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의 거리를 빠져 나와 우리는 새벽의 문으로 갔다. 새벽의 문은 빌니우스를 감싸고 있던 성벽에 남아 있는 몇개 안 되는 문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빌니우스 구시가로 들어가는 문인 셈이다. 이 문은 밖과 안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 밖은 많이 허름한데 안은 아름답다. 그리고 새벽의 문 위에는 기적의 성모마리아를 모신 예배당이 있다. 특히 병자들에게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효험을 본 환자들이 보답하기 위해 은으로 만든 하트에 감사의 글을 새겨 예배당 벽에 붙여놓았다. 예배당의 벽면은 온통 은으로 만든 하트로 장식 되어 있다. 기적의 검은 성모상은 얼굴과 손 외에는 모두 금으로 치장 되어 있다. 우리가 간 날도 예배당에서는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진 찍기가 어려웠다. 이층 난간에서는 구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새벽의 문에서 시가지로 내려가면서 여러 성당들을 볼 수가 있었다. 9시 부터 지금까지 빌니우스 투어를 하다보니 벌써 12시가 넘어 있었다. 우리는 구시가지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그동안 헤어졌던 버스와 만나 트라카이성으로 갔다. 트라카이 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트라카이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시원하게 펼쳐진 갈베호수가 우리를 맞이한다. 아 그런데 호수 중간에 그림처럼 떠있는 동화같은 성이 아름답다. 호수엔 요트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이 요트들은 대부분 트라카이 성 주변을 돌며 성을 감상 할 수 있는 요트 투어를 하는 배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요트 투어 대신 트라카이성 내부를 돌아보기로 했다. 호수를 따라 내려가니 트라카이성 앞에 있는 작은 섬과 연결된 다리를 나왔다. 그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 내려가다 이 성은 완공시킨 비타우티스대공의 목상이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 나라의 시골 동네에 들어 갈때 서 있던 대장군 처럼 서 있다. 요새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 갔다. 성은 요새처럼 만들어져 있었고 꽤 넓었다. 성 안 마당에는 중세 시대의 죄수들에게 사용했던 형벌 기구들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놓여 있었다. 호기심 천국인 사람들은 직접 체험 해 보기도 했다. 성 안채로 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만들어져 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갔고 난간 처럼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성 내부로 들어 갔다. 성 안의 여러 방들은 그 당시의 생화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성당도 있었다. 성안을 다 둘러 보고 나니 약 1시간 정도 소요 되었다. 지하로 내려 가니 그 곳에도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트라카이성에서 나와 빌니우스로 다시 돌아 왔다.
새벽의 문(Ausros Vartai, Gate of the Dawn) - 빌뉴스 시가지로 진입하는 초입
16세기에 르네상스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진 이곳은 시내를 감싸고 있던
성벽의 출입문 중의 하나로 원래 존재하던 9개의 출입문 중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나머지 문들은 18세기 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었다.
원래는 중심부가 꽤 거리가 있었던 문이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상권이 개발되면서
지금은 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한 빌뉴스 시가지의 입구이자 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문의 2층 망루에 은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상은 영험한 기운을 가졌다고 소문이 나면서
빌뉴스 시민뿐 아니라 각지에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를 흠모한 한 장인이
그녀의 모습을 성모 마리아의 얼굴로 성화시켰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새벽의 문 위에 세워진 작은 경당 안으로 올라가는 계단옆 벽에 걸려있는 성모마리아그림
경당안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성채의식을 하고 있었다.
기적의 성화로 불리는 검은 마리아상
기적의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했던 많은 환자들이 병이 치유되고 난 뒤 감사의 표시로 바친 은으로 만든 하트(심장)에 쓰여진 감사의 글 귀를 새겨
예배실 사방 벽에 빼곡히 붙여 놓았다.
새벽의 문을 뒤로하고 구시가지로 내려갔다.
바질리안대문과 삼위일체성당
구시가지 안에 있는 수도원으로 1347년에 지어진 목조 러시아 정교회였다.
1748년에 화재로 불탄 이후 이 곳에 다시 로코코양식으로 다시 지었다.
성 카시미르 기념성당
1604년에 지은 건축물로 빌니우스에서 가장 오래된 바로코 양식의 성당이다.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골목길
트라카이(TRAKAI) - 빌뉴스 근교도시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28㎞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호수와 섬으로 이루어진
면적은 497㎢이고 인구는 약 6,000명의 소도시이다.
트라카이는 한때 리투아니아의 수도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이곳은 건국초기의 독일 튜튼 기사단과 강대국의 침공과 공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은 귀족과
부유한 계층 및 학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합니다.
특히 인종적으로는 리투아니아인 뿐만 아니라 타타르인, 러시아인, 유태인과
폴란드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특히 비타우타스 대공이 크림반도까지 진출하여 그 당시
몽골을 지칭하는 “황금의 유목민”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터키계의 카레임 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자치권을 주어 살게 하는 등 역사적 의미가 깊은 도시입니다.
당시 대 공작들은 자신들의 개인 호위병으로 삼기 위해서 흑해 크림반도 지역에 살고 있는
터키계 타타르 인들을 대량 이주시켰으며,
그 결과 트라카이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과 관련된 삶의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트라카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키비나스라는 음식과
트라카이 시내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거리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독특한 모양의 나무집들이다.
트라카이성
15세기에 완공된 성으로, 중세 시절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난공불락 요새의 형태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땅을 탐하던 독일 기사단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국이 독일 기사단들과 대항해 싸운
‘타넨베르전투(리투아니아어로 잘기리스 Žalgiris, 폴란드어로는 그룬발드 Grunwald 전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