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스님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판 독 문
해석문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반야사 원경왕사비 (경남 합천군)
위 치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구 (해인사) 홈페이지주소 : www.hc.go.kr 관 리 자 : 해인사 종무소 전화번호 : 055-934-3000 지정현황 : 보물 제128호 / 1963년 1월 21일 지정
개 요 : 원래는 가야국 구원동 반야사지에 있던 것을 해방 후 해인사로 옮겨 사고에 보관하다가 1968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비는 귀부, 비신과 옥개형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은 평박하다.
비의 제액은 비신의 전면 상부에 녹서로 증교원경왕사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고 고려 문종 4년(1050)에 태어나 영통사의 경덕국사와 대각국사에게 사사하였으며 대각국사를 따라 송에 갔다가 선종 3년(1026)에 귀국하여 숙종1년(1104)에 승통이 되었고,
예종 9년(1114)에 오공 통혜의 법호를 이어받았다.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예종 14년(1119)에 70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식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뒷면에는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신라의 기본형태에서 벗어난 형태로 귀부의 중곽갑문과 아울러 생경한 문양표현, 옥개형으로 변한 개석 등 고려 중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해인사 원경왕사비 보물 제128호. 합천군 반야사 옛터 원경왕사비 (소재지 해인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 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 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 (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영통사 석탑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 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 (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 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 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 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 000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 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 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 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 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 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 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 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 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 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대각국사비 당간지주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 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 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 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 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 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영통사’는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출가해 천태종을 개창한 천년고찰의 사찰로서 불교계의 성지임. (개성 송악산 자락에 위치)
○ 10세기 중반 이전에 창건된 영통사는 16세기경에 화재로 인해 없어진 것으로 전해짐. 1998년 북한과 일본 학자들이 3년여에 걸쳐 발굴사업을 벌였고, 그후 북한의 역사학계가 심혈을 기울여 건축복원 설계를 완성 함. ○ 이후 500년만인 2002년 11월부터 대한불교 천태종의 지원으로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고 2005년 10월 31일, 복원 낙성식을 개최함. ○ 6만여㎡의 부지에 모두 29채의 전각을 복원하였고 북한의 국보인 대각 국사 비를 비롯 각종 문화재도 함께 복원됨.
---------------------------------------------------------------------------------
흥왕사 대각국사 묘지명 (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高麗國大聖日興王寺故國師 詔諡大覺大和尙墓誌銘幷序」
朝散大夫秘書少監知制誥賜紫金魚袋臣朴浩奉 宣撰」 我大覺國師法諱釋煦字義天爲避西宋國諱多用字爾文宗仁孝聖」 王之第四子?仁睿大后夢感黃龍以娠焉乙未歲九月二十八日誕」 生而有非常之相年跨十一文考異其?悟召靈通寺故景德國師爲」 親敎而出家就佛日寺戒壇受具則夙習警矣一代宗乘無不自解?」 景德歸寂師繼法門而當世之學佛者有戒律宗法相宗涅槃宗法性」 宗圓融宗禪寂宗師於六宗?究至極外及六經七略之書各發醇趣」 故文考褒爲廣智開宗眞祐世僧統順宗宣宗恩禮甚厚累加法?」 大遼天佑皇帝再寓經籍茶香金帛以結信緣忽元?乙丑歲師以微」 行越海巡游宋境而主客郎中楊傑被詔導引自密水至?河直上宸」 殿且訪丞相旣而歷問六宗中錚錚者則淨源懷璉擇其慧琳從揀等」 五十餘人也此?還識我國師?襟之妙蘊乎越明年言還本國者定」 有所以也宣宗以文考創成興王寺從來無主掌詔國師爲住持而演」 講橫亘禪敎精密者有年矣爾后仁睿與宣宗昇遐師以安居海印寺」 ?我聖上之登極也增友睦而興佛事急命中使召徵而再住興王寺」 (陰記) 昔者大后以盛域本無天台性宗啓願創立國淸寺將欲興行其法始拓」 其址而今上告成丁丑歲五月詔國師兼持文考? 許我聖上投」 佛而天爲繼體事重未果其志卽以國師捨俗今則上以同年生第五」 愛子零染而爲我國師哲資以酬疇昔之願由是助我國家之盛業者」 至矣今年十月三日?爲國師是月五日國師恒化而上聞之震悼尋」 輟朝命有司備禮茶毗已遷靈骨於靈通寺東山築石室以?焉偉矣」 哉國師處世之萬化我聖上追崇之衆美?國師門下傳六宗之濟濟」 者光於國史亦載塔碑此不書略述大?其銘曰」 師之德足以繼諸佛 化足以益衆生 行足以扶正道」 智足以發大誠而銘之以此足以流其光明」 正德郎秘書郎賜緋臣高世?奉 宣書」 是歲(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統元年)十一月四日刻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고려국(高麗國) 대성일(大聖日) 흥왕사(興王寺) 고조시대각화상묘지명(故詔諡大覺和尙墓誌銘) 병서(幷序)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소감(秘書少監)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臣) 박호(朴浩)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묘지명(墓誌銘)을 짓다.
