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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촌로공파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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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 이야기 스크랩 경덕국사와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
희망나라 추천 0 조회 265 12.04.04 09: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통사 답사기.hwp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스님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판 독 문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
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
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
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
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
揚緇秩?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謂人中之師」
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
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
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
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해석문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 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반야사 원경왕사비 (경남 합천군)

 

위 치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구 (해인사)

홈페이지주소 : www.hc.go.kr

관 리 자 : 해인사 종무소

전화번호 : 055-934-3000

지정현황 : 보물 제128호 / 1963년 1월 21일 지정

 

개 요 : 원래는 가야국 구원동 반야사지에 있던 것을 해방 후 해인사로 옮겨 사고에 보관하다가 1968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비는 귀부, 비신과 옥개형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은 평박하다.

 

비의 제액은 비신의 전면 상부에 녹서로 증교원경왕사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고 고려 문종 4년(1050)에 태어나

영통사의 경덕국사와 대각국사에게 사사하였으며 대각국사를 따라 송에 갔다가

선종 3년(1026)에 귀국하여 숙종1년(1104)에 승통이 되었고,

 

예종 9년(1114)에 오공 통혜의 법호를 이어받았다.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예종 14년(1119)에 70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식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뒷면에는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신라의 기본형태에서 벗어난

형태로 귀부의 중곽갑문과 아울러 생경한 문양표현, 옥개형으로 변한 개석 등

고려 중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해인사 원경왕사비 

  보물 제128호. 합천군 반야사 옛터 원경왕사비 (소재지 해인사)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 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 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 (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영통사 석탑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 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085년(선종 2)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성법사(有誠法師)와 함께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 (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1086년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 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 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 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 000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 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편집하였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 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 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뒤 1099년에는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 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 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 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선·교 양종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 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 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 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대각국사비                                                                 당간지주

 

1101년(숙종 6) 10월 5일,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 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 세,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 <신집원종문 류(新集圓宗文類)>22권, <석원사림(釋苑詞林)>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권, <천태사교 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 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영통사’는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출가해 천태종을

     개창한 천년고찰의 사찰로서 불교계의 성지임.

     (개성 송악산 자락에 위치)  

 

○ 10세기 중반 이전에 창건된 영통사는 16세기경에 화재로 인해 없어진

    것으로 전해짐. 1998년 북한과 일본 학자들이 3년여에 걸쳐 발굴사업을

    벌였고, 그후 북한의 역사학계가 심혈을 기울여 건축복원 설계를 완성 함.

○ 이후 500년만인 2002년 11월부터 대한불교 천태종의 지원으로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고 2005년 10월 31일, 복원 낙성식을 개최함.

○ 6만여㎡의 부지에 모두 29채의 전각을 복원하였고 북한의 국보인 대각

     국사 비를 비롯 각종 문화재도 함께 복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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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사 대각국사 묘지명 (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高麗國大聖日興王寺故國師 詔諡大覺大和尙墓誌銘幷序」

 

     朝散大夫秘書少監知制誥賜紫金魚袋臣朴浩奉 宣撰」

我大覺國師法諱釋煦字義天爲避西宋國諱多用字爾文宗仁孝聖」

王之第四子?仁睿大后夢感黃龍以娠焉乙未歲九月二十八日誕」

生而有非常之相年跨十一文考異其?悟召靈通寺故景德國師爲」

親敎而出家就佛日寺戒壇受具則夙習警矣一代宗乘無不自解?」

景德歸寂師繼法門而當世之學佛者有戒律宗法相宗涅槃宗法性」

宗圓融宗禪寂宗師於六宗?究至極外及六經七略之書各發醇趣」

故文考褒爲廣智開宗眞祐世僧統順宗宣宗恩禮甚厚累加法?」

大遼天佑皇帝再寓經籍茶香金帛以結信緣忽元?乙丑歲師以微」

行越海巡游宋境而主客郎中楊傑被詔導引自密水至?河直上宸」

殿且訪丞相旣而歷問六宗中錚錚者則淨源懷璉擇其慧琳從揀等」

五十餘人也此?還識我國師?襟之妙蘊乎越明年言還本國者定」

有所以也宣宗以文考創成興王寺從來無主掌詔國師爲住持而演」

講橫亘禪敎精密者有年矣爾后仁睿與宣宗昇遐師以安居海印寺」

?我聖上之登極也增友睦而興佛事急命中使召徵而再住興王寺」

  (陰記)

昔者大后以盛域本無天台性宗啓願創立國淸寺將欲興行其法始拓」

其址而今上告成丁丑歲五月詔國師兼持文考? 許我聖上投」

佛而天爲繼體事重未果其志卽以國師捨俗今則上以同年生第五」

愛子零染而爲我國師哲資以酬疇昔之願由是助我國家之盛業者」

至矣今年十月三日?爲國師是月五日國師恒化而上聞之震悼尋」

輟朝命有司備禮茶毗已遷靈骨於靈通寺東山築石室以?焉偉矣」

哉國師處世之萬化我聖上追崇之衆美?國師門下傳六宗之濟濟」

者光於國史亦載塔碑此不書略述大?其銘曰」

師之德足以繼諸佛 化足以益衆生 行足以扶正道」

智足以發大誠而銘之以此足以流其光明」

      正德郎秘書郎賜緋臣高世?奉 宣書」

 是歲(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統元年)十一月四日刻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고려국(高麗國) 대성일(大聖日) 흥왕사(興王寺) 고조시대각화상묘지명(故詔諡大覺和尙墓誌銘)

병서(幷序)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소감(秘書少監)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臣) 박호(朴浩)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묘지명(墓誌銘)을 짓다.

 

우리 대각국사(大覺國師)의 휘(諱)는 석후(釋煦)요, 자(字)는 의천(義天)이었는데,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휘(諱)가 후(煦)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흔히 의천(義天)이라는 자(字)를 많이 사

용하였다. 국사는 문종(文宗) 인효성왕(仁孝聖王)의 넷째 아들이다. 비(妃)는 인예태후(仁睿

太后)이니, 황룡을 감득하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였다. 을미세(乙未歲) 9월 28일에 탄생하였

는데, 비상한 인상(人像)을 가졌다. 11세 때 아버지 문고(文考)께서 그 영오(穎悟)함을 특이

하게 여겨 영통사(靈通寺)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불러 친교사(親敎師)로 삼아 출가하게 하

여,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그 숙세(夙世)에 학습한 것이 놀랄

정도였다. 부처님의 일대종승(一代宗乘)을 스스로 해득(解得)하지 않음이 없었다. 경덕국사

가 귀적(歸寂)함에 이르러 국사께서 그 법문(法門)을 계승하였으므로 당세(當世)에 뛰어난

불학자(學佛者)로 알려졌다. 당시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

(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이 있었는데, 국사는 이 육종(六宗)에 있어서 아울

러 그 연구가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

 

따라서 외전(外典)인 육경(六經)과 칠략(七略) 등의 서적에도 각각 그 순취(醇趣), 즉 심오한

취지(趣旨)를 발명하였으므로 문고(文考)께서 포상하여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

祐世僧統)'이 되었다. 맏형인 순종(順宗)과 둘째 형인 선종(宣宗)도 은총의 예를 심히 두텁게

하여 누차에 걸쳐 법호(法號)를 가정(加呈)하였다. 요(遼)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도 재차(再

次)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 옴으로써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었다.

홀연히 원풍(元豊) 을축년(乙丑年)에 국사는 개인 자격의 미복(微服)으로 바다를 건너 송(宋)

나라 국경에 도달한 후 순례(巡禮)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객낭중(主客郎中)인 양걸(楊

傑)이 철종(哲宗)의 명을 받들어 인도하게 되었다. 밀수(密水) 지방으로부터 변하(?河)에 이

르러서는 곧 바로 신전(宸殿)에 올라가 철종을 배알하고 따라서 승상(丞相)도 예방하였다.

그리고나서 차례로 6종중(宗中)의 정정한 큰스님들을 방문하였으니, 즉 정원(淨源), 양연(?

璉),택기(擇其), 혜림(慧琳), 종간(從揀)등 50여 인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돌이켜 보건대

우리 국사(國師)의 흉금(胸襟)에 간직하고 있는 묘온(妙蘊)을 알았을 것인가!

 

그 다음해에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말하게 된 것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선종(宣

宗)의 아버지인 문종이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하였으나, 오랫동안 주장(主掌)할 스님이 없었

다. 그리하여 국사를 칙명(勅命)으로 주지(住持)케 하고, 정밀(精密)하게 강경(講經)과 선담

(禪譚)의 법회를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다. 그 후 모후(母后)인 인예태후(仁睿太后)와 둘째

형인 선종이 모두 승하하였다. 국사는 해인사(海印寺)로 물러가서 안거(安居)하고 있었다.

지금의 성상(聖上)이 등극함에 이르러서는 조카인 헌종(獻宗)을 더욱 융숭하게 우대하는 한

편 불사(佛事)를 일으키면서 급히 중사(中使)를 해인사로 여러 차례 보내서 서울로 불러 다

시 흥왕사(興王寺) 주지(住持)를 맡게 하였다.

 

[이면(裏 面)]

 

옛날 태후(太后)께서 성역(盛域)에는 본래 천태성종(天台性宗)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원(願)을 세워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여 장차 그 법(法)을 중흥코자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진행 중에 승하하시고, 지금 임금이신 셋째 형 숙종(肅宗)이 그 불사(佛事)를 낙성(落成)하

였다. 정축세(丁丑歲) 5월 국사에게 명(命)하여 흥왕사(興王寺) 주지직과 함께 겸직하도록

하였다. 문고(文考)께서 일찍이 우리 성상(聖上)에게 불교(佛敎)에 깊이 귀의토록 하였으나,

나라 일이 너무 바빠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곧 국사께서 세속(世俗)을 버리고 출가하

였는데, 지금에 와서 임금이 동년생(同年生)인 다섯째 아들을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우리

대각국사를 위하여 훌륭한 제자(弟子)가 되어 옛날 부왕인 문종과 모후(母后)인 인예(仁睿)

의 원(願)을 갚으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왕자가 출가하여 국가의 성업(盛業)을 도운

것이 지극하였다고 할 것이다. 금년(今年) 10월 3일 국사로 책봉하고, 이달 5일에 국사께서

온 국민이 깜짝 놀라게 갑자기 입적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곧 국무(國務)를 쉬고 임시 공휴일(公休

日)로 정하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다비(茶毗)하여 마치고, 영골사리(靈骨

舍利)를 영통사 동쪽 산으로 옮겨 석실(石室)을 쌓고 안치하였다. 위대하도다! 국사께서 처

세(處世)하실 때의 만화(萬化)와 성상(聖上)께서 국사를 추숭(追崇)하신 여러 가지 아름다움

과, 국사의 문하제자(門下弟子)로서 육종(六宗)을 전한 제제(濟濟)한 자가 국사(國史)를 빛나

게 장식한 일들은 모두 탑비(塔碑)에 실려 있을 것이 여기에는 갖추어 적지 아니하고, 그

대개(大槪)만 약술하였다. 그를 게송으로 명(銘)하여 이르노라.

 

국사의 도덕(道德)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을 계승하기에 만족하고,

국사의 교화(敎化)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이익(利益)하기에 만족하며,

국사의 수행(修行)은 불법정도(佛法正道)를 부호(扶護)하기에 만족하고,

국사의 지혜(智慧)는 홍원대성(弘願大誠)을 개발(開發)하기에 만족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묘명(墓銘)을 지었으니, 그 광명을 유통하기에 만족하였다.

선덕랑(宣德郞) 비서랑(秘書郞)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고세칭(高世?)은 왕명(王

命)을 받들어 묘지명을 쓰고,

 

▨세(▨歲) 대송(大宋)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元年) 대요(大遼) 건통(建統) 원년(元年)11월

4일 돌에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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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사(福興寺,復興寺)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圓通洞)에 있었던 절.

복흥사(復興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 초기에 창건

하였다.

 

경기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 (국사봉)

 

  

이 절에는 승려를 출가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마련한 계단(戒壇)인 관단(官壇)이 있어서 원융국사(圓融國師)·혜덕왕사(慧德王師) 등을 배출한 유명한 사찰이다.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지에는 법당터의 주춧돌과 삼층석탑, 2기의 석재, 부도(浮屠), 귀부(龜趺) 등이 있다.

 

이 절은 신라말 고려초에 개성 부근에 세워진 절 중에서 유일하게 쌍탑가람(雙塔伽藍)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매우 희귀한 유지(遺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오학린(吳學麟)과 변계량(卞季良)의 시가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에는 법당과 수각(水閣)이 있었고 매우 한적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松都의 古蹟(高裕燮, 悅話堂,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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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金山寺 慧德王師眞應塔碑)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인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 정종 4~1097, 숙종 2)의 생애를 기린 비로 보물 제 24호이다.

 

전면

후면

혜덕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정종 4년(1038)에 태어나 11세에 불교의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 승려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숙종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그를 법주(法主)로 삼자 왕에게 불교의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59세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그를 국사로 대우하여 시호를 ‘혜덕’, 탑이름을 ‘진응’이라 내리었다.비는 혜덕왕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1111년(숙종 3)에 세웠다

현재 비의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비문은 심하게 닳아 읽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비의 받침돌에는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크게 표현된 거북을 조각하였고,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받침돌에 비해 커보이는 듯하며, 주위에 덩굴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문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문하시랑을 지낸 이오(李?, 1050~1110)가 지었고, 해서로 비문을 쓴 사람은 『대동금석서』에는 채유탄(蔡有誕)이라 하였으나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등에서는 정모(鄭□), 『한국금석전문』에는 정황선(鄭晃先)이라 하고있다.(당대의 명필 정윤(鄭允) 설) 비 전면 끝에 이효전(李孝全)이라는 이름이 있어 새긴 이로 추정된다.

