 이미 엘로힘의 33회째의 숨겨진 예수님 이 세상에 사신 나이와 같다. 홍문표의 삶은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이 33의 2회 리듬인 66세에 신학박사학위에 도전하고 지금은 한국문인교회 담임목사이다.
3. 홍문표와 에덴
1). 거기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마음이 즐겁게 되기를 원한다. 그로하여 마음이 즐겁게 되면 웃음을 웃게 된다. 이 즐거움은 행복바이러스로 행복을 전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보기 원한다. 매 순간순간마다 즐거움을 맛보게 된 이 즐거움은 눈으로 보는 중요성이다.
홍문표는 물의 환경이지만, 곧 아버지와 그의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가 물이지만, 홍문표의 열정으로서 이 물 위를 불로 걷기를 소망한다. 홍문표 교수가 믿는 신앙의 절대자로 하여 물 위로 걸으며 표, 불을 켠다. 예수님이 “베드로야 물 위를 걸으라” 하시었던 것처럼 홍문표는 계간 창조문학 · 말씀과문학 한국기독교선교협회(2012. 1. 8 발족) · 한국문인교회(2012.1. 28 창립예배)의 현재성에서 물 위로 하나님의 불을 켜고 걷고 있다.
2). 홍문표
하나님을 먼저 언급하려는 본 논자의 하나님의 경외의식에 의하여 먼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를 육신의 몸을 입기 위하여 요셉과 마리아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하였다. 이스라엘 집은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 의해서 조직된 강력한 공동체이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반드시 존재한다. 대가족에서는 세대와 연령이 앞선 연장자가 윗어른이 되고 아버지 격이 된다. 이에 대하여 가족은 존경, 복종, 신뢰로 통솔권을 위임한다. 가장은 가족의 생존, 번영, 명예, 그리고 영원한 계승을 위해서 노력한다. 여기에 어머니는 자녀를 위하여 유년기 동안 교육하여 소년기에는 가장에게 위임하여 조상의 유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교육적 역할이다.
한국의 집은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 의해서 조직된 형태이다. 반드시 아버지가 존재하며 대가족의 형성에서 홍문표는 가족과 더 나아가 사회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소명의식을 가진다.
……맏사위로서 책임을 느낀다. - 「어느날의 일기」(1878, 1, 14).
.....결혼 시킨다면 부모님으로서나 나로서 웬만큼 일을 다한 셈이 된다. - 「어느날의 일기」(1878, 1, 15).
.....난 몸 전체로 산다고 했다. - 「어느날의 일기」(1878, 4, 25).
한국적인 대학교수생활은 연구하고 학생지도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보직도 맡아야하고, 사회에 봉사도 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현실적 여건에서 나는 어쩌면 가장 한국적 현실에서 그 모두를 충족시킨 교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보직도 많이 했고, 저술도 많이 했고, 강의에도 충실하고자 했고, 사회적 활동도 할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불안초조불면이라는 천형적인 장애는 급기야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동안의 지나친 강행군, 그 복합적인 행동이 결국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장애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식자우환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님의 경고와 돌보심이라고 할까. 나는 심리적 장애를 통하여 자신을 돌보는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 그보다는 차라리 독서를 하고 저술을 하는 편이 보다 충실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어느날의 일기」(2000, 7, 23)
홍문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한정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이시간 쪼개기의 바쁜 일정을 가지는 홍문표 박사는 아버지 역할을 담당한다. 홍세창(洪世昌)과 이동월(李東月) 사이에서 태어나 얻은 홍(洪) 성 그대로 거대한 물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잘못하면 물에 빠지기 쉬운 이 삶의 나날을 한자 부수가 보여주는 氵(삼수변)의 특히 많은 물에서 살아남는 기적은 하나님으로서임을 고백한다. 아버지 함자는 세창으로 세(世)는 인간 · 일생 · 생애 · 한평생 · 세대 · 세간 · 시대 · 시기 · 백년 · 세상 · 성 · 여러 대에 걸친 · 대대이다. 총획 5획으로 일평생의 뜻과 아울러 오로지의 뜻인 한일 획에 의하여 물로 싸여진 삶의 상징성을 부각시킨다. 더구나 아버지의 ‘창(昌)’ 함자는 총획 4 획이며 날 · 해 · 태양 · 낮으로 이 부수가 두 번 합쳐져 창성 · 창성하다 · 흥성하다 · 번성하다 · 아름답다 · 곱다 · 착하다 · 선량하다의 뜻을 그대로 더 전한다. 이 더하기 물의 삶은 총 획 8획이 되면서 유감없이 8의 대량의미가 보태서 거대한 바닷물이다.
때문에 더구나 홍문표의 성 그대로 붙어지면서 문(文)의 글월 · 문장(文章) · 어구 · 글 · 글자 · 문서 · 서적 · 책 · 문체(文體)의 한 가지 · 채색(彩色) · 빛깔 · 무늬 · 학문(學問)이나 예술(예술) · 법도(法道) · 예의 · 조리(條理). 등이다. 문표는 드넓은 문학세계라는 의미와 함께 이름의 뜻과 접목되면서 홍문표의 몸 담아 있는 문학과 더불어 이름이 뜻하는 바는 글 잘 전하기이다.
