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향수는 사계절 봇물처럼 넘쳐난다.
꿈의 배경도 평소에 대부분이 고향이며 그 향수는 모든 삶의 활력이기도 하다.
내 고향은 춘천에서 두어마장을 채 못가면 나타나는 무쇠솥(鼎足) 마을이다.
예전에는 대개 어느 지방이나 다 그렇겠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아 가시거리에 내려다보이는 곳을 무려 한시간 이상을 걸어다녀야 했다. 무거운 책가방에 비틀거리던 60년대에 통학구역이 늘 불만의 대상이었다.
시루마을( 甑里) 학생들은 경춘선 기차로 통학을 하는데, 이곳 마을은 어중간에 있어 시내 학교를 오직 걸어 다녀야 하는
불편이 많았다. 거기다 지역 명칭도 군지역이라 어디가면 늘 얼버무리기가 일쑤였다.
지금이야 춘천시에 통합되었지만 당시만해도 그러니까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전까지 춘성군 신동면으로 되어
항상 객지생활 때 머뭇거리던 답변이었다.
-고향이 어디지요? 선생님!
-네, 춘천 신동면입니다.
-네! 거기는 춘천이 아니고 춘성군이지요.
도시 춘천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답하다가 춘천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분이면 토를 달아 고쳐 무안을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이야 별 문제가 없지만 한창 청년기 때는 시가 아닌 군에 거주하는 것마저 못마땅했다.
고향은 시내와 다르게 변두리는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여 꿈틀대던 태동기에 늘 제동을 걸곤했다.
새마을 운동으로 고개가 낮아지고 동구밖 좁은 길이 곧게 닦아지곤 했지만, 농촌지역으로 존재할 뿐,
그 외에 어떤 공장이나 신축건물조차 신개축을 하지 못하게 옭아매 놓은 곳이다.
마을은 한 백여호가 촉성재배와 밭농사로 근근히 살아갈 뿐 다른 지방과 차별성을 보이는 것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다.
언론기관에서 단 한번 방영 한 적도 없고. 지역 특산물이나 지역 인사와 역사적인 맥이 서려있는 곳이 아니기에 늘 내 고장에 대한
아쉬움이 상존해왔다. 그러나 2002년 증리 마을에 김유정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인근 마을조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최근 직장 동료 15명이 방학을 이용해 맛따라 길따라 남해안을 일주히기 위해 첫 숙박지인 전주에서 일박할 때였다.
안내하시는 지방문인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우리 마을을 설명할 때
-네!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거장 김유정 고향 바로 옆마을입니다.
라고 소개를 했더니 위대한 김유정선생의 혼이 깃든 마을 이웃이라 곧 수긍하면서
좋은 곳에서 태어나 문학에 정열이 높다고 부추김을 받은 적도 있었다.
유년기 때 시루버덩이란 소리를 귀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 . 우리 마을에서 실레마을로 통하는 교통로가 바로 시루버덩이었다.
시루버덩이란 시루와 버덩의 합성어이다. 사전에 버덩이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이라고 한다.
김유정 소설 총각과 맹꽁이에 일꾼들이 서른 넷의 순박한 덕만이를 놀려먹을 때
바람에 아름거리는 저편 버덩의 파란 벼잎을 아득히 바라보는 덕만이 눈길이 그려지기도 한다.
힘찬 진병산 줄기가 표범처럼 치달려 내려오다가 노년기 산맥으로 약간 평지를 이룬 야트막한 구릉지대인 시루버덩이야말로 무쇠솥 마을에서 시루마을을 관통하는 교통로요, 마을 경계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지난 해에도 큰형님께서는 김유정 선생 생가 지붕의 이엉을 엮느라 몇날 며칠을 시루버덩을 넘나드셨다고 한다.
백 주년 겨울축제 때도 새끼꼬기, 다듬이 방망이질하기, 윷놀이 대회에 정족리 사람들이 시루버덩으로 대거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니 얼마나 내겐 반가운 소식인가. 이런 지연이 때로는 많은 힘을 북돋우어 준다.
김유정 문인의 터에 기념관 전개운동이 벌어질 때, 문학인이기 전에 같은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지연으로 볼때 춘천이란 범주내에서도 그 고매한 문학의 향을 병풍같은 진병산 품속에서 같이 공유하는 형제마을 같기에 더욱 감회가 남달랐다. 이런 자긍심이 문학의 자아를 부채질한다. 고향이 안겨주는 또 다른 행복이다.
또한 가난 속에서 도지를 부치며 살아가는 만부방의 응칠이가 내 이름과 비슷해 혼자 싱글벙글하며 한숨에 읽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병석에서 신음하시지만 양주조씨 집안에 두째 어른이신 매형께서 틈만 나면 청년 김유정선생이 23세때 이곳에서
야학을 하시던 이야기와 그 때의 금병의숙을 누차 강조하시곤 했다. 매형의 숙부께서 김유정 선생의 제자로 저에게 선생과 공부배울 때의 회고담도 들려주시곤 했던 것들이 모두 제가 오늘의 문학에 등단한 좋은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들병이들이 산골마을 사내들을 부추기던 김유정역 앞에 거주하시는 매형께서는 김유정 선생 단편소설에 나오는 지명을 항상 나와 마치 퀴즈 대회처럼 문답형식으로 가리켜주시곤 했다. 고야가 유난히 많이 달리던 새고개 마을이며 물방앗간이 있던 한들마을과 백두고개,덕만이 고개들을 늘 확인해 주셨다.
엊그제 봄이 유난히 빨리 오는 길목에서 주말은 시루버덩 답사를 했다.
고향 어른들께서는 새삼스럽게 무슨 답사냐고 하지만 나는 한국단편문학의 거장 김유정 선생의 고향을 가는
길목이란 점에서 가슴 부듯히 다녀왔다. 낮은 산 허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낯선 연못이 누워있고 듬성듬성 노송들이
마치 증인이라도 되듯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인류학자가 된 기분으로 최근 인적이 끊겨 거친 풀숲을 헤치며 적단풍이 혼자서 가을을 맞고 있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향했다.
조씨 사돈어른 댁 곁이 기념관이다. 김유정 선생님과 한들마을의 시내를 찾았을 때 물구나무로 개울을 건너던 증언과 야학을 할 때 불이 나 학생들을 마치 공기돌처럼 문밖으로 집어던지던 학창시절의 소중한 에피소드를 내게 아낌없이 전해 주시던 사돈어른이 거하시던 곳-. 산은 1센티미터 자라기 위해 3년을 기다린다고 한다. 풍화되어 다시 고운 흙으로 쌓이기 위해 3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문학 또한 그 얼마나 오래 전에 이 고장에서 끊임없이 피고 또 피어났을까? 김유정 문인의 산소라도 있으면 찾아가 고마움을 표하고 싶지만 화장으로 맑은 물에 실려갔다. 그의 혼은 영원히 실레마을을 지키며 이 지방의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 걸출한 문인들을 수없이 배태하는 위대한 산으로 우뚝 서 있다.
첫댓글 나도 군대생할 때 춘성군 신동면이라고 신상명세서 쓸때 마다 군.면.리 약간 그랬고 시.동 부러웠던 생각이 문뜩 떠오르네요.
파묻히고 잊어 갈뻔한 그때 우리지역에 얽킨 사연과 구전을 덕전이 글로 새로 탄생시키고 기록하는 내고장의 수호신이요.
덕전의 글을 접하면서 그저 바쁘게 현대 문명에만 치부하는 가운데 애향심은 얄바지고 ,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아깝고 소중한 것들을 글로 붙잡아 우리 고장 신동면 후손에게 남겨 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