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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설교집 14. 의의 종과 자유의지 (롬6장 III)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23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롬 6:12-2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설교 열네 번째입니다. 제목은 “의의 종과 자유의지”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전체에서 계속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를 꺼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약속이지요. 꺼내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어디로부터 꺼내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사람마다 자기 처지와 가치관에 따라 다 생각이 틀리지요. 배고픈 데에서 꺼내신다는 것인가 보다, 병을 치료해주신다는 것인가 보다, 또는 윤리 도덕적으로 참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해주시겠다는 것인가 보다 등등 온갖 해석들이 있습니다. (물론 죽은 다음 천국에 들여보내 주신다고 보는 것은 공통된 것입니다. 천국의 존재 자체도 부정하는 신학적 흐름도 일부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성경 해석의 차이는 구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의 차이인데 이 차이점은 인간의 문제점을 성경에서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는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배부르고 등 따시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논리 자체가 다 다르게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 사실 세상 철학자들도 다 그것을 연구하는 거지요. 우리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우리 머리를 사용을 해서 파악하려고 들면 각자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가치관, 자기가 받은 교육에 의해서 다 다르게 생각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문제도 성경에서 설명하시는 인간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분들이 있어요. 어떤 분들이냐 하면 인간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신학자들 중에서는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지요.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을 절망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서구 헬라 철학에 속한 사람이었는데도 참 특이하게 죽음의 문제가 그 사람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어요. 배고픔의 문제도 중요한 게 아니고, 윤리도덕의 문제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차한 삶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질병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오직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평생 굉장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그 덕분에 본질을 본 것이지요.
사실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출발합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죽음의 공포가 무의식 속에서만 작용하지요. 소위 건강한 삶을 산다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문제가 현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심지어 초상집에 가서 신나게 화투를 칩니다. 그리고 상주들도 화투와 담요를 준비해 주느라 바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초상집에 가서도 죽음의 문제가 현실로 오지 않는 겁니다. 그만큼 죽음의 문제를 자기 본능이 억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엔 그 죽음의 문제가 의식 세계로 치고 올라옵니다. 그래서 의식이 죽음의 문제에 휘둘리게 되지요. 이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 건강한 삶이 오히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전도서 7장 1절부터 4절까지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전 7:1-4)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자들은 잔칫집을 쫓아다닌다는 것이고 지혜로운 자들은 초상집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으로 우리가 교독한 이사야 55장에서도 그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왜 엉뚱한 데에 너희 노력을 기울이느냐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느냐. 그 엉뚱한 것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행복을 좇아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엉뚱한 삶이라는 거지요. 지금 전도서 말씀대로 연락하는 집에 마음이 가 있다, 잔칫집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고 싶은 마음, 우리 집에서 잔치를 하고 싶은 마음, 그 생각만 하면서 산다는 거지요. 왜 그렇겠어요? 죽음이 현실로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곧 다가오는 죽음이 현실로 인식이 안 되니까 잔치에만 관심이 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이 삼일절이었는데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뭐냐 하면 개신교의 소위 보수 기독교 중에서도 이제 수구 기독교 쪽 사람들이 집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오늘 주제와 관련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어요. 자 들어 보십시오. 그 유명한 김홍도 목사님이 나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기사에 나온 걸 그대로 말씀을 드립니다. ‘공산 치하에서 사는 것보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겠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종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러고 났더니 월간조선 사장 출신인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 씨가 뭐라고 얘기를 했냐 하면 ‘기독자유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번영과 자유, 진실, 정의를 지켜내는 선봉이 되기 바란다’ 이렇게 축사를 했고 거기까지는 뭐 이 사람들이 항상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이니까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데 서경석 목사라는 사람이 나와서 무슨 얘기를 했냐 하면 - 서경석 목사에 대해서는 많이들 아실 텐데 처음에는 이 사람이 진보적인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변절을 합니다. 변절을 해서 요즘에는 중국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위한 교회를 하면서 그쪽 일을 많이 해요. 수구 쪽으로 간 사람이지요 - 이 분이 뭐라고 얘기를 했냐 하면 '3월 8일 - 돌아오는 목요일입니다 - 제주 강정 마을에 2천명이 가서 천주교에 대항해서 해군기지 건설 찬성 집회를 할 것이다’ 하고 공표를 했습니다.
