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행위는 폭력적이다 -필자
공부, “평생 팔아먹을 수 있는 상처”
영화 <질투는 나의 힘>(<파주>의 박찬옥 감독, 2003)에는 유난히 좋은 대사가 많다. 특히 출판사 편집장으로 나오는 문성근의 대사가 좋은데, 뒷이야기로는 그의 애드리브가 많았다고 한다. 극중 그의 인생은 자유롭고 만족스럽다. 아내도 사랑하고 애인도 사랑하는 솔직, 소박(?), 행복한 남자다. 주제 파악이 되는 드문 한국 남성 캐릭터다. 그가 술에 취해 자기가 왜 문학을 포기했는지 말한다. “(머리를 가리키며) 소설가는 평생을 우려먹을 수 있는 깊은 상처가 있어야 돼. 아무리 파내도 파내도 계속 솟아나는, 팔아먹을 수 있는 상처. 그래야 글이 되는데 나는 상처가 없어. 작가가 되기에는 너무 행복한 놈이거든.”
상처는 왜 예술의 수원(水源)이 되는가. 노파심에서 부연하면 ‘예술은 감성(상처), 공부는 이성’, 이런 이분법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상처가 없어서 공부를 포기했어”라고 말하는 이는 드물다. 이 말 자체를 이해하는 이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왜 상처, 고통, 감수성, 소수자, 피억압자로서의 경험이 지식 생산과 관련이 있을까. 이 시대는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 학교 성적이 좋은 경우 ‘인간극장’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공부와 저 공부는 다른 공부인가. 사람들은 왜 ‘공부는 무엇일까’를 질문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만을 고민할까. 공부론은 인생론에 가깝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만큼이나 흔한 책 제목이 ‘공부란 무엇인가’다.
이 글의 목적은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개념을 밝히고 그런 공부가 의미 있는 콘텐츠(앎)를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과 정치학이 필요한가를 주장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문학 열풍은 사실인가? 부분적 사실인가? 날조된 현상인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는 지구(전체)가 따뜻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는 덥고 뜨거워졌다. 기온 상승으로 빙하가 대륙에서 물이 되고 사막은 남하하고 있다. 한편, 우리가 매년 겪다시피 겨울은 더 추워졌다. 삼한사온은 없다. 겨울철 단골 뉴스 중 하나는 북미와 유럽 대륙의 한파와 폭설이다. 따뜻한 곳은 없고, 뜨겁거나 춥거나 양극화다.
지구온난화? 인문학 열풍?
한국 사회의 ‘인문학 열풍’이라는 단어(현실이 아니다)를 분석하는 데 ‘지구온난화’만큼 좋은 비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무엇이며, 어디서, 어떤 열풍이 불고 있는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온난화처럼, 이런 언설의 출현 자체가 문제다.
열풍? 학계 안팎을 막론하고 한국의 인문학 상황은 삭풍도 아니고 전멸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 말한다면, 서울 시내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 대학원은 석사과정 지원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은 지 오래됐다. 입학 필기시험은 생략되고 외국어(영어)시험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학원 수강으로 대신한다. 이렇게 되면 대학원생은 외국어 공부를 안 해도 되고 학교는 돈을 번다. 전문대학원이라는 이름의 석사과정은 졸업논문 없이 시험만으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외국 대학을 포함해 박사 논문 대필 아르바이트는 은근한 소문이자 암묵적 현실이다.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몇 년 전 나는 이른바 ‘명문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수강생 100명 중 정확히 경영학과와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반반이었다. 처음에는 학과별 분반 수업인 줄 알았다. 사연인즉, 이 학교는 입학 때 계열별 모집 뒤 2학년부터 자유로이 전공을 택할 수 있는데, 200명의 사회과학 계열 학생 중 199명이 신문방송학과를, 1명이 사회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실제 상황이다. 다른 과를 선택한 학생은 전무. “그럼 신방과 말고 다른 과 교수님들은 어떻게?”라는 내 질문에, 조교 학생은 부전공이 필수인데다 복수전공이 3개까지 허용돼서 모든 학과와 과목에 “수강생이 적절하다”고 답해주었다(이후 이 대학은 신문방송학 계열을 독자적으로 신설해, 199 대 1과 같은 상황은 없다고 한다).
하이라이트는 몇 년 전 경영학 전공 출신의 모 대학 총장이 전체 교수회의에서 “철학과 같은 과가 왜 대학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괴로움(?)을 호소하다가(폭언을 반복하다가), 철학과 교수들의 동의는커녕 통보도 없이 대기업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주려다가 ‘회장님의 겸양(거부)’으로 실패한 일이다. 몇몇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하자 나랑 친분 있는 교수들은 “우리 학교는 왜 (인수) 안 하나?”며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한다.
