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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어쩌나
고려 항몽(抗蒙) 42년의 역사와 교훈
몽골의 고려 정복은 쿠빌라이 시대에 마무리된다. 몽골군이 오랜 대치 끝에 양양과 번성을 장악 하고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남송과의 전쟁에서 고비를 넘었던 것이 1273년 2월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탐라(제주도)에서 마지막 항쟁하던 삼별초를 제압 하면서 몽골의 고려 정벌에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고려와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은 오고타이 시대인 1231년이었다. 무려 42년간의 전쟁이었다.
몽골이 하나의 나라를 정복하는 데 이처럼 길고 긴 세월이 걸린 경우는 고려와 남송뿐이지만 실제 전쟁을 벌인 기간은 고려 쪽이 훨씬 길었다. 그 길고 긴 전쟁을 모두 쿠빌라이가 마무리 지었다. 남송의 접수는 쿠빌라이가 필요에 따라 심혈을 기울였던 전쟁이었지만 고려와의 전쟁은 성격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쿠빌라이가 바다의 시대를 여는 과정에서의 전투가 됐다는 점에서는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고려의 정복이 결국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섬나라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한반도 배꼽부위에 해당하는 지점에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섬 강화, 이 곳에서 바라다보면 육지는 정말 지척에 있다. 마치 육지였다가 좁은 바닷길이 나면서 섬으로 떨어져 나온 듯한 곳이 강화다. 하지만 염하(鹽河)라고 부르는 폭 1Km도 채 되지 않는 이 강화해협은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군도 어쩌지 못하고 무려 30년 이상 발을 구르도록 만들었다고 알려진 천연 장애물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것은 1236년 7월, 2백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는 이후 천연의 요새인 강화에 머물면서 34년간 몽골에 대항했다. 강화도는 한강과 예성강 그리고 임진강 등 세 개의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개성과 개풍이 있고 서쪽으로는 한강입구에 문수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문수산성 아래에 있는 통진 나루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뱃길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광성보 근처 강화해협에는 손돌목의 급류가 가로막고 있어 비록 짧은 거리지만 배가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강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배들이 이 좁은 수로를 통과해야 하지만 물때와 바람을 맞히지 못하면 이 곳을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돌목 앞에 대기해야만 했다. 특히 손돌목의 바닥은 바위 층이고 돌부리가 많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게 불면 배들이 암초에 부딪쳐 난파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로 양편에서 포격을 한다면 배가 이 지점을 지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강화도에 돈대가 설치되는 등 조선후기까지도 중요한 요새가 됐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운양호 사건 등이 모두 강화에서 일어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특히 1866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제너럴셔먼호를 앞세우고 조선을 개항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화도로 쳐들어 온 신미양요는 손돌목에서 조선과 미국의 최초 군사적 충돌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수로를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함대가 손돌목에 이르렀을 때 강화포대에서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부른다.
급한 조류가 이는 지점의 이름이 손돌목이라 불려지게 된 연유도 몽골의 고려 침공과 관련해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화로 피난가게 된 고려왕 고종이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배를 타게 됐는데 배가 광성진 근처에 이르자 물살이 거세어지면서 배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왕은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한다고 생각하고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손돌은 죽음을 당하기 전에 바가지를 하나 건네면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가 가는 대로 따라가면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말에 따른 결과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후에 강화 사람들은 광성진 앞 수로를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해서 손돌목이라 부르게 됐다. 또 10월의 차가운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부르면서 덕포진에 있는 손돌의 묘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다. 강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다.
