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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광주문학 계간평 2021년 가을호
삶을 깊게 하는 시품(詩品), 시격(詩格), 시인 격(詩人格)에 대하여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내게 비석은 필요 없다. 너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지 않았느냐.
언어와 이야기의 힘은 이처럼 강하다. 그 어떤 돌이나 쇠보다 말이다.”
- 『인도이야기』의 ‘비쥬르와 제자 이야기’ 중에서
1
시는 곧 ‘길’로 가는 ‘리듬’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감정 세포들의 ‘여정’은 시라는 ‘리듬’을 타고 그 품에 ‘생명체’를 키운다. 시의 세포로서 몸짓이 바로 ‘리듬’이자 ‘결’이다. 필자 나름의 시에 대한 이 정의는 한낱 은유적 표현만은 아니다. 시도 하나의 ‘격(格)’을 갖춘 존엄한 ‘생명체’로 보자는 것이다. 화자의 사유가 그러하듯, 사물의 심리를 시의 심상으로 가져오는 것 또한 ‘리듬’의 주요한 기능이다. 반대로 리듬은 사물의 심리를 시의 기제로 교체하며 전달하는 법을 보다 쉽게 하기도 한다. ‘리듬’은 시와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살아있는 ‘윤활제’이다. 단순하지만 이 원리를 알고 시를 쓰면, ‘시의 길’은 잘 벋어가게 될 것이다. 나아가 시에 이를 즐겨 활용하면, 시는 좋은 그릇에 담아낸 풍미진 음식과도 같아질 것이다. 해서, 당신은 뜻있는 수요자(독자)를 모을 수 있다. 이를 섭취한 당신의 피부는 ‘윤택’해질 것이며, 삶의 지혜 또한 깊고도 넓어질 건 자명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인문학적 정서와 합류하게 되고, ‘시품’으로서의 ‘시격’을 부여받게도 된다. 그렇다. 시인으로서 격을 갖춘 ‘시인 격’을 드디어 찾게 되는 것이다. 이르게 되는 게 아니고 찾게 된다고 하는 것은, 원래 ‘시품’의 ‘시격’을 시인이 간직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시인 격’으로 가는 여정이 이렇게 〈길〉과 〈리듬〉과 〈생태〉를 동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 요소는 각각 인간의 정신적 표증(表證)이자, 시인이 살아가는 표층(表層)이며, 이는 ‘시품’으로 안목을 가다듬을 표중(表重), 즉 ‘시인 격’으로 중요하기에 그렇다.
시의 ‘생태’는 인간 보다 먼저 사물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를 시 속으로 끊임없이 건져 올린다. 그러니까, 지상에 흩어진 돌멩이, 부서지는 흙, 그리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그릇, 또는 사람들이 무분별한 낫으로 쳐버린 나뭇가지, 어느 무식한 등산객이 스틱으로 쳐 죽게 한 작은 쑥잎이나 토끼풀, 미나리아재비 등, 아니 그것들을 덮어버리려는 미세한 먼지들까지도 시의 밥상에 올려보자는 것이다. 아니면, 그 반대인 것들도 있다. 예컨대 몇 백 년 후에도 썩지 않을 흙 밭에 묻히는 비닐 조각, 한 아이의 손에서 사랑받았지만 이젠 부서지고 빛바랜 채 구렁에 버려진 악어 장난감, 그 벌어진 등, 또는 그 구멍을 타고 먹이를 나르는 개미나 풀무치들에게서 순간의 생명성을 느닷없이 획득하는 찰나를 비롯해, 산머루, 굼뱅이풀, 도깨비털 등 다소 생소한 들풀과, 길냥이, 물뱀, 오소리, 부엉이 등 야생동물에까지 발광체(發光體)를 달아주어 깨어있게 하는 시편들도 생태를 복원해주는 한 ‘시품’을 지닌다. 그런 것에 시의 눈을 앵글처럼 들이대는 일로부터 ‘시품’은 시작과 함께 ‘리듬’의 징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시인들이 구가하는 시의 지상엔 그게 많지는 않다. 아니 그 보단 관심이 적다고 해야 옳겠다. 