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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무의 조선사 원문보기 글쓴이: 문 무
연경(燕京)에 대하여
● 아래의 원문(原文)은 고전번역원의 “고전국역서 편의 연행록”속에 있는 “조경일록(朝 京 日 錄)” 중의 일부 내용이다.
【“조경일록(朝 京 日 錄)” 의 저자(著者)는 『인조(仁祖), 효종(孝宗) 연간의 문신으로, 벼슬은 지평으로부터 영의정까지 지낸 『김육(金堉)』이란 분으로, 명(明)에 한 번, 청(淸)에 세 번이나 동지사(冬 至 使),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 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또 진향사(進香使)로 청(淸)에 다녀온 분으로, 조선(朝鮮)의 북방(北方)에서 명(明)과 청(淸)으로 가는 곳의 지형(地形), 지리(地理)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던 분이다. 조경일록(朝 京 日 錄)은 인조 14년(1636) 6월 15일부터 이듬해 6월 2일까지 1년 동안의 일을 일기체로 쓴 것이다. - 고전번역원의 해제 참조】
병자년 숭정(崇禎) 9년 (1636, 인조 14) 10월 / 23일
《 원문(原文)/번역(飜譯) : 여러분들이 보고,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차례로 나눴음.》
○ 晴溫.平明.發行.點心于范家庄.夕宿楡關.凡行七十里. : 맑고 온화하다. 평명에 출발하여 점심은 범가 장에서 먹고, 저녁 유관에서 묵었는데, 70리쯤 갔다.
○ 楡 關. 乃 一 大 村 庄. 別 無 關 防.: 유관(楡 關)은 하나의 평평한 대촌(大村)으로 특별한 관방은 없다.
○ 蓋 古 樹 楡 爲 塞 之 地. 秦 之 長 城 止 於 此. : 진(秦)의 장성(長城)이 여기에서 끝났는데 옛 적에 버드나무를 심어 성채(경계)를 만든 땅이다.
○ 皇 朝 中 山 王 徐 達 增 築. 至 山 海 關 望 海 樓. : 황조의 중산 왕 “서달”이 증축하여 산해 관 망해 루까지 이르렀다.
○ 楡關之北.有黃坎山.極高大.分出兩支.一支東去爲角山.卽山海關之鎭山也.又西支北走爲回龍.作永平府鎭山. : 유관의 북쪽에 “황감 산”이 있는데 높고 크다. 나뉘어 양쪽으로 뻗었는데, 한 가지는 동으로 가서 “각산”이 되었는데, 즉 산해 관의 진산(鎭山)이다. 서쪽으로 나누어진 한 가지는 북쪽으로 뻗어 둥그렇게 둘러쳐진 형세가 되어 “영 평 부”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 蓋北京之第一纏護角山也.第二兔耳山也.第三薊州景忠山也.景忠山.自白頭山而來. : 북경을 둘러쳐 보호하는 것은 첫째 “각산”이요, 둘째가 “토이 산”이며, 셋째가 계주의 “경충 산”이다. 경충산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 白頭在沙流河正北.石山如雪.故謂之白頭.此山一支南走爲空同,景忠山.一支西走爲盤山.南回爲玉泉山.環繞北京之西矣. : “백두산(白頭山)”은 사류 하(河)의 정 북쪽에 있으며, 산에 돌이 눈(雪)과 같아 예부터 “백두(白頭)”라 하였다. 이 산의 한 가지가 남쪽으로 달려 “공동(崆 峒)산”과 “경충 산”이 되고, 한 가지가 서쪽으로 뻗어 “반산”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옥천산”이 되어서 북경의 서쪽을 띠처럼 둘러싸고 있다.
[주D-001] 회 룡(回 龍) : 산이 회전하여 둥그렇게 둘러친 형세를 말한다.
➊ 위 글에서 진(秦)의 장성(長城) 문제는 수십 회도 넘게 설명한 내용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한 설명으로 대신한다.
즉 진(秦)의 장성(長城)은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나서, 더 이상의 장성(長城) 축조(築造)는 중지(中止)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진(秦)의 본기(本紀)나 열전(列傳)등을 보면, 진(秦)의 장성(長城)은 하【 河 : 중원 서북방 내몽고를 흐르는 황하(黃河)】의 북안(北岸)에 있는 양산(陽山)의 북쪽으로 향하다가 끊겼기 때문에, 양산(陽山) 동쪽으로 이어질 수 없다.
위 기록대로 『“진(秦)나라 때의 장성(長城)”이 현대(現代)의 “하 북 성 산해(山海)관” 또는 “유관(楡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면, 『이 장성(長城)은 진(秦)나라의 “황태자 부소” 및 “대장군 몽 념”과 그 “휘하 40만 대군”의 귀신(鬼神)들이 “저승사자”들의 통솔아래 만들어 졌을 것이다.』라고 유추할 수 있다.
곧 이러한 일은 없었다는 것이며, 『대륙(大陸)사나 조선(朝鮮)사 그 어디에도 기록(記錄)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는 의미(意味)다. 역사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대륙의 손문(孫文) 이후의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중화주의자 및 제국주의의 식민사관과 반도사관 논자들에 의한 “역사해설”이란 명목 하에 만들어낸 조작의 결과일 뿐이다.