강정 마을 사건, 지금 참 문제가 많지요. 전 지금 어느 쪽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제주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를 짓는 것 때문에 문정현 신부 이런 분들이 잡혀가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거기서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이 계속 미사를 드리고 있어요.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걸 반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주교도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그걸 잊으면 안 돼요. 천주교 신부하고 수녀들이 계속 미사를 드리고 잡혀가고 하고 있는데 서경석 목사 이 분 얘기가 천주교에 대항하겠다, 천주교하고 한판 붙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제주도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를 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좌익 종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 목요일은 제가 TV를 좀 볼까 합니다. 천주교하고 개신교가 한판 붙으면 어떻게 되나 그걸 보려구요. 지금 제주 강정 마을에서 해군기지 짓는 걸 반대하는 그 미사와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 천주교는 다 반대냐? 그건 또 아니에요. 천주교 안에도 찬성과 반대가 갈라지고 개신교 안에도 찬성과 반대가 갈라지는데 지금까지 분위기는 종교인들은 일단 반대 집회를 하는 것으로 다들 인식이 되어 있는데 서경석 목사 이분이 이제 한판 붙자 이제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러자 개신교 목사들 중에서도 서경석 목사를 비난하는 댓글들을 올리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간들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즉 어떤 소원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소원과 목적 때문에 서로 물고 먹으면서 산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으로 돌아가시지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6장 12절에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여기서 사욕이 에피뒤미아입니다. 열정이라는 말이지요. 너희 몸의....여기서 이 몸은 죄성을 의미하는 사르크스가 아니라 소마라는 단어를 씁니다. 소마는 가치중립적인 그냥 우리 육신입니다. 그냥 몸뚱아리지요. 우리 몸뚱아리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지요. 이 소마의 에피뒤미아, 그러니까 너희 몸뚱아리가 원하는 것을 순종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몸뚱아리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또 13절에서는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불의의 도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몸뚱아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어째서 불의냐 하는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 마을 일을 제가 말씀드리는 이유가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가톨릭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서경석 목사 쪽이 주장하는 것이 정면충돌을 하게 생겼는데 가톨릭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강정 마을 주민들이 1,500명 정도 되는데 이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간다는 것과 제주도의 자연 환경이 파괴된다는 것, 그리고 국제정치적인 해석도 곁들이는 사람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들게 되면 중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겁니다. 중국을 자극하게 되면 우리는 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국제정세 상으로도 한반도에 결코 유리한 게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전부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서경석 목사 쪽의 주장은 뭐냐 하면 정부쪽의 주장과 같은데,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있어야만 우리의 안보가 우리의 생존과 번영이 보장되는데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부와 서경석 목사 쪽이 말하는 “우리”가 누굽니까? 4천만이 넘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가톨릭 쪽이 이야기하는 “우리”는 누구에요? 강정 마을 주민1,500명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북아 전체의 군사적인 균형을 생각하면 동북아에 살고 있는 한 15억 정도가 “우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건 환경 문제이고 인류 문제다라고 하면 60억이 “우리”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서로 부딪히고 싸울까요? 사람들의 목적은 다 똑같이 생존과 번영인데 왜 서로 협력하지 않고 충돌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그 생각만 하면서 삽니다. 그것이 몸의 사욕이라는 것이지요. 소마의 에피뒤미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안 죽고 어떻게 하면 풍요롭게 사나’ 그 생각만 하면서 살고 있는데, 그 생각이 뭐가 문제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어느 쪽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몸의 사욕들이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데 문제는 저 사람들 생존과 번영이 추구되면 내 생존과 번영이 피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얼마나 큰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수시로 주민들과 경찰들이 충돌이 일어나는 게 몇 년째 계속 되었고 이제는 종교 간의 충돌까지도 일어나게 될 판입니다. 왜 충돌합니까? 결국 어느 쪽 편을 드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겁니다. 한 쪽은 “우리”가 사천오백만 명 정도 되지요? 사천오백만이 “우리 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1,500명만 “우리 편”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동북아시아 15억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똑같이 생존과 번영을 원하지만 서로 원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몸뚱아리가 원하는 것, 몸의 사욕을 추구한다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냐?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잘 좀 살아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그리고 나만 잘 살겠다는 거냐? 1,500명이 잘 살겠다는 거 아니냐? 사천오백만이 잘 살겠다는 거 아니냐? 15억이 잘 살겠다는 거 아니냐? 60억 인류가 잘 살겠다는 거 아니냐?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은 정면으로 충돌을 합니다.