빛을 투과해온 우주적 사유, 아니면 그것을 지나온 인간들의 관행을 뛰어넘어온 상상 속 캐릭터들도 모두 일단은 생태적으로 보는 일은 중요하다. 아니 더없이 긴요하다 할 것이다. 가령 영화나 문학작품이 창조하여 무대에서 활동하는 제3의 생명체들, 예컨대 이티(ET)나 킹콩, 고질라, 주라기의 익룡과 조상새, 빠지자마자 길어나는 괴물의 이빨, 손오공의 여의봉, 서랍 속이나 클립보드에 헤아릴 수 없이 복사된 인형들, 스타워즈, 아바타, 스머프, 뽀로로의 발가락 등과 같이 살아있는 케릭터들의 몸체는 뭇 시인들을 향해 종횡무진으로 달려 나온다. 그들도 생각과 감정을 지닌다는 사유로부터 한 세계가 존재함은 바로 살아있는 시를 탄생시킬 수가 있다. 이들은 시·소설·영화·애니 속에서 길러지지만 세상을 다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해리포터의 마법사처럼 사방에서 뛰어나와 독자와 관객을 무진장한 축으로 싸잡아가 홀릭, 홀릭, 또 홀릭하게 한다. 예를 들어, 엘리스가 모험하며 만난 이상한 나라 그 지하의 존재들이나, 피노키오, 해저 이만리의 네모 선장, 라푼첼의 긴 금발, 인어공주의 흰 발, 드레곤,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디아블로·2의 신종무기, 스타워즈의 불바다, 마션, 인디펜던스 데이, 갈리버의 휘늠국과 소인국,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면적 동면(裏面的 同面), 그리고 최근 프로인 엘사의 겨울왕국,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 위치 헌터 등등 헤아리기에도 벅찬 캐릭터들이 상상계에 살아서 시인들을 기다린다. 해서, 지금은 환상의 천국, 아니 상상과 환상이 실재한 세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자기 작품에 태우고 더 멀리 더 깊이 여행하길 기다린다. 그래 시품은 다양하고 앞으로는 더 다양해질 것이다. 그건 더 많이 탄생할 것이고, 세상과 우주를 누비며 시를 기다릴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에도 태왕사신기, 호랑이 형님, 퇴마록, 도깨비 세상, 홍길동, 장화홍련, 눈물을 마시는 새, 리니지 등 시의 소재는 널려있듯 많다. 이 역시 시인의 시품에 들어가기를 꿈꾼다. 이들이 비록 3D나 가상공간, 게임의 무대, 애니메이션과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지만 일상에서 실재할 가능성 또한 배제하지 못한다. 아니 이를 배제한다면 그는 작품을 쓸 자격이 없어질 것이다. 뭐 놀라울 일이 아니다. 세상은 벌써 그런 4차원의 사회로 깊숙이 진입해 왔기 때문이다. 혹 황당할, 아니 당황할 이야기라 할지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세상은 ‘환상’과 ‘상상’은 ‘공상’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될 무대였음을 신이 예견해 왔다. 21세기가 되기도 전에 실재와 환상이 혼재된 세계가 이미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 앞엔 사물인터넷과 가상화폐, AI, 로봇, 가상인간 모델 로지, 로아가 활동하고, 심지어 이 로지들이 인스타그램에 참여하는 등 인간 보조의 수행자들이 속속 증대되고 있다. 화상 채팅, 원격 진료, 배달 요리, 비대면 학습 등은 코로나로 인해 상상을 현실 세계로 바꾸는 걸 더욱 촉발하고도 있다. 이젠 그들을 사용하는 편리를 떠나 그들도 ‘품격’을 구가하는 이른바 ‘만화기(滿花期)’를 맞고 있다. 머지않아 이 기계들도 ‘노조’를 만들지 누가 알까. 이들은 작금의 ‘현대시’에 자주 등장한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그리고 인공지능(AI)의 기술적 결합으로 현실의 벽을 넘는 메타버스(metaverse), 가상현실계의 캐릭터 역시 현대시가 수용하는 과제이자 시품이라 할 수 있다. 우주로의 수학여행이나 화성에서 감자 재배 등이 현실화 되었고, 청소, 밥짓기, 세탁, 독서, 글쓰기 등 노동의 대부분을 로봇이 맡는다. 