성경과 관련한 물과 관련한 홍문표의 기능은 물이 지닌 말씀의미와 더불어 아버지 홍세창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이다. 일평생은 성경에서의 바다와 같은 삶이다. 바다는 우리의 인생의 날들과 같다. 파도가 치고, 세파가 몰아닥치고 한다. 바다와 나날들 모두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바다의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세파에도 하나님이 지금도 사랑하사 물위로 걸어가는 길이다.
바다에는 물이 있다. 우리 몸속에 70%이상이 물인 것처럼 성경에서 물은 1090회의 반복리듬을 가진다. 물 מ(멤)과 물 ם(멤)에 관련된 ‘바다’ 290회 ・ ‘바다라’(창 1: 10; 수 16: 3) ・ ‘바다는’ ・ ‘바다가’ ・ ‘바다에서부터’(민 11: 31; 시 72: 8; 사 24: 14) ・ ‘바닷가에’(출 14: 2,) ・ ‘바다의’ ・ ‘바다에서’ ・ ‘바다를’ ・ ‘바다와’ 등이 있다.
바다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창 1: 9-10)하였다. 히브리어 바다는 ‘물’로 되어 있다. 나날 곧 바다 · 나날 모두의 발음부호를 빼면 같은 언어이며 동일리듬이다. 그리고 바다와 나날 모두 문법적으로 복수(複數)이다. 복수의 개념 또한 모두 사역 자리이다. 물을 다스림의 나날은 목사 현직이다다.
바다의 삶, 세월(창 4: 3, 47: 9)속에서 홍문표의 사역은 세파의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흠양하는 창조문학단체를 이끌고 있다. 하나님 영역에 대한 타자성의 경외인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준행하는, 하나님만이 물을 끌어 올리(계 22: 1)시기에 이 말씀 따라 시들이나 논문들이나 비평서에서의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이 명령하신 물 위 불을 켜고 걷는다.
더구나 고향 마을이름은 ‘태양리’였다.
낮에는 햇살들이 누리에 가득하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
꽃밭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어요
하오나 내 욕망의 나무 사다리는
언제나 추녀끝에 멈추는 절망
흩날리는 겨울날에
홀로이 외로운 빈들에서
차가운 돌베개 끌어안고
아득한 하늘만을 우러러 봅니다
그제야 보이시는 하늘 사다리
땅에서 하늘 끝에 걸어 놓은
오색 빛 무지개
하늘 문이 열리네요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말씀의 꽃비가 온 땅에 내리네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너를 이끌어 이 땅에 오게 하리라
오 벧엘, 당신의 거룩한 집
주여 날마다 하늘사다리를 보게 하소서
말씀의 꽃비로 충만한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 홍문표 「하늘 사다리」
(1) 아빠
직접적으로 홍문표는 5자녀의 아빠이다. 그리고 아내 신용호도 그의 남편을 아빠라고 부른다. 이 아빠 명칭은 한국의 아드님, 따님’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는 애칭이다. 홍문표는 위 아래층을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아래층의 따님 수정이가 ‘아빠-’라고 늘 부르고 있다.
히브리어로 근거한 아빠야는 절대적한 분에 대한 경외이다. 내가 사랑하는 백성들의 집에 계시기를 희망하는 이 나라는 절대자를 모시고 사는 기독교집안이다. 가족 모두가 하나님께 즐겨하여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소망사 ‘하’로 경외하는 우러르는 집안이다.
아들 성혁은 홍교수님을 ‘아버님’하고 부른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말이다. 히브리어에 아비헴이 있다. 누구에게나 계신 아버님, 하나님 아버지는 바다, 세상의 파도를 주관하시기에 이를 믿는 홍문표 신앙의식에서 홍문표의 가계와 연관되어 진다. 그것은 성씨에서부터 홍문표 교수님의 아버님 함자 세창(世昌)과 관련한 바다이미지 모두 세상의 물과 관련되어지는 아버지 의미이다.
아빠라는 말은 아카드어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발견은 히브리어 얌을 위하여 에서 일차적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바다 곧 얌을 주관하시는데 학자 다비드 토시오(David Toshio)는 바다 얌을 아카드어와 관련하였다.
아카드인들은 바다를 아빠/ayabba라 한다. 그 언어의 순서는 아를 처음으로 하고 같이 겹치는 아카드어의 순서에 따른 a-ab-ba=>ayabba>(a)yabba>(a)amba>Yamm>yām의 우가리트어 변화를 가진다. 얌은 바다 신이다. 이 점은 다음 장 홍문표 시인의 시집 - 『지상의 연가 -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밝힐 것이다. 물을 소재로 한 것과 연관한 신앙시에서 영웅신화를 그리고 있다. 곧 바다 속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홍 시인이며 이 홍시인이 신앙 영웅이 되어 있다. 얌은 바닷물고기이다.
아카드에서 보이는 sea-yam과 한국말 ‘아빠’란 말과의 하이퍼 연결은 하나님이 바다, 세상의 파도를 주관하심과 깊이 관련된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한 가정을 주관하는 아빠의 존재는 주관자이다. 한 가정에서의 가장으로서 세상의 파도를 잠재우는 아버지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홍문표 가정이다.