우리 대각국사(大覺國師)의 휘(諱)는 석후(釋煦)요, 자(字)는 의천(義天)이었는데,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휘(諱)가 후(煦)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흔히 의천(義天)이라는 자(字)를 많이 사 용하였다. 국사는 문종(文宗) 인효성왕(仁孝聖王)의 넷째 아들이다. 비(妃)는 인예태후(仁睿 太后)이니, 황룡을 감득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였다. 을미세(乙未歲) 9월 28일에 탄생하였 는데, 비상한 인상(人像)을 가졌다. 11세 때 아버지 문고(文考)께서 그 영오(穎悟)함을 특이 하게 여겨 영통사(靈通寺)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불러 친교사(親敎師)로 삼아 출가하게 하 여,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그 숙세(夙世)에 학습한 것이 놀랄 정도였다. 부처님의 일대종승(一代宗乘)을 스스로 해득(解得)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덕국사 가 귀적(歸寂)함에 이르러 국사께서 그 법문(法門)을 계승하였으므로 당세(當世)에 뛰어난 불학자(學佛者)로 알려졌다. 당시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 (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이 있었는데, 국사는 이 육종(六宗)에 있어서 아울 러 그 연구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
따라서 외전(外典)인 육경(六經)과 칠략(七略) 등의 서적에도 각각 그 순취(醇趣), 즉 심오한 취지(趣旨)를 발명하였으므로 문고(文考)께서 포상하여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 祐世僧統)'이 되었다. 맏형인 순종(順宗)과 둘째 형인 선종(宣宗)도 은총의 예를 심히 두텁게 하여 누차에 걸쳐 법호(法號)를 가정(加呈)하였다. 요(遼)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도 재차(再 次)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 옴으로써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었다. 홀연히 원풍(元豊) 을축년(乙丑年)에 국사는 개인 자격의 미복(微服)으로 바다를 건너 송(宋) 나라 국경에 도달한 후 순례(巡禮)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객낭중(主客郎中)인 양걸(楊 傑)이 철종(哲宗)의 명을 받들어 인도하게 되었다. 밀수(密水) 지방으로부터 변하(?河)에 이 르러서는 곧 바로 신전(宸殿)에 올라가 철종을 배알하고 따라서 승상(丞相)도 예방하였다. 그리고나서 차례로 6종중(宗中)의 정정한 큰스님들을 방문하였으니, 즉 정원(淨源), 양연(? 璉),택기(擇其), 혜림(慧琳), 종간(從揀)등 50여 인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돌이켜 보건대 우리 국사(國師)의 흉금(胸襟)에 간직하고 있는 묘온(妙蘊)을 알았을 것인가!
그 다음해에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말하게 된 것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선종(宣 宗)의 아버지인 문종이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하였으나, 오랫동안 주장(主掌)할 스님이 없었 다. 그리하여 국사를 칙명(勅命)으로 주지(住持)케 하고, 정밀(精密)하게 강경(講經)과 선담 (禪譚)의 법회를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다. 그 후 모후(母后)인 인예태후(仁睿太后)와 둘째 형인 선종이 모두 승하하였다. 국사는 해인사(海印寺)로 물러가서 안거(安居)하고 있었다. 지금의 성상(聖上)이 등극함에 이르러서는 조카인 헌종(獻宗)을 더욱 융숭하게 우대하는 한 편 불사(佛事)를 일으키면서 급히 중사(中使)를 해인사로 여러 차례 보내서 서울로 불러 다 시 흥왕사(興王寺) 주지(住持)를 맡게 하였다.
[이면(裏 面)]
옛날 태후(太后)께서 성역(盛域)에는 본래 천태성종(天台性宗)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원(願)을 세워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장차 그 법(法)을 중흥코자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진행 중에 승하하시고, 지금 임금이신 셋째 형 숙종(肅宗)이 그 불사(佛事)를 낙성(落成)하 였다. 정축세(丁丑歲) 5월 국사에게 명(命)하여 흥왕사(興王寺) 주지직과 함께 겸직하도록 하였다. 문고(文考)께서 일찍이 우리 성상(聖上)에게 불교(佛敎)에 깊이 귀의토록 하였으나, 나라 일이 너무 바빠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곧 국사께서 세속(世俗)을 버리고 출가하 였는데, 지금에 와서 임금이 동년생(同年生)인 다섯째 아들을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우리 대각국사를 위하여 훌륭한 제자(弟子)가 되어 옛날 부왕인 문종과 모후(母后)인 인예(仁睿) 의 원(願)을 갚으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왕자가 출가하여 국가의 성업(盛業)을 도운 것이 지극하였다고 할 것이다. 금년(今年) 10월 3일 국사로 책봉하고, 이달 5일에 국사께서 온 국민이 깜짝 놀라게 갑자기 입적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곧 국무(國務)를 쉬고 임시 공휴일(公休 日)로 정하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다비(茶毗)하여 마치고, 영골사리(靈骨 舍利)를 영통사 동쪽 산으로 옮겨 석실(石室)을 쌓고 안치하였다. 위대하도다! 국사께서 처 세(處世)하실 때의 만화(萬化)와 성상(聖上)께서 국사를 추숭(追崇)하신 여러 가지 아름다움 과, 국사의 문하제자(門下弟子)로서 육종(六宗)을 전한 제제(濟濟)한 자가 국사(國史)를 빛나 게 장식한 일들은 모두 탑비(塔碑)에 실려 있을 것이 여기에는 갖추어 적지 아니하고, 그 대개(大槪)만 약술하였다. 그를 게송으로 명(銘)하여 이르노라.
국사의 도덕(道德)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을 계승하기에 만족하고, 국사의 교화(敎化)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이익(利益)하기에 만족하며, 국사의 수행(修行)은 불법정도(佛法正道)를 부호(扶護)하기에 만족하고, 국사의 지혜(智慧)는 홍원대성(弘願大誠)을 개발(開發)하기에 만족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묘명(墓銘)을 지었으니, 그 광명을 유통하기에 만족하였다. 선덕랑(宣德郞) 비서랑(秘書郞)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고세칭(高世?)은 왕명(王 命)을 받들어 묘지명을 쓰고,
▨세(▨歲) 대송(大宋)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元年) 대요(大遼) 건통(建統) 원년(元年)11월 4일 돌에 새기다.