톨스토이는 만년에 소설을 불러주면 그의 아내가 받아써서 책으로 출판했다지만, 지금은 음성인식의 문자화 프로그램의 앱을 이용하는 작가가 늘고 있다. 아니 그보다 정밀하게 프로그램화된 가전품들이 우릴 기다린다. 드론을 통한 경작과 시비(施肥), 농약, 파종은 물론 수확, 선별, 운송, 저장, 식탁 배송에 이르기까지 병행 제어시스템이 작동된다. 산간벽지에 살지만 주문한 물건을 받아 활용함은 물론, 과거 수백 명의 노동력이 있어야 처리하던 것을 이젠 한 두 명의 조작수로부터 그 수행을 단축해버리기도 한다. 이렇듯 시의 소재, 시품을 부릴 기회는 무궁무진하지만 어떤 이는 앉아서 시가 되지 않는다고 제 짚방석을 떠날 줄을 모른다.
2
『아라비안나이트(千一夜話, One Thouthand and an Night)]』에서는, 날마다, 내일이면 동이 트게 되고 당장 살해되어질 세헤라자드가 술탄에게 이야기를 한다.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동생 던야자드와 같이 왕의 침대에서 이어나간다. 목숨을 담보했으나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이야기에 끌린 술탄이 결국 세헤라자드 살해 일을 미루다 드디어 천 하루를 맞게 된다. 그래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문학인은 왜 작품을 쓰며 독자를 감동하게 할 의무가 있는가. 그건 다름 아닌 포기하지 않아야 할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와 같은 임무 때문이다. 그녀는 전해 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한 게 아니었다. 왕이 흥미를 일으키도록 매일 창의적으로 각색하거나 새로 창작하여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내일 어떤 얼굴로, 어떤 이야기로 살인마 술탄을 녹다운 시킬 것인가에 대해 궁리를 거듭한 결과이다. 그러니, 세헤라자드와 던야자드의 속셈은 날마다 일치해야만 했다. ‘언니, 어제 이야기가 궁금해 그 뒤편을 말해줘, 여기 임금님도 그럴 거야’ 이렇게 던야자드가 운을 띄우고 세헤라자드는 곧바로 이야기를 지속해 간다. 문학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잃지 않아야 할 것이 이 바로 창의성이다. 그렇다. 시는 흔히 아는 것처럼 정서의 산물이 아닌 시인의 창의적 산물이다. 때로 없는 정서를 창출하기도 한다. 하므로 독자를 향하여 창안해낸 상상의 노래와 그 스토리가 시인의 시품이라는 건 분명한 일이다. ‘시품’으로 말하면, 무생물이나 미생물의 활동에 대하여 그들을 영원히 살아있도록 유예시킬 희안한 노래와 이야기와 상통된다. 시인의 존재는 곧 ‘창조적 격’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가시적 존재에만 시를 투자할 시대는 벌써 바닥을 쳤다. 그래, 불가시적 존재, 또는 상상적, 환상적 존재, 심리의 내면에 작동되는 세포와 미세물을 살리기 위해 포착한 현미경적 생태, 그러니까 살아있는, 또는 살아남는, 아니 살아죽는 일로 감동을 전함은 시인의 책무가 되는 일이다. 생명의 문학을 확장하는 일에 시인이 책무를 다하는 것 그게 ‘시인격’이겠다. 어떤 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SNS를 통해 겉모습의 제 삶만을 제시하며, 자기 시에 제가 먼저 취하고, 제가 유명하다고 떠들고, 제가 최고라고 치켜든다. 그것도 찬란한 존재들에게만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말이다. 교사들이 좋아하는 학생은 뻔히 아는 것처럼 말 잘 듣는 모범아이이다. 시인인 그대들도 대상을 고를 때 그런 모범 사물만 고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라. 진정한 정의의 숨은 독자는 무생물을 비롯하여 유무해의 미생물에까지 뻗친 시인의 눈과 힘을 원한다. 