아들이 장가를 갑니다. 시어머니가 방문 앞에서 듣자니까 며느리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어머니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 먼저 구할 거야?” 남편이 “후!” 한숨을 쉬면서 ‘또 시작이구나’ 이렇게 되는 거지요. 어머니가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그 이야기를 계속 듣습니다. ‘아들놈이 뭐라고 대답을 하나.’ 그런데 듣자 하니 아들이 한다는 말이 “어머니는 돌아가실 날도 얼마 안 남았고 당신은 나하고 평생 살 사람인데 당신을 먼저 구하지 당연히.” 그러니 어머니가 이제 가슴을 치면서 안방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 “어이 어이” 하고 우는 겁니다. 아들이 건너 왔어요. “어머니. 왜 우세요?” “야 이놈아. 내가 너 하는 말 다 들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랬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아이고! 어머니. 마누라야 또 얻으면 되지만 어머니는 한 분뿐이신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생존과 번영을 갈망하는 것이 순수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생존권, 인권 뭐 이런 말들이지요. 사실 세상 철학은 그것을 인간의 고귀한 본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윤리도덕으로 내세우는 것이 뭐지요? ‘많은 사람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자!’ 그것이 윤리도덕의 본질인데 그것 자체가 허황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하고 아들, 며느리 셋만 모여 있어도 당이 갈라지고 결국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이해관계가 충돌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충돌해요.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이지요. 제주도 강정 마을도 마찬가지거든요.
따라서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삶은 바로 이해관계의 충돌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순간도 못 벗어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양과 이리가 서로 물고 먹는 것과 같은 인간들의 그 처참한 삶에서 나와 양과 이리가 함께 먹는 것과 같은 삶으로 옮겨가게 한다는 것인데 그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몸의 사욕 대신에 다른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사욕에 순종하면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에 정글의 법칙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별 소리를 다하고 아름답게 포장을 해도 성경에선 그것을 허황된 망상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뭐?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너희가 힘을 합해서 서로 도우면서 산다고? 웃기지 말아라” 그 말입니다. “너희는 절대 안 돼”라고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안 되면 다음 주 목요일에 신부하고 목사하고 제주도에서 한판 붙게 되냔 말이죠.
우리가 어떤 함정에 자꾸 빠지느냐 하면 이타적으로 살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기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은 대개들 생각해요. 며느리가 이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렇지. 내가 남편을 그렇게 들볶으면서 저 노쇠하신 어머니를 두고 그런 소리나 하고, 아! 참 내가 나쁜 년이야” 뭐 이러면서 반성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도 “그렇지. 며느리 살 날이 창창한데 내가 얼마나 괴롭히고 그랬으면 남편 붙들고 저런 하소연이나 하고 그럴까. 내가 참 며느리한테 못되게 굴었구나.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반성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은 사람들이 대충 알아요. 그리고 이기적인 탐욕으로 상대방을 해치면서도 속에 찜찜한 게 좀 있을 수 있어요. 그걸 양심이라고들 부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건 이타적인 삶을 살아도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생각을 아무리 바꾸어 먹어도, 반성과 후회를 해도 막상 다시 아내를 위하면 어머니가 울고 어머니를 위하면 아내가 울어요. 이 구도에서 절대 못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강정 마을에서 이장이 여러 번 구속이 되고 했다는데 하루는 기자가 찾아갔어요. 기자가 찾아가서 봤더니 이번에도 유치장에 감금된 이장이 너무 몸이 쇠약해지고 해서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의사들이 병원으로 데려다가 링거 주사를 놓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와서 링거 주사를 뽑아버리고 그 사람을 질질 끌고 나가는 거예요. 의사들이 볼 때 ‘야. 이거 큰일 나겠다’ 싶은 거지요. "이 사람 지금 건강 상태가 대단히 나쁘니까 그러지 말아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형사들이 뭐라고 그랬는지 압니까? “우리가 먼저 죽게 생겼습니다” 그랬다는 거예요. 형사들이 나쁜 사람이에요? 형사들이 보기에는 차라리 이장이 팔자가 편한 겁니다. 자기네들은 목이 잘리게 생긴 거예요. 옳고 그른 게 없는 거예요. 세상에는 옳고 그른 게 없는 겁니다. 각자가 너무도 처절해서 자기 생각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절박한 거지요.
