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두고 갑니다
양해본 제주지방기상청장
바람이 일다 사라지듯, 무엇이건 한 번 왔다간 저만치에 차례로 물러서는 순리. 마지막을 생각한다. 알퐁스 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이나 오 헨리 작품 ‘마지막 잎새’처럼 ‘마지막’에는 어둠과 슬픔이 깔려 있다. 33년이 넘는 세월을 속에서 인생의 전부를 담아온 직장을 은퇴하기 전 ‘마지막’의 느낌은 무엇일까? 육체와 정신을 바쳐 헌신한 뒤의 허탈일까? 긴장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쁨일까? 쉼없이 올라왔던 삶의 등반에서 깃을 접어야 하는 아쉬움일까?
공직 생활을 마감하는 정년을 앞두고 1년 간의 공로연수를 위해 7월 1일 기상청을 떠나는 양해본(梁해본, 59) 제주지방기상청장을 만나기 위해 제주 청사를 찾은 때는 그가 현직을 떠나기 3일 전.
지난날에 대한 회상을 묻자 세월의 애환 때문인지 정년의 감격 때문인지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양 청장은 해방 전 해인 1944년 전북 김제에서 7남 2녀 중 4남으로 출생하였다. 해방과 전쟁의 시대적 난관을 겪으며 피폐해지고 어려웠던 농가 살림이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만은 굽히지 않으셨던 부모님의 열정으로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익산 동중학교와 남성고등학교로 통학하기 위해 6km 여를 걸어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어려움 속에서 부지런함과 정성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하여 2학년 때 입대한 공군 관제병 군복무를 마친 뒤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으로 늘어난 복무기간 때문에 복학처리에 문제가 있어 학업을 포기하고 그가 선택한 직장이 기상청이다.
1969년 1년 과정의 기상 교육을 마치고 1970년 2월 이리(현 익산) 농업기상관측소에 첫 발령을 받은 후 본청 예보과, 국제협력과, 광주지방기상청 예보과, 김포공항기상대 등을 거쳐 원주, 전주, 청주, 마산, 춘천기상대의 대장을 지냈고, 부인 손지숙 여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 야근을 자주 하는 기상청 사람들은 딸이 많다는 속설이 있는데 아들만 셋 둔 비결은.
▶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일은 일기예보처럼 그 속설도 빗나갈 수 있는 모양이다. 비결이라고는 야근 때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건강한 아이의 출산을 기원한 것 밖에 없다.
- 재직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분야는.
▶ 사무관 시절에 담당했던 국제업무다. 영어가 문제였다. 그리고 모든 기상인들이 다 공감할 예보업무다. 예보가 틀렸을 때 쏟아지는 비난은 참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예보업무를 하면서 보람도 있었다. 1987년, 부여를 중심으로 큰 물난리가 났었는데 광주 예보관으로 있던 그 때,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집중호우 가능성을 예측하여 사전 조치했던 일을 보람으로 꼽고 싶다.
- 마지막 근무지로 제주에서 1년을 보냈다. 이 곳 날씨 특성은.
▶ 제주도는 바다와 높은 산, 이 것 때문에 좁은 땅덩어리지만 동서 지역의 날씨가 다르고 남북이 매우 다른 날씨를 보여 어떤 때는 북쪽에서는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눈 내리는 한 겨울 같지만 남쪽은 온화하고 맑은 봄 날씨를 보이기도 한다.
이 곳은 장마가 처음 찾아올 뿐만 아니라 장마전선이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 있고, 태풍이 자주 지나가며 악기상이 자주 발생하는 편이다. 따라서 외부와 비행기로 통해야 하고 관광, 어업, 귤농사 등이 발달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당연히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날씨 예측이 매우 어려운 지형조건을 갖고 있으면서 기상정보에 대한 수요와 활용도가 높은 제주도는 기상서비스의 중요성이 그 어느 곳보다도 큰 지역이다.
한편, 한라산 정상부근은 비가 많이 오지만 물이 잘 빠지는 토질로 내륙과 다른 지형적인 조건이고, 원래 바람이 많은 제주도이지만 특히 서쪽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도 강한 바람이 많이 분다. 그런데 특보 발표기준은 전국이 같다. 지역 실정에 맞는 특보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 현직을 떠나는 감회는.
▶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기상업무는 내 성격에 맞는 천직이었으며 기상청에서 정년을 맞게 된 것을 큰 명예로 여길 것이다. 나를 잘 드러내지 못하고 남의 호감을 얻는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다면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관리자가 된 후 일을 잘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 부하 직원들로부터 덕망을 얻지 못하고 떠난다고 생각한다. 이 기회를 빌어 그러한 문제로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면 이해하며 털어 버리기를 바란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항상 기상청에 있을 것이다.
(글 : 김승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