자기 몸의 세포들의 저항하는 것을 공격하는 세포에게도 생명적 존귀함을 주는 그런 글에 동그라미 표시를 오히려 짙게 한다, 뮤즈의 신은. ‘나’라는 작은 존재, 즉 가난하고 장애를 입고, 외톨이이고, 피해를 당한 ‘나’도 건강하고 부유한 아이 못지않게 잘살고 싶어 한다. 교사나 보육사는 삶의 동반자로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시인이 소외된 대상에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당대 생명체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를 ‘닮고 싶다’는 식의 찬사를 보내며 사물에 아부하는 투로는 정의의 시, 감동의 시, 깊이의 시, 창조된 시, 삶의 생태시를 구현할 수가 없다. 살아있다는 특권에 의해 화려한 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가치를 연장하려 드는 시인이 지상에는 넘친다. 더 있다. 시가 ‘정서 순화의 산물’이라는 아직도 구태의연한 서정을 믿는 시인이 적지 않음이다. 늘 강조해 왔지만, 그건 농경시대적 시의 개념으로 60년대가 지나쳐 온 간이역에 불과하다. 그래, 오늘의 ‘시품’은 아니다. 오늘날의 시는 서정에 앞서 스스로의 독창성을 모토로 한다. 아니, 그 독창성마저도 파괴하는, 해서 막장마저 뒤집는 그 혹독한 개성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유명한 시인들을 직접 가르치고 길러낸 대구의 한 백세의 시인은 당신의 질박한 삶을 기록한 시를 2020년에야 출간했다. 그가 노래한 시들에 관심을 갖고 대중이 읽은 건 겉으로 보기에 존재적 가치가 없는, 그래 미세하고 더 자잘한 사물에 대한 부활의 영가(靈歌), 그걸 내밀하게 속삭인 때문이었다.
3
생태적 입장에서, 작품격의 시격이나 시인 격을 이야기하다 길어졌지만 각론하고, 이제 한 삶에 진정성으로 다가간, 그러면서도 가벼운 보법으로 딛는 시를 살펴보려 한다.
바라 떼 덮듯 둥그스럼한 민둥산
노루 정강이처럼 무리지어 발꿈치 세웁니다
한 생애 깊이 참아온 모둠 숨
아픈 청춘처럼 은밀히 잉걸불 지릅니다
그 안간힘 바람에 뒤척이며
선홍빛 속울음을 파르르 떨어 견딥니다
그대 향한 허물없는 표정 붙잡고
소리 없는 눈빛 따라 열정에 빠집니다
그 한의 속살까지 물드는 시간
햇살 튕겨내며 붉고 또 붉습니다
-고영숙 「바래봉 철쭉」 전문
‘바래봉’은 전북 남원의 운봉읍에 위치해 있다. 봉우리가 마치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 해서 그렇게 불린다. 이곳은 한국의 철쭉 밭을 대표할 명소일 뿐만 아니라 생태 환경이 잘 보존된 산이기도 하다. 밥그릇이라는 사물 이름으로부터 연상되는바, 경전 ‘바라밀다’에서 ‘바래봉’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된 그 유래대로 철쭉의 백미(白眉)가 바라보이는 건 ‘팔랑치’ 봉우리까지 올라와야 가능하다. 그래 ‘바래’를 누릴 수 있다. 오르느라 굶은 사실도 잊게 만드는, 해서 바라보아 밥그릇의 형국이다. 허기의 눈을 채우는 산이다. 왁자하게 떠드는 사람 무리를 밀치듯 이 꽃무더기 앞에선 모두 제 위치를 지워버린다. 철쭉꽃에 대한 장관(壯觀)은 묘사된 대로 “잉걸불”을 질러 화염에 떨게 할 만큼 강렬하다. 바래봉에 도달한 것처럼,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철쭉의 ‘꽃밭’이란 ‘불밭’에 눈과 손을 데일 법하다. “바라 떼 덮듯”, “노루 정강이”, “선홍빛 속울음”, “한의 속살” 등의 비유에서 보듯 시각적 눈을 지나 가슴으로까지 슬픈 붉음이 파고든다. “햇살”조차 “튕겨내며 붉고 또 붉”어 심지어 “파르르 떨며” 견디는 그 불이 짓눌려 올 때, “물드는 시간”은 하나의 봉의 형상, 그 움직임으로 기술된다. 그래 독자의 가슴에 매직처럼 솟아나게도 한다. “붉습니다”라는 현재형이 묘사의 종료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걸 잔상으로 남겨 두고 다시 보려한다. 독후(讀後)의 울림 또한 붉게 짙은 생명성에 맞닿아 있다.