아들과 부모님 사이에 호칭으로의 아빠는 홍(洪) 문중 홍문표의 아버지 홍세창(洪世昌)과의 필연적으로 있는 물이 있는 공간, 이 세상에서의 그 창성함에서 출발한 홍문표의 삶이다. 문학에서의 그 많은 양의 물, 곧 말씀으로 한국문단의 문패역할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다름 아닌 말씀의 불을 들고 세상의 파도를 잠재우려 는 사역이다.
사실은 1월부터 검인정교과서 작문 원고를 집필했다. 교과서 본문 1000여 페이지 그리고 교사용지도서 1500페이지 너무나 벅찬 과제였다. 통과될지는 모르지만 만일 된다면 그건 인세 얼마 받는다는 문제보다 그 만큼 후학들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남기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학위를 받는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나는 학위를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 「어느날의 일기에서」 (1978년 4월 18일)
…… 폭포 뒤로해서 조금 평탄한 길, 안개가 온몸을 휩싸고 후미는 보이지 않고 몇 사람 앞에 간 인물도 안 보인다. 바로 해발 2700미터 정상에서 홀로 구름에 싸인 순간이다.
나는 참 아름다워라 찬송을 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소리내어 기도했다. 이 부족한 것을 사랑하시고 오늘 여기까지 올라서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더욱 이 민족을 사랑하게하시고 남북이 통일이 되게 하시고, 저에게 주어진 사명감당하게 하소서 아멘
- 「어느날의 일기에서」 (1989년 8월 17일)
3). 동천(東川)
홍문표 교수에 대한 내면의식에서의 신앙영웅의 소명의식는 내가 나서야 한다는 의식이다. 그 확대는 현재의 단체를 이끌고 있는 현실성과 접목된다.
(1) 호의 변경으로 본 겸손
홍문표 교수는 호를 동천(東川)이라 하였다. 사전상의 속성적 개념으로 는 동천(冬天) · 동천(東天)이 있다. 호 동천(東川)은 사전에 나와 있지 않는 신조어이다. 젊은 시절, 한 때 호를 ‘한 별’이라 자칭하기도 하여 가장 큰 별에 대한 의미를 꿈꾸었다. 그러나 홍문표 교수는 이 한 별이 예수님에 해당됨을 인식하고 다시 에덴을 향하여 흐르는 시냇가라는 의미를 지닌 동천(東川)이라 고치었다.
한자 洪文杓의 홍은 한자로 洪이다. 곧 많은 물이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이다. 표면적인 물은 인간이 먹어야 살며, 또한 말씀의 물은 먹고 입에서 나올 때에 그 역할이 크다. 문학은 문학의 행위 안에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고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드러낸다. 신앙을 가진 홍문표 모든 일, 창작작업이나 학술저서나 모두 그 안에 신앙이 든 바탕을 이루고 있다.
홍문표(洪文杓)의 문(文)은 유일하게 생각과 사상과 마음을 글로 나타내는 마음의 문(文)이 된 소명감이 주어져 있다. 이른바 이름값이다. 물론 한자의 ‘문(文)’이지만 한글 발음 ‘문’도 ‘물’과 연결되어진다. 히브리어와 한글발음이 같은 이 문은 발음이 달레트, 곧 가슴이다. 홍문표박사의 뜨거운 가슴은 원어 그대로도 뜨거운 가슴이다.
다윗은 뜨거운 가슴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되는 계보를 가지고 있다. 모두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다. 이 마음은 한글 초성 ㅁ(미음)의 이 ‘미음=ㅁ’은 히브리어 물과 음가상 동일하다. 히브리어 초성 מ(맴/물)에 관하여는 한국어와의 유사성에서 밝힌 바있다. 문(文)과 물은 말씀이라는 물의 이차적 시의 은유관계이다. 문(文)의 물은 기독교시인인 홍문표의 가슴에 가득한 마음의 물이다. 목사로서의 설교나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쏟아놓고 있는 내용들 모두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눈으로 뵈올수는 없어도
하늘만큼 가득한 당신이기에
난 당신만을 믿어요
고향을 떠나라 하시니
정든 땅 버리고
아비 친척도 버리고
내 유년의 꽃반지
아롱아롱 세월도 다 버렸어요
눈부신 햇살따라
반짝이는 별빛따라
남쪽하늘 바라보며
당신 언약 바라보며
훠이훠이 따라왔지요
내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
밤마다 외로운 바람이지만
당신은 아침마다 타오르는 횃불
너무도 뜨거운 불길이기에
난 당신만을 믿어요
내년엔 가지마다
꽃들이 휘들어지고
주렁주렁 맺은 결실
들녘엔 당신의 알곡들로 가득하겠지요
눈으로 뵈올수는 없지만
하늘만큼 가득한 당신이기에
난 당신만을 믿어요
- 홍문표 「난 당신을 믿어요」
물의 성, 말씀의 성에서 쏟아져 나온 말씀의 창대함의 홍(洪)과 이름의 첫자 문(文)에서 쏟아져 나와 물이, 말씀이 계속 전하여 지는, 말씀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이 사역은 말씀사역이다.