=======================================================================
복흥사(福興寺,復興寺)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圓通洞)에 있었던 절. 복흥사(復興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 초기에 창건 하였다.
경기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 (국사봉)
이 절에는 승려를 출가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마련한 계단(戒壇)인 관단(官壇)이 있어서 원융국사(圓融國師)·혜덕왕사(慧德王師) 등을 배출한 유명한 사찰이다.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지에는 법당터의 주춧돌과 삼층석탑, 2기의 석재, 부도(浮屠), 귀부(龜趺) 등이 있다.
이 절은 신라말 고려초에 개성 부근에 세워진 절 중에서 유일하게 쌍탑가람(雙塔伽藍)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매우 희귀한 유지(遺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오학린(吳學麟)과 변계량(卞季良)의 시가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에는 법당과 수각(水閣)이 있었고 매우 한적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松都의 古蹟(高裕燮, 悅話堂, 1977)
-------------------------------------------------------------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金山寺 慧德王師眞應塔碑)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 정종 4~1097, 숙종 2)의 생애를 기린 비로 보물 제 24호이다.
전면 후면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비는 혜덕왕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1111년(숙종 3)에 세웠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을 지낸 이오(李?, 1050~1110)가 지었고, 해서로 비문을 쓴 사람은 『대동금석서』에는 채유탄(蔡有誕)이라 하였으나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등에서는 정모(鄭□), 『한국금석전문』에는 정황선(鄭晃先)이라 하고있다.(당대의 명필 정윤(鄭允) 설) 비 전면 끝에 이효전(李孝全)이라는 이름이 있어 새긴 이로 추정된다. 비문 글씨는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비와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 8백 인에 이른다.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소현(韶顯)(1038-1096)
고려 전기의 스님, 유식학(唯識學)에 밝던 이. 이름은 이민(李民). 휘는 소현, 자는 범위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1038년(정종 4) 7월 3일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인 1048년(문종 2)에 해안사(海安寺)지광(智光) 해린(海麟)을 은사로 모시고 <금광명경>과 <성유식론>을 배웠다. 이듬해 복흥사(福興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고, 1054년(문종 8) 해린이 현화사(玄化寺)의 주지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서 승과에 합격하여 대덕이 되고, 또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문종은 그의 명성을 듣고 연덕궁(延德宮)에 불러 다섯째 왕자 정(靖; 승통 導生)을 그에게 출가시켜 사사케 했다. 1079년 김제 금산사에서 수좌(首座)가 되고, 1084년 다시 승통에 올라 왕명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또 중외(中外) 법상계(法相系)의 여러 사찰에 정재(淨財)를 주어 매년 두 차례 법회를 개설하게 하고, 석가여래 및 현장(玄장), 규기(窺基)와 해동 육조상(六祖像)을 그려 그 사찰에 봉안했다.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세우고, 또 그 원의 중앙 금당에 노사나상 및 현장, 규기 두 분의 상을 그려 봉안케 하기도 했다. 1096년(숙종 1) 12월 18일 현화사의 봉천원(奉天院)에서 미륵 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면서 나이 59세, 법랍 48년으로 입적했다. 왕사로 추봉하고 시호를 혜덕(慧德)이라 했다.
===================================================================
<판독문>