한 생 휘감고 도는 맷돌의 노역
내 어머니의 두터운 돋보기다
안경 쓰시고 천 조각 잇대 만든 밥상보
분명 밥은 당신 식구들 끄나풀이었다
늘 거울 앞에 앉아
동백기름 가르마 곱게 내던 당신
고우셨다
오늘 화장터 석쇠 위에 올려 보내고
뼛속까지 한이 서린다
-공은정 「밥상보」 전문
흔히 ‘깊은 시’에 보이는 현상은 산재된 이미지들의 단계화가 특징이다. 그건 시적 체계를 강고하게 하는 다단(多段)이기도 하겠다. 이 시는 ‘밥상보’와 관련된 생각을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의지해 병렬적으로 엮은 시이다. 그건 〈휘감고 도는 맷돌의 노역〉→[한 생], 〈두터운 돋보기〉→[내 어머니], 〈당신 식구들의 끄나풀〉→[밥], 〈화장터 석쇠 위에 올려 보내는 유물〉→[밥상보]와 같은 관계 안에 어머니의 다양한 영어(靈語)들을 연결하고 있음에서이다. 과거 ‘밥상보’에 대한 회상 뿐인 구태의연한 사유를 버리고 이미지를 현실로 재구성해 보인다. 자투리 천 조각으로 만든 이 어머니의 밥상보는, 비록 차린 게 없어 가난하고 초라한 밥상이었지만, 순간 그걸 덮어버림으로써 꽃을 얹은 듯 화려한 밥상으로 바꾸어내는 어머니 수완을 재구성해 낸다. 가장 가시적이고 미학적인 가림막으로서의 ‘보’가 연기해내는 순간을 어머니 시대를 지나 지금의 화자가 재현한다. 이런 가림막의 미학은 관혼상제, 즉 혼사, 제사, 상례 등 행사에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병풍으로 두르던 예법도 그와 같을 것이다. 잊지 못할 밥상보이기에, 화자는 어머니가 마지막 가는 화장터까지 동반해 간다. 어머니의 관에 덮어 어머니의 짠한 죽음을 화려함으로 가리자는 의도일 것이다. 화려한 듯 보이는 밥상보이지만 그걸 잇대어 만든 ‘보’는 어머니의 조각진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뼛속”에의 “한”을 남기며 마지막 가는 어머니를 덮는 것으로 치장한 조각보, 그건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기리는 의미있는 만장(輓章)일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행실이 어긋나지 않고
욕심 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양을
어여삐 보셨을까
고희가 다 되어 천주가 하사하신
12/23층 56㎡ 따스한 보금자리
인생 한 순배 돌아
비로소 맛보는 평안과 행복
머리털 파뿌리가 되도록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숲으로 둘러싸인 동남향
공중 부양한 천사의 다락방 같은 곳에서
부시도록 찬란한 태양을 영접하며
배부른 하루를 꿈꾸나니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려나
상처에 돋는 세포처럼
-김석문 「해 드는 집」 전문
시를 이해하기 쉽게 씀은 자신의 체험을 진솔한 필(feel)로 이끌 때이다. 막힘없는 감정의 동력을 얻는 것은 물론이다. 한사코 이중적 표현이나 비틀어 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을 막아내는 한 대안이기도 하겠다. 아니면, 진솔한 체험의 결과라는 기본적 개념에 의한 한 시법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평범한 벌이로는 집 한 칸을 장만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게 뭐, 새삼스런 투정은 아니다. 평생 허리 휘어지게 일하고도 집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의 67%를 넘는다니, 그에 비하면 화자의 입장은 다행하다고 해야 할 것도 같다. 하지만 그는 천신의 고생 끝에 인생 말년 희수에 들어서야 마침내 제 보금자리 하나를 소유하게 된다는 점에서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게 한다. 