물이나 글은 반드시 동적 이동을 전제로 한다. 이동하면서 이쪽과 저쪽이 연결, 곧 크게는 강을 건너야함, 곧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이동을 전제로 한다. 홍(洪)시인의 가슴에 가득한 물, 곧 문(文), 달레트는 홍문표 가슴에 달렸다.
말씀이 달렸다. 이 시인의 가슴은 가슴으로 쏟아놓게 하는 성경말씀을 늘 들고 있다. 그리하여 표(杓)를 들고 있다. 칼자루를 쥐고 있다. 이 글 칼자루는 비평가로서의 칼 자루이다. 글쓰기의 칼자루 표(杓)=칼자루표에 의해서 말씀이 전달되어진 물은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 글 칼자루를 쥐고 가르쳐야 하고 또 문서화해는 소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큰 그릇이 되어 있다. 문학에서는 작품으로, 그리고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잔을 흠모하는 홍교수에게는 기독교시나 기독교 저술과 한국문인교회 목사로서의 현재이다.
예수님에 대한 흠양은 고향시절에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오는 소리에 들어간 교회의 첫 시작 발걸음으로부터 이미 주어졌다.
아무데나 예수 나를 이끌면
아무데나 예수 따라 가려네
예수같이 아니 가면 낙 없고
항상 주와 함께 가면 겁 없네
아무데 가든지 두렴 없겠네
아무데나 주와 함께 가려네
- 구 찬송가 582장
(1) 가정
홍문표의 농원은 부여면 내산리에 있다. 밤 산으로 되어 있는 농원이다. 밤의 수확을 위해 알톨이 굵은 것으로 개종하여 해마다 밤나무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밤을 수확한다. 그리고 유기농으로 인한 고사리 수확은 천연그대로의 밤톨이 만들어낸 웰빙특산물이다. 일일이 홍문표의 아내가 손으로 말랑말랑한 고사리 대궁부분을 꺾어 손 모양의 잎 끝을 잘라 버리고 삶아서 말리는 하나님이 주신 에덴동산에서 만들어낸 이 유기농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던지 그 사랑이 전해지는 한국의 맛이다.
홍문표의 삶의 방식은 바다 얌밈같은 삶에서 나날 얌임을 건져낸다. 주말이면 찾아가 몸과 마음을 달래게 해주는 영양소로 얻는다. 좌우로 산이 둘러싸고 산 아래로 보이는 넓은 시야를 가진 홍문표의 농원 에덴에서 목사의 눈을 통하여 에덴시학(視學)이 탄생한 근원이 된다. 하나님 때문에 보호되어지는 농원은 홍문표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땅이다.
홍문표의 부여면 농원은 마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Y字형의 중앙에 자치하여 잘 보호되며 물 위에 흘러가는 모양으로 되어 있듯이 북쪽 한 면만 남겨 놓고 북동쪽으로 스코프스산 · 동쪽으로 감람산(재림 징조의 장소로서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기름 준비하는 곳(마 23-25)이듯이, 마치 동남쪽으로 범죄산 · 남쪽으로 나쁜 충고의 산이 있어서 예루살렘 성이 어머니 팔에 안긴 아기로 감싸여져 있듯이 아내가 있는 농원을 홍문표는 지상의 에덴으로 시화한다. 마치 홍문표의 어머니 품이듯이, 그리고 아내의 품에 안기듯이 심신을 맑게 해주는 청량지역의 산은 내산면에 있다. 하나님이 주신 내 산이다.
홍문표에게 있어서 아내 신용호는 말 그대로 신용으로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약초이다. 천국여인의 시늉(신용호)을 해주는 아내로 하여 마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지이듯 오로지 남편을 위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한국 전통적인 한국최대의 여인상으로 하여 홍문표는 행복하다. 이 신용호는 홍문표의 아내 신용호의 신용호 깃발을 달고 있다. 자라온 환경에 의해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한 두 부부의 나란한 모습이 되어 야산의 밤 나무지기가 되어 밤톨자람 밑에서 나오는 고사리의 순이듯, 아내로 하여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고 새 봄이 되면서 나오기 시작한 고사리의 손으로 담백질 사랑의 고사리를 만들어 줌에 감사한다.
홍문표는 온 생애의 날을 늘 아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며 자녀들과 함께 살며 출판업무를 계승하여 하나님의 일을 알리려 한다. 홍문표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까지 지킨 날들은 때문에 광야바다의 삶에서 홍문표가 살아 있는 날들이 현재이다.
사람은 마음의 고향을 두고 산다. 구불구불 구비를 돌아가듯 홍문표의 삶은 창조문학과 말씀과 문학잡지를 만들면서 이웃과의 가깝기를 탐색한다. 아내와의 거리를 좁히고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한글을 중요시하여 가능하면 잡지들의 한글사랑을 실천한다. 그 가깝게 하기는 한 번도 한글운동이라는 팻말을 달고 거리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그 거리를 좁힌. 결코 말씀의 강을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의해 보호 되어지는 이 피동형의 홍문표는 이스라엘 땅과 이 땅의 예루살렘 성 세 골짜기, 동쪽 기드론 골짜기 · 힌놈골짜기 사이의 티로피온 골짜기(Tyropoen Valley)로 둘러싸여 있는 히브리어 쉰 모형이듯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된 삶을 살아간다.
