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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와 世界歷史, 人物史 스크랩 체 게바라/ 카스트로
sooaram 추천 0 조회 160 11.10.16 2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39세)

출생 1928년 6월 14일(1928-06-14)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산타페 로사리오(Rosario)
사망 1967년 10월 9일 (39)
볼리비아 볼리비아 라 이게라(La Higuera)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편집] 생애

[편집] 유년기

전통 가우초 복장을 하고 말을 탄 5세 게바라, 1933년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1]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세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 시하여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그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편집] 사춘기

17세의 게바라, 194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의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 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토바이 남미 여행 일기》에 기록되어 나중에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제작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1952년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국유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 여행을 떠난다.

[편집] 청년기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편집] 과테말라

22세의 게바라, 1951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편집] 멕시코 망명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아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편집] 혁명가

노새를 탄 게바라, 1958년 11월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후 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카스트로는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르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편집] 정치인

체 게바라, 1959년 1월 2일

 

그는 쿠바혁명 승리후 쿠바 공산당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또는 반혁명세력 약14,000명을 죽였였다.[2]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발전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편집] 사망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3]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4]

[편집] 평가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를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5]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음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

[편집] 저서 및 관련 매체

짐 피츠(Jim Fitzpatrick)의 체게바라 초상화
  • 《Che의 일기》, 거리문학제, 1997
  • 《라틴 여행 일기》, 이후, 2000
  • 《체 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
  • 《먼 저편》, 문화산책, 2002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황매, 2005
  • 《체 게바라 자서전》, 황매, 2005
  •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실천문학사, 2008

[편집]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는 1950년대 공부를 마치기 전에 오토바이 여행을 하였다. 이 여행은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당시의 이야기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저술되었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제작, 2004년에 개봉되기도 하였다.

[편집] 같이 보기

  • 쿠바 혁명영웅에게 바친 노래, 아스따 씨엠쁘레

    내가 듣는 노래  굴렁쇠




  •  

    '아스따 씨엠쁘레 (Hasta siempre :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Aprendimos a quererte
    desde la historica altura
    donde el sol de tu bravura
    le puso un cerco a la muerte.

    우리는 당신의 용기가 죽음을 멈칫하게 만든 그 역사적
    순간부터 당신을 흠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우리의 지도자 체 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성이 남아있습니다.


    Tu mano gloriosa y fuerte
    sobre la historia dispara
    cuando todo Santa Clara
    se despierta para verte.

    당신의 강하고 역사 속에서 승리를 장담하는 손은 산타 클라라 계곡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깨어난 그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우리의 지도자 체 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심오한 투명성이 남아있습니다.

    Vienes quemando la brisa
    con soles de primavera
    para plantar la bandera
    con la luz de tu sonrisa.

    당신의 웃음이 빛나는 깃발을 꽂기 위하여
    당신은 봄날의 햇살로 산들바람을 태우며 옵니다.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우리의 지도자 체 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있습니다.

    Tu amor revolucionario
    te conduce a nueva empresa
    donde esperan la firmeza
    de tu brazo libertario.

    당신의 혁명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너무나도 단단한 해방의 가슴은
    당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세계로 향합니다.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우리의 지도자 체 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있습니다.

    Seguiremos adelante
    como junto a ti seguimos
    y con Fidel te decimos:
    hasta siempre Comandante.

    당신과 함께인 듯 우리는 여기서 전진합니다.
    피델과 함께 당신에게 선언합니다.
    영원히 당신은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de tu querida presencia
    Comandante Che Guevara.

    우리의 지도자 체 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선명함이 남아있습니다
    .

    (Carlos Puebla, 1965)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하고,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친미독재정권을 무너뜨려 쿠바를 해방시켰던 영웅.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를 외치며 민중의 영원한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험난한 가시밭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게릴라.

     

    하지만 제국주의의 수탈과 탄압에 맞선 그의 무장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볼리비아 정글에서 서른 아홉살의 불꽃같은 생을 마감하면서 이 세상과 작별했던 사람.