비문 글씨는 구양순의 글씨보다 더욱 활달하여 명쾌한 맛이 있다. 신라나 조선에 비하여 고려시대의 글씨가 훨씬 뛰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비신은 크며, 두부가 작은 귀부(龜趺)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비신높이 2.77m, 너비 1.49m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비와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와 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와 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와 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 8백 인에 이른다. 고려의 승려·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소현(韶顯)(1038-1096)

 

고려 전기의 스님, 유식학(唯識學)에 밝던 이. 이름은 이민(李民). 휘는 소현, 자는 범위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1038년(정종 4) 7월 3일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인 1048년(문종 2)에 해안사(海安寺)지광(智光) 해린(海麟)을 은사로 모시고 <금광명경>과 <성유식론>을 배웠다. 이듬해 복흥사(福興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고, 1054년(문종 8) 해린이 현화사(玄化寺)의 주지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서 승과에 합격하여 대덕이 되고, 또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문종은 그의 명성을 듣고 연덕궁(延德宮)에 불러 다섯째 왕자 정(靖; 승통 導生)을 그에게 출가시켜 사사케 했다. 1079년 김제 금산사에서 수좌(首座)가 되고, 1084년 다시 승통에 올라 왕명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또 중외(中外) 법상계(法相系)의 여러 사찰에 정재(淨財)를 주어 매년 두 차례 법회를 개설하게 하고, 석가여래 및 현장(玄장), 규기(窺基)와 해동 육조상(六祖像)을 그려 그 사찰에 봉안했다.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세우고, 또 그 원의 중앙 금당에 노사나상 및 현장, 규기 두 분의 상을 그려 봉안케 하기도 했다. 1096년(숙종 1) 12월 18일 현화사의 봉천원(奉天院)에서 미륵 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면서 나이 59세, 법랍 48년으로 입적했다. 왕사로 추봉하고 시호를 혜덕(慧德)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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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독문>

   

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題額)」

高麗國全州大瑜伽業金山寺普利了眞精進饒益融慧廣祐護世能化中觀 贈諡慧德 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

   

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

章事判尙書禮部翰林院事文德殿太僕射脩國史上柱國▨▨▨▨」

學士▨▨▨ ▨▨」

登仕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鄭晃先 奉 敎撰」

(臣)聞釋氏出世立敎也爲化群機故其說有權實漸頓之殊半滿偏圓之別繇是五天高士諸夏名?空緇?空?有者寔繁宗性宗相者甚衆惟性與相泯合爲一而已▨▨道妙理者今贈諡慧德王師」

師諱韶顯字範圍俗姓李氏其先慶源郡人也曾高以降積累彌深乃子乃孫列鉉司而挺秀爲?爲妹公 掛壺以聯芳王父諱翰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贈太子太傳尙書左僕射▨▨▨」

公孝以克家忠以許 國契先朝之際會?顯列以仟翔衆協六符?立乎鈞衡之秩慶綿十葉翼飛乎閥閱之聲功與世而莫京裕垂昆而不絶者焉顯考諱子淵守太史門下侍中贈中書侍郎文

和公以文章擢 御簾高第有籌略爲 聖域聞人力?萬機首居四輔豈止伊尹作殷家右相天下取以保安孔光拜漢室上公海內畏其威振而已哉外祖諱▨▨▨▨侍郎平章事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杖鉞四方無擊析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蒙之暇其世家遠系信牒備文故略焉母金氏累贈鷄林國太夫人性?柔嘉長成▨▨▨」

四德蔚爲公族之嬪繼念三歸求得法王之子果蒙應也乃有娠焉以太平紀曆十有七年歲在戊寅七月哉生明誕師于 闕南佛嶺之私第師生而特異"659;?▨▨▨▨▨▨▨額廣眉長▨▨▨▨▨」

勁其骨黔其膚若應眞之相也年甫十一就海安寺麟公所落髮麟公卽故法泉寺國師諡智光諱海麟也先是公應詔入內夜方一鼓夢見瑞鳥似鳳而紫▨▨▨紫▨▨▨▨玩深恐失之▨▨▨」

和公?師而至請爲弟子麟公見師貌雄傑而衣紫謂曰昨夢瑞鳥之兆豈誣也哉初學金光明經唯識論夙殖聞?日新懸鮮故麟公意甚愛之?云賢哲之才俟時▨▨▨▨桃李應韶▨▨陽▨」

發顯故以韶顯爲名焉明年受於福興寺官壇超世之戒珠自潔匪假磨?生塵之心鏡本淸豈勞拂拭于時麟公移住玄化寺師?高棲絳帳親受金言則何異仲尼▨▨▨▨▨回善光▨▨▨▨▨▨」

哉淸寧七年赴王輪寺大選?一捷爲大德咸雍五年加重大師?乎六年夏五月文宗金輪啓統玉?凝休廣斯文而旣致化成向彼佛而兼修喜捨 聆師之才▨▨▨蔭眷六年」

延德宮第六 王子投師門而出家卽今俗離山法住寺住持導生僧統是也是年十月十四日 上幸師之所隷玄化寺齋佛僧以慶之仍 賜磨衲袈裟蔭眷七年初住海安寺加授三重大」

師太康五年秋 上命有司於 內殿大張法席 請師充說主者爲大宋回使利涉大洋故也仍加普利二字爾後累加一十六字爲法號者皆所以旌其德行也是年 詔住全州金山寺九年又」

加首座是歲 文宗昇遐 順宗嗣位未幾而王崩卽 宣宗承纂之元年也 上以端拱無爲坐見中興者豈非師福利之功耶下枇署爲僧統其時 師年四十七也始師爲首座求▨▨」

僧統位由德進不其偉歟? 國初已來凡爲法王者非有年德罕能居此職而師以壯年見 擢緇素榮之又其年 王命師移住玄化寺仍於開國慈雲兩寺選?有再爲都▨▨▨▨▨又赴內賜法」

會?大藏道?主張講席幷蒙 賜法服者其數非一師降眞戚里作主空門其儀也燦然可觀其志也確乎不拔凡所爲事有異於人?在燕居少選閒手無釋卷每於講會一▨次之不▨」

物以思恭或誨人而忘倦故得?廊?者盡是?琮藍璧盡是殊珍持?盂者孔羽翠毛無非佳瑞大寂之學徒累百僧俗智?學之聽衆盈千豈可同日而語哉大安初師以手校唯識開發意四衆▨▨▨▨▨▨」

初失其本積有年矣旣得之尊尙者衆矣師曾於金山寺選勝于寺之南走六十許步地創設一院額號廣敎仍筆刻雕經板置于院院之中別造金堂一所幷繪畵盧舍那及奬基二師像其」

堂自太康九年至師之末年搜訪慈恩所撰法華玄?惟識述記等章?三十二部共計三百五十三卷考正其本募工開板私紙墨印布流通以廣法施也謹案大宋高僧傳云奬▨存惟」

識開創之祖基?守文述作之宗?苟無基則何祖張其學乎是知凡將入於性相義門者捨慈悲之學則罔臻其極矣頃自唐 文皇以新羅 王表請 宣送瑜伽論一百卷於是無應理圓實之學」

漸盛于玆土?乎曉法師導之于前賢大統踵之於後燈燈傳世世嗣興然而去聖寥遠遺文訛舛者多矣師?疾于懷以其祖門章?大行於世使學者知本宗之有坦途惟師之力也可謂扶」

曉賢方軌齊鶩焉可勝道哉其光揚本敎也如此復於傳法之外雅好仁義之術博 覽經史至于詩篇筆札靡不精究爲人歎詠者??有焉故於首座告身云內檀師明訓領徒弟於蘭菊」

結詩社於江山其才兼外學也又如此師以爲欲資感果於未來莫若植因於現在上生懇願遠則追無着之?內院脩行近則慕基公之??評題逐月畵成慈氏尊像每歲取七月十四日開法筵」

集徒侶禮懺?依及明設齋施?以罷席自太康元年乙卯至壽昌二年丙子   首尾凡二十有二稔而止大康末癸亥宣宗聞其事特 賜諸般彩畵幷 御書一通其書曰▨當來不▨▨▨▨▨▨」

盛會謹隨喜吾師功德其於月日下 國銜稱弟子有以見師心奉法繼年修香火之緣 御手飛文隨喜 賜丹靑之飾苟非願力甚深▨何▨宸襟信重之如是耶師居玄化寺時▨▨▨▨」

完補爲急務尋狀聞 上可其奏仍置繕理宮大安四年肇其役壽昌二年畢其功締葺宏模雖因舊址莊嚴勝?宛若新成師又於中外本宗諸寺施納淨財許設每年兩度法會以爲常式募得虎頭」

名手畵成釋迦如來及?基二師海東六祖像都一各安于其寺欲令義學者覩像生敬自敬生信自信得慧日以勸焉壽昌元年乙亥冬十月 聖考肅宗慶襲宗社心歸佛法▨▨▨▨」

召師爲法主講仁王經者祈天 祚業故也?二年十二月十八日師於寺之奉天院深夜看經次有斯疾旣以聞卽 遣御?診視之未回續 差中使押送尙乘鞍馬施納其寺以▨▨▨▨▨▨▨」

內侍少卿池澤厚奉傳 聖旨今欲封師爲 王師師頓首言德簿行庸豈堪 聖奬夜將深嚼楊枝漱訖念彌勒如來名號?四弘願戒與門弟等囑累蕩蕩然無憂色中夜更嚼楊枝俄而遷化」

先一日白虹夜見識者以爲師終之?也山?野老無不號?走獸飛禽互相悽慘遙明以入寂聞 上乃 震悼遣入 內奉御王? 吊慰之翌日命右街僧錄繼通攝司天監知太史局事文」

象等監護葬事二十七日 遣使尙書右僕射陳謂使副尙書左丞右諫議大夫金沅等?持璽書封爲 王師諡曰慧德塔號眞應幷 贈紫地繡袈裟?諸衣對器玩茶香等物▨伸時▨▨▨▨」

未茶毗于寺之西南隅明年丁丑正月旬有一日丙申遷葬于寺之西北隅安其骨遵像法也嗚呼毗尼園內始則現無生之生跋提河邊終則示不滅之滅其餘終也自初七?二祥凡十齋所▨▨▨▨▨」

給其在 朝延也猶若是焉?其門人乎哉時有祐世僧統大覺國師實華嚴之宗匠也聞師之卒方盡哀而致祭其文略云方期沒齒交臂弘眞今也卽亡吾誰與親其他宗之見重也皆是歎道人有華僧▨▨」

大師慧?度海而來屬于師之講下?之於師也欣然如舊相識居兩年矣無何先於師三旬而滅其滅也結跏印手而坐化盖出於尋常焉其爲遠人依慕也又如是類其▨累朝凡所賜▨▨▨」

他等避繁故不書及諸貴臣盛族豪商大賈各盡其所可爲而致敬者無虛日矣俗壽五十九夏臘四十八奧有門弟上首導生僧統而下凡一千餘人等狀先師行涕淚伏 闕而奏其書曰▨▨」

於珊兜知哀慕勒龜趺於寶界願永傳聞爰 命下臣?揚遺烈臣表讓云臣本性孤?加以老衰?無賈勇於操?曷副屬辭於寫琰願回▨中旨移授通人仍降 制曰以碑聯▨之▨▨▨▨▨」

之景行勿煩曲讓勉?眞書旣 阻示於 都兪敢不?於論?文非無質然慙作者之求道可强名庶續高僧之史?其實而謹述銘云」

能仁出現爲大因緣度衆生界說諸敎詮或云權實或云偏圓起從西域漸被東?(其一)祖祖闡揚師師提唱談有談空曰性曰相苟泯二道有何偏尙其誰融通唯我宗匠(其二)萬行▨我生而▨▨▨▨▨」

鷲嶺譽? 龍?應 王臣護爲 帝子師聖墻疊?覺樹添枝(其三)締構梵宮莊嚴佛氏日振法衣講宣微旨請益如雲攝齋成市道豈遠而行之卽是(其四)欲圓妙果須種善業像像補處▨▨▨▨▨▨」

如水月福也河沙年踰二紀念玆靡?(其五)廣敎起院購書周?多葉鏤文貫花增線法雨均沾慈風益扇擬彼曉賢重生辰卞(其六)對賓命筆探景成詩垂露騰彩碧雲騁奇業之所感作▨▨▨▨▨▨」

▨所名滿證爲期(其七)白虹告祥雙林變色奄促化緣復歸淨域 大君澍恩微臣?德刻以貞珉   流美萬億(其八)」

校尉(臣) 李孝全   奉詔 撰

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해석문>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전주(全州) 대유가업(大瑜伽業) 금산사(金山寺) 보리료진(普利了眞) 정진요익(精進饒益) 융혜광우(融慧廣祐) 호세능화중관(護世能化中觀) 증시(贈諡)

혜덕왕사(慧德王師) 진응지탑비명(眞應之塔碑銘) 병서(幷序)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開府儀同)삼사(三司) 검교(檢校)태사(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 한림원사(翰林院事) 문덕전(文德殿)대학사(大學士)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학사(▨▨▨▨學士)인 이오(李?)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碑文)을 지었고,

등사랑(登仕郞) 상서도관낭중(尙書都官郎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정황선(鄭晃先)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불교를 창립한 것이 군기(?機)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의 설법(說法) 중에는 권실(權實)과 점돈(漸頓)의 다름과 반만(半滿)과 편원(偏圓)의 차별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천축국(五天竺國)의 모든 고사(高士)와 제하(諸夏)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공(空)에 집착하고, 유(有)에 떨어진 이가 매우 많으며, 또한 성종(性宗)에 국집하거나, 상종(相宗)으로 치우치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성종과 상종이 민합(泯合)하여 오직 하나뿐인 지극한 도(道)이며,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결락) 우리 혜덕왕사(慧德王師)의 휘는 소현(韶顯)이요, 자(字)는 범위(範圍)이며, 속성은 이씨(李氏)요, 그의 선조(先祖)는 경원군(慶源郡) 사람이다.

 

증조(曾祖)와 고조(高祖) 이후로 선행을 적루(積累)함이 심히 많아서, 자자 손손(子子 孫孫)으로 내려 오면서 현사(鉉司)의 높은 관직에 서열(序列)되어 크게 빼어났으며, 자(?)가 되고 매(妹)가 된 여식(女息)들은 괘호(掛壺)의 집안으로 시집가서 왕후(王后), 국태부인(國太夫人), 음부인(陰夫人), 숙부인(淑父人) 등 연방(聯芳)에 오르게 되었다. 왕부(王父)의 휘는 한(翰)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증태자태부(贈太子太傅)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공(▨▨▨▨▨▨公)이니, 효도로써 힘을 다하고, 충성으로써 생명을 바쳤다.

