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변정금-전남 광양시 금호동
어제 난 부산에게 바람을 맞았습니다. 집안 행사로 부산을 향하던 발걸음이 톨게이트에서 멈춰서고 말았지요.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아이 아빠의 고집으로 결국 나만 집앞에 남긴 채 사라지는 차의 뒷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집으로 터벅거리며 올라오는 계단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잠시, 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집은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겼습니다.
그렇게 낯선 침묵 속에서 한참 뒤에야 커피 한 잔을 들고서 베란다에 앉아 깊어가는 이 가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어둠이 내려앉는 하늘에 또 다른 얼굴의 가을이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울긋불긋 또 다른 얼굴의 가을하늘이 회색빛 무채색의 어둠을 감싸안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우리 가족은 백운산의 끝자락에 있는 성불사 계곡으로 향합니다. 그곳은 가을이 서서히 내려앉는 아담하고 작은 절입니다. 그래서인지 단풍은 전국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아름답고 곱게 물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고운 단풍을 주워 말리고 코팅을 했더니 아이처럼 유치하다고 놀리던 지인들도 이젠 가을이 오면 애틋한 눈초리로 나만 바라봅니다. 한 장씩 나눠주는 고운 낙엽을 그들이라고 왜 싫을까요. 가슴속엔 유년의 추억을 간직하고서도 밖으로 보이지 못하는 그들은 가슴 한구석엔 이렇듯 어리석은 내가 부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즐기는 내게도 올 가을은 유난히 가슴에 크게 다가옴을 깨닫습니다. 언제부턴가 외로움을 가슴 한모퉁이에 숨겨두는 법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혼자인 외로움은 참을 수 있었지만 솟구치는 그리움은 심연보다 더 깊은 가슴속에 아무리 꼭꼭 묻어두어도 잡초처럼 비집고 나와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사람은 세월과 함께 나이도 따라 걸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 전엔 중년의 여성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자식과 남편에게 얽매여 전쟁을 치루듯, 삶이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지금의 그 나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것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지나온 세월의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뿌듯함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긴 이 편안함이 나를 몹시 행복하게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란 구속이 아닌 자유로움이란 걸 이제서야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나이가 드는 만큼 내 마음이 열려가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겁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아 가는 베푸는 사랑과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작은 마음 한 조각이 배려하는 또다른 이름으로 세월과 함께 모난 내 성격을 많이 다듬어 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흘러 한 살씩 나이의 나이테가 늘어갈 때마다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내 마음도 둥글게 더 큰 원을 그릴 겁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낭랑 18세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신 "육체는 늙어도 마음은 그대로"라는 말씀이 이렇듯 시리게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가을, 나는 내 나이가 참 좋습니다. 눈 밑에 잡힌 주름도 입가에 미소를 지을 때마다 생기는 여울 속에서 찾아오는 세월의 흔적을 이젠 간직하며 따뜻하게 품고 싶습니다. 어쩌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살아갈수록, 나 자신을 포기한 만큼 비어 있는 내 가슴은 또 다른 새로움으로 가득 채워짐도 깨닫습니다. 가을도 지금의 내 나이처럼 모듬고 있던 모든 잎들을 다 떨구었을 때야 비로소 튼실한 열매를 잉태합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느새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아름다운 40대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넉넉하고 여유로운 가을이 깊어가는 오늘 문득, 난 지금의 내 나이를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