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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14
디모데전서 6:1-5
바른 말
이제까지 교회에서 과부를 분류해서 어떻게 잘 대우하라든지 장로, 즉 목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말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오늘 본문도 단순히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현실적으로 우리의 상황에서는 상전이 없고 종도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만 적용되는 말씀이지 오늘날 우리에게는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들이 이에 대한 대안으로 종과 상전을 현대적 개념으로 바꾸어 종업원과 주인 혹은 관리인, 사장의 관계로 바꾸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성경은 언제나 복음을 말씀하지 우리의 삶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 본다면 그것 자체가 또 새로운 율법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 역시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된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종”의 ‘둘로스’는 ‘종, 노예’라는 말이다. 노예나 종은 주인의 말을 따라 살며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자로서 상전과 같이 되는 존재이다(마 10:25). 그런데 문자적으로 보는 자들은 바울 사도가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지금 당장 폐지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은 종으로 상전은 상전대로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적인 종과 상전에 대한 일로 복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전한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0-24)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라고 하였는데 “멍에”라는 말의 ‘쥐고스’는 ‘쥬그니미’(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멍에, 저울’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는 왕권적인 다스림 아래 있는 속박과 노예의 상태를 의미하여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으로 비유한다(레 26:13, 사 9:3, 14:25 등).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죄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을 종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말씀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란 죄의 종으로 멍에를 메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며 복음을 나누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율법을 행위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짐이 되었다는 뜻이다(마 23:4). 그 짐을 벗어 버린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이스라엘의 멍에는 언제나 두 마리의 소가 메는 멍에였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이기에 쉽고 가벼운 것이다.
“상전들”이란 ‘데스포테스’는 ‘(노예와 구별되는) 주인, 주, 소유자’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 단어가 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일반인들에게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주재여”(눅 2:29), “대주재여”(행 4:24, 계 6:10)라고 번역하였고, 예수님에 대하여 값으로 사신 “주”(벧후 2:1), “주재 곧 주(퀴리오스)”(유 1:4)라고 나타낸다. 즉 ‘데스포테스’를 통해 ‘주’(퀴리오스)를 말씀한 것이다.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라는 말씀은 ‘가장 가치 있고 합당한 것으로 여긴다’라는 뜻이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5-9)
“하나님의 이름”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하나님의 그 이름’이다. 한마디로 구약에서 언약으로 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교훈”이란 언약으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 이는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은 모독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진리가 된 자들을 ‘종들’로,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하나 된 자들을 ‘상전들’로 비유하여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씀한 것으로, 율법의 멍에를 벗고 진리의 말씀이 된 자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멘 것을 가장 가치 있고 합당한 것으로 여긴다면 언약으로 일하신 하나님과 그 말씀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독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2절).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이란 종이나 상전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자들을 의미한다. “유익”이라는 말의 ‘유에르게시아’는 ‘유’(잘, 좋은, 기쁜)와 ‘에르고’(일하다, 행위를 하다)의 합성어인 ‘유에르게테스’(선행자, 은혜를 베푸는 자, 은인, 후원자)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선한 행위, 은혜의 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익을 받는 자들”이란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믿는 자들”이란 ‘믿음이 된 자들’이고, “사랑을 받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된 자들’이다.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라는 말씀은 이런 진리 가운데 가르치고 초대하라는 것이다. 상전, 고관, 권세 있는 자들이 다스리는 이 땅에 예수님은 대주재이셨으나 상전이 되고 큰 자임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섬김을 이루셨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자들이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2-4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3절). “다른 교훈”이란 이미 1:3에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에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으로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에 집착하는 것으로 완전히 진리와 다른 가르침을 의미한다. “바른 말”이란 표현에서 “바른”의 ‘휘기아이노’는 히브리어 ‘샬롬’의 역어로 쓰이는 단어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평안, 안식의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래서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따르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의 ‘프로셀코마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몰두하다, 함께 하다, 따르다’라는 뜻인데 부정을 표현하는 ‘메’가 붙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대적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4절). 성경에서 “교만”이란 단순히 잘난체하는 거만한 태도를 말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좋아하는”의 ‘노세오’는 ‘병들다, 앓다’라는 뜻으로 병적으로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현재 능동태로 계속 좋아하고 있는 상태이다. 즉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를 부인함으로 말씀이 아닌 것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논쟁하는 것, 말싸움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자들이다.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 율법적인 행위에 집착함으로 투기, 분쟁, 비방(모독), 악한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자기 행위가 아닌 은혜와 긍휼에 의해 이런 육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음을 아는 자이다.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3-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5절). “부패하여지고”는 ‘파괴하다, 파멸시키다’라는 뜻으로 겉 사람이 죽어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고후 4:16). “진리를 잃어버려”라는 말의 헬라어 ‘아포스테레오’는 ‘약탈하다, 속여서 빼앗다, 관계를 끊다’라는 뜻인데 완료 수동태를 사용하여 완전히 진리를 빼앗긴 상태를 나타낸다. “이익의 방도”의 ‘포리스모스’ ‘이익, 취득’이라는 뜻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의미한다. 즉 “경건”이라는 하나님을 경외함을 종교적으로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완전히 진리를 빼앗겨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라는 말의 ‘디아파라트리베’는 ‘부단한 싸움, 끊임없는 투쟁’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다른 교훈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3)라고 하였다. “적그리스도”란 무시무시한 마귀 같은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예수 그리스도 같은 모습으로 자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바른 말,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다.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4-6)
(202501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