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절)에 세리인 레위(마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과 또 다른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 들어가 앉아서 잡수셨다(식사)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앉아 식사하는 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도 함께 앉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합니다.(그때 당시 백성의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여기 앉은 세리와 죄인들은 누구일까? 세리는 특히 유대인으로서 세리 된 자는 유대인(하나님 나라 백성)을 이방(로마)인족에게 팔아먹고, 자기 백성이 고혈을 빨고 핍박하는 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정복자가 피 정복자들에게 세금을 걷는 일은 공손하게 행하는 일이 아니다. 때문에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고 핍박하는 것은 유대인들 개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적 개념에 반드시 지켜야할 행위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어려움에게 구원해 내는 일이라면 자기 전 재산을 드려서라도 구원해 내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도 그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개념은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 한 백성이라면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증거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백성들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음이 의라는 단어이다.)
그런 관점에서 세리는 한 나라 백성으로 여길 수 없는 자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려 나간 자(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잘려나간 자) 취급을 받는 자이다. 이런 특성으로 창녀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실족하게 하는 자들로 이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잘려 나간 자들 취급을 받는 것이다. 즉 이들은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옛 경영의 선생인 서기관의 가르침이다. 지금 이 서기관의 옛 가르침으로 하자면 예수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 죄인들이 많았다고 기록한다. 이들은 어떤 죄인들일까? 흉악하고 난폭한 자들일까? 일부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자들이라면 감옥에 가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하게 식사를 할 수 없다. 이들은 로마(세상적인 관점)에서 죄인 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한 자들이던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반드시 해야 될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로서 B.C. 2세기의 "하시딤"(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정치적인 일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빼먹지 않고 낱낱이 지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치부하였고, 서로 분리하려 하였습니다.
특별히 정결 의식을 거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거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먹는 음식일 경우에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이란 말은 바리새인의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의인’과 ‘죄인’을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옛 선생의 가르침으로 보자면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아니며, 이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들과 함께 앉는 다는 것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들과 어울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 경영과 옛 가르침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기관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옛 경영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는 서기관과 대비해서 예수님의 어떤 부분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 (17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앞에 중풍병자의 사건과 연결된다. 인자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다. 불러서 뭐하시려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 그들 그들에게 회복(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 옛 가르침은 그들을 잘라내라는 가르침이지만, 새로운 선생인 예수는 그들을 불러 회복시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경영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감당하실 고난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받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고, 죄사하는 권능을 나타내실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그 일을 행할 것이니까? 죄인들은 무조건 다 용서 받고 회복되는가? 그래서 마가복음이 말하는 복음이 앞부분에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런 회복이 기회가 주었음에도 그 은혜 앞에 회개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새로운 경영과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나라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여전히 그는 죄인으로, 귀신의 권세아래, 형벌의 권세아래 놓여있는 것이다. 새로운 경영에서의 회개는 예수를 나의 죄의 짐과 형벌이 짐을 대신 짊어진 자로 믿고, 나의 죄를 용서하는 권능자로 믿고, 예수가 나의 회복자이신줄 믿고 예수께 돌이키는 것이다.(본문에 그 세리와 죄인이 어떻게 행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중 일이고, 마가에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 강조하여 나타내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