고려는 몽골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약점을 최대한 활용해 강화도로 천도한 뒤 다가올 침략에 대비했다. 우선 43리에 이르는 외성을 흙으로 쌓고 내성 안에는 궁궐을 지어 장기전에 대비했다. 육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는 북문을 설치하고 바다 쪽에는 서문을 세웠다. 강화는 섬이면서도 분지형태를 취하고 있어 군사적 방어진지로서도 유리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해안가는 거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은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방어 진지로서는 더 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강화도가 이처럼 건너기 어려운 수로를 앞에 두고 있고 전략적으로 이점을 지닌 군사 요충지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단지 그 때문에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군이 30여 년 동안 강화도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것도 이유가 되기는 했겠지만 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몽골군이 초원에서 사는 유목민들이어서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몽골은 세계를 정복 하는 과정에서 강화 해협보다 더 넓고 긴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다. 비록 전투에서 고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패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대부분 그 난관을 극복 하고 상대를 제압했다. 쿠빌라이가 남송 공격과정에서 장강을 건너는 병사들에게 부적을 붙이게 한 것이나 주력부대를 몽골인이 아닌 다른 피정복민들을 편성한 것 등은 바로 물을 벽을 넘기 위해 취한 방안들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자로 둘러싸인 성을 공격 위해서 말가죽에다 공기를 불어넣은 뒤 길게 이어 부교를 만드는 기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지닌 몽골이 전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완전 접수하겠다는 마음만 먹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화와 육지 사이를 가르는 염하가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배를 타고 건너기가 어렵고 더욱이 높은 곳에 있는 토성에서 바다 쪽을 공격한다면 접근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에 대한 침공보다 시기적으로 몇 년 늦게 추진된 남송의 양양과 번성 공략 작전을 보면 그 해답이 엿보인다. 우선 양양과 번성 전투의 승패를 가른 투석기 회회포를 강화 전투에 활용했다면 강화도는 더 이상 버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수로의 폭이 좁기 때문에 배에다 회회포를 싣고 손돌목을 피해 조금만 섬 쪽으로 접근해 집중 공격을 했다면 섬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도 방어벽으로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사거리가 5백 미터가 넘는 투석기는 아마도 토성을 넘어 그 안쪽에 돌멩이 세례를 퍼부었을 것이다.
남송의 여문환이 견디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던 것처럼 고려 조정도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몽골군은 전혀 그런 방법을 동원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또 중국의 한인들을 수전에 활용하거나 포로로 잡은 육지 고려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할 수도 있었을 터지만 그 방법 역시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을 대치하는 동안 몽골은 한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친 적이 없었다. 물론 육지의 고려 땅은 그 동안 몽골군에게 철저히 유린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고려의 조정과는 지루한 대치상태를 이어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몽골이 고려와의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어가면서 강화도를 점령하지 않거나 못한 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 그것은 형식상으로 서로 협력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그 만남의 원초 적인 발단은 역시 몽골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으킨 회오리바람의 여파였다. 1216년, 몽골군과 금나라군에게 쫓긴 거란인 9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 살길을 찾아 한반도로 들어온 터라 거란인들은 마구잡이 약탈을 하며 고려 땅을 헤집고 다녔다. 이들은 평안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를 불태우는 등 방화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거란인의 행패가 계속되던 1218년, 몽골과 몽골의 영향권에 있던 동진(東眞)이 함께 거란군을 토벌하고 고려를 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각각 1만과 2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 땅으로 들어섰다. 당시 몽골의 장수 카치온은 고려 서북면원수부에 사신을 보내 군량미를 요구하면서 함께 거란을 소탕한 뒤 고려와 몽골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약속하는 통첩을 칭기스칸의 이름으로 전달했다. 고려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몽골과의 공동작전에 동의했다. 1219년 1월, 고려와 몽골, 동진 세나라 연합군은 거란인의 본거지였던 강동성을 함락시키면서 거란인들은 고려를 침입한 지 2년 반만에 완전 손을 들고 말았다. 이 시점은 몽골의 호레즘 사절단이 오트라르성에서 이날축에게 살해되면서 호레즘 전쟁이 예고되고 있던 때였다.
이처럼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거란인들을 격멸시킨 뒤 몽골군은 약간은 오만 불손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약탈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조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고려와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이 있기는 했겠지만 다른 원정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너그러운 자세였다. 몽골의 장수 카치온은 고려의 장수들과 형제의 맹약을 맺기도 하고 몽골 말을 아는 고려인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고려의 사정을 알아보는 등 나중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얼마 후 황급히 몽골로 되돌아갔다. 몽골에서 호레즘 정벌이 준비되면서 더 이상 고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이 때 나중에 고려를 손에 넣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의 최씨 무신정권은 중국 땅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몽골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중을 대비하는 방책을 세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있었다.
