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되기까지

1930년대 초기 MOMA의 관장인 알프레드 바는 당시 현대예술의 변방인 미국 뉴욕에 “입체주의와 현대예술”이라는 기획전을 열었다. 당시까지 미국은 현대예술의 대중의 폭이 상당히 좁았다. 1차2차 세계대전동안에 나치가 현대예술를 퇴폐예술로 규정 탄압하자 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파리의 루부르박물관 직원들도 대륙보다는 바다를 건너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미술품 또한 전쟁의 폭격과 약탈을 피해 뉴욕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뉴욕이 현대미술의 중심지라는 바통을 파리에서 이어받았고 화상들의 바지런한 활동으로 예술시장자체가 옮겨오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유럽의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18세기에 화상이라는 직업이 등장했다.
파리에서는 주된 예술후원자들이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었기때문에 화가들은 루부르궁전에 작업실을 갖고 주문에의해서만 그림을 그렸다.따라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사업적인 미술거래는 할 수없었다.반면에 소비가 미덕인 뉴욕의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미국의 경제적인 부와 파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콤플렉스 ,파리를 능가하려는 그들의 열정으로 대형미술관들이 속속 생겨났다. 역사는 짧았지만 예술품을 닥치는대로 사들인 후, 강연및 세미나를 통한 자율학습과 과외로 지적인 면까지 속성으로 갖춰나갔다. 문화적인 열등감에서 탈출하려고 닥치는 대로 예술품을 구입한 미국인들은 뉴욕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이들 중 일등공신은 미국의 저명한 재력가의 부인들, 미국왕조(American Dynesty)라 불리는 록펠러가문의 며느리인 애비 앨드리치 록펠러와 릴리플레머 블리스, 메리 퀸 설리번이다. 이들 세명가운데 주축은 애비록펠러, 미술품구입과 설립자금은 록펠러가문의 것이지만 탁월한 안목과 식견은 온전히 그녀자신의 것이었다. 만약 록펠러2세가 애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록펠러가문은 현대미술계에 이렇게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록펠러 2세는 아버지 록펠러 1세가 펼치던 자선사업을 이어가면서 클로이스터 미술관의 중세유럽컬렉션을 100만 달러에 구입해 1925년 메트로풀리탄 미술관에 기증하는 등 문화도 적극 지원했다.하지만 현대미술에는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혐오했다.
애비의 아버지는 로드아일랜드 주 상원의원이었던 넬슨 앨드리치, 앨드리치 가문은 록펠러만큼 부자는 아니어도 권위있는 상류명문가였고 애비는 어릴때부터 드가의 드로잉과 수채화를 수집했으며 유럽여행으로 예술과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운 세련된 아가씨였다.
당대재계와 정계 최고의 가문이 만난 이들의 결혼 은 <타임>을 비롯한 각종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검소하고 절제하는 가풍이 몸에 밴 록펠러 2세는 내성적이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반면, 그녀는 늘 쾌활했고 뉴욕의 문화와 사교생활에 익숙해졌다.결혼초기에는 그녀도 남편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르레상스이전 회화등을 수집했다. 당시 미국 컬렉터들은 유럽걸작을 구매하는 데 몰두했으나 1913년 미국최초의 국제현대미술전으로 인상파,입체파,다다이즘,추상미술에 이르는 유럽모던니즘 경향을 총 망라한 아머리쇼(병기고armory를 전시장으로 이용한데서 붙은이름)를 본 후 현대미술의 매력을 발견한다. 또한 이 아모리쇼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건립에 결정적인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제1회 아모리쇼를 전두지휘한 작가 아서 데이비스(Authour Davis,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남편이기도 하다)가 세 여인 애비 록펠러 메리 퀸 설리반, 릴리 블리스에게 미국 현대미술관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미술사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애비는 1925년 부터 조지아 오키프, 맥스웨버같은 미국의 젊은 작가작품과 미국 민속미술품을 수집하는 동시에 반고호,마티스, 피카소 등 유럽 모던이즘 미술가들의 작품들도 다양하게 구입했다. 애비 록펠러의 컬렉션은 그녀가 고전작품 위주로 흐르던 당시 미술계와는 매우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우리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함께 호흡할 작품이기때문” 이라는 것이 그녀가 말한 이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이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 같은 생각을 공유한 두여성과 뭉쳐 뉴욕현대미술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록펠러 2세는 처음에는 그녀의 활동을 돕지 않았다.미술관은 맨하튼 웨스트53번가 11번지에 위치한 룩펠러가의 9층짜리 저택7층에서 시작되엇다. 세계최고재벌의 부인이지만 미술관운영 기금도 직접조달해야했고 설립 후 10년간 무려 3번이나 이사를 해야했다. 그러나 록펠러2세는 결국 아내의 활동을 뒷받침 해 주었다. 1939년 록펠러2세는 저택을 미술관부지로 제공했고, 이후 거액의 돈도 기부했다.미술관은 더이상 욺겨다닐 필요가 없었고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대여성으로서 다소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애비 록펠러의 사회활동도 록펠러가의 명예를 높였다.”내게 미술은 인생의 위대한 자산중 하나다”라고 말한 그녀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록펠러가의 분위기에 미술을 향유하고 후원하는 여유와 풍요로움을 심었다.그러나 그녀가 기여한 것은 록펠러가문이 아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에서 다양한 근현대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감식안과 신념덕이 크다.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는 2015년까지 관광객 5000만명 유치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첫번째 요소로 예술장려를 뽑았다. 그도그럴것이 뉴욕현대 미술관 MOMA이 창출하는 경제효과만 해도 매년 20억달러가 넘기때문이다. MOMA 는 뉴욕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미술관이다.
▶참고문헌
경매장가는 길 ,록펠러가의 사람들, 뉴욕미술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