    아르헨티나의 촉망받는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종횡무진전장을 누비던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 체 게바라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체 게바라는 진보의 열망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항상 그의 이름,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를 떠나지 않는 외침의 소리에 우리는 저절로 익숙해져 있다.

    그가 죽은지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전 세계 민중들의 가슴 속에 혁명전사로 살아 있다. 그가 남미 제3세계 국가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의 이념도 고스란히 전설로 남아 있다.

    별을 단 베레모와 덥수룩하게 자란 구레나룻, 강렬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비밀리에 묻혀 있다가 1997년에야 발견됐다. 그가 죽은 지 30년 만에 자신이 몸 바쳐 압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조국 쿠바로 돌아와 묻히면서 다시 한번 민중의 가슴에 회한의 불을 지폈다.

     

    아주 오랫동안 정치·경제·군사를 지배해왔던 미국과 유산자 계급의 착취,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던 독재정권의 박해와 탄압에 저항해 온 쿠바 민중들이기에 체 게바라의 존재는 죽어서도 들풀 들꽃이었다.

    체 게바라의 불꽃같은 삶은 그를 따르고 기억하는 이들에게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 그의 영혼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하나의 문화코드가 됐다. 그를 위한 노래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1965년 까를로스 뿌에블라가 쿠바 혁명을 마치고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떠나는 체 게바라에게 헌정했던 노래

     

    '아스따 씨엠쁘레'(Hasta siempre :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오늘날 월드뮤직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타이틀을 직역하면 '늘 언제나'이다. 
     

    <'베네수엘라의 보석'이라 부르는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 의 리메이크 곡>

  •  

     

'아스따 씨엠쁘레'1997년 발표된 체 게바라 30주년 추모음반이자 헌정음반인 <체 게바라 만세!(El Che Vive!)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라는 앨범에 들어 있다. 이 음반에는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밴 노래들이 많다. 안데스 인디오의 민속음악에 뿌리를 둔 '포클로레'와 이를 새로운 노래운동으로 발전시킨 '누에바 깐시온', 아르헨티나 지방의 그늘진 뒷골목에서 탄생한 '탱고'를 모두 들을 수 있다.

'아스따 씨엠쁘레'는 여러 뮤지션들이 불렀지만, '베네수엘라의 보석'이라 부르는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의 리메이크 곡은 체 게바라 추모곡 중에서도 백미 중의 백미로 손꼽힌다. 볼륨을 높이고 가슴을 맞대 심장으로 들어보라. 애잔한 선율과 함께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비장미가 느껴지고, 억압받는 민중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유독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이유도 이 노래 때문일 것이다.

솔레다드 브라보는 언제나 압제에 시달리면서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삼켜온 민중의 편에 서서 노래를 불러온 저항가수다. 1943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남미 베네수엘라로 이주하면서 이후 독재의 탄압에 누에바 깐시온 음악으로 맞서왔다. 그녀는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감성을 순수한 영혼의 울림으로 촉촉이 적셔왔다. 유럽의 감성과 라틴아메리카의 열정이 잘 버무려진 보컬이 특징이다. 월드뮤직의 대들보 같은 존재지만 말년에 이르러 그녀의 삶은 굴곡진 남미의 역사를 반영하듯 곡절이 많다. 솔레다드 브라보는 국내에서도 '어둠'(Sombras), '검은 비둘기'(Paloma Negra) 등 심금을 울리는 절창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굴렁쇠

 

 

 

1.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1967)

2.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절)


3.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댜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율에 관한 한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1959년 초)


4. 이 곳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콩고로 떠나기 전)


5.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편지 중에서)


6. 나는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7.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델(체 게바라의 동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8.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9.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인터뷰 중에서)


10. 피델에게는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체가 죽기직전에 남긴 말 즉 유언..아내의 재혼까지 이야기하는..)


11. 잠자는 자는 꿈을 꾸지만, 잠자지 않는 자는 꿈을 이룬다.


12. 나는 천천히 걷는다. 하지만 적어도 뒤로 가지는 않는다.