드러난바, 그의 소박한 시적 화법은 구수하지만, 사실 여기엔 남모를 물리적 고통이 생략돼 있다. 부자들이 보면 참 보잘 것 없겠지만 화자는 56㎡(약18평)짜리 아파트를 70이 다 된 노년에야 장만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집을 소유하기까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시에 피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숲으로 둘러싸인 동남향”으로 선 이 집을 우선 “공중 부양한 천사의 다락방”으로 규정한다. 시의 기법으로서의 ‘비약’이 아니라, 진솔하고도 가식 없는 삶으로써의 ‘비약’, 그러니까 숱한 고초를 지나왔지만 축지(縮地)와도 같은 돌아앉은 그 자세이다. 그걸 규정함은 더욱 깊어져 “찬란한 태양을 영접하며” 일상을 얻는다는 데까지 이른다. 이렇듯 보기엔 적은 평수의 집에 불과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큰 성취를 이루었음에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유유자적함과 지금 있음에의 즐거움, 이른바 한거낙득(閑居樂得)에의 겸허가 시에 촘촘하다. 예컨대 (1)“살아오는 동안 행실이 어긋나지 않”은 점, (2)천주가 “욕심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양을 어여삐” 보아 이루어진 점, (3)“인생 한 순배 돌아 비로소 맛보는 평안과 행복”의 장소인 점, (4)“공중 부양한 천사의 다락방 같은” 점, (5)“부시도록 찬란한 태양을 영접하며 배부른 하루를 꿈꾸”는 곳, 그리고 (6)“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에 드는 것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시의 끝, 발랄한 삶의 의욕, 그 결미다운 긍정이 앞의 다단(多端)을 의미있게 종료해 보인다. 필자가 알기로 그가 평생 궁핍했으되 내색하지 않고 문인들과 늘 소통해온 그대로여서 시는 더 공감영역을 넓힌다.
광주시청 앞 광장 내방로 오른쪽 길
한 소녀가 왼손을 가슴에 얹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 생각이 나를 끌고 갑니다
현해탄 건너 시퍼런 통증을
온몸으로 간직하고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우린 위안부 할머니라 부릅니다
장미꽃을 먹는 채식동물처럼
눈가에 햇살 조각을 그렁그렁 모아가며
할머니의 옛 그림자를 더듬어 봅니다
가시는 장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녀와 할머니의 꿈이 만나는
그곳에 장미는 피었습니다
온몸으로 혈서를 쓰며 나를 찔렀습니다
-양동률 「몸으로 쓰는 혈서」 전문
이 시는 오버랩한 바를 접점으로 기술해 보인다. 그 상대는 화자와 겹칠 만큼 [소녀=할머니]의 관계이다. 도입부에선 “광주시청 앞 광장 내방로 오른쪽 길”로 한 소녀가 “맨발로 걸어”간다. 화자는 그것을 보며 “한 생각”을 하게 된다. 소녀는 다름 아닌 “현해탄을 건너 시퍼런 멍의 통증을 온몸”에 간직하며 살아온 “위안부 할머니”이다. 시는 할머니의 소녀 시절을 한 시대의 전환법으로 풀어간다. 길 가던 소녀와 강제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 자리에 “장미”가 피었다. 하지만 장미는 온몸으로 화자를 찌른다. 소녀와 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소녀 시절에 겪었듯 가시 찔린 상처는 피로 젖은 꽃으로 바뀐다. 그건 지금에 이르러 우리에게 혈서를 쓰듯 아프게 찌른다. 시의 전개상은 담담하지만, 그만큼 읽는 고통은 거슬러가 피눈물을 끌어온다. 정서가 깊어지지 않은 시에선 일단 시인이 감정의 노예가 되기 쉽다. 하지만 이 시는 대상에 대해 흥분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독자의 자극을 발양케 하는 점이 값지게 보인다.
