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Agnosticisom)이란 어떤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명제는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없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αγνωστικισμός(Agnosticismos)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모르는 이라는 뜻의 agnôstos와 "앎 혹은 지식"이란 뜻의 gnosis이 합쳐진 말입니다.
찰스 다윈, 버트런드 러셀, 에밀 뒤르켐, 토머스 에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등의 지식인, 과학자들은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한 바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무신론과 유신론의 경계에 서 있는데 그 특징은 종교를 인정하고 절대자의 존재 가능성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결국 그들의 생각의 초점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그것이 정확무오한 계시인지, 하늘나라와 지옥이 있는지, 부활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오디케아 시대 기독교인들의 대다수가 복음을 믿는 대신 희석된 불가지론에 빠져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저명한 지식인들이 선두에 서서 이런 지식들을 주입했고 학교에서 배우는 실용주의, 합리주의, 진화론은 모두 불가지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무신론)고 주장함으로써 보수적 기독교인들과 정면 충돌하는 대신에 마귀의 지혜를 받은 지식인들은 타협적인 길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불가지론입니다.
가령 거듭난 신앙인과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이 섞여 있는 가정은 전체적으로 불가지론적 입장으로 타협하면 서로 다툴 일이 없으니 좋다, 그런 논리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다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건 다니지 않건 분명한 복음을 듣고 나서도 "그게 맞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하고 피해 버립니다. "잘 모르겠다"는 것은 참 좋은 핑계거리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극단주의자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공개적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 자체로부터도 열렬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제권을 만들어 놓고 서로 지지하지만 "무신론"이라는 것이 성경을 거부한다라는 부정적 명제로 뭉쳤기 때문에 악이 악을 세워줄 수 없듯이 그들은 자기들끼리 뭉칠 수 없는 모래알입니다. 또 자기들끼리도 서로 잘났다고 하고 무시하고 헐뜯기 일쑤입니다. 쉽게 말해 무신론자들 자신도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것을 썩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양심이 화인에 맞아 마비된(딤전 4:2) 마귀들린 사람은 그 칭호를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쪽이나 저쪽으로부터 모두 잘 보이고 싶고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현대 라오디케아인들은 그 미지근한 속성을 따라서 "회의주의", "무신론", "이신론" 같은 것 대신 "불가지론"을 택합니다.
1.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존하고 전수하신 무오한 말씀입니다.
- 잘 모르겠는데요. 그걸 누가 알 수 있죠. 어차피 완벽한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건 수학적 확률일 뿐입니다.
2. 성경은 죽음 후에 반드시 부활이 있고 죄가 있는 사람은 수치의 부활로 나올 것이고 불못에 들어갈 것을 말씀합니다.
-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어떻게 100% 확률로 말할 수 있죠? 수명은 연장될 수 있고 로봇이나 냉동인간을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거에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미지근한 입장입니다. 부정하려면 아예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맞는데 "맞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고, 생각해 봐야겠군요." 하고 뭔가 생각할 것처럼 하고 그 상황만 모면하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화인 맞은 상태"의 양심과 관련되는데 현대인들은 너무나 자극적인 볼거리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너무 많이 살인을 보고 간음을 보고 배웁니다(영화와 드라마). 그래서 그들은 더 자극적인 것이 필요하고 죄에 목말라 있습니다. 죄를 저지를 핑계거리에 목말라 있는 사람에게 죄를 버리라고 하면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실상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가 없는데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 3: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옛 자아와 속 사람이 분리되는데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믿음으로 살 수 있고 못박지 않으면 옛 자아의 노예로 살고, 그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라오디케아 교인들은 자아를 못 박는 대신에 자아와 불가침 협정을 맺고 우리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살아갑니다. 물론 새로 창조된 속 사람은 옛 자아의 일들을 좋아하지 않고 옛 자아는 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눈만 뜨면 으르렁대고 싸우기 때문에 아무리 육신적으로 살고자 해도 거듭난 이상 마음 속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불가지론은 여기서 무슨 보탬이 되는가,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만 이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나한테 역사하시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 거짓말은 자기도 시인합니다. 남들 앞에서 합리적이고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온건하게 보이려고 성경이 진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건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도, 자동적으로 성경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자기 양심에 대해 거짓말이 술술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거짓말쟁이와 약한 양심을 가진 크리스찬의 차이점입니다. 크리스찬이 아무리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해도 마귀의 자식들의 프로급 거짓말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입니다. 마귀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실로 세상 일(거짓말, 살인, 음행, 도둑질)에서는 월등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면 말씀에 순종해야지 세상 자녀들 틈에서 흉내내 보았자 어설픈 티만 날 뿐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5-17).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가 크리스챤 개개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대환란 때 잘못된 행동 때문에 주님에게서 분리될 수 있는 대환란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이 시대의 20-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15절, 이 어리석은 라오디케아 교인이 자기 나름 지혜를 발휘해서 회색 노선을 걷게 되었는데 그는 세상으로부터도 비난받지 않고 교회로부터도 불신자, 이교도라는 말을 듣지 않게끔 영리한 회색주의를 택했습니다. 그는 자선, 구제, 봉사도 하고 때에 맞춰 교회 출석하며 재직도 있습니다. 십일조도 내며 교인들과 꽤 잘 지내며 가끔 대표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주정뱅이들과 간음자들과 거짓말쟁이, 사기꾼들과 사업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때로 그들과 함께 여흥을 즐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그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믿음도 아니고 불신앙도 아닌 "온건한 불가지론적 현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된 것을 빼면 그는 인정받는 기독교 실업인이거나 저명인사일 수 있으며 신문 기사와 칼럼에 기독교 관련 평론을 쓰는 문필가일 수도 있습니다. 실상 그런 저명인사들, 기독교 유명인들 상당수가 직업상 양심을 저버린 불가지론자들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겉모습과는 달리 이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 드러나는데 주님께서 그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가지론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주님께 문이 닫혀 있어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회중 가운데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또한 이들은 개별적으로도 마음이 닫혀서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초청하는 것은 그와 함께 먹고 나도 그와 함께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인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인자이신 주님을 뵐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분 말씀(말씀 안에 주님의 인격이 있다)을 먹으면 그것이 생명의 교제가 되어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라오디케아 교인들 안에는 주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메말라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끔 은사주의적 광신에 빠진 사람들이 메마른 마음으로 "주여" "주여" 많이 외친다 해도 주께서 그 마음에 들어가시지 않는 것은 그가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썩은 양심, 더럽혀진 양심을 가지고 거듭나지 않은 채로 종교 생활을 통해 주님을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