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대오거리shu****
번호 116266 | 09.07.07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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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에 6호선 증산역에서 한 여자와 조우했고, 2009년 4월까지 만났습니다.
동거기간은 2007년 8월부터 2008년 11월까지였구요.
사랑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몸에 배인 담배냄새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봅니다.
일본유학 다녀오고 10년 일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아서인지 돈이 모이지를 않더군요.
그렇다고 가족들의 삶의 질이 저로 인해 그다지 향상되는 것도 없었고...
그러다가 우연히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2005년 6월 5일. 오후 1시 35분. 6호선 증산역 플랫폼...
전날 야근한 탓에 늦게 출근하다가 그녀를 플랫폼에서 발견하곤 압구정역까지 뒤를 쫓아갔고
말을 걸었습니다.
커피마시고 어찌어찌 술자리까지 가게 되었는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보다 다섯 어린 당시에 33살이었고 누이의 의류매장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자주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영화보고 데이트...
사랑한다는 말 하기까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지병인 신증후군(몸이 붓는 신장병의 일종)으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죠.
그 다음해에 성남시에 소재한 S대학에 산업체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잠시 잃었던 기간에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학업에 대한 미련, 삶이란 것 등등 말입니다.
2006년 1학년 1학기를 서울 북가좌동에서 성남까지 통학을 했는데 다시 지병이 발생하고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붓고 걷는 것이 어렵게 된 탓입니다.
건강을 잃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것보다는 위로와 희망이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내가 일을 그만두고서라도 돕겠다고 약속을 했고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사랑했고 결혼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2007년 8월 학교근처의 오피스텔을 얻어 동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통학시간과 이동에 대한 체력부담을 줄이기 위함이었는데 졸업전까지 그 방법은 성공했고
지병이 발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4년동안 배워야할 분량의 수업을 2년내로 끝내야하는 대학과정이란...
정말 그 과제의 양이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과제에 단기간 알바(일용직노동)를 그만두고 그녀의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스토리보드에 레포트, 파워포인트, 박람회도 가야하고 바느질에 그림까지...
15년만에 과제(숙제)라는 것을 하게 된 그녀는 일종의 과제배달꾼이었더랬습니다.
수업에 가서 과제를 저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이 주된 임무였고 교양시험만 본인이 해결하면 되었습니다.
제작능력(문서나 보드작업)이나 그림능력 등이 너무 부족한터라...
그해 1학년 2학기 평점 4. 25로 6등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 2학년 1학기는 4.27로 5등을 했고 장학금도 받았죠.
방학이 되면 그녀는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전 성남에 남아 노동을 하며 다소의 학업자금을 마련했죠.
그녀의 가족들에게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안생기더군요.
전화로는 누이분과 몇차례 통화를 했지만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예기를 주로 전화통화를 통해 듣게 되었고 그 기간이 길어서인지
그냥 가족같은 느낌, 늘 주변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만 살았습니다.
동거중이지만 결혼이 아니었던 탓도 있었고요.
2학년 2학기 졸업작품전을 마치자 나이도 있고 한 그녀에게 굳이 마지막까지 수업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기로 했죠.
그해 10월말 오피스텔 계약을 마치고 그녀를 먼저 올려보냈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아주 바람직한 사랑이야기였죠.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닙니다.
전 의류수출업에 종사한 사람이라 그녀의 학업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대학(1995년 졸업)을 나온 탓에 일본수출업에 종사했고 섬유에 관해서는 박식한 편이었습니다.
2006년 5월 경.
그녀의 1학기 과제를 만들기 위해 신촌에 있는 비지니스호텔에서 1박 2일을 보냈습니다.
이런저런 옛 이야기하면서 과제만들다가 그녀가 한번 결혼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지만...
저를 만나기 전의 일이라 오히려 그런 넘과 헤어진 것 정말 다행이었다고 그래서 날 만나게 된거라고
위로를 했더랬죠.
2008년 어느 날...
더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번의 결혼 후 방황하던 자신을 북가좌동 집에 살게 해준 남자가 있었다고요...
자주 오지는 않지만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북가좌동에 같이 있다는 가족이란 다름아닌 그 남자였던 겁니다.
이건 뭐...
배신감도 이런 배신감이 없었죠.
집도 알고 해서 잠시 서울에 올라가 그 집 우편함을 확인했더니...
공과금 명의가 죄다 그 남자 이름이더군요.
더 묻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본인이 내리게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11월 초에 그녀를 서울로 올려보내고 전 잠시 생각도 할겸 재취업이 결정되기 전까지
노동을 다시 시작했고 근처의 고시원을 얻었습니다.
전반적인 불경기라 동종업계로 다시 취업한다는게 힘들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와의 어떠한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게 중요했습니다.
그해 12월 임신을 했습니다.
악몽같은 일이 벌어진거죠.
그 사람의 아이였던 겁니다.
전 어렸을 적 열병을 심하게 앓아 인공수정이 아니면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건강한 정자의 양이 보통사람의 그것에 비해 열등하게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올해 3월인가 4월에 결국 친자감별까지 했고 그 사람의 아이임을 확인 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가임기간 확인을 위해 산부인과 수없이 갔고요...
뭘 위해서였던지...
미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냥 죽던 죽이던 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그렇지 못하고 조금씩 제 자신이 폐인화되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이 마르고 의욕을 잃고 먹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7월이네요... 벌써...