 

선조의 제회(際會)에 계합하고, 현열(顯列)로써 회상(?翔)함에 참여하였다. 상징적으로 육부(六符)를 도왔으며, 균형(鈞衡)의 질(秩)에 악립(?立)하였고, 가문의 경사(慶事)가 칠대(七代)의 후손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서 벌열(閥閱)의 명성이 온 천하에 퍼졌으며, 공적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고, 쌓은 적덕(積德)을 먼 후손에까지 드리워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현고(顯考)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중서시랑(贈中書侍郞) 문화공(文和公)이니, 문장으로써 어렴(御簾)고제(高第)에 발탁되었다. 남다른 주략(籌略)이 있어, 독보적인 지모(智謀)로 많은 사람을 힘껏 돕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며, 만기(萬機)를 돕는 사보(四輔) 중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우상(右相)이 되어 천하를 태평성세로 이룩한 것에 그칠 뿐이며, 공광(孔光)이 한(漢)나라의 상공(上公)에 임명되니, 해내(海內)가 어찌 그의 위엄(威嚴)에만 두려워 함이겠는가?

 

외조부(外祖父)의 휘는 ▨▨ ▨▨시랑(▨▨侍郞) 평장사(平章事) (결락) 왕실의 명신(名臣)이며, 충절(忠節)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과 장(杖)과 부월(?鉞)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擊柝)의 근심이 없고, 궐내(闕內)로 들어오면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萬乘)께서 수상(垂裳)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世家)의 먼 계보(系譜)는 신첩(信牒)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여러 차례에 걸쳐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으로 추증(推贈)받았다. 성품은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아름다움을 타고 났으며, 장성(長成)해서는 (결락) 부인(婦人)의 사덕(四德)을 갖추어 영광스럽게 공족(公族)의 부인이 되고, 마음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법왕(法王)의 제자가 될 아들을 간구하였더니, 과연 부처님의 성응(感應)을 입어 임신하였다. 태평기력(太平紀曆) 17년 세재무인(歲在戊寅) 7월 재생명(哉生明)에 궁궐 남쪽 불령(佛嶺)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날 때부터 특이하였고, 초츤(??) (결락) 이마는 넓으며 눈썹은 길고, 코는 높고 곧으며, (결락) 골격은 건장하고 피부색은 검어서 마치 응진(應眞)의 상(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1살 때 해안사(海安寺)의 해린(海麟)스님을 찾아가서 그를 은사로 하여 낙발득도(落髮得度)하였는데, 해린은 이미 입적(入寂)하신 법천사(法泉寺)의 국사(國師)이니, 시호는 지광(智光)이요, 휘는 해린이다.

 

이보다 앞서 인공(麟公)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궐내에 들어가서 어느날 밤 삼고(三鼓)의 꿈에 서조(瑞鳥)를 보니, 봉(鳳)과 비슷하나 자색(紫色)이며, (결락) 자(紫) (결락) 완심(玩深) 공실지(恐失之) (결락) 화공(和公)이 스님을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는데 인공이 스님의 모습을 보니, 웅걸(雄傑)하고 자색(紫色) 옷을 입고 있었다.

 

인공이 이르기를, “어제 밤에 서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어찌 이것이 거짓이겠는가”라 하고 받아 들였다. 처음부터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유식론(唯識論)을 배웠는데, 숙세(夙世)로부터 많이 문훈(聞薰)하였으므로, 날마다 식견(識見)이 증승(增勝)하였다. 그리하여 인공이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이르기를, “현철(賢哲)의 재질(才質)이 때를 기다려,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도리(桃李)나무가 봄 빛을 받아 점점 자라는 것과 같으므로, 소현(韶顯)으로써 법명(法名)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명년(明年)에 복흥사(福興寺)의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세간을 초월하는 계주(戒珠)가 스스로 청결(淸潔)하여 마롱(磨?)을 빌리지 않았다. 출진(出塵)의 마음 거울이 본래로 청정한 것이어늘, 어찌 수고롭게 불식(拂拭)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무렵 인공이 현화사(玄化寺)로 이주하여 높이강장(絳帳)에 앉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왕사(王師)도 그곳으로 따라가서 금언(金言)을 수학하였으니, 어찌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는 안회(顔回)와 다를 것이며, 선광(善光) (결락) 재(哉)아!

청령(淸寧) 7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 일첩(一捷)에 대덕법계(大德法階)에 합격하였다.

 

함태(咸泰) 5년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가 첨가되었고, 6년 5월에 이르러 문종이 금륜왕(金輪王)과 같이 나라를 통어(統御)하고, 옥의(玉?)으로부터 저절로 상서(祥瑞)가 응집(凝集)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풍(文風)이 널리 퍼져 이미 화성(化成)을 이루었고, 저 성불(成佛)의 단계를 향하여 대희대사(大喜大捨)의 6도만행을 겸수하였다. 문종 임금께서 왕사의 뛰어난 법재(法才)를 듣고,흠모하는 마음으로 마납가사(磨衲袈裟)와 음척(蔭脊)을 선사하였다.

 

또 그 해 연덕궁비(延德宮妃) 이씨(李氏) 소생인 문종의 여섯째 왕자 훈(塤)을 왕사의 문하에 보내어 출가하여 시봉토록 하였으니, 지금의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주지인 도생(導生) 승통(僧統)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해 10월 14일에는 문종 임금이 왕사가 소속되어 있는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불승(佛僧)에 공양하며 경축하고는 마납가사와 음척을 하사하였다.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국초(國初) 이래로 무릇 법왕(法王)이 된 이는 연덕(年德)이 있지 않으면 능히 이 직위에 오른 이가 드물었으나, 스님은 장년(壯年)에 이미 치소중(緇素中)에서 발탁되어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 그 해에 왕명으로 스님을 현화사에 이주케 하였고, 개국(開國)과 자운(慈雲) 양사(兩寺)의 선장(選場)에서 다시 도승통(都僧統)이 되었다. (결락) 또 내사법회(內賜法會)에 나아갔으며, 대장도량(大藏道場)에서 강석(講席)을 주관하고 아울러 법복(法服)을 하사받았으니,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왕사께서는 척리(戚里)의 가문에 태어나서 공문(空門)을 주관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위의(威儀)가 찬연하여 우뚝해 보이며, 그 의지는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다.

 

무릇 하는 바의 일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함이 있었다. 항상 고요한 곳에서 연거(燕居)하되, 잠깐 사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고, 항상 강회(講會)마다 질서가 정연하여 조리(條理)를 잃지 아니하였다.

 

(결락) 물건을 얻기 위해 비굴하지 아니하며, 혹은 후학을 가르치되 피곤함을 잊었다. 낭무(廊?)에 나아가서 얻은 것이 모두 곤종(?琮)과 남벽(藍璧)이니, 다 특수한 보배이다. 왕사를 모시며 병우(甁盂)를 시봉하는 자로는 공작(孔雀)의 깃과 푸른 털을 가진 봉황(鳳凰)까지도 가서(佳瑞)로운 시자(侍者) 아닌 것이 없었다.

 

대적(大寂)의 회상에 학도(學徒)가 수백명이며, 지의(智?)의 문하(門下)에 청중(聽衆)이 천명을 넘었으나, 어찌 동일의 선상에 놓고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안(大安) 초에 스님께서 직접 유식론(唯識論) 등을 교정하여 깊은 뜻을 개발하고, (결락) 사권(四卷)을 지었다. (결락) 그 초본을 유실한지 이미 오래되었다가 다시 얻었으므로 이를 존상(尊尙)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현장이 만약 규기가 없었다면 어찌 그의 학(學)을 조술(祖述)하여 확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만약 성상(性相)의 의문(義門)으로 들어가고자 할진대, 자비(慈悲)의 학(學)을 버리고는 그 진극(盡極)한 경지에 이르러 갈 수 없다.

 

과거 당(唐)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신라왕의 요청으로 유가론(瑜伽論) 100권을 보내옴으로부터 그때까지 응리원실(應理圓實)의 교학(敎學)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점점 이 땅에 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효법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태현대통(太賢大統)이 뒤를 따랐으며, 등(燈)과 등이 등불을 이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 중흥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상거(相去)가 더욱 멀어진 말세에 있어서 유문(遺文)에 그릇되고 어긋남이 많았으므로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이를 바로 잡으려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조사(法相宗祖師)의 초소(草?)를 크게 세상에 유행토록 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본종(本宗)의 탄도(坦途)가 있음을 알게 한 것은 오로지 스님의 공력(功力)이었으니, 가히 원효와 태현(太賢)을 부호(扶護)하고 바야흐로 함께 달리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본교(本敎)를 더욱 빛나게 선양한 것은 이와 같았고 전법(傳法)하는 일 밖에도 인의(仁義)의 학술(學術)을 아호(雅好)하였으며, 경사(經史)를 박람(博覽)하고, 시편(詩篇)과 필찰(筆札)에 이르기까지 정미롭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탄영(歎詠)을 받은 적이 자주 자주 있었다.

 

그러므로 수좌(首座) 승계(僧階)를 받을 때의 고신(告身)에 이르되 내단사(內檀師)인 명훈(明訓)이 도제(徒弟)를 난국(蘭菊)에서 거느리고, (결락) 시사(詩社)를 강산(江山)에서 맺었으니, 그의 재주가 외학(外學)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스님을 도와서 미래에 감과(感果)코자 할진댄, 그 인(因)을 현재에 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도솔천 내원정토(內院淨土)에 상생(上生)하기를 발원(發願)함에는, 멀리로는 무착(無着)의 자취를 추모하여 내원수행(內院脩行)을 하고, 가까이로는 규기(窺基)의 행적을 흠모하여 마음에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씨(慈氏)의 탱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해마다 7월 14일에 법연(法筵)을 열어 도려(徒侶)를 모아 예참(禮懺)하며 귀의(歸依)하고, 또한 크게 재(齋)를 베풀어 시친(施?)하고 법석(法席)을 파하였는데, 태강(太康) 원년 을묘(乙卯)로부터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이르기까지 수미(首尾)의 기간이 무릇 22년만에 끝났다.

 

태강말(太康末) 계해년(癸亥年)에 선종(宣宗)이 그 미륵불의 탱화불사를 듣고, 특히 여러 가지 채화(彩畵)와 아울러 어서(御書) 일통(一通)을 하사하였는데, 그 어서에 이르기를, “당래불(當來不) (결락) 성회(盛會)하여 삼가 우리 스님의 공덕을 수희(隨喜)하라” 하였다.

 

그달 그날에 왕이 국함(國銜)을 내려 제자(弟子)로 일컫대 왕사의 마음을 보고 불법(佛法)을 받들면서 계속 여러해 동안 향화(香火)의 인연을 닦았으며, 어수(御手)로 쓴 친서(親書)를 보내어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단청(丹靑)할 장식물을 하사하였으니, 진실로 원력(願力)이 심히 깊은 이가 아니면 어찌 능히 신금(宸襟)의 신중(信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이를 숙종 임금께 알렸더니 곧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였으나 회복되지 아니하였다. 이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친서(親書)와 함께 왕사가 전용으로 타도록 상승국(尙乘局)의 마차를 그 절에 헌납하였다. 이(以) (결락) 내시소경(內侍少卿) 지택후(池澤厚)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전하고, “스님을 봉(封)하여 왕사로 추대코자 합니다”라고 고하였다. 스님이 돈수(頓首)하고 이르되, “덕이 박하고 수행도 용렬하니 어찌 성장(聖?)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밤이 장차 깊어져 가는데 스님은 양지(楊枝)를 씹어 양치질한 다음, 미륵여래(彌勒如來)의 명호를 염(念)하고 사홍원계(四弘願戒)에 이르러 발원하여 마치고, 문제자(門弟子)들과 더불어 간곡히 부촉하되, 탕탕연(蕩蕩然)하여 얼굴에 조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다. 중야(中夜)에 이르러 다시 양지를 씹은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다. 열반에 들기 하루전에 흰 무지개가 밤에 나타났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스님께서 임종하실 예고를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산동(山?)과 야로(野老)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으며, 새와 짐승들도 서로 처참하였다. 이른 새벽에 입적하시니,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입내봉어(入內奉御)인 왕하(王?)를 파견하여 조문(弔問)과 위로를 표하고, 다음날 우가승록(右街僧錄) 계통(繼通)과 사천감(司天監)이며 지태사국사(知太史局事)인 문상(文象) 등을 보내서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토록 하였다.

 

27일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진위사(陳謂使)와 부상서(副尙書) 좌승(左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인 김통(金統) 등을 보내어 새서(璽書)를 지참하고 가서 왕사로 진봉(進封)하고, 시호를 혜덕(慧德),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고, 아울러 자색(紫色) 바탕에 수를 놓은 가사(袈裟)와 여러 가지의 옷과 대기완(對器玩) 다향(茶香) 등 물류를 증사(贈賜)하였다.

 

신시(申時) (결락) 말에 절 서남쪽에서 다비(茶毗)하였다가, 다음 해 정월(正月) 11일 병신(丙申)에 절의 서북쪽으로 천장(遷葬)하여 유골을 안치하였는데, 이는 상법(像法)을 준수한 것이다. 오호라! 비니원내(毗尼園內)에서 비롯하였으니, 곧 출생할 것이 없는 데서 생(生)을 나타냈고, 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임종하였으니, 이는 곧 입멸(入滅)할 것이 없는 데서 입멸을 보인 것으로, 일생(一生)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다.

 

초재(初齋)인 7일로부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인 이상(二祥)에 이르는 무릇 십재(十齋)에 이르기까지의 소요되는 경비 (결락) 를 공급함이 조정(朝廷)에 있었다. 국가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문인(門人)이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우세승통(祐世僧統) 대각국사는 실로 화엄종장(華嚴宗匠)이었지만, 스님의 입적을 듣고 바야흐로 극진히 애도하여 그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생략하여 말한다면 “바야흐로 몰치(沒齒)를 기약하여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교(眞敎)를 홍포(弘布)하여 왔는데, 이제 스님께서 사망하였으니, 내 누구와 함께 친할 것인가”라 하였다. 타종(他宗)에서도 왕사를 존중하였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중화(中華)의 도인(道人) 성총(省聰)과 혜진(慧?) 양대사(兩大師)가 있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와서 왕사의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혜진이 처음 스님을 보고 흔연히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있는 구면(舊面)과 같다면서 2년 쯤 주석하다가 갑자기 병이 생겨나서 스님보다 20일 앞서 입멸하였다. 입멸할 때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선정인(禪定印)을 수인(手印)하고는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비상(非常)함이 아니어서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의지하고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종류가 심히 많았다. 여러 조정(朝廷)에 걸쳐 무릇 하사받은 (결락) 타등(他等)은 번거로움을 피하는 까닭으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귀신(貴臣)과 성족(盛族), 호상(豪商)과 대고(大賈) 등은 각기 정성을 다하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날이 없었다. 속수(俗壽)는 59요, 하납(夏臘)은 48세였다.