겨우내 봉인해 둔
질항아리 뚜껑을 연다
깊은 속 잴 수 없는
거먕빛 맑은 우물
퍼내도
마르지 않은
엄마 하늘 거기 있다
-이복렬 「간장독을 열며」 전문
전통적 어머니의 상은 검댕이진 부엌의 솥단지, 또는 봉숭아 핀 장독대, 아니면 새벽 뒤뜰의 정안수 그릇을 올리는 돌단으로부터 온다. “간장독”과 어머니 사이엔 “겨우내”란 물리적 시간보다도 평생 지내온 필연의 생명 줄이 더 끈끈하게 매여 있다. 화자는 오랜 동안 어머니가 “봉인해둔 질항아리 뚜껑”을 열며 그 간장에 기대를 건다. 아니, 어머니의 정을 맛보고자 하는 그 서정이 깊어진다고 해야 옳겠다. 항아리를 열 때마다 “잴 수 없는” 속이 보이는 건 어머니가 거기 오롯 계시기 때문이다. 독 안에는 늘 “거먕빛 맑은 우물”과 같은 어머니상이 떠있다. 어머니는 여전히 낡은 수건을 두르고 독안에 있는 것이다. 평생 독안의 이 사랑은 “퍼내도 마르지 않”을 하늘일 터이다. 식구를 생각하며 빚은 어머니의 간장 애찬은 사실 시조단에 많이 유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깊어지게 보이는 건 〈질항아리 뚜껑〉을 열고 〈거먕빛 맑은 우물〉로 들어가 거기 띄워내는 〈엄마 하늘〉이 자연스럽게 순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에 질박한 시는 흔하지만 이를 깊이 있게 담는 건 남다른 정한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4
마침 보르헤스의 소설 『비밀의 기적』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한 상징을 읽는다. 전개는 이렇다.
‘색즉시공, 나치군에 체포되자마자 총알이 발사된다. 잠깐만요, 그리고 일 년 후,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은 홀라딕의 심장에 박힌다, 끝!’
기막힌 소설의 끝이다. 그 끝은 이미 전개한 이야기들을 압축한다. 대미(大尾)로 가는 행렬이 최소치로 줄어들었다. 대신 최대치의 효과가 곧 드러날 기세이다. 나치의 횡포가 어떻다는 걸 총알 하나가 웅변해 주는 것이다. 평생을 그들에게 쫓기며 살아온 ‘홀라딕’의 생애는 반전하듯 거슬러가 긴 소설로 전개된다. 그의 심장에 박힌 총알은 반 나치운동의 종지부가 아니라 그 총알로부터 저항이 시작된다는 걸 상징해 보인다. ‘대미(大尾)’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그 너머의 너머, 또는 마지막이란 이렇듯 의미심장한 틀이다. 한 시인의 종미(終尾)가 ‘느낌표’가 될 것인가 ‘물음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평범하게 ‘마침표’만 남길 것인가이다. 그게 요즘 필자에게 심심찮은 문제로 등장해 온다. 헌데, 어떤 시인들은 간혹 ‘쉼표’를 지른다. 자신의 시를 더 널리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거나 이름을 날릴 조작극을 기획하는 때문이다. 하지만 현명한 독자는 ‘또 그 쉼표구먼’ 하고 습관화된 그의 시를 다시 읽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격’이 될 수 없음을 독자가 알아차리는 것이다. 대체로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스스로가 유포하는 것도 넘어, 제 시비를 세우고 온갖 문학상을 욕심내는 걸 지속하기도 한다.