고려는 1170년 정중부의 난 이후 의종이 추방되고 명종이 새로 들어서면서 문신귀족들이 몰락하고 무신계급이 득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등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 나라는 극도로 혼란했다. 이를 정리하고 최씨 무신정권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강력한 독재정치로 정권을 안정시키고 최충헌→최우 →최항→최의 순으로 이어지는 최씨 무신정권을 확립했다. 최씨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 임금을 비롯한 황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고 모든 국사는 최씨 집안이 좌지우지하는 형편이었다. 몽골군이 돌아간 1219년 최충헌이 죽자 아들간의 권력투쟁 과정을 거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은 최우에게 넘어갔다.
몽골이 호레즘과 금나라 정벌에 힘을 쏟는 동안 고려는 몽골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일이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다만 그 동안에도 몽골은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고려는 공물을 보내지 않은 것은 물론 사신을 푸대접하기가 일쑤였다. 몽골인 사신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최우는 이때부터 의주와 화주 그리고 철관 등에 성을 쌓고 개경의 나성을 수리하는 등 몽골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224년 저고여(著古與)를 비롯한 몽골 사절단 열 명이 고려에 왔다. 몽골의 호레즘 전쟁이 거의 마무리돼가던 시점이었다. 몽골은 이미 한번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에게 전과는 달리 잘 대접해 보냈다. 그런데 이들이 몽골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동진국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일로 여겨진다.
칭기스칸의 호레즘 원정으로 몽골이 동쪽 지역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게 되자 동진의 포선만노는 몽골과의 외교관계를 끊고 고려를 여러 차례 습격했다. 지금의 만주 요양에 자리를 잡고 연길 지방에서 고려 함경도에 이르는 땅을 지배했던 동진은 고려와 몽골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고려를 침범할 때는 몽골 인의 복장을 하고 들어왔다. 반대로 몽골의 사신을 살해할 때는 고려인으로 위장한 뒤 일을 저질렀다.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몽골은 고려가 사신을 살해한 것으로 단정 짓고 보복을 다짐 했다. 하지만 호레즘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 쪽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 3년 뒤 서하 원정 중에 칭기스칸이 죽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와 몽골은 7년간 국교가 단절된 채 내왕이 끊겼다. 몽골이 고려 침공에 나서면서 길고 긴 여몽전쟁이 시작된 것은 몽골의 후계자 구도가 정리돼 오고타이가 두 번째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였다.
몽골이 군사를 동원해 고려침공에 나선 것은 저고여가 피살된 지 7년이 지난 1231년이었다. 이 때는 몽골의 대칸 자리가 오고타이에게 넘겨진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 해 오고타이는 직접 금나라 정벌에 나서 툴루이, 옷치긴과 함께 개봉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오고타이는 사르타크 코르치, 우리 역사에 살례탑(撒禮塔)으로 알려진 장수에게 3만 명의 기마병을 주어 고려를 정벌하도록 했다. 42년간 이어진 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몽골의 1차 공격은 의주와 귀주, 서경, 개경, 청주, 충주 등 주로 한반도 서쪽 지역에 집중되며 반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몽골군의 공격이 파죽지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철저한 항전에 나선 평안도 지역의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절반의 군사를 그 곳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귀주성을 사수한 장군은 서북면병마사인 박서(朴犀)로 그의 항전은 몽골군의 장수도 혀를 내 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박서의 철저한 방어로 귀주성의 공략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몽골군은 지금의 평북 영변인 위주(渭州)의 부사였던 박문창을 사로잡아 항복을 권유하도록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박서는 그러나 즉각 박문창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몽골군은 이번에는 3백 명의 정예 기병을 뽑아 북문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지만 박서는 이를 즉각 물리쳤다. 