곧 자신을 히브리어 하늘의 이의 모형으로 끊임없이 연단하면서 어둠에서, 곧 북에서 남으로 밝음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런 다음 서에서 동으로 뻗어 내리면서 이스라엘 산이 기드론 골짜기와 합류하듯이 예루살렘 성을 서쪽과 남쪽에서 격리시켜 천연 요새가 되듯이 세상과의 뭇별들과 격리하여 사는, 오직 예수님 별을 닮는 세속이 아닌 요새를 만든다.
홍문표의 농원 밤나무농원은 마치 이스라엘 첫째 산은 감람산, 그 맞은 벽 편에 있고 예루살렘 성보다 높고 둘째 감람산 북쪽에 있는 스코푸스(Scopus)산이 감람산과 연결되면서 북방의 방어를 담당하며 셋째산 감람산 남쪽으로 연결된 범죄산(Mount of pffence)동남쪽에서 예루살렘을 호위하듯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세 개의 산이 예루살렘 성을 두른 것처럼 그리고 넷째산이 힌놈의 골짜기의 서쪽으로 서산(Western Hill), 힌놈의 골짜기 남쪽으로 나쁜 충고의 산이 남쪽과 서쪽에서의 방어를 담당하듯 홍문표의 현실적 에덴동산은 골짜기와 산들로 보호되어 있는 황금성의 역할인 요새가 예루살렘이듯 그리고 5개의 산이 보호하는 지형으로 야훼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 2)의 치아 ש(쉰)하는 성경말씀이듯 홍문표의 둘레는 문학과 신학, 그리고 아이들 성혁과 각기 위아래에 층에 살면서 보호받듯, 그리고 아내의 보호와 주위의 보호받는 형태로 그 거리를 좁힌다.
홍문표의 삶은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위하듯, 하나님이 홍문표를 보위하는 삶이다. 몇 번의 수술로 인한 기적같은 삶 이어가기는 늘 다른 사람의 시평, 새로운 비평작업을 육필로 써 내려가면서 그 많은 저서를 일일이 손으로 수작업 한다. 고교시절 공부를 많이 하려고
나의 첫 번째 죽음의 고비는 고3때 밤새기 공부를 한다고
잠 안 오는 각성제 ‘뇌신’ 을 복용한 그 후도 간간히
두 번째 고비는 오십이 되어 가슴에 종양이 생긴 것을 확인
수술을 하게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마치 그의 농원의 산이 양쪽으로 있으면서 고향 집을 보위하는 형상이듯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아버지의 거대한 세창(世昌) 곧 세상의 파도 위에 어머니의 동월 의 달 안에, 아내 신용호의 깃발로 그리고 수정(딸이름)처럼 맑음 을 내리는 에덴의 생활은 에덴의 새싹 성혁(홍문표의 막내)로 하여 최첨단의 전자책을 만들고 또 강의하면서 실험과 실제를 겸하면서 하나님의 일 꿈꾸기를 가족과 더불어 멈추지 않는다.
(2) 에덴을 찾는 길(아 1:1-3:2)
에덴 찾기는 사랑 문제와 관련된다. 절대의 ‘타자성’을 가진 ‘그’와의 거리 좁히기를 예수님이 사랑으로 하시었듯이 홍문표도 이 사역의 역할을 다윋처럼 하려한다. 다윋의 아들 솔로몬의 작품의 아가서처럼 홍문표는 에덴으로 향하기를 즐긴다. 구체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만나기 위해서이고 가깝게는 가족이 있어서이다.
구약에서 제시하는 절대사랑의 가치는 아가서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사랑과 관련하여서는 에덴에 ‘나의 사랑하는 자(NMS.CXS)가 있는 곳이다. 에덴에는 나의 사랑하는 그(하나님)이가 있기 때문에 홍문표는 목숨을 걸고 에덴을 찾는다. 이때의 그이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구약 성경에서 그이다. 아가서는 제목이 시로 하시림(피동)이다. ‘하시림’의 히브리어 발음은 그대로 한국의 발음, ‘하시림’이다. 존경어 의미가 단단히 고정된 아가서가 되는 에덴동산을 찾는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처럼 사랑을 실천하러 에덴으로 간다. 모두 여성 여성문법 의미의 소망사 ‘하’로 된 신학성의 깊이를 찾아 오늘도 아내 신부를 찾아 나선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에덴에는 홍문표의 아내가 있다. 에덴동산 부여면 주암리, 하나님이 계신 에덴동산을 향하여 가는 이유를 『나비야 청산가자』 시집을 통하여 절절히 구가하고 있다.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하늘하늘 옥색치마
자줏빛 꽃댕기
아직도 손끝에 파닥이는
그날의 부끄러움
스물다섯이었지.
우리는 뜨거운 가슴뿐이었지.