그런가 하면 지금 천주교 측이 강정 마을에서 미사를 드리고 하는 것은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자기 밥줄이 걸린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그렇죠? 나름대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겁니다. 이타적인 행위는 안 부딪힙니까? 내가 도와주고 싶은 그 사람이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이 충돌하는데 해결 방법이 없는 거예요. 국가 안보를 생각하는 서경석 목사가 천주교 측의 이타적인 행위에 펄펄 뛰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의 소욕에 충성을 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몸의 소욕에 충성을 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든 간에 해결은 안 되는 겁니다. 어디서나 충돌이 있고, 어디서나 서로 물고 먹고, 어디서나 서로 해치는 거예요. 이 구도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도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이 이타적인 삶을 살면 뭔가 해결될 것 같다는 망상을 자꾸 가지고 있는 거예요. 윤리도덕이 뭡니까?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복무하라는 것이 윤리도덕이고 법률이잖습니까? 그런데 이 윤리도덕과 법률은 무엇과 부딪힙니까? 옆에 있는 공동체의 윤리도덕과 부딪힙니다. 옆의 공동체의 윤리도덕 법률과 충돌해요. 이건 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고 소경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답이 없는 걸 답이 있다고 착각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빠져나갈 수 있느냐? 못 빠져나갑니다.
언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에피뒤미아가 바뀔 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탐욕과 열정을 의미하는 에피뒤미아라는 단어는 사실은 가치중립적인 단어에요. 예수님도 에피뒤미아를 갖고 계셨으니까요. 탐욕이라는 나쁜 뜻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열정도 의미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피뒤미아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에요. 이 우리의 열정이 다른 데를 향하기 전에는 해결이 안 나는 겁니다. 즉 몸의 소욕,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한에는 어딜 가든 당이 갈라지고 어딜 가든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당이 갈라지느냐?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즉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그렇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그렇습니다.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게 뭐 그렇게 나쁘냐? 지독하게 나쁜 겁니다. 우리 현실의 삶이 수렁에 빠져요.
따라서 성경의 약속은 이 에피뒤미아가 다른 데를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대표기도에서 연동흠 형제님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 것처럼 몸의 사욕에 순종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 본능이 과연 제어될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인간이 자기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느냐? 인간이 몸의 사욕에 거역할 수 있느냐? 못 합니다. 절대 못 하지요. 그래서 성경의 약속은 나오라는 명령이 아니고 꺼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꺼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먼저 죽으신 이유입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저지른, 또 앞으로도 저지를 그 수많은 죄악들이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피도 필요하지만 십자가의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올라가서 죽을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꺼내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존재로 부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렇게 되면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우리의 에피뒤미아가, 우리의 열정이 그 대상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실체입니다. 즉 우리 소원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이기적인 사람은 나의 생존과 번영을 원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고,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는, 이렇게 세 가지 타입의 몸의 소욕을 추구하는 모습이 있는데 우리가 이 세 가지 타입의 모습에서 모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에피뒤미아가, 이 욕망이 원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지요.
불교의 방법론은 비운다는 것이지요. 참선으로 탐진치 세 가지를 제거한다고 합니다. 거기서 탐이 바로 에피뒤미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에피뒤미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인데 제가 왜 불교를 떠났겠습니까?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하나님의 desire가, 하나님의 소망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안에 있던 욕망이 방향을 전환한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혈서를 쓰고 뭘 해도 이건 되는 일이 아니에요.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기 전에 20절과 21절을 보시지요.