 

이에 상수(上首) 제자인 도생승통(導生僧統)이 있고, 그 이하에 무릇 일천여인(一千餘人)이 함께 뜻을 모아 선사(先師)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눈물을 흘리면서 궐하(闕下)에 엎드려 임금께 주달(奏達)하였다. 그 올린 글에 이르기를, “(결락) 산두사다천(珊兜史多天)에서 공연히 미륵(彌勒)을 애모(哀慕)하는 것이옵니다만 귀부(龜趺)를 보계(寶界)에 새겨 미래에 영원토록 널리 전문(傳聞)케 하기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하신(下臣)에게 명하여 왕사의 유열(遺烈)을 천양하도록 비문을 지으라 하시므로, 신(臣)이 사양을 표하여 이르되, “신은 본성(本性)이 고루할 뿐 아니라, 노쇠(老衰)를 더하였으며, 하물며 조고(操?)를 잡을 용기조차 없음이온 어찌 속사(屬辭)를 사염(寫琰)에 부합할 수 있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중지(中旨)를 회수(回收)하여 다른 통인(通人)에게 당부하소서”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다시 제지(制旨)를 내려 이르시기를 “이비련(以碑聯) (결락) 지(之) (결락) 왕사의 비문을 지어 경행(景行)을 선양토록 하되, 더 이상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직서(直書)에 힘쓰라” 하였고, 이미 도유(都兪)에 지시하였으므로 감히 비문을 짓는 일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文章)에 질(質)이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작자(作者)의 요구에는 부끄러움이 없지 않다. 도(道)라는 말도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고승(高僧)의 사전(史傳)이 후대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적(行跡)의 사실만을 주워 모아 삼가 명(銘)을 서술하여 이른다.

능인(能仁)이 출현함은 중생(衆生)을 위함인 것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사파(娑婆)에 출현했네.

십이류(十二類) 중생(衆生)들을 모두 다 제도코자

팔만(八萬)과 사천법문(四千法門) 갖가지 연설하다.

때로는 방편법문(方便法門) 유시(有時)엔 진실교리(眞實敎理)

어느땐 편설(偏說)하고 혹시(或時)엔 원설(圓說)하다

서역(西域) 발상(發祥)여 사오년(四五年) 교화(敎化)하고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근역(槿域)에 두루하다.

서천(西天)의 이십팔조(二十八祖) 동토(東土)엔 육대조사(六代祖師)

조조(祖祖)가 천양(闡揚)하고 사사(師師)가 제창(提唱)하다

유(有)와 공(空) 주창하여 저마다 국집하고

성(性)과 상(相) 상치(相値)하여 성상(性相)이 적대(敵對)하나

성상(性相)을 초월하면 이도(二道)가 따로 없어

이 어찌 편견(偏見)으로 저마다 옳다 하랴!

이러한 차별견(差別見)을 그 누가 융통(融通)할까?

금산사(金山寺) 왕사(王師)만이 이 일을 감당했네.

만행(萬行)을 (결락) (결락) (결락)

숙세(宿世)에 훈습(薰習)하여 생지(生知)의 천재(天才)일새

(결락) (결락) (결락) 취령(鷲嶺)

그 칭송(稱頌) 두루하여 용병(龍?)에 가득했네!

도덕이 숭고하여 왕신(王臣)이 외호(外護)하고

덕망이 고매하여 임금의 스승되다.

그 경지(境地) 높고 높아 엿볼길 전혀 없고

보리수(菩提樹) 잘 길러서 가지에 가지로다.

비보(裨補)를 하기 위해 옛터에 절을 짓고

불씨(佛氏)를 장엄하여 유식종(唯識宗) 도량(道場)되었네!

날마다 법의(法衣) 입고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오묘(奧妙)한 그 진리(眞理)를 사자후(獅子吼) 진동하다.

법문(法門)을 들으려는 사부중(四部衆) 운집(雲集)하고

옷깃을 여미운 이 장터를 이루었네!

도(道) 어찌 멀다 하랴. 평상심(平常心) 그것이며

실천(實踐)만 한다면 이 또한 도(道)인 것을

구경(究竟)의 원묘과(圓妙果)를 이루려 할진대는

반드시 인행(因行)에서 선업(善業)을 닦을지다.

삼라(森羅)의 만상(萬像)들이 모두가 보처(補處)인데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지혜(智慧)가 교결(皎潔)함은 청담(淸潭)의 달과 같고

복덕(福德)이 구족(具足)함은 항하사(恒河沙) 모래같네.

해마다 유식참법(唯識懺法) 이기(二紀)를 계속하여

도솔천(兜率天) 상생(上生)코자 그 일념(一念)밖에 없네.

법상종(法相宗) 홍포(弘布)코자 광교원(廣敎院) 열어놓고

곳곳에 다니면서 장소(章疏)를 구(求)하여서

제본(諸本)과 교정하여 목판(木板)에 새겼으니

흩어진 꽃송이를 노끈에 꿴 것 같네!

이 법문(法門) 인경(印經)하여 골고루 법시(法施)하니

자비(慈悲)한 진리(眞理) 바람 천하(天下)에 두루 불다

원효(元曉)와 태현대통(太賢大統) 이 나라 불교(佛敎) 위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땅에 재현(再現)이 아닐런지.

문장(文章)이 도도하여 운자(韻字)만 떨어지면

정경(情景)을 감상하여 구구(句句)가 성시(成詩)일새

은총(恩寵)을 드리우니 찬란한 그 광채(光彩)여!

벽운시(碧雲詩) 좋다지만 비할 바 전혀 없네

동작(動作)의 느낀 바로 토운(吐韻)이 주옥(珠玉)일새.

작(作)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결락) 소명(所名)

수행을 쌓고 쌓아 만증(滿證)을 기약(期約)하다.

열반전(涅槃前) 흰 무지개 입적(入寂)을 예고했고,

쌍림(雙林)의 사라나무 흰 빛이 나타나다

양지(楊枝)로 양치하고 미륵(彌勒)을 부른 다음

도솔천(兜率天) 정역(淨域)으로 소요(逍遙)히 상생(上生)하다

임금께서 스님에게 보은(報恩)을 위해서

고루(孤陋)한 미신(微臣)에게 찬비(撰碑)를 명(命)하시어

사부중(四部衆) 정성모아 정민(貞珉)에 각자(刻字)하여

위대(偉大)한 그 홍덕(洪德)을 억만세(億萬歲) 전하리다.

교위(校尉) 신(臣) 이효전(李孝全)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천경(天慶) 원년(元年) 세재신묘(歲在辛卯) 맹하월(孟夏月)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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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

 

유형문화재 제127호

고려시대

높이 186cm, 폭 96cm

소재지 :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4번지

지정일자 : 1979. 1. 25

 

  

고려 문종 8년(105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예부시랑 고총이 찬하고 유림랑 임호가 전과 서를 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지만 파손이 심한 편이고 비신도 파손, 마멸이 심해 판독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글자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해동금석원』등의 문헌에 그 내용이 전한다.

 

이수는 좌우가 긴 팔작지붕형이며, 처마 끝선으로는 전각이 있고, 용마루까지 표현되어 있다. 귀부는 뒷면은 조각이 남았으나 앞쪽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육각형의 귀갑문은 안에 王자를 넣어 정교한 표면처리를 하였다. 원융국사(964∼1053)는 고려초의 명승으로 자는 혜일, 속성은 김씨이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승려가 되어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되었다.

 

현종 초에 승통에 오르고 정종 7년(1041)에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되었다. 묘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부석사에서 법사가 되었다. 문종 7년(1053)에 부석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를 원융국사라 하고 절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비가 있는 원융국사비각에는 해동화엄종조의상국사비가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비신은 새로 조성한 것이고 비갓과 비좌는 원융국사비가 발견된 곳에 함께 있었다 한다. 비갓은 우진각형으로 정상중앙에 연화문을 돌린 보주가 있고 처마끝에는 귀꽃장식이 잘 남았다. 비좌는 둥근 중판연화문대를 돌린 원형좌로 연화문은 반원이 연속된 간단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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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대각국사비 (靈通寺大覺國師碑)

 

시대

고려

연대

1125년(인종3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높이 292.4cm, 너비 158cm, 두께 18.2cm, 글자크기 18.5cm

출토지

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영통사지

소재지

(북한)-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영통사지

서체

해서(楷書), 제액(題額) 전서(篆書)

찬자/서자/각자

김부식(金富軾) / 오언수(吳彦修) / 미상



증시(贈諡)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전액(篆額)]


고려국 오관산(五冠山) 대화엄(大華嚴) 영통사(靈通寺) 증시 대각국사 비명과아울러 서문(序文)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검교(檢校) 태위(太尉) 수사도(守司徒)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판상서(判尙書)예부사(禮部事)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朝散郞) 상서 공부시랑(工部侍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오언수(吳彦修)는 칙선(勅宣)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 이하 생략 ==========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리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 이하 생략 ==========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寶幢)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의 진방(震方)에 안적(安?)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불법이 양(梁) 나라 대통(大通) 원년(元年) 정미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원효와 의상이 중흥하였으니, 이 두 스님은 십지(十地)인 성종성(聖種性)이며 대종사(大宗師)이다. 말광(末光)으로 비추는 바이며, 여파(餘波)로 가피(加被)하는 바이나 모두가 담암(?闇)에서 벗어나와 그 고명한 위치에 이르렀다.


======== 이하 생략 ==========


【음기곽외(陰記廓外)】 

대각국사 문도의 직명(職名)과 개좌(開坐), 그리고 비음(碑陰)은 좌(左)와 같다.

문인(門人) 견불사(見佛寺) 주지(住持) 사문(沙門) 혜소(慧素)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승통(僧統)

창원(昶元)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던 스님이며, 홍호사(弘護寺) 제1대 주지였다.

칭도(稱道)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기(理琦)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으로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다.

사소(俟韶) : 국사의 제자.

홍천(弘闡) : 국사의 제자.

낙진(樂眞)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기영(器英) : 국사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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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대사(三重大師)

영현(令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선기(善機)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간영(幹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영(敎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영천(英闡)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광자(廣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  생략 ====


중대사(重大師)

응주(應周)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향현(向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응수(應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총지(聰智)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소여(紹餘)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침(敎琛)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고충(古沖)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명서(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풍(戒豊)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명(繼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조진(照眞)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순명(順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수명(守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재종(在宗)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종해(從海)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하 결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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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규(法規)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이상의 문도 명단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원문은 아래에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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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수 & 김란영 - 님의 향기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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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諡大覺國師碑銘(題額)」

