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특별한 여행>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무열사(武烈祠)와 서흥김씨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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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9일 월요일.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를 다녀오다. 시관(始貫)의 길을 열어준 고려조의 상장군(上將軍) 서흥군(瑞興君) 휘(諱) 천록(天祿)공의 영정(影幀)과 위패를 모신 무열사(武烈祠)가 자리한 곳이다. 무열사와 숭모재(崇慕齋)가 지어진지 어언 34년, 서흥김씨삼강정문이 이곳으로 이전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제야 찾아보고 숙연해지는 처지가 내심 부끄러울 뿐이다.
서흥군 천록공은 고려 원종(1260-1274)과 충렬왕(1275-1308) 양조(兩朝)에 무장(武將)으로 삼별초의 난(1270,고려원종12년)과 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1281,충렬왕7년) 때 혁혁한 무공을 세워 상장군에 올랐다. 천록공은 서흥군(瑞興君)에 봉작(封爵)을 받고 자신이 시조가 되심을 송구히 여겨 고려조에서 역시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부 보(寶) 공을 시조로 모시게 되었으니 시조 삼대(三代)가 무장(武將)의 가문에서 문무제예(文武諸禮)를 익힌 분들이다.
오전10시 잠실에서 출발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올 여름엔 유난히 큰 비가 많이 내린다. 네이버지도에서 추천한 길을 익혀두었기 일행이 다니던 지방도로 대신 경부와 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는 네비게이션의 길안내를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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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후 두 시간도 채 못된 시간. 고삼저수지를 끼고 있는 도로 입구에 표지판이 보인다. 경기도 문화유적 ‘서흥김씨삼강정문’ 그리고 ‘瑞興君 武烈祠 入口’라고 씌어진 두 개의 표지판이 좌우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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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사로 들어가는 정문, 충의문(忠義門)에 들어서니 우측에 한 채의 건물이 있다. 각수(珏洙) 안성종친회장과 무열사를 지키고 있는 익(瀷) 어르신이 이곳에서 우리 일행을 맞는다.
두 분은 월향리의 산 증인으로 이것 지역매체 안성신문에도 사진과 함께 소개된 분이다. 무열사와 안성 문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다.
83세의 익(瀷 26世孫) 어르신은 고삼면사무소와 벽산그룹에서 봉직하시다 고향에 다시 들어와 문중일을 돌보고 있다. 서흥김씨의 주요 세거지는 이곳 무열사를 중심으로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와 가유리, 그리고 양성면 염치 등 일대에서 약 50가구 200여명이 살고 있다고 전한다.
서흥김씨 후손들이 이곳으로 정착한 시기는 조선 성종 재위기간 이던 1469∼1494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서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무열사(武烈祠)에 오르기 위해서는 충의문(忠義門)을 거쳐 재실(齋室) 숭모재(崇慕齋)를 지나 음수문(飮水門)을 통해야 한다.
무열사 사당안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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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리 일행은 영정앞에 무릎 꿇어 큰 절을 올리다.
올가을 향사 때부터는 시조 세분의 위패가 봉안돼 세분께 봉향(奉享)의 예를 올리게 된다.
무열사 참례를 마치고 다시 충의문으로 나오니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쳤다.
서흥군의 묘소는 전란으로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서흥군 신도비명의 비문을 일부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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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중(國中)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인 서흥김씨는 고려조(高麗朝)의 명장(名將) 김천록(金天祿) 장군이 훈공(勳功)을 세워 서흥군(瑞興君)에 봉작(封爵)됨으로써 시관(始貫)되었다.(중략)
공의 묘소가 누차의 전화로 실전되었으며 문헌 또한 증빙할 길이 없어 애달프게만 여기어 오다가 이제 안성군 고삼면에 길지(吉地)를 택하니 앞에는 만경평호(萬頃平湖)가 그림처럼 펼쳐있고 뒤에는 경승지(景勝地)로 이름 높은 응봉산 하 양지바른 곳에 무열사(武烈祠)와 숭모재(崇慕齋)를 창건하여 위패와 영정을 모시었고 지척에 판서공 설단과 삼강정려각이 우뚝 솟아있다.(중략)
현손(玄孫)으로 중건(中乾) · 중곤(中坤) · 중인(中寅) 삼남을 두었다.
휘(諱) 중건(中乾)은 경기파의 중조(中祖)로, 조선조 초 사조(四祖)에 걸쳐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와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禮曹判書)를 역임하고 청백리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부인은 창녕성씨 판도판서(版圖判書) 중용(中庸)의 따님이요, 광정대부 도첨의시랑찬성사집현전태학사(匡靖大夫道僉議侍郞贊成事集賢殿太學士) 사홍(士弘)의 손녀이다.(중략)
휘(諱) 중곤(中坤)은 영남파의 중조로 조선조 초 사조(四祖)에 걸쳐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과 통정대부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를 역임하고 또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부인은 현풍곽씨 공조전서(工曹典書) 주(珠)의 따님이다. 그 자(子) 휘 소형(小亨)은 의영고사(義盈庫使)요, 부인은 배천조시 부흥군(復興君) 반(胖)의 따님이다. 삼남을 두었으니 장자(長子) 휘 유(紐)는 호군(護軍)이요, 부인은 청주한씨 증병조판서청성군(贈兵曹判書淸城君) 승순(承舜)의 따님이다. 차자(次子) 휘 총(緫)은 호남파의 중조로 부호군(副護軍)이요, 부인은 완산최씨 직제학(直提學) 연촌(烟村)선생 덕(德)의 따님이다. 계자(季子) 휘 진(縉)은 해남파의 중조로 직장(直長)이며, 부인은 기계유씨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효통(孝通)의 따님이다.