13. 불가능은 가능을 위해 존재한다,


14. 너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냐?

     나의 인생은 고난극복의 연속이다.


15. 포기란 배추를 셀 때만 필요한 단어지, 그외에는 쓸모가 없는 단어이다.


16. 우리는 처음 숫자를 셀때 1부터 센다.

     하지만 모든 일의 처음은 0부터 시작한다.


17.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그리고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라


18. 태양을 향해 쏜 화살은 태양근처까지라도 간다


19.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것과 같다.

     너가 계속 폐달을 밟는 한 너는 넘어질 염려가 없다


20. 너가 죽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가 살아있으면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21. 우리는 포위되었다.

     덕분에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22.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 싸움에서는 한번도 져본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23. 마지막 1%의 길, 그것이 곧 나의 길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seamos todos nosotros realistas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pero tengamos un sueno imposible en nuestro corazon

 

잔혹한 지도자들은 잔인함을 전복시킨 새로운 지도자로 대체될 뿐이다.
Cruel leaders are replaced only to have new leaders turn cruel.

 

만일 내가 추락하더라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가 버려진 내 총을 잡아들고 혁명의 사격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다.
I don't care if I fall as long as someone else picks up my gun and keeps on shooting.

 

나는 네가 여기서 나를 죽일 것을 알고 있다. 쏘아라, 애송아, 너는 그저 사람 한 명만을 죽일 뿐이다.
I know you are here to kill me. Shoot, coward, you are only going to kill a man.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가라고 부른다 - 그러나 나는 그저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진부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쓴 사람들중의 한명일 뿐이다.
Many will call me an adventurer - and that I am, only one of a different sort: one of those who risks his skin to prove his platitudes.

 

침묵은 수 많은 의미의 논쟁을 담고 있다.
Silence is argument carried out by other means.

 

혁명은 다 익었을때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너는 그것을 떨어트려야만 한다.
The revolution is not an apple that falls when it is ripe. You have to make it fall.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할 때에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는 누군가에게 함성을 지르고

우리의 팔들을 팽팽하게 펼쳐서 손을 뻗어 그를 환영하자.
Whenever death may surprise us, let it be welcome if our battle cry has reached even one receptive ear and another hand reaches out to take up our arms.

 

만일 네가 항상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면 너는 곧 내 동료이다.
If you tremble indignation at every injustice then you are a comrade of mine.

항상 승리할 수 있도록
Until victory always

 

솔직하게 말해서, 만일 그리스도가 나의 길 앞에 서있었다면,

나는, 니체처럼, 그를 벌레처럼 찌그러트리기를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In fact, if Christ himself stood in my way, I, like Nietzsche, would not hesitate to squish him like a worm.

 

우리는 이 역사의 불합리한 순간에 고뇌로서 승리한다.
We are overcome by anguish at this illogical moment of humanity.

 

그것은 간단한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무기다.
It is not just a simple game, it is a weapon of the revolution.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있을 바에는, 똑바로 서서 죽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Better to die standing, than to live on your knees.

 

나는 쿠바 혁명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모른다. 혁명의 성공여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혁명이 실패한다면)... 대사관에서 나오는 온순하기만한 망명자들 사이에서 나를 찾지 말라.
I don't know if the Cuban revolution will survive or not. It's difficult to say. But [if it doesn't] . . . don't come looking for me among the refugees in the embassies.

 

나는 이미 그 일들을 겪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결코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손에 기관총을 거머쥐고 나를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로 전진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내 목표를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
I've had that experience, and I'm not ever going to repeat it. I will go out with a machine gun in my hand, to the barricades. . . I'll keep fighting to the end.

 

이 돈키호테같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모험을 앞두고, 한마디 하겠다,

진정한 혁명은 사랑의 위대한 감각에 의해서 인도된다.
Let me say, at the risk of seeming ridiculous, that the true revolutionary is guided by great feelings of love.

 

아군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적군이 없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It's a sad thing not to have friends, but it is even sadder not to have enemies.

 

나는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스스로 해방한다.
I am not a liberator. Liberators do not exist. The people liberate themselves.