➋ 【蓋北京之第一纏護角山也.第二兔耳山也.第三薊州景忠山也.景忠山.自白頭山而來. : 북경을 둘러쳐 보호하는 것은 첫째 “각산”이요, 둘째가 “토이 산”이며, 셋째가 계주의 “경충 산”이다. 경충산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白頭在沙流河正北.石山如雪.故謂之白頭.此山一支南走爲空同,景忠山.一支西走爲盤山.南回爲玉泉山.環繞北京之西矣. : “백두산(白頭山)”은 사류 하(河)의 정 북쪽에 있으며, 산에 돌이 눈(雪)과 같아 예부터 “백두(白頭)”라 하였다. 이 산의 한 가지가 남쪽으로 달려 “공동(崆 峒)산”과 “경충 산”이 되고, 한 가지가 서쪽으로 뻗어 “반산”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옥천산”이 되어서 북경의 서쪽을 띠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 북경(北京)을 둘러싸고 있는 산 중에서 계주【薊州 : 어 양(漁陽)이며, 당(唐)의 범 양이며, 유주절도가 있던 곳이다.】에 있는 “경충 산”이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것이라 하니,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조선사 입장에서 알아보자는 것이다.
●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것이, “공동 산(崆峒山)과 경충 산(景 忠 山)이 되고,” 서쪽으로 뻗어 내린 것이 “반산(盤 山)”이 되고, 또 남쪽으로 돌아 “옥천(玉泉)산”이 되었는데, 이 4개의 산이 북경(北京)의 서쪽을 띠(고리)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 본문 내용이다.
● 여기서 본인은 현재의 “북경(北京)”은 옛 역사서에 기록된 북경이 될 수 없음을 지리(地理), 지형(地形)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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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 두 산(白頭山) :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반도(半島)의 령 산(靈山) “백두산(白頭山)”!!!!!!!!!!!!!
또 현 “하 북 성”의 사류 하 북쪽에 또 하나의 백두산(白頭山)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도책이나 역사서 어느 곳에도 이곳에 “백두산(白頭山)”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니, 도대체 웬일인가!!!!!!!!!!!!!! 북경(北京)의 서쪽지방엔 태 행(太行) 산맥(山脈)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북경의 서쪽을 띠처럼 둘러싸고 있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뻗어 내린 산맥(山脈)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백두산’에서 한 지맥이 뻗어 내려 ‘태 행 산맥’이 되었다.』는 것은 아닐진대!!!!!!! 이것은 지형, 지리를 무시한 채 지명(地名)만을 짝퉁으로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는 오류(誤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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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에 관한 것 역시 자세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하였으니 이것으로 끝내고,
(2) 공 동 산(崆 峒 山) : 공동 산(崆 峒 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산해 경(山海經)일 것이다. 산해 경 / 해내서경을 주석(註釋)한 것을 보자. “공 동 산(崆峒山)”에 관한 것이다.
<山 海 經 第 十 一 . 海 內 西 經> : 【본문(本文) / 貳 負 之 臣 曰 危, 危 與 貳 負 殺 窫 窳. 帝 乃 梏 之 疏 屬 之 山, 桎 其 右 足, 反 縛 兩 手 與 髮, 繫 之 山 上 木. 在 開 題 西 北 ➊】
【주석(註釋) ➊ <畢 沅 云 : 開 題 疑 即 笄 頭 山 也, 音 皆 相 近. 珂 案 : 六 朝 陳 顧 野 王 輿 地 志(漢 唐 地 理 書 鈔 輯)云 : 笄 頭 山 即 雞 頭 山. 唐 李 泰 括 地 志(漢 學 堂 叢 書 輯)云 : 笄 頭 山 一 名 崆 峒 山. 黃 帝 問 道 於 廣 成 子, 蓋 在 此. 開 題, 笄 頭(雞 頭, 崆 峒, 均 一 音 之 轉 也.) : 필원이 이르기를 : “개제(開題)”는 의심스러우나 곧 계두 산(笄 頭 山)이다. 음(音)이 모두 서로 가깝다. 가안 (珂 案)상고해보면 : 육 조 진(陳) 고 야 왕 여 지 지(六 朝 陳 顧 野 王 輿 地 志 : 한서지리서 초집)에 이르기를, 계두 산(笄 頭 山)은 곧 계 두 산(雞 頭 山)이다. 당(唐)나라 “이태(李 泰)”의 괄지 지【括 地 志: 한 학 당의 총 서 집】에서 이르기를 : 『계두 산(笄 頭 山)은 일명 공동 산(崆峒山)이다.』 황제(황 제 헌 원)와 광 성자【도인 또는 신선(神仙)이라고 전해진다.】가 도(道)에 대해 문답(問答)을 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개제(開題)는 계두(笄頭)이다. (계두(鷄頭). 공동(崆峒)은 균일하게 음(音)이 변한 것이다.)】라고 옛 역사학자 “필원(畢 沅)”은 설명하고 있다.