평생교육 개념에 가까운 인문학의 유행은 분명 대학 밖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무시한다면, 자칫 ‘공부는 대학에서만 하냐?’는 제도권 중심 사고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아래는 문화비평가 문강형준의 글인데, 내 생각과 일치하는데다 정확한 문제제기여서 인용문으로서는 길지만 옮겨본다.
내 입장을 부연하다면 ‘대중 인문학’은 인문학이다/아니다, 순기능이 있다/없다 차원의 이슈가 아니다. ‘대중 인문학’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현상은 인문학의 부흥을 가져온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공부와 앎을 생산하는 체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반(反)공부’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에서 위험하다.
“‘어린이를 위한 인문학’ ‘부모 인문학’ ‘광고 인문학’ ‘사장의 인문학’ ‘돈의 인문학’ ‘연애 인문학’에다 심지어 ‘팬티 인문학’까지 있다. 조만간 ‘고3 인문학’이나 ‘조기유학을 위한 인문학’도 나올 법하다. 모든 것이 인문학이 되어버릴 때, 바로 그때가 인문학이 사라지는 시점이다. (…) 많은 대중 인문학 강의들이 어려운 텍스트를 쉽게 요약하며 즐겁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강사는 선생이라기보다 엔터테이너처럼, 관객은 학생이 아니라 방청객처럼 보인다. (…) 물론 어려운 텍스트를 읽지는 못하지만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쉽게 요약 전달해주는 일은 고귀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 공부’는 아니다. ‘공부’는 스스로 힘들게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이런 ‘공부’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자체에 이미 문제가 있다. (…) 또 하나의 강의 형태는 ‘인문학 공부’의 외피를 썼지만 실은 ‘힐링’의 연장인 경우다. 이 경우에는 아예 텍스트 강독조차 없고 바로 ‘상담’으로 들어간다. 멘토링, 힐링, 자기계발 담론 등이 큰 시장을 형성했으며, 여기에 인문학도 한몫을 하고 있다. (…) 치유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텐데, 대중은 대개 ‘충격요법’을 선호하는 것 같다. 눈빛이 흔들리는 피상담인의 불안 앞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호통과 함께 그 불안의 실체를 분석하면서, 생의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 대개 힐링 인문학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분석보다 개인의 자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이런 형태의 ‘인문 치료’는 절대 사회를 불편하게 하는 법이 없다. 당연히 모두에게 사랑받을 것이며, 인기도 계속될 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대중 인문학’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다. 쉬운 이해에 즐거워하거나 감동에 눈물 흘리는 대중, 그리고 권위와 카리스마로 무장한 강사라는 요소가 그것이다. (…) 그런 점에서 오늘 유행하는 ‘대중 인문학’은 대중의 지적 성숙을 의미하는 게 전혀 아니다.” -문강형준,
문강형준은 대중 인문학 내용이 충격요법의 힐링이라는 점에서 철학자와 종교인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혹세무민이 딱 그 뜻이다. 남이 소화해줘서 먹기 좋게 다시 시장에 내놓는 지식, 미국 잡지 제호이기도 한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문제의 핵심이다. 다이제스티브(digestive)! 소화와 소개의 어중간한 인문학 기능 비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은 “공부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는 순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제도 공부도 잘할 수 없는 현실
이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대한민국의 대학이 있다. 전문화가 아니라 서열화라는 학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대학은 자본주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대학은 판매자이고 교원은 판매자에게 고용된 노동자이며 학생은 소비자다. 그러나 현실의 대학은 봉건적 신분사회다. 대학은 고객만족 서비스에 관심이 없다. 어느 학교든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들을 과목이 없다”이다.
어느 대학의 겸임교수로 일하다 현업으로 복귀한 친구가, 시간강사인 죄 없는 내게 호통을 쳤다. “운전을 못하면 택시기사가 될 수 없잖아? 요리사가 요리 못하면 돼? 유일하게 자기 분야를 못해도 혹은 못할수록 취업이 되는 분야가 있더라고. 그게 교수야. 운전사는 운전을 못하면 사람 죽이잖아. 교수는 공부를 못해도 되더라. 심지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해. 얘네(대학)는 경쟁력이 없어. 우리 회사(전문직 모임)는 정말 한 사람 뽑을 때 회사의 명운이 달렸다고 생각하거든. 성실하고 무지 똑똑한 사람이 아니면 일을 못한다고.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외국 애들이랑 일을 못한다고. 경쟁이 안 돼. 근데, 여기(대학)는 똑똑한 사람을 싫어하더라.”
우리나라 대학 강의의 60%는 시간강사가 담당한다. 국가나 대학이 비용이 없어서 교원을 임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웬만한 대학들은 1천억원이 훌쩍 넘는 적립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종 학술 진흥 단체들은 프로젝트 형태로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한다. 이는 변호사들이 로스쿨을 반대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남성들이 직장 일이 피곤하다면서 성별 분업을 바꿀 의사는 전혀 없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검사들은 엄청난 업무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검사들은 검사 증원에 반대한다. 간단한 논리다.