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題額)」 高麗國全州大瑜伽業金山寺普利了眞精進饒益融慧廣祐護世能化中觀 贈諡慧德 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
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文德殿太僕射脩國史上柱國▨▨▨▨」 學士▨▨▨ ▨▨」 登仕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鄭晃先 奉 敎撰」 (臣)聞釋氏出世立敎也爲化群機故其說有權實漸頓之殊半滿偏圓之別繇是五天高士諸夏名?空緇?空?有者寔繁宗性宗相者甚衆惟性與相泯合爲一而已▨▨道妙理者今贈諡慧德王師」 師諱韶顯字範圍俗姓李氏其先慶源郡人也曾高以降積累彌深乃子乃孫列鉉司而挺秀爲?爲妹公 掛壺以聯芳王父諱翰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贈太子太傳尙書左僕射▨▨▨」 公孝以克家忠以許 國契先朝之際會?顯列以仟翔衆協六符?立乎鈞衡之秩慶綿十葉翼飛乎閥閱之聲功與世而莫京裕垂昆而不絶者焉顯考諱子淵守太史門下侍中贈中書侍郎文 和公以文章擢 御簾高第有籌略爲 聖域聞人力?萬機首居四輔豈止伊尹作殷家右相天下取以保安孔光拜漢室上公海內畏其威振而已哉外祖諱▨▨▨▨侍郎平章事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杖鉞四方無擊析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蒙之暇其世家遠系信牒備文故略焉母金氏累贈鷄林國太夫人性?柔嘉長成▨▨▨」 四德蔚爲公族之嬪繼念三歸求得法王之子果蒙應也乃有娠焉以太平紀曆十有七年歲在戊寅七月哉生明誕師于 闕南佛嶺之私第師生而特異"659;?▨▨▨▨▨▨▨額廣眉長▨▨▨▨▨」 勁其骨黔其膚若應眞之相也年甫十一就海安寺麟公所落髮麟公卽故法泉寺國師諡智光諱海麟也先是公應詔入內夜方一鼓夢見瑞鳥似鳳而紫▨▨▨紫▨▨▨▨玩深恐失之▨▨▨」 和公?師而至請爲弟子麟公見師貌雄傑而衣紫謂曰昨夢瑞鳥之兆豈誣也哉初學金光明經唯識論夙殖聞?日新懸鮮故麟公意甚愛之?云賢哲之才俟時▨▨▨▨桃李應韶▨▨陽▨」 發顯故以韶顯爲名焉明年受於福興寺官壇超世之戒珠自潔匪假磨?生塵之心鏡本淸豈勞拂拭于時麟公移住玄化寺師?高棲絳帳親受金言則何異仲尼▨▨▨▨▨回善光▨▨▨▨▨▨」 哉淸寧七年赴王輪寺大選?一捷爲大德咸雍五年加重大師?乎六年夏五月文宗金輪啓統玉?凝休廣斯文而旣致化成向彼佛而兼修喜捨 聆師之才▨▨▨蔭眷六年」 延德宮第六 王子投師門而出家卽今俗離山法住寺住持導生僧統是也是年十月十四日 上幸師之所隷玄化寺齋佛僧以慶之仍 賜磨衲袈裟蔭眷七年初住海安寺加授三重大」 師太康五年秋 上命有司於 內殿大張法席 請師充說主者爲大宋回使利涉大洋故也仍加普利二字爾後累加一十六字爲法號者皆所以旌其德行也是年 詔住全州金山寺九年又」 加首座是歲 文宗昇遐 順宗嗣位未幾而王崩卽 宣宗承纂之元年也 上以端拱無爲坐見中興者豈非師福利之功耶下枇署爲僧統其時 師年四十七也始師爲首座求▨▨」 僧統位由德進不其偉歟? 國初已來凡爲法王者非有年德罕能居此職而師以壯年見 擢緇素榮之又其年 王命師移住玄化寺仍於開國慈雲兩寺選?有再爲都▨▨▨▨▨又赴內賜法」 會?大藏道?主張講席幷蒙 賜法服者其數非一師降眞戚里作主空門其儀也燦然可觀其志也確乎不拔凡所爲事有異於人?在燕居少選閒手無釋卷每於講會一▨次之不▨」 物以思恭或誨人而忘倦故得?廊?者盡是?琮藍璧盡是殊珍持?盂者孔羽翠毛無非佳瑞大寂之學徒累百僧俗智?學之聽衆盈千豈可同日而語哉大安初師以手校唯識開發意四衆▨▨▨▨▨▨」 初失其本積有年矣旣得之尊尙者衆矣師曾於金山寺選勝于寺之南走六十許步地創設一院額號廣敎仍筆刻雕經板置于院院之中別造金堂一所幷繪畵盧舍那及奬基二師像其」 堂自太康九年至師之末年搜訪慈恩所撰法華玄?惟識述記等章?三十二部共計三百五十三卷考正其本募工開板私紙墨印布流通以廣法施也謹案大宋高僧傳云奬▨存惟」 識開創之祖基?守文述作之宗?苟無基則何祖張其學乎是知凡將入於性相義門者捨慈悲之學則罔臻其極矣頃自唐 文皇以新羅 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於是無應理圓實之學」 漸盛于玆土?乎曉法師導之于前賢大統踵之於後燈燈傳世世嗣興然而去聖寥遠遺文訛舛者多矣師?疾于懷以其祖門章?大行於世使學者知本宗之有坦途惟師之力也可謂扶」 曉賢方軌齊鶩焉可勝道哉其光揚本敎也如此復於傳法之外雅好仁義之術博 覽經史至于詩篇筆札靡不精究爲人歎詠者??有焉故於首座告身云內檀師明訓領徒弟於蘭菊」 結詩社於江山其才兼外學也又如此師以爲欲資感果於未來莫若植因於現在上生懇願遠則追無着之?內院脩行近則慕基公之??評題逐月畵成慈氏尊像每歲取七月十四日開法筵」 集徒侶禮懺?依及明設齋施?以罷席自太康元年乙卯至壽昌二年丙子 首尾凡二十有二稔而止大康末癸亥宣宗聞其事特 賜諸般彩畵幷 御書一通其書曰▨當來不▨▨▨▨▨▨」 盛會謹隨喜吾師功德其於月日下 國銜稱弟子有以見師心奉法繼年修香火之緣 御手飛文隨喜 賜丹靑之飾苟非願力甚深▨何▨宸襟信重之如是耶師居玄化寺時▨▨▨▨」 完補爲急務尋狀聞 上可其奏仍置繕理宮大安四年肇其役壽昌二年畢其功締葺宏模雖因舊址莊嚴勝?宛若新成師又於中外本宗諸寺施納淨財許設每年兩度法會以爲常式募得虎頭」 名手畵成釋迦如來及?基二師海東六祖像都一各安于其寺欲令義學者覩像生敬自敬生信自信得慧日以勸焉壽昌元年乙亥冬十月 聖考肅宗慶襲宗社心歸佛法▨▨▨▨」 召師爲法主講仁王經者祈天 祚業故也?二年十二月十八日師於寺之奉天院深夜看經次有斯疾旣以聞卽 遣御?診視之未回續 差中使押送尙乘鞍馬施納其寺以▨▨▨▨▨▨▨」 內侍少卿池澤厚奉傳 聖旨今欲封師爲 王師師頓首言德簿行庸豈堪 聖奬夜將深嚼楊枝漱訖念彌勒如來名號?四弘願戒與門弟等囑累蕩蕩然無憂色中夜更嚼楊枝俄而遷化」 先一日白虹夜見識者以爲師終之?也山?野老無不號?走獸飛禽互相悽慘遙明以入寂聞 上乃 震悼遣入 內奉御王? 吊慰之翌日命右街僧錄繼通攝司天監知太史局事文」 象等監護葬事二十七日 遣使尙書右僕射陳謂使副尙書左丞右諫議大夫金沅等?持璽書封爲 王師諡曰慧德塔號眞應幷 贈紫地繡袈裟?諸衣對器玩茶香等物▨伸時▨▨▨▨」 未茶毗于寺之西南隅明年丁丑正月旬有一日丙申遷葬于寺之西北隅安其骨遵像法也嗚呼毗尼園內始則現無生之生跋提河邊終則示不滅之滅其餘終也自初七?