● 위 주석(註釋)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 산(崆峒山)은 중원(中原) 서북(西北)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며, 현재의 “하 북 성” 북경(北京) 주위에 있는 “공동 산(崆峒山)”은 유명한 “짝퉁”인 셈이다.
조선사(朝鮮史)의 기록 중 연행록엔, 공동 산(崆峒山)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대부분 “황제(黃帝)와 광 성 자(廣 成 子)”사이에 “도(道)”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있었던 곳으로 “공동 산(崆峒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 지리 등으로 북경(北京)에 대해 알아보면, 현 “하 북 성”에 있는 북경(北京)은 전형적인 역사왜곡의 산물인 “짝퉁”이며, 실제 『옛 “북경(北京)”은 중원(中原) 서북방의 사막(沙漠)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증명(證明) 또는 고증(考證)하는 자료로, 연행(燕行)록 속에 가장 많은 자료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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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원 직지(燕 轅 直指) 제2권 출강 록(出 疆 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 5일의 기록을 보면 ;
《“평명(平明)”에서 출발하는데, 아주 미세한 티끌과 모래가 바람을 따라 날리니, 거의 한 발자국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북경(北京) 가까이 갈수록 사막(沙漠)지대와 가까웠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현 ‘하 북 성’과는 관계없는 지형, 지리이다.
(4) 연 행기(燕行 紀) 제2권 / 起 熱 河 至 圓 明 園 / 경술년(1790, 정조14년) 7월 22일(경자) ; 조 하 천 영(潮 河 川 營) 성에 올라가 시(詩)를 지었다. 의 기록을 보면 ;
《수레는 더디고 사막엔 가을인데 / 車 馬 逶 遲 大 漠 秋 / 백단 山 남으로 보이는 게 신주라네 / 白 檀 南 望 是 神 州 / 연경 운수는 하늘 끝에 닿았고 / 燕 雲 樹 色 連 天 盡 / (中略).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 북경(연경)으로 가는 가까운 곳에, “사막(沙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5) 연행록 / 몽 경 당 일 사 (夢 經 堂 日 史) 제4편 / 자 금 쇄 술(紫 禁 瑣 述) ○ 을묘 년(1855, 철종 6) 12월 22일(경술)
《燕京不過北方一隅之地.山川則醫閭,渤海亦是支流餘脈而已.人物則雖有堯,舜,禹,湯之聖.皐,夔,稷,契之佐.一着黑毳帽馬蹄袖.則餘無足觀矣.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中略).: 연 경(燕 京)은 북방 한 모퉁이 땅에 불과하고, 산천은 醫무려산과 발해(渤海)로서 역시 지류(支流)와 여맥(餘脈)일 뿐이며, 인물로 말하면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 같은 성군(聖君)과 고(皐)ㆍ기(蘷)ㆍ직(稷)ㆍ설(契) 같은 현신(賢臣)이 있었지만 한번 흑 취 모(黑 毳 帽)와 마제 수(馬 蹄 袖)를 착용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더 볼 것이 없네. 황 막(荒 邈)한 사막, 흰 자갈뿐인 천 리 광야에 높직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 놓고는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다랗게 정각(亭閣)ㆍ전우(殿宇)를 세워 조각과 단청을 하여 궁궐이라 하였다. (중략).》
● 연경(燕京 : 북경)에 대한 결정적인 지형(地形)을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것은 연경(燕京)과 현 ‘하 북 성’의 북경(北京)과는 서로 다른 지명(地名)이며, 위치(位置) 역시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하는 증거다.
우선 현 “북경(北京)”에 있는 궁궐(宮闕)과 장성(長城)은 옛 “연경(燕京)”과는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위 원문을 보면 ; <荒沙白磧千里曠野之中.仞築甓垣而周圍之.曰城堞也.高起亭閣殿宇而雕彩之.曰宮闕. : 황막한 사막(沙漠)의 흰 자갈뿐인 천리(千里) 광야 가운데, 벽돌담장(甓 垣)을 높게 주위에 쌓고, 이것이 성첩(城堞)이라 하고, 높은 정각(亭閣 : 정자). 전우(殿宇 : 전당)를 세워 놓고 조각하여 색칠해 놓고는 이르길, 궁궐(宮闕)이라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1,855년 12월 22일의 연경(燕京) 모습이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의 “연경(燕京)”이라는 “황도(皇都)”의 궁궐 모습이란 얘기다. 여러분들도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 《연경(燕京)과 북경(北京)이 같은 곳이라면 오늘날의 하 북 성 북경(北京)의 옛 궁궐(宮闕)의 거대한 모습”은 1,855 년 이후(以後)에 건축된 것이며, 연경(燕京)과 북경(北京)이 서로 다른 곳이라면, 현 북경(北京)은 어떤 나라의 도읍지(都邑地)였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사(朝鮮史)를 공부,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케 하는 좋은 예이다.
●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들의 기록물을 연행록(燕 行 錄)이라고 한 것을 감안하면, 분명 “연경(燕京)”은 황도(皇都)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황도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사막(沙漠) 지대며, 천리 넓은 광야 지대』라는 점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형(地形)은 현 ‘하 북 성’ 북경(北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2011년 01월 0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