정공법에 의한 공략이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군은 망루가 있는 수레인 누거 (樓車)등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안에 군사를 숨겨 성 아래로 접근해 갔다. 성 아래쪽으로 터널을 뚫어 침투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박서가 성에 구멍을 뚫고 끓는 쇳물을 붓자 수레가 불탄 것을 물론 병사들도 불에 타 상당수 죽었다. 여기에 땅까지 꺼져 압사자까지 수십 명 발생해 아비규환을 이룬 상황에서 불이 붙은 이엉까지 성 위에서 투척하자 몽골군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이번에는 몽골군이 15대의 투석기를 동원해 성의 남쪽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박서 역시 성 위에 대를 쌓고 같은 포차(砲車)로 맞서면서 돌을 날려 적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다시 기름에 젖은 섶에다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자 박서는 물에다 진흙을 섞어 투척해 불길을 잠재웠다. 몽골군이 풀을 가득 실은 수레에 불을 붙여 접근시키면서 초루(성문 위에 세운 망루)를 공격하자 박서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누상(樓上)의 물을 쏟아 부어 불을 껐다. 몽골군이 성을 포위해 공격하기를 30일, 그 동안 갖가지 묘책을 동원해 귀주성을 공략했으나 박서는 그 때마다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처해 몽골군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에 나타난 박서의 항전을 보면 몽골 장수도 감탄할 만하다. 공성전에 약했던 몽골군이 오랜 호레즘 전쟁과 금과의 전쟁을 통해 그 취약성을 극복하고 난공불락이라는 성들도 어렵지 않게 함락시킨 것과 비교하면 귀주성의 저항은 몽골군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병사들이 아닌 초적(草賊)들까지 몽골군 공격에 가세했다. 초적이란 당시의 통치계급의 확정에 반대해 궐기한 농민군인데 이들과 천민인 부곡민(部曲民)까지 항쟁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조급해져서 먼저 강화를 요청한 쪽은 사르타크였다. 고려조정도 오래 동안 견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요구에 응했다. 저고여 살해사건에 대한 해명과 황금과 백금, 비단, 말 등 엄청난 양의 선물을 몽골 측에 건네고 강화가 성립됐다. 몽골은 전국에 72명의 다루가치, 즉 지방감독관을 두어 그 지방의 행정을 관할하도록 해 놓고 적은 병력만 남겨 둔 채 몽골로 돌아갔다. 다루가치란 몽골이 점령지의 백성을 직접 다스리거나 점령지의 국정전반을 간섭하는 역할을 하도록 현지에 남겨 놓은 관리다. 다루가치를 남겨 놓았다는 것은 몽골이 고려를 점령지로 간주한다는 의미로 말만 강화였지 사실상은 고려의 항복이었다.
형식은 고려를 제압한 뒤 승전하는 모양을 취하며 몽골로 돌아갔지만 그들도 사실 고려와의 첫 충돌에서 혼쭐이났다. 금나라를 공략할 때 철옹성이라 불리던 거용관을 쉽게 넘었고 호레즘과의 전쟁에서도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성은 물론 오트라르 성까지 큰 어려움 없이 접수했던 몽골로서는 귀주성의 결사항전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몽골은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귀주성을 고수하며 항복을 하지 않는 명장 박서를 죽일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최우는 박서에게 충절은 비할 데 없으나 몽골의 말 또한 두려운 것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난처한 입장을 보였고 박서는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고 한다. 초적과 천민들까지 가세한 공격도 다른 정복지에서 본 저항과 다른 것이었다. 호레즘 전쟁에서 자랄 웃딘이 곳곳의 세력을 모아 칭기스칸의 군대에게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 것은 민초들의 저항은 아니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보여준 귀주성의 항전과 민중들의 저항은 계속될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지를 암시해 주고 있었다.