너의 순진한 눈시울에
나는 몇 번이나 죽음을 약속하며
가난한 마음하나
푸르른 날개를 달고
아, 새벽처럼 달리던 숲길이었지
종달새 지저귀는 들길을 지나
두견화 손짓하는 언덕을 지나
산도화 피멍든 꽃잎을 뿌리며
바람처럼 푸르른 언덕길
이슬처럼 영롱한
네 가슴속의 진주
그 맑고도 황홀한 순결의 날개를 펴고
오색빛 고운 햇살
그 선연한 빛깔 사이로
사뿐사뿐 달려오던
네 아련한 기억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가자
- 「나비야 청산가자 1」
에덴동산가기의 홍시인의 절절한 연애시는 성경의 아가서와 관련된다. 흔히 이야기 하는 솔로몬이 사실 쉴로모로 발음된다. 쉬러 가는 곳이다. 또 술람미 여인이라 한 성경원음 쉴람미트처럼 쉴렵니다이다. 같은 언어(여성문법일 뿐)로서 관련한 홍문표의 에덴가기는 하나님의 신부인 홍문표가 하나님을 찾는 부여의 에덴동산이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돋아 있다. 하나님의 향이 스며나와있다. 때문에 좋음이다.
좋음은 어린 처녀들, 곧 어린 알라들이 모여 둘러싸며 하나님의 신부를 사랑하며 아파하는 모습이 있어서 간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에덴을 찾는자가 그녀들에게 나를 왕에게로 나를 인도하도록 모시겠니 라고 하기 때문이다. 곧 아내에게서 왕 대접을 받을 수 있어서 에덴을 찾는다.
홍문표는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시집을 통하여 청산가자의 청유를 한다. 가자라는 말은 같이 들 봐라는 공유성과 함께 우리 가서 말씀을 나르자라는 거대한 의미소가 있다. 에덴동산이 좋은 이유는 말씀을 나를 수 있어서이다. 충분히 쉬고 돌아와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기쁨표현은 좋아 “낚일라”이다. 성경의 아가서가 철저히 구두어이듯 좋아 낄길거리면서, 에덴을 향하여 왔다갔다 한다. 오랜 동안 하나님 일을 같이 하여서 이제 낯이 익어있는 에덴으로 모두를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일 사역이며 홍문표의 설교나 글이나 특강을 따르는 무리들이 곧 아파버려지게 되는 원동력이 에덴동산에 있다. 단순한 여성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는 사람을 따르는 무리, 크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신부들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이다. 하나님 말씀 사모의 복수적인 개념은 동시에 하나님 신부들 모두를 위해서이다.
5. 아들 홍문표
하나님 일을 하는 홍 시인의 삶을 주위에서 비록 쉬어라 할지라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느라, 곧 빛을 많이 쬐어서 검을찌라도 하나님 일함을 홍문표는 멈추지 않는다.
홍시인의 시집 『지상의 연가』의 - 늘 푸른 강물이듯이-는 1, 2, 3, 4~52호에서 ‘늘 푸른 강물이듯이’가 모두 반복구조이다. 이와 관련하여 홍문표의 효와 결부된 주제는 홍문표(洪文杓)의 홍(洪)이 제시하는 흐르는 물살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다.
물 흐름과 달과의 상응성은 수직구조를 가진다. 어머니 이름은 동월(冬月)이다. 그 아들은 홍문표, 호 동천(東川)이다. 어머니는 달이며 아들은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이다. 이 겨울 하늘의 달과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과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우선 그 소재, 곧 있는 곳이 하늘과 땅이라는 뚜렷한 구분을 가진다.
홍문표의 어머니 이름은 동월(冬月)이다. 그대로 풀이하면 겨울 달이다. 서정주는 동천(冬天)을 시 작품으로 하였지만 홍문표는 그의 어머니를 동월(冬月)로 하고 있다. 홍문표는 어머니를 “떡바다 들녘의 한섬지기 옥답”이라 하였다.
아버님은
구룡포 하늘의
찌렁한 목소리
어머님은
떡 바다 들녘의
한섬지기 옥답
아버님은 일백리 쭉 뻗은 신작로
평생을 달리시며
훤한 꽃길 닦으시고
어머님은
비옥한 이랑의 벽오동 심으시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셨지
이제는
우리 다섯 남매
치렁한 오동나무 줄기가 되고
아버님의 그 길을 걸으며
어머님의
그 이랑을 밟으며
오늘도
파아란 하늘을 둘러 봅니다.
당당하신 아버님
자애로우신 어머님
선연한 그 모습
쟁쟁한 그 목소리
구름자락 휘날리며 굽어 보십니다.
- 홍문표의 「어머님, 아버님」
내 유년의 강물에 띄워진
지상의 그림자
소중하게 길들여진 꽃신들과
몽땅 연필로 새긴 서투른 글자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저질러진
배냇짓의 웃음을 버리기엔
너무나 믿음이 연약합니다.
바람소리
강물소리
- 「늘 푸른 강물이듯이」・10
백마강 하류 엿바위 부근에서
지금도 천년의 물 빛이듯이
- 「늘 푸른 강물이듯이」・17
늘 푸른 강물이듯이
어머니
억센 삼배 혀끝에 녹여
긴긴 밤을 동여매고
속살 비치는 고운 무릎에
자장가 새기시며
별을 따서 꽃 그리고
달빛 모아 땀을 뜨시는 색동저고리
꿈속에서도
일곱 빛깔 무지개의 나라
꽃수레로 나를 태워
하늘로 내어 미시는 다사로운 기쁨
눈동자 한 가운데
나를 숨겨주시는 지극한 평안이여,
내 환한 얼굴에
당신의 슬픔을 씻고
내 슬픈 눈짓에
당신의 살을 저미시는
끈적거리는 역설의 인연이여,
사철 구비치는 강물은
내 영혼의 발바닥을 적시우고
이생의 고달픈 들길에
풍요의 꽃 무덤으로 황홀합니다.