그녀는 이제 연락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한번 폭주한 탓입니다.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했거든요.
그 집 가족(형부와 누이)과 통화를 했었습니다.
"사랑했으면 그걸로 끝이지 남자가 더럽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더군요.
저에게서 동전 한잎, 쌀 한톨까지 다 가져간 그녀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었습니다.
"떠나겠다"고, "내 몸 많이 망가졌으니 이대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200만원만 그냥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72킬로그램이 정상체중인 제가 지금 62킬로그램이 조금 안됩니다.
위염도 있고 술과 담배 이런 것들 때문인지...
정신적인 문제가 제일 크겠지만...
그거 마련하면 1개월간 운동하고 먹고 어찌해서든 사람다운 모습 조금이라도 만들어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죠.
돈이 필요했던 건 그 이유고, 사실 절망이랄까 좌절이랄까 3월부터는 일을 거의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연락 끊더군요.
그래서 고소 건 예기를 했습니다.
이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예기도 그녀의 가족 분이 하시더군요.
"그녀가 아닌 우리에게 전화를 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이렇게 협박해서 얼마나 돈 뜯어갔냐?"고
"너 이새끼!"
라고 말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결국 제 형에게 모든 걸 오픈했습니다.
고소해도 민사 건이고 이겨도 져도 돈은 든다라는 것.
혹 재수없게 지면 감당도 않될 일들이 발생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냥 잊으라 하더군요.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일 불쌍한 입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제가 한번 소란을 떨었던 탓에 북가좌동의 그 남자도 어느 정도까지는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불쌍한 사람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속았던 그 이상으로 그 남자도 속았겠구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고소까지 생각한 내가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남자일 수 있겠구나...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우습게도 거짓으로 모든 것을 꾸며댄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남자의 더 이상의 불행을 슬퍼해서 멈추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여자랑 2년가까이 동거를 하고 햇수로 5년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용서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 남자의 더큰 불행을 염려해서 용서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겪지는 않으리라는 나이 43살의 남자가 한숨 쉬며 몇 글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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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세상을 마주보는 시각과 스킬(재능이나 재주)은 조금 모자란 듯 보였습니다.
2005년에 인터넷과 이메일 기능조차 몰랐으니 말이죠.
S대학에 입학한 2006년.
피씨방에 데리고가서는 그날 무려 6시간 정도에 걸쳐 이메일 사용법을 알려줬습니다.
몇 달 지나니 보내고 받는 정도는 하더군요.
결혼과 사랑, 꿈같이 다가올 미래...
그런 희망적인 내용들로 가득한 120여통의 메일이 제 수신함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왜 나는 그녀의 이중적인 생활에 대해 의심 한 번 못한걸까?
정확하게 말하면 의심하기가 싫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삶의 중심에 저보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대를 다니기 전에는 병약한 그녀가 그저 걱정이 되었고...
학업 중에는 과제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울먹이는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쁨과 희망을 줘야한다는 각오,
그녀가 기뻐할 수록 제 삶이 윤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그 남자는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사업자등록은 되어있지 않은 듯하고 개인적인 인맥을 활용해서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법 명성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학업에도 상당한 자금을 지불했다더군요.
상당한 자금...
올 2월에 전 일용직근로자 유류환급금을 수령했습니다.
22만원.
내역을 보니 2007년 6월부터 2008년 5월말까지 900만 정도 일용직 일을 했더군요.
노가다라는 것을 난생 처음했는데 그 기간은 2007년 9월부터였습니다.
학기 중에는 중간/기말 전후와 방학기간이 전부였으니 그럭저럭 했던 것 같습니다.
일당 7만원/8만원 정도의 일이었으니 말이죠.
오피스텔 월세가 28만원, 관리비 79800원, 올전기시스템이라 관리비에 전기세 상하수도세 포함하면
45만원 전후가 월 기본이었습니다.
과제 재료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월평균 패션전문잡지나 보드, 실, 원단, 등등의 구입비도 20여만원 정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출이 컷던 것은 포샵교육비용이었습니다.
1시간 15000원에 디자인선생을 알바로 주 1/2회 정도 고용했는데 경원대 학생이었습니다.
1일 10만원 정도에 월 7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지출된 달은 1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학기 등록금 350여만원...
3회에 10,500,000만원...
1,030,000원을 장학금으로 한번 받았고 독후감 최우수상으로 500,000만원 상금 받았으니
대충 8,970,000원이 학비로 들어갔네요.
식비와 의류구입비 등등 계산하면 3학기 동안 동거하며
3500여만원 정도가 소비된 것 같습니다.
제가 실제로 공헌한 부분은 자료상 900여만원의 일용직노동급여와 자료없이 현장이나 인력사무소에서 입금된 몇 백만원이 전부이니...
못해도 그 남자로부터 2000여만원 전후의 금액이 들어온 것입니다.
어느 분께서 학교나 기간 유추하면 누군지 알지도 모르니 삭제하는게 좋을 듯 하다는 충고를 하셨군요.
다른 건 놔두고 대학명만 S대학으로 고쳤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아닌 그녀의 가족이나 관계된 분이 사실 이 글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니 그녀도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말라고.
그렇게 살지 못하게 다스리라고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 글 읽어주셨네요.
술 한잔하고 어찌 털어내보려 아주 오랜만에 글이란 것을 한 번 적어봤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 약 밖에 없다면 시간에 기대어 살아볼 생각입니다.
많은 충고와 염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