(롬 6:20-21)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본능에 따라서 사는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게 돼있습니다. 거기서 한 발짝도 빠져나가지 못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사망인데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느냐?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못 느끼는 사람도 무의식 속에 있는 그 죽음의 공포가 그 행동 양식을 결정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잔인하냐? 왜 그렇게 사람이 무자비하냐? 죽음의 공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무자비해지는 거지요. 죽음의 공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잔인해지는 겁니다. 안 그럴 수 있다고요? 천만에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깊은 산에서 어떤 짐승을 만날 때 제일 무서우냐?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제일 무서운 겁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한 거예요. 왜? 죽음의 공포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의식까지 치고 올라왔든 아니면 무의식에 숨어 있든 사람의 모든 행동은 죽음의 공포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잔인한 거예요 사람들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아까 그 시어머니와 아들 며느리 이야기가 우리 현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 세 사람 중에 절박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TV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를 욕하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욕합니다. 누가 옳아요? 다 각자 자기가 옳은 거지요. 그러면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가 있지요. 너는 나중에 시어미 안 될 것 같으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요. 자기 입장에서, 자기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휩쓸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무자비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이 바뀌면 그 순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힙니다. 거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 비참한 삶에서 우리를 꺼내시려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22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6:22-23)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확보되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는 삶에서 한 치도 못 빠져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계속 영생을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영생을 확보한 사람만이 본능에서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영생이 현실로 확보되지 않으면 결국은 사망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은 죽음의 공포에 의해서 내 생각과 내 판단과 결정과 행동들이 좌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느라고 예수님이 죽으셨지요. 13절을 보시지요.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의가 나왔습니다. 18절 보시면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생존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본능의 종이었다가 이제는 의에게 종이 된다는 거지요. 그 의가 뭐냐 하는 겁니다. 우리의 에피뒤미아가 생존과 번영을 지향하고 있다가 이제는 의를 지향한다는 것인데 생존과 번영은 불의이고 이제는 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우리의 에피뒤미아가 지향하는 그 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인데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에피뒤미아가 새롭게 지향하는 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은 무엇이지요? 사람들을 수렁에서 꺼내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본능에서 해방시키는 일이에요. 그것을 우리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의 종입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강정 마을에서 부딪힐 사람들 중에서 의의 종이 있을까요? 의의 종은 지금 거기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해관계에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이용하러 갈 수는 있겠지요.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각자의 몸의 사욕을 위해서 이편에서 소리를 지르고 저편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을 전부 눈을 뜨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이 소원이죠. “당신들은 지금 생존과 번영의 문제를 놓고 이렇게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오직 정글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그 사람들과는 관심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지요. 자기가 먼저 빠져나와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빠져나와 있어야 다른 사람을 빼올 수가 있어요. 그렇죠? 물속에 있는 사람이 물속에 있는 사람을 건질 수는 없지요.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물속에 있는 사람을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나 너희가 나의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지금 제주 강정 마을에서 모두가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에서 각자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가서 “여러분! 생존과 번영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거기서 나오십시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우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게 됩니다. 왜 그렇죠? 누구 편도 아니니까. A팀과 B팀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A팀한테도 미움을 받고 B팀한테도 미움을 받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인간은 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본능의 종이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든가 인간은 종이 되어서 주인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는 거지요. 자기 육신을 섬기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노예의지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 몸의 사욕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내 생존과 번영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야 하고, 내 사랑하는 자식들의 생존과 번영에 대해서도 관심이 사라져야 하고, 우리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번영에 대해서도 관심이 사라져야 해요. 이것이 과연 진행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거지요.
언제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생존과 번영을 희구한다는 것이 결국 수렁이라는 것을 처절히 깨달을 때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절히 깨달았다고 해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가? 절대 못 빠져나가지요. 처절히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간구해야 됩니다.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서 이 수렁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처절하게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가 실제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나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에피뒤미아로 불타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 쭉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인데 그 일이 진행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에서 절망하게 만드시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아까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처럼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서 고통에 몸부림치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발 저를 건져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다윗 왕이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서 그 일이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게 하신 그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희가 지금도 여전히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당짓기를 하고 우리 편을 위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살아가는 그 처절한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거기에서 빠져나온 것은 아니지요. 연동흠 형제님도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지만 우리가 들락날락합니다. 오락가락합니다.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더욱더욱 변화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자유의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종이고 노예의지 밖에 없다고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얘기냐?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오늘 교회에 갈지 말지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저 사람에게 이 말을 할까 말까도 내가 결정하는 것인데 자유의지가 없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가치문제를 놓고는 인간은 노예의지밖에 없습니다. 나와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가치로 삼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거기서 절대 못 빠져나옵니다. 또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완전히 복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노예의지밖에 없는 것이지요.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즉 우리의 에피뒤미아가 무엇을 지향하는가가 A냐, B냐로 딱 결정이 돼 버리기 때문에 거기서 한 발짝도 못 빠져나옵니다.
인간들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느 쪽 종이 되었든 간에 그 종노릇을 함에 있어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에서 자유의지가 발동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효율성을 추구하는 쪽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가치를 지향하는 쪽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형제: 철학이나 또는 불교에서는 가치문제에 있어서의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거든요. 효율성을 가지고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거든요.
혼란스러운 겁니다. 그 혼란이 왜 오냐 하면 강정 마을 경우를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충돌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가치문제로 충돌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보와 보수가 왜 충돌합니까? 가치 때문에 충돌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효율성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형제: 그럼 성경에서는 자유의지라는 그런 표현이 없나요?