二祥凡十齋所▨▨▨▨▨」 給其在 朝延也猶若是焉?其門人乎哉時有祐世僧統大覺國師實華嚴之宗匠也聞師之卒方盡哀而致祭其文略云方期沒齒交臂弘眞今也卽亡吾誰與親其他宗之見重也皆是歎道人有華僧▨▨」 大師慧?度海而來屬于師之講下?之於師也欣然如舊相識居兩年矣無何先於師三旬而滅其滅也結跏印手而坐化盖出於尋常焉其爲遠人依慕也又如是類其▨累朝凡所賜▨▨▨」 他等避繁故不書及諸貴臣盛族豪商大賈各盡其所可爲而致敬者無虛日矣俗壽五十九夏臘四十八奧有門弟上首導生僧統而下凡一千餘人等狀先師行涕淚伏 闕而奏其書曰▨▨」 於珊兜知哀慕勒龜趺於寶界願永傳聞爰 命下臣?揚遺烈臣表讓云臣本性孤?加以老衰?無賈勇於操?曷副屬辭於寫琰願回▨中旨移授通人仍降 制曰以碑聯▨之▨▨▨▨▨」 之景行勿煩曲讓勉?眞書旣 阻示於 都兪敢不?於論?文非無質然慙作者之求道可强名庶續高僧之史?其實而謹述銘云」 能仁出現爲大因緣度衆生界說諸敎詮或云權實或云偏圓起從西域漸被東?(其一)祖祖闡揚師師提唱談有談空曰性曰相苟泯二道有何偏尙其誰融通唯我宗匠(其二)萬行▨我生而▨▨▨▨▨」 鷲嶺譽? 龍?應 王臣護爲 帝子師聖墻疊?覺樹添枝(其三)締構梵宮莊嚴佛氏日振法衣講宣微旨請益如雲攝齋成市道豈遠而行之卽是(其四)欲圓妙果須種善業像像補處▨▨▨▨▨▨」 如水月福也河沙年踰二紀念玆靡?(其五)廣敎起院購書周?多葉鏤文貫花增線法雨均沾慈風益扇擬彼曉賢重生辰卞(其六)對賓命筆探景成詩垂露騰彩碧雲騁奇業之所感作▨▨▨▨▨▨」 ▨所名滿證爲期(其七)白虹告祥雙林變色奄促化緣復歸淨域 大君澍恩微臣?德刻以貞珉 流美萬億(其八)」 校尉(臣) 李孝全 奉詔 撰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해석문>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전주(全州) 대유가업(大瑜伽業) 금산사(金山寺) 보리료진(普利了眞) 정진요익(精進饒益) 융혜광우(融慧廣祐) 호세능화중관(護世能化中觀)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병서(幷序)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開府儀同)삼사(三司) 검교(檢校)태사(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 한림원사(翰林院事) 문덕전(文德殿)대학사(大學士)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학사(▨▨▨▨學士)인 이오(李?)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지었고, 등사랑(登仕郞)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교를 창립한 것이 군기(?機)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설법(說法) 중에는 권실(權實)과 점돈(漸頓)의 다름과 반만(半滿)과 편원(偏圓)의 차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모든 고사(高士)와 제하(諸夏)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공(空)에 집착하고, 유(有)에 떨어진 이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종(性宗)에 국집하거나, 상종(相宗)으로 치우치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성종과 상종이 민합(泯合)하여 오직 하나뿐인 지극한 도(道)이며,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결락) 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曾祖)와 고조(高祖) 이후로 선행을 적루(積累)함이 심히 많아서, 자자 손손(子子 孫孫)으로 내려 오면서 현사(鉉司)의 높은 관직에 서열(序列)되어 크게 빼어났으며, 자(?)가 되고 매(妹)가 된 여식(女息)들은 괘호(掛壺)의 집안으로 시집가서 왕후(王后), 국태부인(國太夫人), 음부인(陰夫人), 숙부인(淑父人) 등 연방(聯芳)에 오르게 되었다.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선조의 제회(際會)에 계합하고, 현열(顯列)로써 회상(?翔)함에 참여하였다. 상징적으로 육부(六符)를 도왔으며, 균형(鈞衡)의 질(秩)에 악립(?立)하였고, 가문의 경사(慶事)가 칠대(七代)의 후손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서 벌열(閥閱)의 명성이 온 천하에 퍼졌으며, 공적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고, 쌓은 적덕(積德)을 먼 후손에까지 드리워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과 장(杖)과 부월(?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날 때부터 특이하였고, 초츤(??) (결락) 이마는 넓으며 눈썹은 길고, 코는 높고 곧으며, (결락) 골격은 건장하고 피부색은 검어서 마치 응진(應眞)의 상(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풍(文風)이 널리 퍼져 이미 화성(化成)을 이루었고, 저 성불(成佛)의 단계를 향하여 대희대사(大喜大捨)의 6도만행을 겸수하였다. 문종 임금께서 왕사의 뛰어난 법재(法才)를 듣고,흠모하는 마음으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음척(蔭脊)을 선사하였다.