 

원작 : 체 게바라
번역 및 각색 : 보헤미안

 

입 에 쿠바산 시가를 물고 손에 기관총을 거머쥔 혁명가 체게바라, 체게바라는 밤에는 항상 독서를 했다. 체게바라는 독서광이었으며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읽었다. 체게바라가 자주 읽었던 작가들은 괴테였으며 프랑스 시를 읽을때면 어김없이 랭보와 보들레르를 읽었다. 그는 학자로서의 재능과 운동선수로서의 재능, 마음과 육체의 재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다만 체게바라는 항상 천식을 앓고 있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치명적인 천식을 앓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내색하지도 않고 차가운 강물을 끝까지 헤엄쳐가는 체게바라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나는 네가 여기서 나를 죽일 것을 알고 있다. 쏘아라, 애송아, 너는 그저 사람 한 명만을 죽일 뿐이다.'

 

'만일 네가 항상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면 너는 곧 내 동료이다.'

 

그래서 넌 항상 내 동료였다.

 

'항상 승리할 수 있도록'

 

'솔직하게 말해서, 만일 그리스도가 나의 길 앞에 서있었다면, 나는, 니체처럼, 그를 벌레처럼 찌그러트리기를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체게바라가 혁명을 성공시킨 뒤 1956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저는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체 게바라는 예수가 했던대로 부조리에 대해서 그저 희생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순수로서 부조리에 대해서, 속물들에 대해서 총을 들고 맞서 싸웠다.

 

체게바라가 한 말중에서는 승리, 투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는 쓰러지면 기어코 총을 들고 투쟁하며 결론이 나지 않으면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한다. 그는 대군에 맞서서 수가 딸리면 게릴라 전술을 펼친다. 산속에서 옮겨다니며 게릴라 전술로 예상치 못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있을 바에는, 똑바로 서서 죽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나는 쿠바 혁명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모른다. 혁명의 성공여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혁명이 실패한다면)... 대사관에서 나오는 온순하기만한 망명자들 사이에서 나를 찾지 말라.'

 

'나는 이미 그 일들을 겪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결코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손에 기관총을 거머쥐고 나를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로 전진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내 목표를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지 않으면 체게바라는 손에 기관총을 거머쥐고 바리케이드로 전진한다. 그리고 기어코 목표를 이루어내고야 만다. 붉은 옷을 입은 사나이,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영혼을 가진 남자 체게바라.

 

나는 내 손에 기관총을 거머쥐고 나를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로 전진할 것이다.

 

'나는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스스로 해방한다.'

 

그 스스로의 운명은 그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의 영혼의 자유와 해방도 그 스스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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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리스트

<체 게바라 평전>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체 게바라. 쿠바의 혁명 투사이자 20세기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람이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고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혁명은 현 정부를 갈아엎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게 일반적인 정의이다. 현재까지의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건 크나큰 변동을 일으켜왔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을 예로 들자면 늘 핍박 받던 시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재까지의 혁명은 항상 진정한 의미로서의 혁명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민중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혁명 수뇌부의 권력욕을 실현시켰고 자신들이 해낸 혁명이 다시 쓰러지지 않게하기 위해, 또 다른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다시 민중을 탄압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군사 쿠데타이다. 무능한 정부를 무너뜨리고 조국 근대화와 국민 계몽을 명목으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워 나아갔다.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고 시민들의 힘으로 세운 현재의 정부들도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민중을 위하기보단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

세상에 진짜 민중을 위한 혁명가는 없는것일까?

 

체 게바라는 말그대로 혁명이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권력에 큰 마음을 담아두지 않은 채 다시 또 다른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났다.

 

체의 인생에 대해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백인으로서 인디오와 흑인들과도 어울려 다녔다. 이로 인해 어릴적부터 가난한 남아메리카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천식에 시달려 그가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히지만 각종 스포츠에 모두 도전 할 정도로 그는 정말 끈기있는 사람이였다.