이 도도한 사랑의 강폭에
수목들은 무성하고
굽이굽이 언덕마다 계절이 가득한
열 두 폭의 산수화
그날 남루했던 모시적삼
때 묻은 은가락지
그토록 소중했던 모본단 저고리
주름진 손마디 틈새마다
꽃 댕기 부끄러운 얼굴이
오늘도 시나브로 물살집니다.
- 「늘 푸른 강물이듯이」・ 49
일차적으로 홍문표 시 의식의 강물은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지상의 연가』의 - 늘 푸른 강물이듯이-는 1, 2, 3, 4~52호에서 ‘늘 푸른 강물이듯이’가 반복되면서 홍시인의 효는 홍문표의 홍(洪)이 제시하는 흐르는 물살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다.
1). 달과 물
홍문표의 어머니 이름은 동월(冬月)이다. 달을 노래한 시조로는 황진이의 시조가 있다. 황진이 시조의 달과 관련한 물의 “청산리 벽계수야...”가 있다.
이 안의 관계는 사랑이 내재한다. 먼저 황진이 시조에서의 안을 살펴본다.
*표 1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에서의 안(in) 이미지
황진이 시조의 시적 화자는 달 안에 벽계수가 들게 함으로써 벽계수는 달의 것 즉 그녀의 소유 즉 ‘내해’라는데 있다. 이 관계는 안이다. 이 내해는 히브리어에서 찾아지는데 바로 동천이나 동천 어머니가 지니고 있는 은혜 갚기이다. 부지런히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아들 동천은 히브리어는 내해이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 그 내해는 물려 주신 몸으로 하늘향하기이다.
황진이 시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동류(東流)가 있다. 명월(明月)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다. 이 물은 시대를 초월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홍문표의 호 동천(東川)의 물과 리듬을 같이한다. 한국인의 작품 속에 유유히 흐르는 물은 서류(西流)나 남류(南流)나 그리고 북류(北流)가 아닌 동류(東流)이다. 홍문표의 호 동천(東川)이 갖는 동일성이다.
동천(東川)과 동월의 관련성은 빛과 물이라는 변별성에서도 뚜렷한 모자지간이라는 통념적 관점 수직성에서 성립된다. 부모와 아들이라는 관계에서 필수성은 효의 관점이며 이름의 이미지에서 생성되는 바의 동월(冬月)과 홍문표의 호 동천(東川)은 물이 빛을 쳐다보는 형상이다. 동쪽을 향하여 흐르는 물과 하늘에 떠 있는 모자지간이라는 관계는 물이 빛을 쳐다보는 구조의 겨울 달 이미지는 여성스러움에서 시적이다. 동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쳐다보는 형상이다.
홍문표와 낳아준 어머니와의 관계는 유업의 의미로 접근된다. 유명한 황진이 시조는 달과 벽계수와의 관계를 ‘남녀 사이로 하였지만 홍문표와 어머니사이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로서의 영향관계이다.
어머니 이름 동월과 아들 동천의 관계는 밤과 낮의 이미지이다. 우선 예수님과는 마리아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빛이시어서 낮의 이미지이다. 반면 마리아는 이에 상응되는 밤의 이미지이다. 한국의 시인 이상 또한 백모와의 관계성 또한 그러하듯이 동천(東川)과 어머니 또한 빛과 밤의 달 관계이다. 모친 동월(冬月)의 월(月)이 밤 달이라면 동천(東川)의 동(東)은 동쪽 곧 해 뜨는 밝은 이미지이다.
(3). 입
홍문표의 고향은 부여이다. 본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근초고왕」 드라마가 보여준 부여 왕 이름 ‘어라하’임에 주목한다. 히브리어에 엘라하가 있다. 홍문표의 태생지는 부여이고 이 곳을 비롯하여 오늘의 홍시인이며 에덴시학의 철학자이며 문학박사이여 목사인 어린 시절이 있다. 왕, 곧 어라하 성격을 지닌 근원의 뿌리가 있다.
홍문표는 배우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은 배움의 연속이다. 그의 학력은 석사과정부터 박사과정을 두 번씩 수행한다. 성경에서 배움은 알레프)인데 “봐 이렇게”, “봐라” 4회, “봐 이봐라”하며 배우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을 향한 숨쉬기로서 누구나 겪었던 숨막히는 가난의 삶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으면서 숨 쉬게 된 은혜 연속은 지금은 “봐라, 이거라”지경까지 이르고 있다.
홍문표의 하나님 알기는 부여군 부여면의 태양리 태양교회에서 출발한다. 태양리 태양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
아무데나 예수 나를 이끌면
아무데나 예수 따라 가려네
예수같이 아니 가면 낙 없고
항상 주와 함께 가면 겁 없네
아무데 가든지 두렴 없겠네
아무데나 주와 함께 가려네
- 구 찬송가 582장
을 듣고 이끌리듯 찾아 들어간 그 시점에서 시작된 이 하나님 배움의 시작은 하나님 사랑 배우기였다.
