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종을 더 지지한다. 돈이 없어도 배울 수 있는 불교이기에 수용성이 좋고 돈이 많고 적음을 구별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배울 수 있고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달마는 이것을 강조해서 혼자 수행을 하기도 하며 세상의 외물에 벗어난 진짜 근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조건이 있는 사랑은 조건이 없으면 깨지지만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사랑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것처럼 부처가 되기위해 돈이라는 조건이 붙는 교종은 금새 사람의 발길이 끊기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불교가 쇠퇴한 이유만 봐도 그렇다. 돈이 없으니 교종보다 선종(쉽게 말해 평민 불교)이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두 번째로 선종은 경전이나 불상같은 외적인 것을 넘어선 본질을 꿰뚫는 불교이기에 불교의 근원에 도달하기 쉽다. 수행을 할 때 외적인 것에 얽매이다보면 진리에 도달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대중들에 대한 접근성이 좋기도 하다.
교종을 지지하는 이 중에 교종은 실천성이 강하다고 하지만, 선종에도 실천을 강조하는 이입사행론이 있다. 이입(꺠달음)을 얻고 행입(행동, 실천)을 실천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교종은 배우는 데 돈이 필요해서 사람들에게서 돈을 얻기 위한 경쟁을 부추기기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너무 큰 논리적 비약이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져라, 욕심 내라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종은 어쩌면 그런 행위를 하게끔 유도하지는 않나싶다. 희소성이 있는 상류층만 배우는 학문인데 왜 모두에게 욕심내지 않은 상태를 가진 개인을 지향하는가? 희소성이 있으려면 욕심을 부려야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을 제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