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碑銘(?序)」
          金紫光祿大夫檢校太尉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
          平章事判尙書禮部事修國史上柱國臣金富軾奉宣 撰」
          朝散郎尙書工部侍郎賜紫金魚袋臣?修奉  宣書
上嗣位之四年乙巳秋七月庚午?篆額大覺國師門人都僧統澄儼等師之行事以聞曰吾先師?世久矣 而碑銘未著常懼其德業有所磨滅而不記惟 上哀憐之使之?撰以示久遠 上曰嗚呼師於余爲從祖而遺功餘烈炳然」
可觀其可盖  而不章乎遂授臣富軾以行狀曰汝其銘之臣讓不獲   命 退而?曰以臣觀之師於聖人之道可謂性得而生知者也何以知其然哉自少知學不爲紛華盛麗之所移及其出家當道衰學廢之時獨能背馳於時態追古聖」
賢而祖述之不幸短命而其所樹立如此子思有言自誠而明者其是類乎師諱釋煦俗姓王氏字義天後以名犯  哲宗諱以字行  我太祖大王四世孫而文宗王第四子也母仁睿太后李氏夜夢若有龍入懷而有身焉至」
乙未秋九月二十八日生於宮中時有香氣郁然久而後歇師少超悟讀書屬辭精敏若宿習兄弟皆有賢行而師傑然出鋒?上一日謂諸子曰孰能爲僧作福田爲利益乎師起曰臣有出世志惟上所使 上曰善  母后以」
前夢貴徵竊惜之  而業己受  君命?如之何乙巳五月十四日徵景德國師於內殿剃 上再拜之許隨師出居靈通寺 冬十月就佛日寺戒壇受時春秋十一歲而學問不息己能成人?夢人傳燈觀法師書自是慧解日進」
至年甫壯益  自勤苦早夜??務博覽强記而無常師道之所存則從而學之自賢首敎觀及頓漸大小乘經律論章?無不探索又餘力外學見聞淵橫自仲尼老聃之書子史集錄百家之說亦?玩其菁華而尋其根?故議論縱橫馳」
騁??無津涯雖老師宿德皆自以爲不及聲名流聞時謂法門有宗匠矣丁未七月乙酉  敎書褒爲祐世僧統  師?有志如宋問道聞晋水淨源法師以慧行爲學者師託舶賈致書以修禮源公知師非常人?復書相招由是欲往滋」
甚至  宣王在位第二年是宋元豊七年春正月入內誠請  上會群臣議皆以爲不可師於  上前與群臣言聖賢忘軀慕道如玄奬往西域義湘入中國苟安安而不務求師非所以出家本意其言懇切繼之以泣上感激」
意許之  而群臣議確依違而罷至明年四月庚午夜留書上  王及太后率弟子壽介微服至貞州寓商客?發上聞之驚差遣官僚與弟子樂眞慧宣道隣從之五月甲午至大宋板橋鎭知密州朝奉郎范鍔迎勞?附表陳所」
以來朝之意  皇帝命主客員外郎蘇注廷導之秋七月入京師啓聖寺以中書舍人范百祿  爲主數日見垂拱殿待以客禮寵數渥縟明日表乞承師受業優詔從之遂見華嚴有誠法師先此皇帝聞僧統之來詔兩街預選」
高才碩學堪爲師範者兩街推薦誠師至是僧統?衣下風欲行弟子之禮誠師三辭而後受之乃進曰某之甲海外之鄙人也虛襟求道之日又未有所得願師慈憫開我迷雲答古佛?心而爲法至有求一文一句而捨轉輪王位今上人」
能行之可謂難矣願同志一乘同修萬行以遊華藏海者吾之願也於是僧統請問云云師嘆曰辭旨婉切善啓重關非法王之眞子?義湘之後身復承朝旨與主客員外郎楊傑出京師沿?達淮泗浸尋以至餘杭詣大中祥符寺謁源」
公如見誠公之禮源公儼然而坐僧統進曰某甲仰慕道誼以日爲歲不憚險難百舍來謁願開金口玉音以卒覺悟源公曰昔慧思一見智??知靈山之舊今僧統之來焉知非夙緣耶不須膝行爲禮請講以所聞於是誠投道應如芥」
就鍼有問有答盡其?容源公因知州蒲公宗孟之請入南山慧因院開講周譯經僧統施錢營齋以延學徒甚衆源公於前所居之處各置賢首敎藏?祖師像至此又欲辦焉而未能楊公知其意與知州及諸僚力營之僧統亦捨銀置」
敎藏七千五百餘卷及還國又以金書大經三本歸之以祝  聖壽慧因本禪院改爲講院特免租稅朝廷爲僧統故也會國王上表乞令歸國遂詔趣赴京請源公同舟講學不輟以元祐元年後二月十三日入京再見淹五」
日  朝辭至秀州眞如寺見楞嚴疏主塔亭傾?慨然歎之以金屬寺僧修葺楊公曰璿公今日始遇知音興章衡記其事云僧統可謂篤厚好學君子矣夏四月復入慧因院源公傳道訖正坐焚香云願僧統歸廣作佛事傳一燈使百」
千燈相續而無窮遂授經書爐拂以爲信非特僧統資源公而道益進源公名之所以益高以僧統揚之也禮辭源公行至天台登定光佛?觀智者親筆願文禮於塔前誓傳敎于東土楊公志之沙門中立立石始自密室京以及越往來」
凡十有四月所至名山勝境諸有聖跡無不瞻禮所遇高僧五十餘人亦皆咨問法要若源公雅所望以爲五十(五十字缺)」
慧林善淵戒律則擇基元照梵學則天吉祥紹德此皆卓然可尙故資其所長者己及將歸禪講宗師各率徒衆(四八字缺)」
學之悉備此眞重法大菩薩者也然非是始學欲以己所得與諸師相試故來耳故 其所贈詩有孰若祐世師(五十九字缺)」
三韓王子西求法鑿齒彌天兩勅敵其爲時賢所推尊類皆然也夏五月二十日隨本國朝賀回使放洋二十九日(四十八字缺)」
上及左右無不感動  皇帝所贈金繪  國王太后寄送財寶以巨萬計擧施諸道場及所聞法諸師無少(五十一字缺)」
師誕年肇基旣成多歷年國家每議其主而  難其人至是宣演敎理盡妙窮神學者海會得未曾有  上及群臣(四十八字缺)」
怠不講故官?私楮亡散幾盡遂重購求書於中國以及契丹日本又於辛未春南遊搜索所得書無慮四千卷皆塵昏蟬斷編簡壤舛???拾包?以歸請置敎藏司於興王寺召名流校定謬缺使上之??不幾稔閒文籍大備學者」
??甲戌春二月初入洪圓寺其敎學如故居興王初  順王寢?召師言寡人嘗願作大伽藍額號洪圓今病篤想不自濟若嗣君不相忘師其同心以終吾願師涕泣曰臣敢盡心力死生不易至於旣成乃命住持焉夏五月退居」
海印寺溪山自適浩然有終焉之志  獻王再徵不能致乙亥冬十月八日  肅祖?位數遣近臣齋書迎之固辭又敎曰不穀之望師可謂切矣非高山景行寤寐增想而??在原義重匪他雖不能往屢以誠請拂衣高跡曾」
不我顧古之達者非夷非惠與時卷舒冀或一來副我意焉師飜然曰備禮厚辭義不可拒乃赴都復居興王寺敎學如初丁丑夏五月住持國淸寺初講天台敎是敎舊巳東漸而中廢師自問道於錢塘立盟於佛?思有以振起之未曾」
一日忘於心  仁睿太后聞而悅之經始此寺  肅祖繼之以畢厥功師於此之時依文而顯理究理而盡悟止觀圍明語默自在?盡信書之守破惡取空之執一時學者瞻望聖涯捨舊而自來幾一千之盛矣哉世之議台宗者爲」
師百世不遷之宗渠不信哉戊寅夏四月庚寅  上命第五子侍之師手落其髮今都僧統是也辛巳春二月上以洪圓寺九祖堂成請師重修而落之前世爲祖譜不一今以馬鳴龍樹天親佛陀光統帝心雲華賢首淸凉爲九祖」
師所定也秋八月?疾隱?而坐或觀心或持經不以疲憊自止門人請修佛事曰事佛久矣上遣中使問體名醫處方俵寶衣名令於諸寺爲之請福疾革親來慰問曰恐有不可諱願聞其所欲言者曰所願重興正道而病奪」
其志伏望至誠外護以副如來遺敎則死且不?冬十月五日壬辰右脇而化享年四十七僧臘三十六是前或夢寶幢崩?于地上聞之慟命有司贈賻有加?爲國師諡曰大覺十六日癸卯茶毘?遺骨以十一月四日辛酉安備」
於五冠山靈通寺之震方從本敎也佛法以梁大通元年丁未?入新羅後一百餘年義湘元曉作是二師者以聖種性爲大宗師末光所燭餘波所加皆得以出其?闇而造其高明及去聖云遠法隨而弛世所謂名士者心蕩乎名智昏」
乎利學益浮淺涉獵典籍?烈文句置之齒牙閒??以自好後來者承誤襲謬往而不返師於是疾習俗之蔽蒙也道德之??也激昻奮勵以明道救弊爲己任黜其典學示之妙蘊剖發幽覆扶起?情雷霆而震動之雨露以溥灌之」
閒雖有心服而悅隨者而群邪嫉正謗毁沸騰以道自處恬不動心終而翕然寢變於正異時僻見妄執者革面遷慮務爲根本之學亦嘗言曰禪家所謂不籍筌蹄以心傳心則上上根智者也脫或下士以口耳之學認得一法自次爲足」
指三藏十二分敎?狗也糟粕也又烏足觀者不亦乎乃勸學楞伽起信等經論又天性至孝善養父母不怠及其亡則窮思畢情以營功德至自燒臂後値諱日亦如之仁譯持鑒識洞然樂善不倦每與縉紳先生燕見應對其言論不出聖人」
之道又其文辭平澹而有味故士大夫承風而披靡稍厭彫琢而趣雅正焉至於俗吏虎臣不以文學自業及宦道異術相背如仇讐者一見其貌聞其言則莫不?然自服恨相値之?後睿考覩畵像徘徊感慕親製?詞二百字師」
適宋時泗上禮僧伽塔上有光明如燈火天竺寺禮觀音放素光赫赫然又在海印寺講經堂宇忽動有驚起者  睿考在東宮被疾請師爲讀金剛般若經至乙夜光自口出燭於戶?傳所謂神異感通者豈是歟又不忘與福或告永」
新前路是百郡之所出入舊有?院而壞亡卽指授門人作新之名館曰指南院曰兼濟至  睿考錫以土田始師之幼太后謂言吾願於興王寺內別開一院爲若異日行道之所伴來卜地至後營?號之薦福其他所成佛像經文」
亦不能盡書師旣爲一國尊親有大政事必款密諮決故所與  上論列國家事甚多而有陰德於人民亦後世莫得而盡知師欲立言以垂不腐而志莫之遂?以群言汗漫撮其精要類別部分名曰圓宗文類又欲會古今文章有補」
於敎以爲釋苑詞林而未及參定至後乃成故去取失當門人集所著詩文殘編斷藁存者無幾紬次爲二十卷此皆率爾落筆非將以貽後也故於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者取其板焚之當時北遼天祐帝聞其名送大藏及諸宗」
疎?六百九百餘卷其餘文書藥物金帛至不可勝計燕京法師雲?高昌國阿?梨尸羅 底亦皆尊嚮以策書法服爲問遼人來使者皆請見以土物籍手以拜吾使入遼則必問師之安否最後日本人求文書於我其目有大覺國師」
碑誌其名顯四方爲異國所尊又如此師?召臣先兄釋玄湛與之遊甚歡相知之分非 期牙臣由是得以一謁容色?淸若覩靑天白日辱賜之坐語自晝窮夜試問易老莊一二大義臣偶能言之他日數稱之曰湛師弟亦才士也居」
無何師入滅噫士爲知己者用假令死而可作雖布髮而籍足亦所欣慕焉?以文字掛名於碑石之下豈不爲榮幸也哉而學術固隨辭語澁訥不能發幽德之光以宗來裔是所恨焉其銘曰」
義湘西學侮佛圓音元曉獨見或幽極深或出或處沕然同心香薰霧潤學者林林道與世喪日薄月偸有狂東走無知北遊迷不知復放不知求邪熾正滅」
不塞不流否終則傾異人挺生不留富貴而趣高明誰謂宋遠木道乃行索焉而獲爲焉而成理無不盡事無不融遊觀自在浩不可窮攝諸刹海於一毛中」
不動一步周行虛空橫流浪浪獨爲之防道其百派東至于洋始則不信??衆狂終隨而革磨?發光惟君之哲其尊其師問道之要謀事之疑陰毘密?」
幾格淸夷飄然遠擧則挽留之其道之大如天如地淵源之深固不聽議其出於時土?而己如寸雲澤彌萬里厥徒叩?稽首敷臆冀書之碑以揚宏則」
上曰其然乃命臣軾臣拜獻辭貽厥罔極」
(陰記)
 大覺國師墓室及碑銘安立事跡記」
國師墓室在靈通寺東北隅太史令崔資顥春官正全幹奉  肅廟聖旨卜定其地員外郎朴浩奉  宣述墓誌三重普滋翼玄重大師融介暹顯朗機都(以下缺)」
三百人作之歸法寺重大師妙悅忠現等五百人輸大石覆其墓皆三重翼玄督視之旣而營祭堂三間于墓南靈通寺重大師得嚴法善等五十人作之又役靈通寺  僧四百五十人(以下缺)」
恒式又造家墓下引白丁四人居之給衣食使守墓壬午五月日知奏事尹瓘奉  聖旨許立國師碑靈通寺至甲申年經始敬先院 宣命大史令崔資顥春官正全幹卜地(以下缺)」
普滋(永寧院主)三重翼玄(重閣院主)重大師德滋(香海院主)重大師眞介(岐房主)等都管勾役事重大師得妙(毘羅房主)主穀重大師勝流(眞寺觀)主材重大師融介(天台院主)石主鍛賢善爲執事?(以下缺)定宏等助手役僧二十五人興王寺重大師碩從爲石工首大師有英神妙眞憲  德甫等助手役僧二十五人成?加金三人作鍛也至癸巳年十一月日敬先院成伐靑石于沒頓山三重翼(以下缺)」
兼鍛事與石工重大師碩從助之役歸法寺僧三十五人旣伐石下山此三十五人及興王寺薦福院白丁四十人?用牛三十三首輸石到濟危寶歸法寺主首座應先領衆五百餘人出助(以下缺)」
此碑之左方彌勒堂遣歸法寺衆還之翌日以靈通寺衆五百餘人輸置敬先院東閣普光院田中有石半入于地右工重大師碩從石匠?(以下缺)」
心?集勇勵也一七日閒問?作龜形安置敬先院東閤踰八歲至辛卯年省奏大 覺國師碑在寺西北根?於勢不便宜更(以下缺)」
元忠春官正全幹到寺與門徒名公卜擇得食堂南廊外平地卽今此地是也明年二月此興王寺衆一千六百七十人(以下缺)」
慧宣(靈通寺善炤院興王寺正覺院主)福興寺住持僧統翼玄(靈通寺重閣院興王寺無相)崇善寺
(住持首座夢英檀香寺住持)?香寺住持(以下缺)」
興王寺重大師世賢神現碩從玄漢靈通寺重大師占惠洪惠志一性?碩
珍弘現朗?善解眞憲德甫爲介妙賢幸照賢覽(以下缺)」
朴瑾?其緣石匠校尉林旦刻之等刻字?士至十二月二十日畢工重大師世賢碩從申從申現指事以靈通寺衆四百五十人(以下缺)」
門人師子寺住持悟(以下缺)」
  (陰記廓內)
大覺國師門徒職名開坐碑陰如左
      門人見佛寺住持沙門慧素奉 宣書
僧就
昶元(本是景德門人 師少時所咨?者爲弘護寺第一代主) 稱道(本景德門人) 理琦(本景德門人 師少時所承受者) 俟韶弘闡樂眞(本是景德門人從師入宋求法至睿考時封爲王師) 器英聽?宣慧(以下缺)」
首座
學淵仁允爽英靈善南曉靈憲昶之融?顯深(以下缺)」
講明宿堅古先充世神悟普滋(以下缺)」
承照夢英惟儼??靈法相智顯雄處常道隣(從師入宋者)代眞則由承冠賢濬慧溫」
三重
令玄善機幹英敎英英闡廣慈(己上本景德門人)芳古洪悅道眞善嚴壽介(從師入宋者)應宣成俊(以下缺)」
圓璉神珥利崇裕幹挺賢靈印淸慧戒膚惟淸昶均正玄曇柱德稱資守慧示(以下缺)
重大師
應周向玄應守聰智紹餘敎琛古?明?戒豊繼明照眞順明守明在宗從海(以下缺)」
(己上本景德門人) 上機日滋先器講眞應成俊神占崇亮▨惟哲成?志明英冠法緣應? ?資融現守南玄?應淸壽千迪之義滋挺英處英義持??仁賢成裕幸▨(以下缺)
慧?緇秀得機念眞妙慈靈致慧高洪機猶吾玄(以下缺)」
派經成良辯(從師入宋者)慧芳(以下缺)」
裕貞周冠廣賢性英?貞法常法暢崇?順雄惟順融介暹現法悟介▨(以下缺)」
景猷潤?成璉勝流釋雲因俊道雲?鑑復元惟勝元亮宗鑑稱現(以下缺)」
慧素慧謙觀宣慧幢慧觀慧妙慧南慧悟俊隣?覺法▨性照海瓊(以下缺)」
慧嚴明介辯眞周敏周潤敎?定韶性觀懷遠慧臻笑瑾英▨繼玄(以下缺)」
慧仁善連正眞性眞戒雄雄照戒瑚慧敬慧良慧約戒如(以下缺)
道宗尙先成信銳觀玄悟?機慧深景純崇妙證玄釋詮(以下缺)」
大師
思俊唱英利英湛靈挺成慶融淸璉慧先宗哲義宏自强慧▨利宣慧千敎元照常(以下缺)
大德
自寧慧俊慧均性如冠規仁永惟白慧善正端志圓占常法規(以下缺)」
右奉  聖旨施行」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上(1984)〕