 

체는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의사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 전 남아메리카 구석 구석을 여행하며 남아메리카의 실정을 깨달았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미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소수 미국인 지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세워놓은 꼭두각시 정부에 인해 신음하고 있었다.

 

그 후 체는 피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하며 쿠바 혁명단체 M7-26에 들어간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체는 혁명이 끝난 후, 쿠바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게 만드는걸 목표로 했다. 책에서도 나타나있지만 이 책에서 발견한 체의 모습중 하나는 민중과 하나가 되는것이였다. 지도자가 되어도 사람들 속에 파묻혀 그들의 일을 돕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그의 모습은 민중의 영웅이라고 부를만 했다.

 (항상 혁명을 할때 입었던 군복차림에 베레모를 썼다고 한다. 다른나라를 방문할때도 말이다.)

 

쿠바의 은행 총재가 되고 외교 담당이 되면서도 스스로 배움을 놓지 않았고 순수한 의미로서 마르크스 주의를 연구했다. 스스로 배운걸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국민들이 더욱 잘살게 하기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때가 되자 체는 쿠바를 떠났다.

쿠바로부터 받은 모든것을 내놓고 말이다.

 

그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쿠바 때보다 상황은 열악했다. 민중은 자신을 지지했지만 선뜩 나서지 않았고 내부의 고발자 때문에 위치가 발각되어 결국 나중엔 죽게 되었다.

 

그는 진짜 순수한 의미의 혁명을 일으켰다.

부와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것이 아닌 고통받는 민중을 위한 위대한 혁명가의 모습

민중을 해방시켜주기 보다는 민중이 직접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법을 가르쳐주고

민중 속에서 숨쉬는 리얼리스트로서의 모습으로 살다갔다

 

"나는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해방해야한다."

그의 말은 사람은 누군가가 해방시켜주는 게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그 자유를 쟁취해야한다는 말이였다

 

 

침묵은 수 많은 의미의 논쟁을 담고 있다

 

만일 네가 항상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면 너는 곧 내 동료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realist : 사실주의/현실주의/실재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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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Fidel Alejandro Castro Ruz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
쿠바 쿠바제22대 대통령
임기 1976년 12월 2일 - 2008년 2월 14일
후임: 라울 카스트로(제23대)

출생일 1926년 8월 13일(1926-08-13) (85)
출생지 쿠바 쿠바 비란
정당 쿠바 공산당
학력 하바나 대학교
종교 없음
배우자 미르타 디아즈 발라트
서명 Signature of Fidel Castro.svg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년 8월 13일 ~ )는 쿠바의 혁명 지도자로서 1959년 2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쿠바의 총리를 지내고 이후엔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가 2008년 2월에 사임했다.

 

처음에 카스트로는 쿠바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이에 동조하는 풀헤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자였다.

 

1953년 그는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하다 실패하여 체포되었으며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그는 멕시코로 가서 당시 쿠바 정권을 공격할 조직을 건설하여 훈련했고,

1956년 체 게바라 등을 이끌고 12월에 이를 실행했다.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쿠바 혁명으로 권력을 잡아 쿠바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1965년 쿠바 공산당 제1비서가 되어서 쿠바를 일당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 1967년 10월 9일(39세) 체 게바라 사망

1976년 그는 각료 회의 의장과 더불어 국가 평의회 의장에 취임한다.

또 쿠바군의 최고위 군사직인 "코만단테 엔 헤페(Comandante en Jefe, 최고 사령관)"에 오른다.

 

이후 장출혈로 내장 수술을 받고 카스트로는 2006년 7월 31일 자신의 직위를 제1부통령인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했다. 2008년 2월 19일에 그의 임기가 끝나기 5일 전에 그는 의장직이나 최고 사령관직을 수락할 생각이 없음을 발표했다.

 

2008년 2월 24일 쿠바 국회는 라울 카스트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제 1 비서직을 2011년 4월 20일 사임 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로 기네스에 올랐다.