이 필수적 사랑방법,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통해 세례를 받는다. 홍문표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신성익히기이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초청하여 감찰하시면서 싹을 낸, 그리고 울창한 나무가 되어 있는 지금의 홍문표는 하나님이 허락한 언약을 믿는다. 그리고 지금의 삶 안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높은 뜻을 배움에 아직도 머문다.
시대를 뛰어넘는 하이퍼의 전자시스템 홈페이지구축을 하고 있다. 한 개인의 일이 아닌 모두의 공유를 위해 홍문표의 삶을 끝내지 않으신 하나님 은혜에 감읍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홍세창의 아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싹을 내면서 지금도 계속 하나님이 사랑하심 표시 안에서 묵묵히 그러나 그 형상이 드러나는 장음화 한 기법에서 싹 냄을 실시한다. 이제 그 은혜 갚기는 곧 어머니 동월에 대한 애틋한 정성의 눈물에 답이다. 태양 교회가 마음의 고향이 되면서 홍문표의 삶은 드넓은 바다를, 말씀의 바다로 만들려, 에덴시학의 실천을 위해 물에 뜨며 헤엄치고 있다.
에덴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예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이 지상에서 결혼의 모습이다. 박지성과 연인 만남에 서 그 분에게 향하는 특별한 감정을 “골 넣는 것보다 ooo 만나는 게 더 좋아”라고 하였듯이 홍문표 시인은 신뢰로 쌓여진 아내를 사랑한다.
이에 대한 신학적 철학 설교에서 홍문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창 1:26절과 함께 봉독하실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 동안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 즉 “이르시되” God said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우리가”라는 복수로 협의해서 창조하심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홍문표 목사 설교문「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에서
삼위일체설이 제시되는 이 장은 삼위께서 우리가 나서서 아담하게 우리의 형상대로 베 짤일을 제시한다. 성경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제의한다. 만든 것은 눈에 보임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를 두고 눈에 사람이 세상을 다스림을 보이도록 하시었다. 홍시인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몸 전체로 드리미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만 쳐다보려 위로만 향해 하나님의 세계가 살아있음을 움직임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아주 아담하게 하나님을 바라며 에덴동산이 좋은 이유를 주말마다 시골로 가서 확인한다. 에덴동산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자기인 남자와 그 남자가 오 내게 와라고 하는 여자가 있어서이다. 에덴동산은 결혼의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이 부부사이에서 통용되는 ‘자기’가 있어서이다. 자기가 오 내게 와라고 하는 홍문표와 신용호의 부부사이는 잉꼬부부이다. 하나님의 에덴동산 완료형은 하나님, 곧 우리가 만든 것이다. 이 에덴을 홍문표는 그의 삶 전체의 시학, 에덴시학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봐 이 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 이 곳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우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간다. 이 등산은 늘 푸르고 푸르러 움마소리가 나도록 감탄되는 곳이다. 남자 홍문표가 하늘나라사모로 베껴 와서 우리도 해냈어 하고 자랑하는 지상의 연가에서 부르는 늘 푸른 강물이듯의 삶이 있는 곳이다.
부부가 사는 세상은 은혜를 갚는 에덴동산(창 1:28)이다. 그러기에 힘이 있는 곳이다. 아내는 봐요 말을들어보라며 애교가 넘치도록 하나님의 힘을 나타내 준다. 이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늘 열매맺게 하는 삶의 현장이다. ‘우리’의 것은 ‘조렇게’’ 아름다운 식물이 자란다면서 자랑하는 아내를 향하고 그러기에 그 사이의 자녀들도 행복하다. 서로 얼굴을 앞으로대고 마주 앞에 앉아 하나님의 계약을 실행하는 알을 낳는 곳에 사는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궁창과 땅을 본다. 하나님과의 계약 이행 장소이어서 에덴동산의 나무들 사이로 오고 가고 한다.
홍문표는 하나님께 답을 풀어 들이려 향기 가득 넘치는 밤나무 향기 곁에서 자라주는 만나를 먹고 건강하다. 이에 힘을 얻어 어울림을 위한 인터넷 광장을 만들며 혼자가 아닌 너희들을 향해 이거야라며 에덴동산을 증언하려 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자 하나님으로 하여 숨 쉬는 사역에 아침의 부지런으로 에덴동산을 찾는다.
2. 부여출신
1). 숨쉼
에덴동산실현의 장소는 하나님이 숨 쉬게 ‘하여’ 숨 쉬는 홍문표는 아내 신용호가 경영하는 에덴동산을 잧는다. “나는 나다”의 그분이 만드신 의 땅을 경작하며 시적 삶에 충실하는 일로 고향 부여를 찾아 시창작을 가르치는 일을 겸한다. 부여는 부여 12대 왕의 딸 이름 부여화에서 찾아지듯이 홍 시인의 아내가 있는 곳은 부여이다. 아담이 하와를 찾듯이 농사의 자부심을 보게 해주는 아내의 동산을 오르며 하나님의 힘을 본다. 아아싸하며 매우 좋아 하는 하나님 구원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