호군공(護軍公) 휘 유(紐)의 자(子) 굉필(宏弼)은 호 한훤당(寒暄堂)이요,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감춘추관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요,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종사(宗師)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제(門弟)이며 정남(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스승이다. 오현(五賢)의 수현(首賢)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주향(主享)이다. 부인은 순천박시 사맹(司猛) 예손(禮孫)의 따님이다. 삼남을 두었으니 장자(長子) 휘 언숙(彦塾)은 주부(主簿)요, 차자(次子) 휘 언상(彦庠)은 군수(郡守)요, 계자(季子) 휘 언학(焉學)은 선무랑(宣務郞)이다.(중략)
휘(諱) 중인(中寅)은 초계파의 중조이며 문과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요, 그의 손(孫) 휘 광윤(光胤)은 주부(主簿)요, 그의 현손(玄孫) 휘 백영(伯英)은 남원교수(南原敎授)로 한훤당 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서흥세록에는 혁혁한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서 모든 사림(士林)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려조의 휘 보(寶)는 당시 왕정(王廷)을 우의(羽儀)하여 그 공훈이 찬연히 빛났고 그의 손(孫) 서흥군 휘 천록(天祿)은 무략과 지모로 내외의 대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封)하여졌다.
판서공(判書公) 휘 중건(中乾)은 청백 정직하고, 참의공(參議公) 휘 중곤(中坤)은 염결문아(廉潔文雅)하고 박사공 휘 중인(中寅)은 의덕미행(懿德美行)을 갖추었으며, 의정공(議政公)인 한훤당 휘 굉필(宏弼)은 도학창명(道學倡明)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도통을 수계하니 그 여광(餘光)과 유덕(遺德)이 온 나라에 충만하였다.
또 조선조에 대과급제한 분이 十여명에 달하니 어찌 무과(武科)와 소과(小科)를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는 오로지 서흥군의 유덕과 훈업에 근원(根源)이 심대강고(深大强固)하여 거수(巨樹)의 만지억엽(萬枝億葉)을 능양하는 소치라 하겠다. 근래 숭조정신이 쇠미해지는 작금에 사손(嗣孫) 택수보(澤洙甫)와 문경공 종손(文敬公 宗孫) 병의보(秉義甫)의 발의로 인득보(仁得甫)가 거금을 연출하여 서흥군신도비(瑞興君神道碑)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장거(壯擧)라 아니할 수 없으며 전통윤리를 바로잡는데 지주지공(砥柱之功)이 될 것이다.
이에 후손 석렬(錫烈) · 필(泌) · 준(浚) · 현선(鉉善) 등이 비문을 청하므로 그 정성과 세의를 사(辭)할 수 없어 비재(菲才)를 불고(不顧)하고 사적(史蹟)의 대략과 손록(孫錄)을 초(抄)하여 비문으로 삼는 바이다.
1978년 3월
後學 法學博士 晉陽 姜周鎭 謹瓚,
瑞興君22世孫 昌東 書幵篆,
瑞興君22世孫 벽산그룹회장 經營學博士 仁得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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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산96 소재 무열사 들어가는 초입에는 서흥김씨삼강정려각(瑞興金氏三綱旌閭閣)이 우뚝 서 있다. 우리 후손들이 꼭 기억해야 할 곳이다. 경기도 문화재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 명칭은 서흥김씨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Memorial gate for Seoheung Ki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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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는 의병장 김충수(金忠守 13세)의 충절, 아들 김 함(金 涵)의 효절, 온양정씨와 청주한씨
두 열녀의 정렬(貞烈)을 기리고자 이곳에 일충일효이열(一忠一孝二烈)의 사중정려(四重旌閭)를 세웠다. 소학세가(小學世家) 서흥문중의 충절(忠節)과 효절(孝節), 정절(貞節) 등 이른바 절의(節義)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안내 표지판의 글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안성의 죽산에서 왜적에 포로가 되었다가 전사한 김충수(金忠守)의 충신 정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함께 전사한 아들 김 함(金 涵)의 효자 정문,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쫓기자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연못에 투신한 김함의 손자며느리 온양 정씨(溫陽 鄭氏)의 열녀 정문, 슬하에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자 부도(婦道)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남편을 따라 순결한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열녀 정문 등이 있는 건물이다.
김함의 효자 정문은 선조 39년(1606)에, 김충수의 충신 정문은 숙종 26년(1700)에, 열녀 정문은 영조 13년(1737)과 영조 16년에 각각 내려졌다. 지금의 삼강정문은 1958년에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으며, 정문(旌門)의 현판(縣板)을 한 군데 모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흥인의 심상이자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곳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은 우리 문중에서 관리한다.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는데 지붕의 훼손이 심해 안성시가 최근 대대적인 기와 보수공사를 마쳤다.
옛말에 한 집에서 정승이 셋 나오면 명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집도 대제학(大提學)이 한 명 나온 집보다는 못하고, 대제학이 세 명이라도 문묘배향 한 분 나온 집안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서흥군(瑞興君) 휘(諱) 천록(天祿)공의 정기가 혈맥상통하여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선현에, 의병장 김충수(金忠守)와 아들 김 함(金 涵)의 효자 정문, 온양정씨와 청주한씨 두 열녀정문까지 더해 일충신(一忠臣) 일효자(一孝子) 이정렬(二貞烈)의 삼강(三綱)을 빛낸 선조님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곳... 무열사(武烈祠).
나를 찾아 떠나는 특별한 여행,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를 찾으며 스스로 물어본다.
“적어도 앞으로 남은 여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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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후 대부님 글 솜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