또 그 해 연덕궁비(延德宮妃) 이씨(李氏) 소생인 문종의 여섯째 왕자 훈(塤)을 왕사의 문하에 보내어 출가하여 시봉토록 하였으니, 지금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인 도생(導生) 승통(僧統)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해 10월 14일에는 문종 임금이 왕사가 소속되어 있는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불승(佛僧)에 공양하며 경축하고는 마납가사와 음척을 하사하였다.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국초(國初) 이래로 무릇 법왕(法王)이 된 이는 연덕(年德)이 있지 않으면 능히 이 직위에 오른 이가 드물었으나, 스님은 장년(壯年)에 이미 치소중(緇素中)에서 발탁되어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 그 해에 왕명으로 스님을 현화사에 이주케 하였고, 개국(開國)과 자운(慈雲) 양사(兩寺)의 선장(選場)에서 다시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결락) 또 내사법회(內賜法會)에 나아갔으며, 대장도량(大藏道場)에서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아울러 법복(法服)을 하사받았으니,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왕사께서는 척리(戚里)의 가문에 태어나서 공문(空門)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위의(威儀)가 찬연하여 우뚝해 보이며, 그 의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무릇 하는 바의 일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있었다. 항상 고요한 곳에서 연거(燕居)하되, 잠깐 사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항상 강회(講會)마다 질서가 정연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아니하였다.
(결락) 물건을 얻기 위해 비굴하지 아니하며, 혹은 후학을 가르치되 피곤함을 잊었다. 낭무(廊?)에 나아가서 얻은 것이 모두 곤종(?琮)과 남벽(藍璧)이니, 다 특수한 보배이다. 왕사를 모시며 병우(甁盂)를 시봉하는 자로는 공작(孔雀)의 깃과 푸른 털을 가진 봉황(鳳凰)까지도 가서(佳瑞)로운 시자(侍者) 아닌 것이 없었다.
대적(大寂)의 회상에 학도(學徒)가 수백명이며, 지의(智?)의 문하(門下)에 청중(聽衆)이 천명을 넘었으나, 어찌 동일의 선상에 놓고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大安) 초에 스님께서 직접 유식론(唯識論) 등을 교정하여 깊은 뜻을 개발하고, (결락) 사권(四卷)을 지었다. (결락) 그 초본을 유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이를 존상(尊尙)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현장이 만약 규기가 없었다면 어찌 그의 학(學)을 조술(祖述)하여 확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만약 성상(性相)의 의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비(慈悲)의 학(學)을 버리고는 그 진극(盡極)한 경지에 이르러 갈 수 없다.
과거 당(唐)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00권을 보내옴으로부터 그때까지 응리원실(應理圓實)의 교학(敎學)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이 땅에 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효법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를 따랐으며, 등(燈)과 등이 등불을 이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중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상거(相去)가 더욱 멀어진 말세에 있어서 유문(遺文)에 그릇되고 어긋남이 많았으므로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를 바로 잡으려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조사(法相宗祖師)의 초소(草?)를 크게 세상에 유행토록 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탄도(坦途)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오로지 스님의 공력(功力)이었으니, 가히 원효와 태현(太賢)을 부호(扶護)하고 바야흐로 함께 달리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본교(本敎)를 더욱 빛나게 선양한 것은 이와 같았고 전법(傳法)하는 일 밖에도 인의(仁義)의 학술(學術)을 아호(雅好)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고, 시편(詩篇)과 필찰(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미롭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탄영(歎詠)을 받은 적이 자주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수좌(首座) 승계(僧階)를 받을 때의 고신(告身)에 이르되 내단사(內檀師)인 명훈(明訓)이 도제(徒弟)를 난국(蘭菊)에서 거느리고, (결락) 시사(詩社)를 강산(江山)에서 맺었으니, 그의 재주가 외학(外學)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스님을 도와서 미래에 감과(感果)코자 할진댄, 그 인(因)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도솔천 내원정토(內院淨土)에 상생(上生)하기를 발원(發願)함에는, 멀리로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추모하여 내원수행(內院脩行)을 하고, 가까이로는 규기(窺基)의 행적을 흠모하여 마음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씨(慈氏)의 탱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해마다 7월 14일에 법연(法筵)을 열어 도려(徒侶)를 모아 예참(禮懺)하며 귀의(歸依)하고, 또한 크게 재(齋)를 베풀어 시친(施?)하고 법석(法席)을 파하였는데, 태강(太康) 원년 을묘(乙卯)로부터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이르기까지 수미(首尾)의 기간이 무릇 22년만에 끝났다.
태강말(太康末) 계해년(癸亥年)에 선종(宣宗)이 그 미륵불의 탱화불사를 듣고, 특히 여러 가지 채화(彩畵)와 아울러 어서(御書) 일통(一通)을 하사하였는데, 그 어서에 이르기를, “당래불(當來不) (결락) 성회(盛會)하여 삼가 우리 스님의 공덕을 수희(隨喜)하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왕이 국함(國銜)을 내려 제자(弟子)로 일컫대 왕사의 마음을 보고 불법(佛法)을 받들면서 계속 여러해 동안 향화(香火)의 인연을 닦았으며, 어수(御手)로 쓴 친서(親書)를 보내어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단청(丹靑)할 장식물을 하사하였으니, 진실로 원력(願力)이 심히 깊은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신금(宸襟)의 신중(信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이를 숙종 임금께 알렸더니 곧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친서(親書)와 함께 왕사가 전용으로 타도록 상승국(尙乘局)의 마차를 그 절에 헌납하였다. 이(以) (결락) 내시소경(內侍少卿) 지택후(池澤厚)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전하고, “스님을 봉(封)하여 왕사로 추대코자 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스님이 돈수(頓首)하고 이르되, “덕이 박하고 수행도 용렬하니 어찌 성장(聖?)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밤이 장차 깊어져 가는데 스님은 양지(楊枝)를 씹어 양치질한 다음, 미륵여래(彌勒如來)의 명호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戒)에 이르러 발원하여 마치고, 문제자(門弟子)들과 더불어 간곡히 부촉하되, 탕탕연(蕩蕩然)하여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중야(中夜)에 이르러 다시 양지를 씹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과 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인 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오호라! 비니원내(毗尼園內)에서 비롯하였으니, 곧 출생할 것이 없는 데서 생(生)을 나타냈고, 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임종하였으니, 이는 곧 입멸(入滅)할 것이 없는 데서 입멸을 보인 것으로, 일생(一生)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다.