 

[편집] 생애

[편집] 초기 활동

블라디미르 푸틴과 카스트로

[편집] 정치 활동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를 다녔으며, 1945년 아바나대 법학부 재학 중 학생운동 지도자로 정치투쟁에 참여했다. 법학부 졸업후 변호사가 된 카스트로는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참여를 해왔으며[1],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한 이래 49년간 공산주의 이념 아래 쿠바를 통치해왔다.

 

가족으로 막내동생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방장관을 두고 있다. 그는 지지자들로부터는 카리스마있는 지도자, 친미독재정권이었던 바티스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해방자, 반미노선으로 쿠바의 자주노선을 실천한 국가 지도자로 추앙을 받지만, 반대자들로부터는 정적 숙청을 포함한 그의 인권침해 행적을 빌미로 종종 독재자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는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사임했다.

[편집] 정계 은퇴

2006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 악화로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대행하였다.

[편집] 꾸준한 암살 시도

미국CIA는 피델 카스트로의 독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카스트로의 암살을 꾸준히 계획, 시도했다. 카스트로가 집권한 48년동안 무려 638건의 암살을 시도해왔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중에는 담배에 독을 묻혀 독살하거나, 카스트로가 자주 마시던 밀크쉐이크에 독약을 타거나, 연인관계를 가장한 여성을 매수하여 암살을 시도하는 등 방법과 종류도 다양했다. 카스트로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행사에 내보내거나, 20여곳의 은신처를 만들어 지내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암살 시도를 피해갔다. 후에 카스트로는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은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2]

[편집] 대한민국과의 관계

현대중공업에 따르면, 피델 카스트로 의장은 2006년 7월 11일 오후 민바스 기초공업성 장관과 함께 현대중공업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아바나의 이동식 전력발전설비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현대중공업 직원 11명과 일일이 인사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공사를 잘 진행하는 것이 놀랍다. 우리 쿠바도 빨리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격려했다고 한다.[3]

 

현대중공업이 쿠바 정부로부터 1억 3000만달러어치의 큰 공사인 디젤발전설비 공사를 추가로 주문받은 2005년 11월에도 피델 카스트로 의장은 직접 현대중공업과 쿠바 정부와의 계약식장을 방문하였다.

 

당시 카스트로 의장은 김헌태 현대중공업 상무, 김창곤 현대중공업 부장과 사진촬영을 하고, 오랜시간동안 이야기도 나누는 등의 깊은 관심을 보였다.2005년 9월의 1차 계약 때도 현대중공업 관계자들을 직접 관저로 초청해 환담을 나누기도 하였다.[4], 2006년에는 수시로 이동식 발전설비 설치공사의 현황을 보고받고 있어, 현대중공업에서도 더욱 부지런하게 일하게 된다고 한다.

[편집] 기타

1960년 유엔 총회에 처음으로 참석해 4시간 29분간 연설하며 국제 사회 데뷔식을 치렀다.

당시 카스트로는 호텔에서 닭과 함께 생활해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편집]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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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카스트로

라울 모데스토 카스트로 루스
Ra?l Modesto Castro Ruz
라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쿠바 쿠바제23대 대통령
임기 2008년 2월 24일 -
부통령 호세 마차도 벤투라
전임: 피델 카스트로(제22대)

쿠바 쿠바의 제1대 부통령
임기 1976년 12월 2일~2008년 2월 24일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전임: -

출생일 1931년 6월 3일(1931-06-03) (80)
출생지 쿠바 쿠바 비란
정당 쿠바 공산당
학력 아바나 대학교
배우자 빌마 에스핀
서명 Raul Castro Signature.svg

 

라울 모데스토 카스트로 루스(스페인어: Ra?l Modesto Castro Ruz, 1931년 6월 3일)는 쿠바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쿠바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2008년 제2대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초대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이자 형과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한 혁명 1세대이다.

 

[편집] 이력

[편집] 학력

  • 아바나 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편집] 경력

피델 카스트로를 따라 쿠바의 혁명전쟁에 동참하였다.

