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 김구(金絿)(사온직장공파/대흥공파/문의공)
(1488∼1534) 47歲. 조선 중기의 문신 및 서예가. 字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아버지는 증좌승지(贈左承旨) 계문(季文)이며, 어머니는 증숙부인(贈淑夫人) 전의이씨로 현감(縣監) 겸인(兼仁)의 딸이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별시 문과 2등 1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고 저작박사, 수찬, 교리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조좌랑에 옮겼다가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사간원 헌납, 사간, 장악원정을 거쳐 홍문관 응교, 전한으로 이배(移拜)되었으며 항상 응교를 겸임하였다. 한 때 성균관 사성으로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 있고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요" 하며 술을 같이 마셨다.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 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렀고 호당에 들어갔다. 이 때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등 젊은 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했다. 그러나 남곤, 심정등이 원한을 품고 임금에게 대역으로 모함하여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해로 귀양중 화전별곡을 지었는데문학적인 작품으로 유배가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귀한 소산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작품은 음양으로 후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31년(중종 26) 임피(臨陂: 현 옥구군)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부모가 구몰하였다. 부모의 산소에 가서 통곡하다가 기절까지 하였고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함에 풀이 다 말라 버렸다 하며 이로 인해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이 고매하였으며 조선 전기, 중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이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서 살았으므로 공의 서체를 인수체라고 한다. 선조조에 광국원종 1등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가 영조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가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며, 예산의 덕잠서원(德岑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남해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이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國史大事典, 東國筆苑, 海東名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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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 질충(質忠)
(1519∼ ?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직부(直夫), 아버지는 부호군 경(鏡)이며, 어머니는 영인 삼척김씨(三陟金氏)로 참의 연손(延孫)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 동방생원과에 3등 14인으로 합격하였고 1548년(명종 4) 별시 문과에 병과 18인으로 급제하였으며 황강 김계휘와 같이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벼슬은 병조좌랑과 지제교를 지냈다.(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典故大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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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황강공(黃岡公) 휘(諱) 계휘(繼輝)
26세 김계휘(金繼輝)(양간공파/판군감사공파/의정공파) (1526∼1582). 57歲. 조선 중기의 문신. 字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아버지는 증좌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정랑 광원(光元)의 딸이다. 세 살, 네 살 때 문자를 알고 일곱 여덟살 때 문의(文義: 글의 뜻)를 통하고 15세 이전에 경서와 사기를 다 읽었고 한 번 보면 거의 다 기억하였다. 1548년(명종 4) 정시 및 과시에 연이어 장원하니 전시에 직접 응시하라는 왕명이 있어 이듬해 정시에 장원하고 전시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곧 호당(湖當)에 뽑혔다. 이듬해 부정자를 거쳐 조금 있다가 예문관 검열,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가 되었다. 1554년(명종 10) 부수찬, 지제교, 사간원 정언, 이듬해 병조좌랑,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곧 성균관 전적으로 이조좌랑에 피천되니 이 때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김홍도와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함을 주장하니 권간배의 꺼리는 바가 되어 한을 머금고 화를 전가 시키니 일시의 명류들이 혹은 귀양가고 혹은 파직당하였다. 서울을 떠나 연산에 은거하였고 1563년(명종 22) 조정의 조치가 달라져서 벼슬을 돌려주고 다시 등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중이라 이듬해 복제를 마치고 곧 승문원 교리, 예조정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여러 시(寺)의 첨정을 한 번, 정(正)을 세 번 지냈고 양사의 사간과 집의며 의정부로는 검상과 사인이요 관직(官職)으로는 응교, 전한, 직제학을 지냈다. 1566년(명종 22) 중시 문과 을과 제1인으로 뽑히니 통정에 승진하여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 중시에 올린 시표가 시정에서 걸출일 뿐만 아니라 당송명문집에도 당당히 우두머리가 될 만하니 곧 학사가 당상관이 되는 예요 상감의 은총도 받았다. 그 후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었으며 중국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1573년(선조 7) 가선에 승진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로 대사간을 네 번, 대사헌을 세 번 지냈고 평안, 전라관찰사, 공, 형조참판, 상호군,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때에는 동지성균관사,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경상감사를 재직시 백성의 제소(提訴)를 공정히 처결하여 흐르는 물같고 일의 작은 수나 이름이라도 한 번 듣고 본 것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잊지아니하니 이민(吏民)이 그 신명함을 탄복하였다. 또 급미(給米) 3백석을 연산으로 보내 고운산사에 있는 정회당을 대둔산으로 옮겨 서재를 짓고 학문을 권장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왕조계통이 명나라 서책에 잘못 기록된 점을 바로 잡는 것) 교섭차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하는데 학식이 고명한 인재로 황제를 감동시켜야할 당시의 인물은 김계휘와 이이뿐이었다. 임금이 계휘로 주청사를 삼으니 고경명과 최립은 보좌관으로 수행하였다. 1600년(선조 34) 광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으로 추증되었다. 묘(墓)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신도비가 논산시 연산면 거정리에 있으니 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見朝鮮王朝實錄, 國朝文科榜目)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