몽골의 1차 고려 침공은 고려인들의 반감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공포전술도 적어도 고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의 몽골에 대한 반감은 철저해서 겉으로나마 항복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몽골에 대한 저항을 준비했다. 강화도 천도는 그래서 단행됐다. 최씨 무신정권의 反몽골노선은 그들이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 성향이 유난히 강해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런 성향이 일부 있기도 했겠지만 그 보다는 그들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고려가 몽골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면 그들의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방안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지, 불리한 지를 따져보고 선택해 나가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떠나지 않으려는 고종을 강요하다시피 해서 강화 천도를 단행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강화로 천도하던 1232년 6월, 장대 같은 빗줄기가 열흘동안 쏟아졌다. 무릎까지 빠져드는 진흙 길을 헤치며 조정의 백관들과 그 가족들은 백여 대의 수레에 짐을 싣고 강화로 떠났다. 최우의 강압에 못 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궐터로 들어섰다. 강화 천도와 함께 몽골이 1차 공격후 두고 간 72명의 다루가치는 모두 처단됐다. 점령지를 관할한다는 명분으로 공물의 수납과 운반 등의 일을 보면서 고려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어오기는 했지만 점령지에 남겨 놓은 다루가치가 전원 살해되는 일은 몽골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복수를 최우선적인 의무로 삼고 있는 몽골로서는 2차 침공을 감행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강화 천도 두 달 후인 1232년 8월, 1차 공격을 지휘했던 사르타크가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다시 밀어 닥쳤다. 이 때 몽골군의 길잡이는 홍복원(洪福源)이었다. 서경의 낭장이었던 홍복원은 반란을 일으킨 뒤 몽골의 1차 침입당시 몽골군에 투항한 인물로 그의 아들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고려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홍씨 일족이었다. 몽골군은 4개부대로 나뉘어 경상도 지역까지 내려가 약탈을 자행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지 않고 섬을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 내려는 전술을 구사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총 사령관 사르타크가 민중부대가 쏜 화살에 맞아 숨지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2차 침공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사르타크가 죽은 곳은 경기도 용인 처인성(處仁城), 수주(수원)을 지나 중원경(청주)로 남하하던 사르타크는 길목에 위치한 처인성을 지나는 도중 승려 김윤후(金允候)가 지휘하던 매복조로부터 집중적인 화살세례를 받고 즉사했다. 김윤후가 지휘하던 부대는 승려와 농민, 천민 등으로 이루어진 정규 군대가 아닌 민중부대였다. 몽골의 총 사령관이 고려의 이름 없던 승려로부터 죽음을 당한 그 곳은 장군을 죽인 곳, 즉 살장터(殺將場)라 부르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주민들은 몇 년 동안 행정구역의 이름을 처인면으로 바꾸어줄 것을 요청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행정상의 편이를 위해 남쪽의 4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면의 이름 대신 과거 몽골군의 총사령관 사르타크가 민중부대에 의해 살해된 처인성을 이름을 붙여 달라는 요구다.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번지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이 바로 이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둘레가 425미터 안에 있는 5천여 평의 장방형으로 생긴 동산은 주위에서 보면 주변 보다 조금 높게 보이는 둔덕처럼 보인다. 허물어진 토성은 지난 70년 복원 공사로 어느 정도 토성의 모습을 갖췄다. 몽골이 세계정복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어느 정복전쟁에서도 총 사령관이 적에게 살해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적장을 살해한 사람들은 정규군대도 아닌 대부분 천민인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들이었다. 왕과 귀족들은 섬으로 피신 하고 호족들 마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며 달아나기 급급한 때에 분연히 일어서 몽골군에 대항하고 나선 이들 백성들의 항쟁은 2차 여몽전쟁의 전세를 결정지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사면의 주민들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지역의 이름을 바꾸어달라고 요구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사기가 극도로 떨어져 도망 길에 올랐다. 사령관이 죽으면 전쟁을 중단 하는 것은 몽골군의 관례였다. 한꺼번에 모여 돌아가지 않고 혹은 먼저 가고 혹은 낙오돼 뒤쳐져 가기도 했으며 혹은 동쪽으로 가려하고 혹은 북쪽으로 가려했기 때문에 떠나는 기일을 정하지 못하고 어디로 갈지도 알지 못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후퇴하던 몽골군의 모습이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몽골의 푸른 군대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원정군의 총 사령관이 살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다른 곳의 예로 보면 몽골군은 보복을 위해 즉각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반도로 밀려오는 것이 다음 순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나라와의 전쟁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몽골은 주력부대를 다른 곳으로 빼내 전선을 분산시키기가 어려웠다. 1234년 금나라의 숨통을 완전 끊어버리고 고려와의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던 동진까지 완전 제압한 오고타이는 1235년 카라코룸을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고 오르콘강 근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여기에서 동서 2대 전쟁, 즉 남송 공격과 러시아·유럽 원정을 결의 하면서 고려에 대한 보복 원정도 선언했다.