 

증시(贈諡)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전액(篆額)]

고려국 오관산(五冠山) 대화엄(大華嚴) 영통사(靈通寺) 증시 대각국사 비명과아울러 서문(序文)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檢校) 태위(太尉)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부사(禮部事)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朝散郞) 상서 공부시랑(工部侍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오언수(吳彦修)는 칙선(勅宣)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인종 임금께서 왕위를 이은 지 4년째인 을사년 가을 7월 경오일에 아울러 전액(篆額)까지 내렸다. 대각국사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澄儼)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임금께 올려 고하기를 우리 선사(先師)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명(碑銘)이 저술되지 않아서 항상 그의 위대하신 덕업(德業)이 마멸된 바가 있어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오니, 오직 임금께서는 이 일을 통찰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미래에 구원(久遠)토록 전시(傳示)되게 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슬프도다. 국사는 나에게 종조부가 되신다. 유업(遺業)으로 남기신 공적의 여열(餘烈)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를 어찌 덮어 두고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신 부식에게 행장을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자네가 비명을 지으라”고 하시므로 신이 사양하다 못하여 물러나와 서술하되, 신의 보는 바로는 국사는 성인의 도(道)에 있어서 천성적으로 갖추어 태어날 뿐 아니라 날 때부터 이미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였다. 무엇으로써 그러한 줄 아느냐하면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었고 분잡하고 화려한 세속적 영광에 대해서는 마음에 조금도 유혹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가함에 미쳐서 도덕은 쇠퇴하고 학문은 황폐한 때를 당하여 국사만이 능히 시대적인 세태와 배치되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독보적인 개혁자로서, 옛 성현의 자취를 따라 조술(祖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7세의 단명이었으나, 그의 세운 바 업적은 이와 같이 위대하였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스스로의 정성(精誠)으로 발명(發明)한 자’라 하였으니, 그와 같은 유(類)라고 하겠다.
국사의 휘는 석 후(釋煦)이고, 속성은 왕씨이며, 자는 의천(義天)이었으나, 그 후 이름이 송 나라 철종(哲宗)의 휘와 같다하여 이름 대신 자(字)를 대행(代行)하였다. 국사는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 또한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니, 어느 날 밤 꿈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고 문장을 풀이하며 작문함에 있어서, 그 정민(精敏)함이 숙세(宿世)에 이미 익힌 것과 같았다. 국사의 다섯 형제가 모두 현명하였으나, 국사가 더욱 걸연(傑然)하고 봉영(鋒穎)이 빼어났다.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리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 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이미 성인(成人)이 된 후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등관법사(燈觀法師)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전해주는 것을 받았다. 이 때부터 국사는 혜해(慧解)가 날마다 증진하였다.
나이 장년에 이르러서부터 더욱 스스로 근고 정진(勤苦精進)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골골(??)하여 많은 책을 열람하고 억세게 기억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덕이 높은 이가 있으면 지체없이 찾아가서 문학(問學)하였다. 현수교관(賢首敎觀)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大小乘)의 경율론(經律論)에 따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여력(餘力)으로 외학(外學)에 대해서도 견문이 연횡(淵橫)하여 중니(仲尼)노염(老聃)의 서적과 제자백가의 집록(集錄), 모든 사기(史記)까지도 또한 일찍부터 그 청화(菁華)함을 완미(玩味)하여 그 근저를 찾아냈으므로 의론이 종횡으로 치빙(馳騁)하고 곤곤(滾滾)하여 그 끝이 없었다. 비록 노사(老師)와 숙덕(宿德)이더라도 모두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자인하였다. 칭송하는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널리 들려서, 당시 사람들이 국사를 일컬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최고의 종장(宗匠)이라고 하였다.
정미년 7월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국사는 일찍부터 송 나라에 가서 불교를 문학(問學)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중, 진수(晉水)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혜행(慧行)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국사는 박가(舶賈)에 의탁하여 편지를 보내 예를 갖추었다. 원공(源公)이 편지를 받아 보고 국사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 알고는 곧 답장을 써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로 말미암아 국사는 가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인송 나라 원풍 7년 정월 궁내에 들어가 입송 구법(入宋求法)하고자 출국을 허락하여 달라고 정성껏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문종이 군신들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왕자의 신분으로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락을 받지 못한 국사께서는 어전에서 “군신들과 성현들은 신명을 망각하고 불도를 흠모하였으니, 현장법사(玄?法師)는 서역(西域)에 갔고, 의상조사(義湘祖師)는 중국에 들어가 구법하였거늘 어찌 편안하게만 지내고 스승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출가한 본의가 아닙니다” 라면서 고하는 말이 간절하여 말하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리하여 문종은 크게 감동하여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군신들의 결의는 확고하여 불허 방침으로 끝났다. 다음해 4월 경오일 밤 왕과 태후에게 올리는 편지를 남겨놓고, 제자 수개(壽介)를 거느리고 휘복(徽服)으로 정주(貞州)에 이르러 마침 상객선(商客船)의 출발함을 만났다. 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관료와 제자인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을 보내어 수종케 하였다. 5월 갑오에 대송 판교진(判橋鎭)에 이르렀다. 이 때 밀주(密州)지사(知事)인 조봉랑(朝奉郞) 범악(范鍔)이 영접하여 여행 중의 노고(路苦)를 위로하고, 철종에 표주(表奏)를 올려국사가 송 나라에 온 뜻을 구진(具陳)하였다. 황제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소주정(蘇注廷)에 명하여 안내토록 하였다. 7월 경사계성사(啓聖寺)에 들어갔다.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이 주관하여 수일 후 부름을 받아 수공전(垂拱殿)에서 철종을 배알하고 객례(客禮)로써 기다려 아름다운 의류, 요, 이불등 몇 가지의 총품(寵品)을 받았다. 다음날 표장(表狀)을 올려 수업할 스승을 소개해 줄 것을 건의하였더니, 황제는 특조를 내려 주선해 주도록 하였다. 드디어 화엄종의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황제께서 우세 승통이 송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가(兩街)에 명하여 미리 고재 석학(高才碩學)을 선발하여 사범(師範)에 감당하도록 하였으므로 양가에서 유성법사를 추천하였다. 승통이 그 곳에 이르러 법사의 하풍(下風)구의(?衣)하고, 제자의 예를 행하려 했다. 그러나 유성법사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받아들였다.
이에 국사께서 법사에게 여쭙되, “모갑(某甲)은 해외의 비속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도를 구하였으나, 아직 얻은 바가 없으니, 원하옵건대 법사께서는 자민히 여기시어 저의 미혹한 무명의 구름을 흩어주소서” 라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고불(古佛)들은 고심(?心)하여 법을 구하되 내지 일문(一文)과 일구(一句)를 구함에 있어서도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자리까지 기꺼히 던져 버렸는데, 지금 상인(上人)이 능히 실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한다” 면서 감탄하였다. 법사가 말하되, “일승법(一乘法)에 뜻을 같이하며 함께 만행(萬行)을 닦아 화장세계(華藏世界)에 유희(遊戱)하려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 고 했다. 이 때 승통이 일승의 법문을 청문(請問)하였다. 법사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승통은 말의 뜻이 아름답고 간절하여 심심 미묘(甚深微妙)한 중관(重關)의 법을 잘 질문하니, 법왕(法王)의 진자(眞子)가 아니면 의상(義湘)의 후신(後身)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조지(朝旨)를 받들어 주객원외랑 양걸(楊傑)과 함께 경사를 나와 연소(沿?)하여 회사(淮泗)에 이르렀다가 침심(浸尋)하여 여항(餘杭)에 있는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를 찾아가서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친견하고 전일 유성법사를 만난 때와 같이 예를 올렸더니 원공(源公)이 엄연(儼然)히 앉았다. 승통이 그의 앞에 나아가 여쭙되, “모갑이 스님의 도덕을 앙모하여 하루를 1년으로 여기고 일체 험난함을 꺼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찾아왔사오니, 원하옵건대 금구(金口)의 옥음(玉音)을 개시(開示)하여 마침내 깨닫도록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라 했다. 원공이 이르기를, “옛날 혜사대사(慧思大師)가 한번 지의(智?)스님을 친견하고 곧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함께 지냈던 구면임을 알았으니 지금 승통이 찾아옴도 어찌 숙연(夙緣)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슬행(膝行)하는 예의를 차릴 것 없이 듣고자함을 청문(請問)하라” 고 했다. 그리하여 그 정성이 도응(道應)에 투합(投合)한 것이 마치 개자(芥子)가 바늘 끝에 닿는 것과 같았다. 묻는 대로 걸림없이 척척 대답하여 그 용용(?容)을 다하였다. 원공이 지주(知州)인 포종맹(蒲宗孟)의 초청으로 남산(南山) 혜인원(慧因院)에 입원(入院)하여 주역본(周譯本)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하게 되었다. 승통이 돈을 희사하여 큰 재(齋)를 베풀었는데 많은 학도들이 모여 들었다. 원공이 전에 거주하던 곳에 각각 현수(賢首)의 교장(敎藏)과 아울러 현수조사(賢首祖師)의 등상을 안치하고, 이를 다시 마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양걸(楊傑)이 그 뜻을 알고 포종맹 지주와 모든 관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경영하였다. 승통도 많은 은(銀)을 희사하고 교장 7,500여 권을 안치하였다. 귀국한 후 또 금서(金書) 대장경 삼역본(三譯本) 180권을 보내어 성수(聖壽)를 빌었다. 혜인원이 본래는 선원(禪院)이었으나, 강원(講院)으로 고치고 조세를 특면하였으니, 이는 본국 조정에서 국사를 위해서 경비를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고려의 선종이 송의 철종에게 상표하여 국사를 귀국하도록 청하였다. 드디어 철종이 조칙으로 승통을 경사로 오게 하였는데 원공과 함께 오는 선상(船上)에서도 강학(講學)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원우(元祐) 원년(元年)후 2월 13일 입경(入京)하여 황제를 재견하고 5일 동안 머무른 다음, 조정에서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주(秀州) 진여사(眞如寺)에 이르러 능엄경(楞嚴經) 주소(疏主)인 장수자선선사(長水子璿禪師)의 탑정(塔亭)이 경비(傾?)한 것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여 희사금(喜捨金)을 사승(寺僧)에게 주어 보수토록 하였다. 양공(楊公)이 말하기를, “선공(璿公)이 오늘에야 비로소 지음(知音)을 만났다” 고 하였다. 오흥(吳興)장형(章衡)기(記)에 그 사실을 기록하되, “승통은 참으로 독후(篤厚)한 호학 군자(好學君子)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그 해 4월에 다시 혜인원에 갔더니 원공이 도를 전(傳)하여 마치고 정좌(正坐)하여 분향하고 이르기를, “원컨대 승통은 귀국하여 광작불사(廣作佛事)하되, 한 등불을 전함으로부터 백천등(百千燈)으로 하여금 상속하여 무궁토록 하라”하고, 드디어 경서(經書)와 향로와 불자(拂子)를 전해 줌으로써 표신(表信)을 삼았으니, 이는 특히 승통 뿐만 아니라 원공에게도 도움이 되어 도가 더욱 증진되었다. 원공의 이름이 더욱 높아진 까닭은 승통이 더욱 발양(發揚)한 셈이 된다. 원법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와 천태산(天台山)에 이르러 정광불롱(定光佛?)에 올라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영정(影幀) 앞에서 직접 동국(東國)에 천태종지(天台宗旨)를 전포(傳布)하려는 발원문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을 세웠다. 이 사실을 양걸이 기록하고 중립(中立)스님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밀경(密京)에서 시작하여 오월(吳越)로 왕래하는 동안에 무려 14개월이 걸렸다. 이르는 곳마다 명산과 승경(勝境), 그리고 모든 성적(聖跡)이 있는 곳에는 참배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친견하여 법요(法要)를 청문(請問)한 고승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정원법사와 같이 있었던 시간은 59일이나 되었다. (결락) 혜림(慧林)선연(善淵)이고, 계율(戒律)에 대하여 자문한 스님은 택기(擇基)와 원조(元照)스님이며, 범학(梵學)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와서 흥국사(興國寺)에 있던 서천삼장(西天三藏)인 천길상(天吉祥)소덕(紹德)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탁연(卓然)하여 존경할만한 스님들이므로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장점을 길러 일가(一家)를 이룩한 선(禪), 강(講)의 종사(宗師)로서 각기 대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락) 승통은 삼장(三藏)과 모든 학문을 두루 겸비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중법대보살(重法大菩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통은 시학(始學)이 아니라, 자기의 소견과 모든 스님들과의 서로 시론(試論)해 보려고 송 나라에 온 것이라고 모든 스님들이 입을 모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승통에게 준 시에 “우세 승통과 같은 스님이 또 누구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결락)