자유의지라는 말 자체는 어거스틴이 쓴 말이에요. 성경에 그렇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자유를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에서도 자유가 나오는데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를 하면 결국 자유의지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자유의지, free will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성경에 나와 있는 건 아닌데 인간의 자유의 문제가 구원의 문제와 연결이 되면서 복잡하게 진행 되는데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가치문제를 가지고 자유의지를 발동할 수 있다고, 즉 가치문제에 있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은 가치문제가 아니고 효율성의 문제라는 거지요.
형제: 철학자나 종교학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거네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네요?
효율성 문제에서만 자유의지가 있지요. 어떤 거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는 이미 그들은 생존과 번영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틀에 딱 갇혀 있어요. 이걸 바꿀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데서 벗어날 자유의지가 없어요. 완전히 노예입니다. 생존과 번영이라는, 노예처럼 붙잡혀 있는 그것을 위해서 효율성을 찾는 데 있어서만 자유의지가 있는 것뿐이죠.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가치에 대한 자유의지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가치의 문제는 생존과 번영이라는 틀에 딱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못 빠져나갑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저차원의 자유의지밖에 없는 거지요. 생존과 번영에서 하나님의 의 쪽으로 옮겨가는 이 문제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해당이 안 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신비의 극치의 차원입니다. 성경의 약속의 신비의 극치지요.
형제: 그렇다면 나는 나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사실은 성립하지 않는 말이겠네요.
예. 자기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 생존과 번영을 위한 노예의지 안에서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강정 마을에서 충동할 것으로 보이는 가톨릭 기독교인들과 개신교 교인들이 전부 어디에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까? 생존과 번영에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들이 모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크리스찬이 아니냐? 그건 아니죠. 육에 속한 크리스찬들인 것이지요.
형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봐라. 네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너의 자유의지 때문이 아니냐? 이런 식의 얘기들은 그럼 사실은...
그것이 캘빈주의와 웨슬리안주의가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논쟁은 2000년 동안 다 있어 왔어요. 그리고 거기서 해결 안 된 부분들이 큰 주제로 신학에 남아 있는 것인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사람들의 그 수많은 논쟁들이 대부분 효율을 가치로 착각한데서 오는 논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의 종이 되면, 하나님의 종이 되면 그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오른쪽 갔다 왼쪽으로 갔다 하면서 사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데 그것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마음껏 발휘돼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지금 공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모든 자유의지는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는 무엇을 위해서 행사되는 것인가 하면 효율성을 위해서 행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효율성 차원에서만 행사될 뿐 가치 차원에서는 행사되지 못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라는 것,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가치가 뭘까요? 인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겁니다. 생존권 그러면 다 껌벅 죽잖아요. 그렇죠? 생명 앞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할 수 있느냐? 생명이 그렇게 고귀한 겁니까? 생명은 고귀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프쉬케와 조에로 구분을 합니다. 프쉬케는 짐승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조에, 즉 영원한 새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나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자신의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 종노릇 한다고 로마서 8장에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한 탐욕과 공포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납니다. 거기에 노예로 있는 상태에서 자유의지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윤리도덕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은 다 그 안에서 노예들로서 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효율성이 실제로 확보되기라도 하면 좋은데 강정 경우처럼 서로 속한 당이 필연적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모순을 일으킬 뿐 효율성이 확보되지를 않습니다. 처절하지요.
형제: 그러면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데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이 문제가 사실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성의 문제라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효율성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왜 서로 충돌하느냐? 자기가 속해 있는 당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서로 자기가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깊이 수렁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인간들이 갇혀 있는 함정입니다. 스스로 속는 거지요. 그게 바로 생존과 번영이라는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들이 불의의 종노릇을 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규정을 하십니다.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는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포와 탐욕이라는 참혹한 수렁에 갇혀서 무엇을 해도 결국은 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고 무엇을 해도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탐욕을 이루지 못하는데서 오는 그 좌절과 애달픔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다가 끝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감옥에서 구해주시는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옵는 것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이 죄의 쓴뿌리가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못하여 육체를 가진 연약한 저희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고 더 놀랍게 역사하시어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이 더 많아지게 하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진행하시고 저희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해방되는 일에 저희들이 사용되게 하시옵소서. 서로 물고 먹는 저 처절한 삶에서 신음하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과 모든 여건을 허락하시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저희들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그 일이 한 단계 더 깊이 진행될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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