그해 탕구(唐古)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로 밀어 닥쳤다. 3차 침공이었다. 이번에도 홍복원이 길잡이로 나섰다. 몽골군은 강화교섭도 벌이지 않고 무조건 약탈전술로 일관했다. 사르타크가 살해된 데 대한 보복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5년에 걸친 오랜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방화와 약탈 그리고 학살을 자행하며 국토를 유린했다. 대약탈이 휩쓸고 지난 간 자리에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잿더미로 남았다. 삼국시대 최대 사찰이었던 경주 황룡사도 이 때 불에 타면서 황룡사 9층 목탑 한줌의 재가 돼버리고 말았다. 고려의 군관민은 유격전 형식으로 몽골군에 철저히 대항했다. 몽골의 1차 침공 때의 영웅이 귀주성의 박서, 2차 침공 때의 영웅이 처인성의 김윤후라면 3차 때의 영웅은 죽주성의 송문주(宋文胄)였다. 몽골군은 사르타크가 살해된 처인성과 1차 침공 때 공략하지 못한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처인성 바로 아래쪽에 있는 죽주성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당시 죽주성에는 몽골의 1차 침공당시 귀주성에서 박서장군 아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몽골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죽주 방호별감으로 승진한 송문주가 버티고 있었다.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화공(火攻)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공성전을 경험한 바 있는 송문주에게 몽골군의 공세는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투석기를 이용한 공격도, 기름과 송진을 활용한 공격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송문주가 이번에는 몽골군이 어떤 장비로,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이니 마땅히 이런 방법으로 응전하라고 지시하면 적은 어김없이 그런 방법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적을 물리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상황마다 미리 대비책을 내놓는 송문주는 부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전략의 귀재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신명(神明)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이름이 죽산으로 변한 죽주는 행정상으로는 안성군 일죽면으로 돼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일죽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오면 죽산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에서 오른쪽으로는 용인 가는 길이 왼쪽으로는 안성 가는 길이 나온다. 죽산성은 바로 용인가는 길, 매산리 국도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야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은 신라 때 처음 축성됐다가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3차 몽골 침입 때 송문주는 주민들과 합세해서 이 성을 지켰다. 이 죽주산성을 등지고 앞쪽의 죽산천을 바라보는 지점에는 경기도 최대 미륵불인 태평미륵이 서 있다. 안성의 위쪽에는 용인의 처인성이 있고 동쪽 방향에는 충주가 있으니 이 일대는 모두 몽골군과의 격전지로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사르타크를 살해한 김윤후와 죽주성을 지킨 송문주의 승전을 기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미륵불을 세웠는데 그 것이 태평미륵이라는 설명이다. 둘레가 1,688미터, 높이가 2.5미터 안팎인 죽주성은 군데군데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다른 성에 비해 비교적 잘 보존이 돼 있다. 성 위에 올라서면 과거 격전지였던 죽산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안 에는 송문주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죽산과 함께 온수(溫水: 지금의 온양)등 여러 지역이 군과 민이 합세해 몽골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등 분전했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백성이 입은 피해와 겪은 고난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처럼 본토에서는 엄청난 고난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강화도에 틀어박혀 있는 고려조정과 무신정권은 섬을 고수하는데 급급했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저 한다는 일이 민중부대의 저항을 독려하거나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섬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에 띠는 특이한 일이라면 부처님의 가호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판 작업에 착수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귀한 문화재를 남겨 놓기는 했지만 전황과는 상관없는 일 이었다. 소극적인 고려조정과는 달리 고려의 민중부대는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몽골군을 괴롭혀 몽골군 진영에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 점을 간파한 고려조정은 사신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골에 보내 조공을 바칠 테니 전쟁을 끝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싸움에 지쳐 있던 몽골은 얼른 이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고려왕이 몽골에 입조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건 채 서둘러 철수했다. 