삼한(三韓)왕자가 서쪽으로 와서 법을 구하니 “마치 습착치(習鑿齒)와 미천석도안(彌天釋道安)이 서로 대적함과 같아서 당시의 현인들로부터 추존(推尊)하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은 유(類)이다. 5월 20일 본국의 조하사(朝賀使)가 돌아오는 편을 따라 배를 타고 29일 (결락) 임금을 비롯하여 좌우 신하가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의 황제가 기증한 금사(金絲)로 짠 비단과 국왕 태후 (國王太后)가 기송(寄送)한 재보(財寶)가 수만 량에 달한 거금이었다. 이 모두를 사원 도량(寺院道場)과 법문을 청해 들었던 여러 스님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무소(無少) (결락)
국사는 탄생한 이후 일찍부터 그 기본이 이미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국가가 항상 큰 스님을 구하였으나, 그러한 인물을 얻지 못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교리를 선양하여 묘리(妙理)를 터득하고 신비(神秘)를 궁진(窮盡)하여 학인이 바다처럼 모여들어 아직까지 이와 같이 왕성한 회상(會上)이 없었다. 임금과 군신들이 (결락) 태불강고(怠不講故)로 관저(官?)와 사저(私?)를 모두 털어서 재차(再次)에 걸쳐 중국, 거란, 일본 등지로부터 경서를 구입하였다. 또 신미년 봄 남방으로 다니면서 수색하여 얻은 책이 무려 4,000권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먼지로 얼룩져서 글자가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백공천창(百孔千瘡)일 뿐 아니라 책장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단괴(斷壞)되어 어그러진 것들이다. 이를 모두 수합하여 궤중(軌中)에 담아가지고 개성으로 돌아와서 흥왕사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명유학자(名儒學者)를 소집하여 유결(謬缺) 부분을 교정 보완하고, 그를 모두 연참(鉛?)하여 몇 년만에 문집이 대비되었으므로 학자들이 기꺼히 의뢰하였다.
갑술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 : 宣宗) 이 왕위를 계승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됨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獻宗)이 두 차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王都)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不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겹합(??) 재원(在原)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寡人)이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拂衣)하였으나 일찍부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非夷非惠)하고 시속(時俗)과 더불어 권서(卷舒)가 무애(無?)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義理)를 거역할 수 없다” 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면서 교학 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정축년 5월 국청사(國淸寺)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간에 폐멸(廢滅)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스스로 전당(錢塘) 에 가서 도(道)를 문학하고 천태불롱(天台佛?)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誓願)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서원을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 인예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 국사는 이 때에 천태교문(天台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연구하여 모두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이 원명(圓明)하고 언어와 묵언(?言)이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고수하려는 집유(執有)의 생각을 발진(拔盡)하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파(破)하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학자(學者)가 국사의 성애(聖涯)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1,000명이나 되었다. 왕성한 지라!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세에 불천(不遷)하는 종지(宗旨)라 하였으니 어찌 신행(信行)하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무인 4월 경인에 숙종 임금이 다섯째 왕자에게 명하여 국사를 시봉(侍奉)토록 하고 손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도승통(都僧統)인 징엄(澄儼)이 바로 이 스님이다. 신사년 2월에 숙종 임금이 홍원사(洪圓寺)에 구조당(九祖堂)이 낙성됨으로써 국사를 청하여 중수(重修)하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는데 전대로부터 화엄종의 조보(祖譜)가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으나, 이제 여기서는 ①마명(馬鳴),용수(龍樹),천친(天親),불타(佛陀),광통(光統),제심(帝心),운화(雲華),현수(賢首),청량(淸凉) 등으로 구조(九祖)를 삼았으니, 이것은 국사가 배정(配定)한 바이다. 8월에 이르러 병을 만나 궤상(?床)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을 하다가 때로는 지경(持經)도 하여 피로하다고 하여 스스로를 중지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 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寶幢)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진방(震方)에 안적(安?)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불법이 양(梁) 나라 대통(大通) 원년(元年) 정미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원효와 의상이 중흥하였으니, 이 두 스님은 십지(十地)인 성종성(聖種性)이며 대종사(大宗師)이다. 말광(末光)으로 비추는 바이며, 여파(餘波)로 가피(加被)하는 바이나 모두가 담암(?闇)에서 벗어나와 그 고명한 위치에 이르렀다. 부처님과의 상거(相距)가 점점 멀어지매 미쳐서는 불법도 따라서 해이하여졌다. 세상에서 이르는 바 명사(名士)란 마음이 명예에 탕탕무애하고, 지혜는 이권(利權)에 눈이 어두워졌으며, 학문은 부천(浮淺)함만 더하고, 많은 서적을 섭렵하나 문구만 책렬(?裂)하여 치아간(齒牙間)에 끼워놓고, 노노(??)하게 횡설수설하며 스스로 좋아하며 착각에 빠져있다.
후학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견(邪見)으로만 치닫고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국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습속(習俗)의 폐몽(蔽蒙)과 도덕의 울체(鬱滯)함을 개탄하고 감정이 격발하여 크게 분발하며 전력을 다해서 도를 밝히고 폐단을 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국사는 잘못된 전학(典學)을 모조리 물리치고 묘온(妙蘊), 즉 묘법을 개시하며 유복(幽覆)한 것들을 부발(剖發)하고 유타(?惰)한 자를 부기하였다. 그리고 뇌정(雷霆)으로써 진동하고 우로(雨露)로써 널리 뿌리는 중간에 비록 심복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가 있으나, 많은 사견자(邪見者)들이 정견자(正見者)를 질투하여 훼방하는 소리가 비등하나 이를 도로써 자처하여 염연히 마음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학자들이 흡연(翕然)히 모여들어 고질적인 사견의 병이 정견으로 돌아갔으며, 점차로 벽견(僻見)과 망집(妄執)한 자들이 얼굴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근본적인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찍이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전제(筌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는 상상근지자(上上根智者)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하사(下士)일 경우에는 구이(口耳)의 학으로써 일법만 터득하면 스스로 만족히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선종(禪宗)에서는 삼장(三藏) 십이분교(十二分敎)추구(芻狗) 또는 조박(糟粕)이라고 천칭(賤稱)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족하다고 관찰하는 자가 또한 어찌 오견(誤見)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과 『기신론(起信論)』 등을 배우도록 권하였으며, 또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며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그가 사망하면 정성(精誠)을 다하여 천도공덕을 짓되, 내지 스스로 팔을 태우며 부모가 돌아가신 기일(忌日)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또 감식(鑒識)이 연하여 선행(善行) 닦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진신(縉紳)을 띤 선생과 더불어 마주앉아 응대(應對)하되, 그 언론(言論)이 성인의 도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또 그 문사(文辭)가 평범하고 담담하나 깊은 뜻이 있으므로 사대부들이 그의 도풍(道風)을 받아 피미(披靡)하고 점점 인위적인 조탁(彫琢)함은 싫어하고 아정(雅正)한 데로 나아갔다. 심지어 속이(俗夷)호신(虎臣)은 문학으로써 스스로 업을 삼지 아니하였으며, 환도(宦道)와 이술(異術)은 마치 원수와 같아서 한번 그 모양을 보거나 그의 말을 들으면 송연하여 스스로 승복(承服)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서로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였다. 그 후 예고(睿考)께서 국사의 화상(畵像)을 보고 배회(徘徊)하면서 감모(感慕)하여 친히 200자나 되는 영찬(影讚)을 지었다.
국사가 송 나라에 갔을 때, 사상(泗上)에 있는 승가대사탑(僧伽大師塔)에 예배를 드릴 적에 등불과 같은 광명이 나타났고, 천축사(天竺寺)에서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함에는 혁혁한 흰 광명을 방광(放光)하였다. 또 해인사(海印寺)에서 『화엄경』을 강설할 때는 당우가 홀연히 진동하여 경기(警起)하는 상서(祥瑞)가 나타났었다. 예고께서 아직 동궁에 있을 때 병에 걸렸다. 그리하여 국사를 청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독송케 하였다. 을야(乙夜)에 이르러 광명이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방 안을 훤히 비추었으니 고승전(高僧傳)에 이른 바 신이감통(神異感通)이란 것이 어찌 이러한 것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또 국태민안을 위하여 흥복사(興福寺)를 창건하는 일을 잊지 아니하였으며, 혹은 국가의 전로(前路)가 영원히 새로워지기를 기고(祈告)하였으니, 이곳은 백군(百郡)이 출입 교차하는 요충지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국태민안을 위한 기도처인 관(館)과 원(院)이 있었으나, 괴망(壞亡)하였다면서 문인들에게 지시하여 지남관(指南館)과 겸제원(兼濟院)을 중창 복구(重創復舊)하였다. 예고께서 많은 토지를 이 절에 헌납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국사의 공로(功勞)에 속한다. 태후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흥왕사 안에 따로 일원(一院)을 개창(開創)하려는 것이니, 국사가 이일(異日)에 행도(行道)하는 장소로 삼으라” 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와서 터를 잡고 그 후 건축을 마치고는 액호(額號)를 천복원(薦福院)이라 하였다. 기타 부속공사와 기물, 불상, 경문 등은 일일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국사는 이미 일국의 존친(尊親)이 되었으므로 큰 정사가 있을 때마다, 관밀(款密)히 자문하였으므로, 임금과 더불어 나라의 대사를 논의하는 경우가 심히 많았다.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끼친 음덕이 많았으나, 또한 후세 사람들은 일일이 다 알지 못하고 있다. 국사께서 입언(立言)코자 함은 그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역대의 화엄종인(華嚴宗人)이 남긴 군언(群言)이 한만(汗漫)한 가운데서 그 정요(精要)만을 촬략(撮略)하여 종류별로 분류해서 『원종문류(圓宗文類)』라 이름하였다. 고금의 문장 중에 교(敎)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회통(會通)하여 『석원사림(釋苑詞林)』을 만들다가 애석하게도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문인들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편집상에 있어 산거(刪去)하고 취입(取入)하는 과정에서 타당성을 어기는 실수를 범한 부분이 많았다. 문인들이 소집(所集)한 국사의 시문(詩文), 잔편(殘編), 단고(斷藁) 등은 거의 주차(紬次)가 없이 엮어 20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솔이(率爾)하게 낙필(落筆)한 것이므로 후세에 끼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므로 생전에 그 글 중에 필사(筆寫)한 책과 각판(刻板)한 판목(板木), 그리고 모든 원고를 소각해 버렸다.
당시 북요(北遼)의 천우 황제(天祐皇帝)가 국사의 이름을 듣고 대장경과 제종(諸宗)의 소초(疏?) 6,900여 권을 보내왔으며, 그 밖에도 문서, 약물, 금백(金帛) 등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연경(燕京)에 있는 운서법사(雲?法師)고창국(高昌國)시라부저(尸羅?底) 아도리(阿?梨) 등도 모두 국사를 지극히 존경하여 책서(策書)와 법복(法服)을 보내어 문안하였으며, 요 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모두 친견하기를 희망하여 토산물로써 선사하고 적수(籍手)로써 예배하면서 “우리나라 사신들이 요에 들어오면 그때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후에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문서를 구하는 목록 중에 대각국사의 비명(碑銘)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국사의 이름이 사방으로 나타나 이국(異國)에서까지 존경하는 바가 되었다. 또 이와 같은 일도 있었다. 국사가 어느 때 신(臣)의 선형(先兄)인 석 현담(釋玄湛)을 불러 함께 학문을 논하며 서로 절친한 교분이 마치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의 사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이 단 한 번 국사를 배알한 적이 있었는데, 용색(容色)이 수청(?淸)하여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을 보는 것과 같아서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 국사를 욕되게 하였다. 낮에서부터 밤이 다할 때까지『주역』과 『노자』, 『장자』 등에 대하여 일(一), 이(二)의 대의(大義)를 시문(試問)하므로 신이 우연히 능히 대답하게 되었다. 후일 자주 칭찬하기를, “담사의 동생도 재사(才士)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국사께서 입적하였다.
슬프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등용되므로 가사(假使) 죽는 한이 있어도 가히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포발(布髮)하여 발에 흙이 묻지 앉도록 도우며, 또한 흔연(欣然)한 마음으로 흠모함이어든, 하물며 문자로써 이름을 비석의 끝에 걸게된 것이 어찌 영광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학술은 완고하며 비루하고 말솜씨는 삽눌(澁訥)하여 능히 국사의 깊은 덕에 잠겨있는 큰 광명을 개발(開發)하여 내예(來裔)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한탄하는 바이다. 이상의 홍대(弘大)한 업적을 찬송(讚頌)으로 명(銘)하여 읊노라.