1976년 쿠바 국가평의회 부의장에 선임되었고 2008년 1월까지 역임했다. 2008년 2월 은퇴한 피델 카스트로를 대신하여 제2대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취임 직후 2009년 1월 대미외교관계에서 미국과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1] 2011년 4월 당의 제1 비서직으로 승격되었다

 

<쿠바의 역사 및 사회>

 

최초로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쿠바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시보니족, 과나아타베이족, 이들보다 뒤에 정착했던 아라와크(또는 타이노)족 등의 인디언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의 첫 아메리카 대륙 항해 때인 1492년 쿠바를 스페인영토로 선포했다. 1511년에는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바라코아최초의 유럽인 영구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곧 쿠바를 7개의 자치체로 나누었고, 이곳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멕시코 진출(1519∼21)을 비롯해 스페인의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근거지가 되었다.

 

인디언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16세기말에는 인디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엥코미엔다 농장 제도는 더 이상 효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17세기에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강대국들이 침략해옴에 따라 식민지 상황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18, 19세기에 걸쳐 사탕수수 재배술의 발전, 노예노동력의 수입, 설탕산업의 성장 등에 힘입어 쿠바는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 설탕산업을 세계최고수준으로 기계화했고,

1860년경에는 전세계 설탕의 거의 1/3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1865년 노예매매는 중단되었지만, 멕시코 인디언과 중국인 노동력이 증가했다.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19세기말에는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투자국이었다.

 

스페인이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세금부담이 증대하면서

제1차 쿠바 독립전쟁인 10년전쟁(1868∼78)이 발발해 군사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발발했는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 1898년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함대 메인호(號) 선상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도 스페인에 대항하여 이 전쟁에 참가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1899년 쿠바가 독립을 쟁취한 후 한동안 미국이 이곳을 점령해 질서가 회복되고 많은 학교와 도로·교량 등이 건설되었다.

 

1901년 미국은 관타나모 만의 해군 기지 설립권과 쿠바의 국내외 행정을 감독할 권리를 얻어냈다. 1902년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폭동기였던 1905∼06년을 거쳐 1906∼09년에는 제2차 미국 점령이 실시되었다.

1909년 자유당 대통령 호세 미겔 고메스가 이끄는 새로운 행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프리카계 쿠바인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뒤이은 대통령들과 독재자들의 시대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관광산업·도박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던 끝에

1958년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대정부 게릴라전을 지속했던 혁명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는 곧 소련과 수교하고 자본주의의 폐지,  외국인소유기업의 국유화, 소련식 농공업 개혁 등을 실행했으며, 마침내 자신의 혁명당을 PCC로 전환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전쟁인

 

1961년의 피그스 만 침공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최악에 달했다.

 

1960, 197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제3세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혁명에서도 소련을 대신해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을 지원해왔으며, 앙골라와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모든 계층에 대한 교육·의료 혜택을 실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계속 소련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부속국이라는 쿠바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비동맹국가들의 움직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바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붕괴로 정치·경제적인 타격이 컸다.

 


사회주의 국가로서, 유일한 합법정당인 쿠바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Cuba/PCC)이 집권하고 있다. 1976년의 헌법은 PCC가 최고권력당임을 천명했으며, 정부구조는 다른 공산당과 비슷하다. PCC의 정치국이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서 모든 공식통치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다. 입법권은 지방의회에서 5년마다 선출되는 510명의 인민의회에 있다. 인민의회 의원 중에서 의회상설기관인 국가평의회의 구성원이 선출되며, 임명받은 각료들로 구성되는 각료회의가 행정집행권을 가진다. 국가평의회 의장이 각료회의의 의장을 겸하며, 국가와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 최고사법기관은 인민최고법원이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어 질병·출산·산재 수당 등 광범위한 수당제도와 노년·신체장애·유가족을 위한 연금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며, 의료혜택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평균수명이 74세 이상이고 유아사망률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편으로 보건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수준 높은 의료진을 갖춘 현대식 의료시설들이 많다. 교육은 모두가 무료이고, 6∼12세의 아동들이 의무교육 대상자들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학습과 육체노동을 결합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PCC의 기관지인 그란마 Granma는 발행부수가 많은 일간지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교육과 정치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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