고려는 왕족인 영녕공(永寧公)과 귀족의 자제 10여명을 인질로 보내면서 일단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고려는 몽골군이 철수한 뒤 약속과는 달리 조공도 바치지 않았고 고종이 몽골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고타이가 죽고 몽골 내부에 권력 투쟁이 이어지는 동안 몽골은 고려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잠정적인 평화가 불안하게 유지됐다. 고려조정은 여전히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1246년 구육이 대칸에 취임하면서 몽골은 다시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이듬해 7월 다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바투와의 갈등 때문에 서방원정에 나섰던 구육이 갑자기 숨지자 몽골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1251년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몽골은 대대적인 고려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253년, 예구(也窟)를 사령관으로, 아모간과 홍복원을 부장으로 하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로 밀어 닥쳤다. 5차 침공이었다. 몽골군은 동진군과 서진군으로 나뉘어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 했다.그 동안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강원도 지역까지 전화에 휩싸였다. 몽골군은 여전히 출륙환도, 즉 고려조정이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했지만 최항의 고집으로 왕실과 무신정권간에 갈등만 빚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몽골 재침에 대비해 대부분 피난해 버렸기 때문에 몽골군은 거침없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몽골군은 충주성 공격에서 또 한 차례 곤욕을 치러야했다.
충주성은 사르타크를 살해한 뒤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충주 방호별감으로 임명된 김윤후가 지휘하고 있었다. 충주성 공격에 나선 몽골군은 총사령관 예구가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로 70일간에 걸쳐 대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덤비는 충주성의 항전에 성을 함락시키기가 불가능했다. 그들의 결사 항전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충주성을 지키던 군대는 노군 잡류별초, 즉 노비군과 잡류병력이 주축이었다. 몽골군이 밀어 닥쳤을 때 양반들과 관리들은 대부분 달아나 버리고 천한 신분의 이들만 남아 성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포위 속에서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나고 병사들이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과거 1차 몽골 침공 대 충주성을 지켜 낸 노군과 잡류군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조치를 취했다.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관직을 제수케 하리라면서 관노들의 호적을 불살라버려 믿음을 안겨줬다. 또 적에게서 뺏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자유를 꿈꿔왔던 관노들은 감격한 것은 물론 사기 백배해 몽골군에 대항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강력한 항전의 벽에 부딪친 몽골군은 마침내 충주성을 포기하고 충주 이남지역에 대한 공격도 단념한 채 퇴각 길에 오르게 된다. 충주성의 항전은 군사적인 의미도 의미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 큰 뜻을 찾을 수 있다. 몽골군을 격퇴한 이 전투로 충주는 국원경 (國原京)으로 승격됐다. 충주성은 이후 충렬왕 때 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일부에 연화문을 새겨 넣어 예성(藝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퇴각하는 명분을 얻기 위해 몽골은 고려조정과 화의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최항의 반대 속에 고종은 몽골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육지로 나와 몽골의 사신을 맞이했다. 몽골은 왕의 입조와 함께 개경으로 천도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하며 그들로서도 지긋지긋한 충주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 몽골군에 협력하거나 항복한 장군과 관리들의 목을 베거나 귀향을 보내는 식으로 강경 대응했다.
1254년 차라타이(車羅大)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여섯 번째로 고려를 다시 공격해 왔다. 몽골은 이번에는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자세로 전국을 유린했다. 경상도 전라도 지역까지 전란에 휩싸였다. 몽골군은 수전까지 감행해서라도 강화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때 포로로 붙잡힌 고려인만도 20만 명 이상이었다.살 육된 사람은 그 보다 더 많았다. 고려 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상태였다. 1255년 고종은 몽골에 입조하고 육지로 나가겠다는 약속을 하자 차라타이는 압록강 남쪽으로 물러나 고려가 약속을 지키는 지를 지켜봤다. 하지만 고려는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반년 뒤 다시 쳐들어 온 몽골군은 광주와 목포 신안 등 남쪽 지방까지 내려가 분탕질을 계속했다. 수군까지 동원해 섬 지방에 대한 공략까지 시도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고종은 몽골 조정에 시어사(侍御史) 김수강(金守剛)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김수강은 대칸 뭉케에게 몽골군의 철군을 요구했다. 뭉케가 고려 조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섬 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탓하자 김수강은 사냥꾼에 쫓긴 짐승이 굴로 들어갔는데 사냥꾼이 활과 칼을 가지고 굴 앞을 지키고 있다면 곤궁에 처한 짐승이 어디로 나오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수강의 언변에 탄복한 뭉케는 화친을 결정하고 차라다이에게 철군을 지시했다.