신라의 의상조사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을 연구하고 그 원음(圓音) 전해왔네.
불교를 회통(會通)하신 원효는 독학이나
유치(幽致)를 궁진(窮盡)하고 심묘(深妙)를 극달(極達)하다.
국내서 연구하든 국외에 유학했든
일승(一乘)을 향한 마음 홀연히 하나였네.
심향(心香)을 훈수(熏修)하고 법우(法雨)로 윤택하며
학인(學人)은 책을 지고 숲처럼 찾아오며
불교도 세상 따라 쇠퇴를 거듭하고
일월은 쉬지 않고 허공을 지나는데
사견(邪見)은 광자(狂者)처럼 동으로 달아나고
무지한 망견자는 북으로 치닫는다.
미(迷)한 자 우매하여 회복 길 찾지 않고
방일(放逸)한 그 마음은 찾을 줄 모르는데
사심(邪心)이 치성(熾盛)하니 정법(正法)은 멸망하고
막힘도 본래없고 흐름도 아니로다.
그 마음 매각(昧却)하면 마침내 방황하고
왕자로 태어나니 그 인물 특이하네.
고귀한 부귀 영화 아랑곳 전혀 없고
불법을 배우려고 고명한 스승 찾다.
서송(西宋)을 멀다 않고 비밀리 떠나가서
창파(滄波)에 몸을 실고 송국(宋國)에 건너갔네.
곳곳에 찾아가서 지식을 친견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각종을 묻고 닦다.
이변(理邊)을 통달하니 현상계(現象界) 따로 없고
사변(事邊)을 터득하니 본체가 현상일세
견해(見解)가 자재하니 이사(理事)가 둘 아니며
호한(浩瀚)한 그 진리는 말로서 알 수 없네.
세계를 총섭(總攝)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일모(一毛)에 집어 넣어 시방(十方)이 따로 없네.
당체(當體)서 한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고
시방(十方)을 주행(周行)하되 걸림이 전혀 없네.
화엄(華嚴)의 깊은 진리 횡류(橫流)로 탕탕(湯湯)하니
국사(國師)가 그 진리를 혼자서 지녔도다.
근본은 하나지만 지말(枝末)은 백파(百派)일세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동국에 유입했네.
처음엔 한 사람도 믿는 이 있지 않아
소귀에 경 읽듯이 은은(??)히 불신하나
정녕(??)히 타이르니 마침내 돌아와서
결국엔 갈고 닦아 큰 광명 발하였다.
뛰어난 현인이며 훌륭한 철인이요
그 인품 존귀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일세.
누구나 찾아가서 진리를 문학하고
국가의 중대사는 언제나 자문했네.
그윽히 도와주고 비밀리 협찬하며
타고난 그 바탕은 지극히 청아하다.
표연(飄然)히 이 세상을 떠나려 하시므로
미혹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울면서 만류하다
불법의 그 진리는 깊고도 광대하여
그 높음 하늘같고 넓기는 땅과 같네.
진리의 그 당체는 찾을 길 아득하여
말로도 알 수 없고 글로도 볼 수 없네.
당체가 수연(隨緣)하여 공(空)에서 성사(成事)했고
나타난 현상계는 무심(無心)한 토저(土?)일 뿐
묘함은 피부같고 윤택은 구름같아
그 혜택 두루하여 만방에 가득하네.
망조(罔措)한 제자들은 수비(樹碑)를 간청했고
머리를 조아려서 소원(所願)을 피억(披臆)하니
비명(碑銘)을 세우려고 비문을 쓰게 하여
위대한 그 업적을 영원히 선양하다.
상(上)께서 주청(奏請)받고 기꺼히 윤계하여
국학(國學)을 찾던 중에 신에게 명하므로
임금께 배알하고 사서(辭書)를 올리어서
필력(筆力)이 부족타고 망극(罔極)을 개진(開陳)하다.
【음기(陰記)】
대각국사의 묘실(墓室)과 비명(碑銘) 건립에 대한 사적기(事蹟記)
국사의 묘실은 영통사 동북 쪽에 있는데, 태사령(太史令) 최자호(崔資顥)춘관(春官)정(正) 전간(全幹)숙종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터를 점복(占卜)하고, 원외랑(員外郞) 박호(朴浩)는 왕명을 받들어 묘지명을 찬술하였다. 삼중대사(三重大師)인 보자(普滋), 익현(翼玄)과 중대사(重大師)인 융개(融介), 섬현(暹顯), 낭기(朗機), 도(都) (결락) 등 300인이 작업하고, 귀법사(歸法寺)의 중대사인 묘열(妙悅), 충현(忠現) 등 500인이 대석(大石)을 운반하여 돌을 깎아 묘를 덮었으니 모두 삼중대사였는데, 익현은 감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난 후 제당(祭堂) 3간을 묘의 남쪽 영통사에 건축하였는데, 중대사인 득엄(得嚴)과 법선(法善) 등 50인이 작업하였으며, 또 영통사 스님 450명도 함께 역사(役事)하였다. (결락) 항식(恒式)을 삼았다. 또 묘하(墓下)에 묘지기가 있을 집을 짓고 백정(白丁) 4명을 불러 살게 하고는 의식(衣食)을 공급해 주면서 묘를 수호(守護)토록 하였다. 임오(壬午)년 오월지주사(知奏事)윤관(尹瓘)이 성지를 받들어 국사의 비를 영통사에 세우도록 허락을 받았다. 갑신년(甲申年)에 이르러 숙종이 경선원(敬先院)을 건축하기 시작하고, 태사령인 최자호와 춘관정 전간에게 명하여 터를 잡았다. (결락) 보자(普滋 : 영덕원(永德院)주) 삼중 익현(翼玄 : 중각원(重閣院)주) 중대사 덕자(德滋 : 향해원(香海院)주) 중대사 진개(眞介 : 기방(岐房)주) 등이 역사를 도맡아 관리하며 감독하였다. 중대사 득묘(得妙 : 곤나방(毘羅房)주)식량을 주관하였고, 중대사 승류(勝流 : 진관사(眞觀寺)주)는 목재를 주선하였으며, 중대사 융개(融介 : 천태원(天台院)주)는 석재를 담당하였고, 단현(鍛賢)은 집사(執事)를 맡았으며 품(稟) (결락) 정굉(定宏) 등은 조수(助手)였고, 역승(役僧) 25명은 흥왕사 중대사였다.
석종(碩從)은 석공의 수장(首長)이며, 대사(大師)인 유영(有英), 신묘(神妙), 진헌(眞憲), 덕보(德甫) 등은 조수이고, 역승 25명과, 성(成)과 찬(贊), 김(金) 등 3인불무간에서 도구(道具) 단련(鍛鍊)을 맡았다. 그리하여 계사(癸巳)년 11월 일에 경선원(敬先院)이 낙성되었다. 청석(靑石)은 몰돈산(沒頓山)에서 채벌하였고, 삼중(三重)인 익(翼) (결락) 단사(鍛事)와 석공을 겸하였으며, 중대사인 석종은 역사를 조역(助役)하였다. 귀법사의 스님 35명이 이미 채벌한 청석을 하산하였으니, 이 35명과 흥왕사 천복원(薦福院)의 백정(白丁) 40명, 그리고 소 33두를 동원하여 석재를 제위보(濟危寶)로 운반하였다. 귀법사 주지이며 수좌인 응선(應先)이 대중 5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조역하였다. (결락) 그리고 이 비의 좌측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다. 귀법사 대중은 모두 돌려보냈다. 다음 날 영통사 대중 500여 명이 경선원 동합(東閤)인 보광원(普光院) 전중(田中)에 있는 돌을 전외(田外)로 운반하였다. 석공은 중대사인 석종이고, 석장(石匠)은 해(?) (결락) 마음으로 용려(勇勵)를 수집(收集)하였다. 17일 동안 귀형(龜形)을 조각하여 경선원의 동합에 안치하였다. 8년을 지난 이후 신묘년(辛卯年)에 이르러 성주(省奏)하되, “대각국사의 비가 영통사 서북쪽 근맥(根脈)에 있는데 지세가 불편하니 마땅히 다른 곳으로” (결락) 원충(元忠) 춘관정인 전간이 영통사에 와서 문도인 명공(名公)과 더불어 터를 잡아 식당(食堂)을 지었으니, 남랑외(南廊外)의 평지가 바로 이 지대이다.
명년(明年) 2월에 이 흥왕사 대중 1,670명이 (결락) 혜선(慧宣 : 靈通寺 善炤院과 興王寺 正覺院主)과 흥복사(興福寺) 주지며 승통인 익현(翼玄 : 靈通寺 重覺院과 興王寺 無相院主)과 숭선사(崇善寺) 주지 수좌 몽영(夢英)과 단향사(檀香寺) 주지 (결락) 와 흥왕사 중대사인 세현(世賢), 신현(神現), 석종(碩從), 현한(玄漢) 등과 그리고 영통사 중대사인 점혜(占惠), 홍혜(洪惠), 지일(志一), 유충(惟沖), 석진(碩珍), 홍현(弘賢), 낭충(朗沖), 선선(善鮮), 진헌(眞憲), 덕보(德甫), 위개(爲介), 묘현(妙賢), 행조(幸照), 현람(賢覽) (결락) 화사(畵師) 박근(朴瑾)은 비석의 사방곽연(四方廓緣)에 문양을 그리고, 석장은 교위(校尉)임단(林旦)이 새겨서 12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중대사인 세현, 석종, 신종, 신현 등은 공사를 지도하였다. 영통사 대중 450명 (결락) 문인 사자사(師子寺) 주지. 오(悟) (결락)
【음기곽외(陰記廓外)】
대각국사 문도의 직명(職名)과 개좌(開坐), 그리고 비음(碑陰)은 좌(左)와 같다.
문인(門人) 견불사(見佛寺) 주지(住持) 사문(沙門) 혜소(慧素)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승통(僧統)
창원(昶元)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던 스님이
며, 홍호사(弘護寺) 제1대 주지였다.
칭도(稱道)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기(理琦)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으로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다.
사소(俟韶) : 국사의 제자.
홍천(弘闡) : 국사의 제자.
낙진(樂眞)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기영(器英) : 국사의 제자.
청서(聽?)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수좌(首座)
각연(覺淵) : 국사의 제자.
인윤(仁允) : 국사의 제자.
상영(爽英) : 국사의 제자.
영선(靈善) : 국사의 제자.
남효(南曉) : 국사의 제자.
영헌(靈憲) : 국사의 제자.
창지(昶之) : 국사의 제자.
융서(融?) : 국사의 제자.
현심(顯深) : 국사의 제자.
삼중대사(三重大師)
영현(令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선기(善機)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간영(幹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영(敎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영천(英闡)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광자(廣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방고(芳古) : 국사의 제자.
홍열(洪悅) : 국사의 제자.
도진(道眞) : 국사의 제자.
선엄(善嚴) : 국사의 제자.
수개(壽介) : 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시종하였던 제자이다.
응선(應宣) : 국사의 제자.
성준(成俊) : 국사의 제자.
원련(圓璉) : 국사의 제자.
신이(神珥) : 국사의 제자.
이숭(利崇) : 국사의 제자.
유간(裕幹) : 국사의 제자.
연현(挻賢) : 국사의 제자.
영인(靈印) : 국사의 제자.
청혜(淸慧) : 국사의 제자.
계부(戒膚) : 국사의 제자.
유청(惟淸) : 국사의 제자.
창균(昶均) : 국사의 제자.
정현(正玄) : 국사의 제자.
담주(曇柱) : 국사의 제자.
덕칭(德稱) : 국사의 제자.
자수(資守) : 국사의 제자.
혜시(慧示)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중대사(重大師)
응주(應周)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향현(向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응수(應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총지(聰智)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소여(紹餘)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침(敎琛)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고충(古沖)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명서(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풍(戒豊)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명(繼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조진(照眞)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순명(順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수명(守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재종(在宗)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종해(從海)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하 결락되었다)
상기(上機) : 국사의 제자.
일자(日滋) : 국사의 제자.
선기(先器) : 국사의 제자.
강진(講眞) : 국사의 제자.
응성(應成) : 국사의 제자.
준신(俊神) : 국사의 제자.
점숭(占崇) : 국사의 제자.
양구(亮口) : 국사의 제자.
유철(惟哲) : 국사의 제자.
성서(成?) : 국사의 제자.
지명(志明) : 국사의 제자.
영관(英冠) : 국사의 제자.
법연(法緣) : 국사의 제자.
응충(應沖) : 국사의 제자.
서자(?資) : 국사의 제자.
융현(融現) : 국사의 제자.
수남(守南) : 국사의 제자.
현서(玄?) : 국사의 제자.
응청(應淸) : 국사의 제자.
수천(壽千) : 국사의 제자.
적지(迪之) : 국사의 제자.
의자(義滋) : 국사의 제자.
연영(挻英) : 국사의 제자.
처영(處英) : 국사의 제자.
의지(義持) : 국사의 제자.
진서(珍?) : 국사의 제자.
인현(仁賢) : 국사의 제자.
성유(成裕) : 국사의 제자.
행구(幸口)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충(慧沖) : 국사의 제자.
치수(緇秀) : 국사의 제자.
득기(得機) : 국사의 제자.
염진(念眞) : 국사의 제자.
묘자(妙慈) : 국사의 제자.
영치(靈致) : 국사의 제자.
혜고(慧高) : 국사의 제자.
홍기(洪機) : 국사의 제자.
유오(猶吾) : 국사의 제자.
현(玄) : (이하 결락되었다)
파(派) : (이하 결락되었다)
경성(經成) : 국사의 제자.
양변(良辯) : 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시종하였던 제자.
혜방(慧芳)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유정(裕貞) : 국사의 제자.
주관(周冠) : 국사의 제자.
광현(廣賢) : 국사의 제자.
성영(性英) : 국사의 제자.
서정(?貞) : 국사의 제자.
법상(法常) : 국사의 제자.
법창(法暢) : 국사의 제자.
숭서(崇?) : 국사의 제자.
순웅(順雄) : 국사의 제자.
유순(惟順) : 국사의 제자.
융개(融介) : 국사의 제자.
섬현(暹現) : 국사의 제자.
법오(法悟) : 국사의 제자.
개구(介口)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경유(景猷) : 국사의 제자.
성련(成璉) : 국사의 제자.
승류(勝流) : 국사의 제자.
석운(釋雲) : 국사의 제자.
인준(因俊) : 국사의 제자.
도운(道雲) : 국사의 제자.
진감(珍鑑) : 국사의 제자.
복원(復元) : 국사의 제자.
유승(惟勝) : 국사의 제자.
원량(元亮) : 국사의 제자.
종감(宗鑑) : 국사의 제자.
칭현(稱現)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소(慧素) : 국사의 제자.
혜겸(慧謙) : 국사의 제자.
관선(觀宣) : 국사의 제자.
혜당(慧幢) : 국사의 제자.
혜관(慧觀) : 국사의 제자.
혜묘(慧妙) : 국사의 제자.
혜남(慧南) : 국사의 제자.
혜오(慧悟) : 국사의 제자.
준린(俊隣) : 국사의 제자.
언각(彦覺) : 국사의 제자.
법구(法口) : 국사의 제자.
성조(性照) : 국사의 제자.
해경(海瓊)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엄(慧嚴) : 국사의 제자.
명개(明介) : 국사의 제자.
변진(辯眞) : 국사의 제자.
주민(周敏) : 국사의 제자.
주윤(周潤) : 국사의 제자.
교진(敎珍) : 국사의 제자.
정소(定韶) : 국사의 제자.
성관(性觀) : 국사의 제자.
회원(懷遠) : 국사의 제자.
혜진(慧?) : 국사의 제자.
소근(笑瑾) : 국사의 제자.
영구(英口) : 국사의 제자.
계현(繼玄)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인(慧仁) : 국사의 제자.
선련(善連) : 국사의 제자.
정진(正眞) : 국사의 제자.
성진(性眞) : 국사의 제자.
계웅(戒雄) : 국사의 제자.
웅조(雄照) : 국사의 제자.
계호(戒瑚) : 국사의 제자.
혜경(慧敬) : 국사의 제자.
혜량(慧良) : 국사의 제자.
혜약(慧約) : 국사의 제자.
계여(戒如) : 국사의 제자.
도종(道宗) : 국사의 제자.
상선(尙先) : 국사의 제자.
성진(成信) : 국사의 제자.
예관(銳觀) : 국사의 제자.
성오(玄悟) : 국사의 제자.
영기(穎機) : 국사의 제자.
혜심(慧深) : 국사의 제자.
경순(景純) : 국사의 제자.
숭묘(崇妙) : 국사의 제자.
증현(證玄) : 국사의 제자.
석전(釋銓) : 국사의 제자.
대사(大師)
사준(思俊) : 국사의 제자.
창영(唱英) : 국사의 제자.
이영(利英) : 국사의 제자.
담령(湛靈) : 국사의 제자.
연성(挻成) : 국사의 제자.
경융(慶融) : 국사의 제자.
청련(淸璉) : 국사의 제자.
혜선(慧先) : 국사의 제자.
종철(宗哲) : 국사의 제자.
의굉(義宏) : 국사의 제자.
자강(自强) : 국사의 제자.
혜구(慧口) : 국사의 제자.
이선(利宣) : 국사의 제자.
혜천(慧千) : 국사의 제자.
교원(敎元) : 국사의 제자.
조상(照常)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대덕(大德)
자녕(自寧) : 국사의 제자.
혜준(慧俊) : 국사의 제자.
혜균(慧均) : 국사의 제자.
성여(性如) : 국사의 제자.
관규(冠規) : 국사의 제자.
인영(仁永) : 국사의 제자.
유백(惟白) : 국사의 제자.
혜선(慧善) : 국사의 제자.
정단(正端) : 국사의 제자.
지원(志圓) : 국사의 제자.
점상(占常) : 국사의 제자.
법규(法規)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이상의 문도 명단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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