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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ㅇ 혁명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모택동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중국이 필요로 하는 신 중국 건설을 추진할 지도자로서는 적절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하고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인민공사」를 설치하여 「대약진운동」을 시작하였다.
ㅇ 농민들은 2만 6천여 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ㅇ 한편 공업생산에서는 우선 철강의 비약적 생산 증대를 추진했다. 특히 1년 내 철강생산을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로 모든 마을에 원시적 용광로인 토법로(土法爐)를 만들게 했다. 불과 3∼4개월 만에 100만개 이상의 토법로가 건설되었다.
ㅇ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ㅇ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생산됐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렸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고 농민들은 턱없이 엄청난 세금을 냈다.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고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ㅇ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 넣어 얻어진 것이었으며,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고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ㅇ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공포의 문화대혁명
ㅇ 1958년 제2차 5개년 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이는 철저하게 실패하여 국가 주석 자리를 유소기(劉少奇)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ㅇ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연금 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여 중국을 무질서와 혼란으로 몰아넣어 중국을 크게 퇴보시켰다.
ㅇ 10년 동란이라고 부르는 문화대혁명은 시기상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까지 실질적으로 지속되면서 중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ㅇ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유소기, 등소평 등 모택동의 충실한 부하들은 보스가 초래한 미증유의 혼란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초토화된 농촌과 중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농업집단제를 대폭 완화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갔다.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낀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ㅇ 이 혁명을 주도한 모택동의 의도는 당, 정부, 군대, 그리고 사회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반혁명계급을 타파하고, 이를 통해 진정 한 프롤레타리아트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ㅇ 지식인과 학생들도 농촌과 공장에 내보내져 프롤레타리아트화 되도록 강요받았다. 결국 유소기(劉少奇)나 등소평(鄧小平)과 같이 실용주의를 추구하던 모의 반대파가 제거되었다.
ㅇ 문혁이 더욱 극좌화된 이유 당시 전개되던 중국과 소련간의 이념분쟁에도 있었다. 이 이념분쟁은 소련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중국의 대약진 운동에 대한 소련의 비판으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ㅇ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쓴 희곡으로 명대의 충신 해서가 폭군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였고,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ㅇ 처음으로 대자보를 붙여 문화혁명을 촉발한 녜 위안쯔(섭원재) 베이징 대학 철학과 여강사가 모택동 비서 캉셩(康生) 지시에 따라서 1966년 5월 25일 베이징대학 구내에 ‘베이징대학 지도부를 마오쩌둥의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최초의 대자보를 붙여서 문화혁명을 촉발했다.
ㅇ 대자보 내용은 “집회나 대자보는 대중적이고 전투적인 최선의 방법인데도 너희(베이징대학 지도부)들은 그것을 못하게 지도함으로써 대중적 혁명을 탄압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귀는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고 개미가 거대한 나무를 뒤흔들 수 없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깃발을 들고 모든 요상한 귀신들과 흐루시초프류의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를 일소하자. 사회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ㅇ 이 대자보는 홍위병 운동을 시작하는 신호탄이 됐으며, “낡은 질서와 권위를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각급 학교 학생 교사들의 홍위병운동은 각종 파괴활동과 살인행위를 벌이다 나중에는 마오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1968년 마오의 지시를 받은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중단됐다. 10년씩 두 차례 모두 20년형을 선고받고 16년을 복역한 뒤 1989년에 출소하였다. “1966년에 대자보를 붙이고 2년 뒤인 1968년에 들어갔을 때의 죄목은 ‘반혁명’이었다. ‘당의 지시를 어긴 것’이며,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어겼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는 문혁을 배후조종한 캉셩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는 것. 나중에 1980년에 들어갔을 때는 ‘마오의 앞잡이’라는 것이었다. 문혁을 주도한 쪽과 문혁 때 핍박당한 쪽 양쪽으로 부터 모두 당했다.
ㅇ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던 모택동은 먼저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든 다음,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고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ㅇ 모택동은 1966년 가을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10년간 중국대륙을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위대한 모주석이 지지하는 그들은 더 이상 선량한 학생들이 아니라 지옥에서 온 야차들이었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공자의 초상과 불상을 파괴했고, 중국의 전통 복장이나 양복 입은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농촌은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ㅇ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홍위병들의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책들이 불태워졌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대약진 운동과 마찬가지로 모른다.
ㅇ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19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ㅇ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유소기(류샤오치, 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모택동-임표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임표(린뱌오 ,林彪)가 反모택동 운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죽었다.
ㅇ 결국 문화대혁명은 희생자만 해도 1백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적이었기 때문에, 목표달성보다는 극좌적 모험주의와 권력투쟁으로 시종하면서, 현대 중국에 대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 문화혁명·홍위병 연표
▲1966년 5월…중국공산당 문화혁명 소조 구성 ▲1966년 5월…베이징대학에 첫 대자보 등장 ▲1966년 8월…당주석 마오쩌둥, 천안문 광장서 홍위병 접견 ▲1968년 7월…마오, 홍위병들에게 하방을 지시. ▲1971년 7월…국방부장 린뱌오, 국외탈출 기도 중 몽골상공에서 추락 사망. ▲1976년 1월…총리 저우언라이 사망. ▲1976년 7월…20만 명 이상 사망한 탕산 대지진. ▲1976년 9월…마오쩌둥 사망. ▲1976년 10월…4인방 체포로 문화혁명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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