6차 침공이 있고 난 뒤 최항이 죽었다. 최항의 서자 최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그는 1258년 유준, 김인경 등에 의해 피살됐다. 이로써 60년에 이르던 최씨 무신정권은 무너졌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조정에는 몽골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됐다. 고려 조정은 몽골에 최의의 죽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이듬해 태자 왕전을 비롯한 40여명이 몽골에 입조함으로써 28년 동안 지속된 전쟁은 일단 한고비를 넘고 있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 숀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고려 가요 청산별곡이다. 그저 자연에 묻혀 살고 싶어 하는 민중의 정서를 담은 노래로 이해하기 쉬운 이 청산별곡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유력한 것이 몽골의 고려 침공 당시 전란을 피해 이리 저리로 떠돌며 겪었던 백성들의 고초와 정서가 담긴 한의 노래라는 해석이다. 이 노래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면 그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머루랑 다래랑 먹으며 지내는 청산에서의 삶은 민초들이 스스로 선택했던 삶이 아니라 몽골의 약탈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삶을 얘기한다. 2연에 나오는 우는 새는 울고 싶은 그들의 심정을 새에 비유한 것이다. 3연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물 속에 잠긴 새를 보고 있다는 표현으로 희망이 사라진 어두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4연은 산성 입보민의 고적한 삶을 나타내며 ‘어디로 던진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고..’ 하는 의미로 이어지는 5연에서는 지도층의 분란으로 상처 입은 민초들의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십 년의 전쟁 동안 고려가 보인 항전 태세는 몽골군으로서는 어느 전쟁터에서도 겪어 보지 못했을 만큼 끈질기고 처절한 것이었다. 그 것도 정규 부대의 저항만이 아니라 전 민중에 나선 범국가적 차원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항전을 두고 자주국가의 면모를 과시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당시 몽골에 대한 항쟁에 나섰던 민중들에게 충주성의 김윤후가 했던 것처럼 사기를 올려주는 조치를 취하고 이들의 힘을 조직화해서 고려 조정이 적극적인 항전에 나섰다면 당시 무적의 몽골군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자주국가의 면모를 과시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군에 맞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은 지방의 군과 농민 그리고 천민들이었다. 몽골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준 사람도 초적과 노비들이었다. 또한 전쟁으로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이들 일반 백성들이었다. 청산별곡에 나타나 있듯이 산 속에 피해 살면서 고난과 어둠의 세월을 보낸 것도 민초들이었다.
이처럼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황폐화되는 동안 무신정권의 주도자들은 강화도에 피해 지내면서 화려한 집을 지어 놓고 안락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항상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상황을 급박하게 몰아갔다. 수십 년 동안 민중이 희생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동안 오로지 강수만 구사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몽골군에게 항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탄력적인 대응과 외교적 수완 발휘를 통해 나라와 백성의 희생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특히 몽골 측에서 봐도 오랜 기간에 걸쳐 희생이 적지 않은 전쟁에 염증을 내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적절한 방법이 있을 법도 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 강경책만 고수한 것은 정권유지만이 최선의 목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따른 피해는 섬 안에 피해있는 그들에게는 나중의 일이었다. 강경책은 다른 잡음은 잠재웠겠지만 그에 따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시킨 꼴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항전을 두고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항전이었다고 추켜세우는 것은 과거 군사정권의 조작이고 그 조작에 발맞춘 일부 어용학자들의 왜곡이었다. 과거 군사정권도 정권 유지가 최우선이었고 백성들의 삶은 그 다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