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톡/목정 이시규 서예전각가
날 때부터 묵향 속에 나고 자란 보령의 벼루공장 아들은 글씨쓰기도 좋아했다. 문방사우가 진짜 ‘벗’이었던 삶, 1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보령필방’을 연 아버지를 따라 서울 인사동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붓글씨를 썼고 나무며 돌에 인장을 새겼다. 아버지의 가게는 인사동 복판으로 옮겨 ‘명신당필방’이 됐고,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2004년 통일미술대전 대통령상 수상 등 작품들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시대의 서예전각가’로 살며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로, 예술잡지의 편집장으로, 평화미술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목정 이시규 서예전각가, 그는 이제 더 높은 꿈이 아닌 더 너른 품을 향하고 있다.
“마음이 붕 뜬달까요,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던 시절도 있었지요. 5년만 젊었어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었을텐데, 라며 늘 아쉬워하고 그게 멋인 줄 알고 객기도 부렸지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조금만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어요. 평범하게 사는 것이 곧 평화인데, 그걸 깨닫는데 참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20년 넘는 아침좌선과 불경읽기 덕분일까. 이제는 ‘까칠함이 아닌 포근한 맛이 느껴진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됐다. 이뤄보고 싶은 것을 다 이룬 셈이니, 이제는 가정과 내면 등 ‘안쪽으로 안쪽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미소는 참으로 편안해보였다.
“아들 륜구(교학과 4년)가 원광대 입학할 때 제가 그랬어요. 학교가서 튀지마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라, 라고요. 제 꿈도 바뀌었습니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 하면 기억에 남지 않는 작가, 라고 말하지요.”
‘기억에 남지 않는 작가’라 하기엔 국빈들의 방문으로 이미 유명한 명신당필방. 스페인 국왕 부부, 네덜란드 황태자, 코스타리카 대통령 등의 국빈들 중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의 일화는 큰 화제가 됐더랬다. 명신당필방을 직접 찾은 여왕 앞에서 한자를 썼다가 ‘중국 글씨 아니냐’고 물어오자 군말없이 ‘훈민정음’ 고체를 적어내려 찬사를 받았다. 구구절절 설명보다는 글씨와 쓰는 모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믿는 그다.
“필방에 오는 분들에게 서예와 전각 하는 모습을 다 보여드리는 게 그 이유예요. 그 과정 전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고 작품이지요. 특히 해외 입양인들과의 인연이 깊은데, 고국을 찾아 자신의 한글이름이 새겨지는 과정을 보고 또 함께 참여하는데 의의가 크지요.”
파리교당과 원불교여성회가 매년 해오고 있는 ‘한국입양청년 뿌리찾기’와의 인연도 그런 마음에서 기꺼이 참여했다. 마음같아선 직접 보여주고 싶지만, 일정상 미리 이름을 받아 일일이 새겨 전달하는 이시규 작가.
“명신당필방이 사랑받는 만큼 돌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잡지 ‘아트&씨’를 발간하는 것도 한국사회의 예술계에 뭔가 보답하는 의미지요. 그것 때문에 우리 사장님(아내 김명 교도)이 집 한 채값은 들어갔다고 속상해도 하지만요, 허허. 평화미술협회에선 미술교육이나 경험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작가들과 함께 재능기부를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길이니까요.”
한 평생 묵향 속에 살아온 그에게 글씨가 어찌 수도가 아니며 수행이 아닐까. 돌에 글씨를 새기면서 자신의 마음밭도 차분히 새겨온 목정 이시규 서예전각가. 욕심을 덜어낸 자리, 스스로 빛내지 않아도 은은하게 퍼지는 편안함이 채워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작업실을 겸한 명신당필방에서의 그의 위치를 물었을 때, 너털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사장님의 셔터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