참, 이와 관련한 비유적 소담이 ‘아라비안나이트’에 있다. 인도 이야기 속에 「비쥬르와 제자」 편이 그것이다. 여기에 비쥬르의 제자 네 명의 사례를 전한다.
첫 번째 제자가 차를 팔아 돈을 벌어 오고, 두 번째 제자가 차를 덖어 팔아 또 돈을 벌어 온다. 세 번째 제자는 차를 오래 두고 우려낼 수 있도록 발효차를 만들어 더 많은 돈을 벌어 온다. 그런데, 네 번째 제자는 돈을 벌어 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이 가르친 언어 그리고 제자들이 돈을 버는 방법 등을 기술한 노트를 들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방방곡곡에 가 스승과 제자들의 행적을 전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큰돈을 벌게 된다. 네 번째 제자는 귀국하여 스승의 공적비를 세우고 스승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으려 한다. 하지만 비쥬르는 “너의 언어로 전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난 유명해 졌다. 내게 비석과 집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요즘 시인들에게 주는 계시처럼, ‘시격’, ‘시인 격’에 대한 깨달음을 깊게 한다. 사익을 채우는 어리석음은 결국 생을 허비한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잘난 시인들은 죽음 이후에도 지리멸렬하게 자기 시와 생을 더 지속하고자 지금 순간에도 그 ‘쉼표’를 지른다. 자기 문학관을 짓게 하고, 자기 시비를 세우려 안달하고, 또 무엇인가 명예를 채우려는 사람이 많다. 특히 문학상이 그렇다. 실제는 수준 있는 문학상이 아닌데도 이름만 그럴 듯 걸려있다. 역사를 자랑하는 상, 상금이 많은 상은 흔히 정치가 개입돼 있다. 이때 심사의 엄정함이란 말의 울타리일 뿐이다. 함에도 그걸 받으려고 줄을 선다. 어떤 키 작은 사람은 재미난 씨름판이 있었지만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앞에 키 큰 사람의 관전을 자기가 했음을 인정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상은 정치사회적으로 키 큰 자 편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 ‘왜인간희(矮人看戱)’ 격으로 상은 거의 암투적이다. 비석과 상이란 다중이 좋으면 이루어지는 일이지 자기가 나선다 해서 유명해지는 건 아니다. 비쥬르의 말처럼 ‘언어와 이야기의 힘’(작품)은 ‘어떤 돌이나 쇠’(상패) 보다 강한 것이다. 사실 가시적, 물질적인 비석이나 패(牌)는 겉모습만 치장해 놓아 오히려 자기를 웃기듯이 쳐다보게도 한다. 돈을 내고 상을 받거나 비를 세우는 적반하장도 있다. 그래, 이사할 때 종종 버린다. 속 빈 ‘찬가’시, ‘애찬’시, ‘문장’시도 이와 같다. 자기의 그 아류를 늦게야 깨닫고 재등단을 하거나, 그때의 자기 시집을 버리거나 약력에서 빼는 일도 있다. 그렇게라도 깨우치는 시인은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가 나서서 시비(詩碑)를 세우고 문학상을 거머쥐는 건, 지나고 보면 그저 추잡기(醜雜記)에 남을 뿐이다. 등산을 하다 보면 바위에 이름을 새긴 걸 볼 때가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마다 그걸 보고 욕을 뱉는다.
우리가 문학을 배울 때, 그 시인이 무슨 상을 탔느냐, 어떤 시를 돌에 새겼느냐를 배우는 건 아니다. 다만 작품을 배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