초재(初齋)인 7일로부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인 이상(二祥)에 이르는 무릇 십재(十齋)에 이르기까지의 소요되는 경비 (결락) 를 공급함이 조정(朝廷)에 있었다. 국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문인(門人)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우세승통(祐世僧統) 대각국사는 실로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지만, 스님의 입적을 듣고 바야흐로 극진히 애도하여 그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생략하여 말한다면 “바야흐로 몰치(沒齒)를 기약하여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교(眞敎)를 홍포(弘布)하여 왔는데, 이제 스님께서 사망하였으니, 내 누구와 함께 친할 것인가”라 하였다. 타종(他宗)에서도 왕사를 존중하였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중화(中華)의 도인(道人) 성총(省聰)과 혜진(慧?) 양대사(兩大師)가 있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와서 왕사의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혜진이 처음 스님을 보고 흔연히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구면(舊面)과 같다면서 2년 쯤 주석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겨나서 스님보다 20일 앞서 입멸하였다. 입멸할 때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선정인(禪定印)을 수인(手印)하고는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비상(非常)함이 아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의지하고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종류가 심히 많았다. 여러 조정(朝廷)에 걸쳐 무릇 하사받은 (결락) 타등(他等)은 번거로움을 피하는 까닭으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귀신(貴臣)과 성족(盛族), 호상(豪商)과 대고(大賈) 등은 각기 정성을 다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속수(俗壽)는 59요, 하납(夏臘)은 48세였다.
이에 상수(上首) 제자인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있고, 그 이하에 무릇 일천여인(一千餘人)이 함께 뜻을 모아 선사(先師)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궐하(闕下)에 엎드려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그 올린 글에 이르기를, “(결락) 산두사다천(珊兜史多天)에서 공연히 미륵(彌勒)을 애모(哀慕)하는 것이옵니다만 귀부(龜趺)를 보계(寶界)에 새겨 미래에 영원토록 널리 전문(傳聞)케 하기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왕사의 유열(遺烈)을 천양하도록 비문을 지으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을 표하여 이르되, “신은 본성(本性)이 고루할 뿐 아니라, 노쇠(老衰)를 더하였으며, 하물며 조고(操?)를 잡을 용기조차 없음이온 어찌 속사(屬辭)를 사염(寫琰)에 부합할 수 있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중지(中旨)를 회수(回收)하여 다른 통인(通人)에게 당부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다시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이비련(以碑聯) (결락) 지(之) (결락) 왕사의 비문을 지어 경행(景行)을 선양토록 하되, 더 이상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직서(直書)에 힘쓰라” 하였고, 이미 도유(都兪)에 지시하였으므로 감히 비문을 짓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文章)에 질(質)이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작자(作者)의 요구에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도(道)라는 말도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고승(高僧)의 사전(史傳)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적(行跡)의 사실만을 주워 모아 삼가 명(銘)을 서술하여 이른다. 능인(能仁)이 출현함은 중생(衆生)을 위함인 것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사파(娑婆)에 출현했네. 십이류(十二類) 중생(衆生)들을 모두 다 제도코자 팔만(八萬)과 사천법문(四千法門) 갖가지 연설하다. 때로는 방편법문(方便法門) 유시(有時)엔 진실교리(眞實敎理) 어느땐 편설(偏說)하고 혹시(或時)엔 원설(圓說)하다 서역(西域) 발상(發祥)여 사오년(四五年) 교화(敎化)하고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근역(槿域)에 두루하다. 서천(西天)의 이십팔조(二十八祖) 동토(東土)엔 육대조사(六代祖師) 조조(祖祖)가 천양(闡揚)하고 사사(師師)가 제창(提唱)하다 유(有)와 공(空)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性)과 상(相) 상치(相値)하여 성상(性相)이 적대(敵對)하나 성상(性相)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어 이 어찌 편견(偏見)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견(差別見)을 그 누가 융통(融通)할까? 금산사(金山寺) 왕사(王師)만이 이 일을 감당했네. 만행(萬行)을 (결락) (결락) (결락) 숙세(宿世)에 훈습(薰習)하여 생지(生知)의 천재(天才)일새 (결락) (결락) (결락) 취령(鷲嶺) 그 칭송(稱頌) 두루하여 용병(龍?)에 가득했네! 도덕이 숭고하여 왕신(王臣)이 외호(外護)하고 덕망이 고매하여 임금의 스승되다. 그 경지(境地) 높고 높아 엿볼길 전혀 없고 보리수(菩提樹) 잘 길러서 가지에 가지로다. 비보(裨補)를 하기 위해 옛터에 절을 짓고 불씨(佛氏)를 장엄하여 유식종(唯識宗) 도량(道場)되었네! 날마다 법의(法衣) 입고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오묘(奧妙)한 그 진리(眞理)를 사자후(獅子吼) 진동하다.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사부중(四部衆) 운집(雲集)하고 옷깃을 여미운 이 장터를 이루었네! 도(道) 어찌 멀다 하랴. 평상심(平常心) 그것이며 실천(實踐)만 한다면 이 또한 도(道)인 것을 구경(究竟)의 원묘과(圓妙果)를 이루려 할진대는 반드시 인행(因行)에서 선업(善業)을 닦을지다. 삼라(森羅)의 만상(萬像)들이 모두가 보처(補處)인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지혜(智慧)가 교결(皎潔)함은 청담(淸潭)의 달과 같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함은 항하사(恒河沙) 모래같네. 해마다 유식참법(唯識懺法) 이기(二紀)를 계속하여 도솔천(兜率天) 상생(上生)코자 그 일념(一念)밖에 없네. 법상종(法相宗) 홍포(弘布)코자 광교원(廣敎院) 열어놓고 곳곳에 다니면서 장소(章疏)를 구(求)하여서 제본(諸本)과 교정하여 목판(木板)에 새겼으니 흩어진 꽃송이를 노끈에 꿴 것 같네! 이 법문(法門) 인경(印經)하여 골고루 법시(法施)하니 자비(慈悲)한 진리(眞理) 바람 천하(天下)에 두루 불다 원효(元曉)와 태현대통(太賢大統) 이 나라 불교(佛敎) 위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땅에 재현(再現)이 아닐런지. 문장(文章)이 도도하여 운자(韻字)만 떨어지면 정경(情景)을 감상하여 구구(句句)가 성시(成詩)일새 은총(恩寵)을 드리우니 찬란한 그 광채(光彩)여! 벽운시(碧雲詩) 좋다지만 비할 바 전혀 없네 동작(動作)의 느낀 바로 토운(吐韻)이 주옥(珠玉)일새. 작(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소명(所名) 수행을 쌓고 쌓아 만증(滿證)을 기약(期約)하다. 열반전(涅槃前) 흰 무지개 입적(入寂)을 예고했고, 쌍림(雙林)의 사라나무 흰 빛이 나타나다 양지(楊枝)로 양치하고 미륵(彌勒)을 부른 다음 도솔천(兜率天) 정역(淨域)으로 소요(逍遙)히 상생(上生)하다 임금께서 스님에게 보은(報恩)을 위해서 고루(孤陋)한 미신(微臣)에게 찬비(撰碑)를 명(命)하시어 사부중(四部衆) 정성모아 정민(貞珉)에 각자(刻字)하여 위대(偉大)한 그 홍덕(洪德)을 억만세(億萬歲) 전하리다. 교위(校尉) 신(臣) 이효전(李孝全)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
부석사 원융국사비
유형문화재 제127호 고려시대 높이 186cm, 폭 96cm 소재지 :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4번지 지정일자 : 1979. 1. 25
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예부시랑 고총이 찬하고 유림랑 임호가 전과 서를 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지만 파손이 심한 편이고 비신도 파손, 마멸이 심해 판독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글자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해동금석원』등의 문헌에 그 내용이 전한다.
이수는 좌우가 긴 팔작지붕형이며, 처마 끝선으로는 전각이 있고, 용마루까지 표현되어 있다. 귀부는 뒷면은 조각이 남았으나 앞쪽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육각형의 귀갑문은 안에 王자를 넣어 정교한 표면처리를 하였다. 원융국사(964∼1053)는 고려초의 명승으로 자는 혜일, 속성은 김씨이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승려가 되어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되었다.
현종 초에 승통에 오르고 정종 7년(1041)에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되었다. 묘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부석사에서 법사가 되었다. 문종 7년(1053)에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원융국사라 하고 절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비가 있는 원융국사비각에는 해동화엄종조의상국사비가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비신은 새로 조성한 것이고 비갓과 비좌는 원융국사비가 발견된 곳에 함께 있었다 한다. 비갓은 우진각형으로 정상중앙에 연화문을 돌린 보주가 있고 처마끝에는 귀꽃장식이 잘 남았다. 비좌는 둥근 중판연화문대를 돌린 원형좌로 연화문은 반원이 연속된 간단한 형식이다.
==========================================================================
영통사대각국사비 (靈通寺大覺國師碑)
증시(贈諡)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전액(篆額)] 고려국 오관산(五冠山) 대화엄(大華嚴) 영통사(靈通寺) 증시 대각국사 비명과아울러 서문(序文)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검교(檢校) 태위(太尉) 수사도(守司徒)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판상서(判尙書)예부사(禮部事)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신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朝散郞) 상서 공부시랑(工部侍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오언수(吳彦修)는 칙선(勅宣)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 이하 생략 ==========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리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 이하 생략 ==========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寶幢)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의 진방(震方)에 안적(安?)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불법이 양(梁) 나라 대통(大通) 원년(元年) 정미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원효와 의상이 중흥하였으니, 이 두 스님은 십지(十地)인 성종성(聖種性)이며 대종사(大宗師)이다. 말광(末光)으로 비추는 바이며, 여파(餘波)로 가피(加被)하는 바이나 모두가 담암(?闇)에서 벗어나와 그 고명한 위치에 이르렀다. ======== 이하 생략 ========== 【음기곽외(陰記廓外)】 대각국사 문도의 직명(職名)과 개좌(開坐), 그리고 비음(碑陰)은 좌(左)와 같다. 문인(門人) 견불사(見佛寺) 주지(住持) 사문(沙門) 혜소(慧素)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승통(僧統) 창원(昶元)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던 스님이며, 홍호사(弘護寺) 제1대 주지였다. 칭도(稱道)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기(理琦)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으로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다. 사소(俟韶) : 국사의 제자. 홍천(弘闡) : 국사의 제자. 낙진(樂眞)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기영(器英) : 국사의 제자. == 생략 ==== 삼중대사(三重大師) 영현(令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선기(善機)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간영(幹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영(敎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영천(英闡)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광자(廣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 생략 ==== 중대사(重大師) 응주(應周)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향현(向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응수(應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총지(聰智)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소여(紹餘)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침(敎琛)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고충(古沖)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명서(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풍(戒豊)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명(繼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조진(照眞)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순명(順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수명(守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재종(在宗)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종해(從海)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하 결락되었다) == 생략 ==== 법규(法規)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이상의 문도 명단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원문은 아래에 올려드립니다.
=======================================================================
양진수 & 김란영 - 님의 향기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
|
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