수가 적어야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직종 불문하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발상이다. 어느 분야나 관련 종사자가 많아야 발전하기 마련인데 이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학자 수가 적으면 비판도 자유롭지 않다. 판이 좁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쿨(학파)은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 문단도 마찬가지다.
비판적, 실천적,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동어반복이다. 지식인은 그 자체로 세 가지를 갖출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인재(人災)다. 이런 이들은 어용 지식인도 되지 못한다.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10대 때 몇 년 성적으로 평생을 먹고사는, 공부를 잘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대다수 ‘걸어다니는 재앙’들을 양산한다. 가장 쉬운 설명은, 육사의 ‘커트라인이 높았던’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서울 법대가 나라를 망쳤냐, 육사가 나라를 망쳤냐”는 가십이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세월호 사건에 대처하는 관료와 언론 관련자들을 보라.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의 ‘종류’
나는 일상생활에서 ‘무식하다, 멍청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당황한다.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표현이 남을 무시하는 금기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지식인이라기보다 ‘강의/글쓰기 노동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게 ‘무식하다, 멍청하다’는 ‘일을 못한다, 안 한다, 일은 못/안 하면서 잘난 척한다’는 뜻이다. 내게 무식과 멍청(공부 못함)의 기준은, 통속적 의미의 학력(학벌)과 무관하거나 반비례하기 때문에 나는 이 표현에 대해 별다른 거리낌이 없다. ‘학식이 높은 분’들의 면전에서 대놓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대개 자신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농담으로 받아들여서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 공부로 간주되는 행위를 개념틀 없이 대중적 인식으로 순서대로 옮겨보겠다. 물론 이 세 가지는 교차, 반복, 상호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위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 입시 공부로 대표되는 지식과 정보의 습득(習得)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인식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모든 공부 문제의 출발점이다. 습득은 글자 그대로 모르는 것을 얻는 것으로(일종의 ‘득템’), 대학이나 입사 시험 합격이라는 목적이 분명하며, 공부의 대상인 지식의 성격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공부가 성적으로 수량화될 때 ‘공부를 잘한다’고 말한다.
이 공부 개념은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계급 세습, 가족주의, 고학력 여성에 대한 고용 차별과 이를 대신한 자아실현으로서 중산층 가정 만들기, 부동산 등)의 근원이자, 공부 개념 중 가장 오해된 것이다. 불필요한 공부는 아니지만 입시 공부가 실력이나 공부 자체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공부는 그냥 제도적 절차다. 입시 공부의 가장 큰 문제는 인생의 특정한 짧은 시기 좁은 분야의 능력이 평생을 좌우하는 신분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페어플레이의 종말이다. ‘좋은 대학 진학’은 한 인간의 총체적 능력으로 인식되고 인맥 등으로 사실처럼 ‘증명’된다. 계급의 학벌화, 학벌의 계급화, 학벌 계급의 인종주의화다.
학력보다 실력의 개념에 가까운 두 번째 공부 개념은 가장 범위가 넓은 것으로서 평생교육, 교양인으로서 독서, 여행, 인간관계, 실연 등 폭넓은 인생 경험을 일컫는다. ‘사는 게 공부다’ ‘배운 것(학력)은 없지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등 수많은 표현이 있다. 직장인들의 자기계발이나 힐링, 상담, 대화 등은 모든 것이 공부다. 혼자서 성경을 필사하거나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져 전문가 수준에 이른 이들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세 번째 공부 개념은, 생각하는 노동이다. 이 공부가 가장 생산적이다. ‘선생님, 연구자, 학자’라는 표현을 넘어 ‘사상가’(thinker)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공부다. 사상이 거창한 것 같지만, 단어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피노자, 푸코, 니체만이 사상가가 아니다. 자기만의 사유 방식·체계·입장을 추구하는 사람, 자신만의 렌즈로 현실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실력,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다.
공부의 결실은 통념과 달리 실제로는,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찾는 데 있지 않다(기업의 인사 담당자나 커플 매니저에게 물어보라). 직장생활의 성취나 인생의 행복은 공부보다는 자기 재현, 즉 개인의 노동의 질에 달려 있다. 공부를 못하면 일단 취직이 안 된다고? 어느 곳에서라도 인정을 받아보라. 금세 스카우트된다. 물론, 학력 차별은 심각하다. 그러나 당신이 고용주라면 학력이 좋은 사람을 원하겠는가, 일 잘하는 사람을 원하겠는가. 자본주의,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은 실력자는 누구나 알아본다는 점이다. 공부해서 남 주자? 이 말도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사회에 기여하는 공부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세 번째 공부 개념이 오히려 ‘성공’과 ‘행복’의 가능성을 제고한다. 규범(이데올로기)보다 현실을 믿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려면?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글 쓰는 속도는 타자 치는 속도일 뿐이다. 이런 이는 천재가 아니다. 단지 평소 생각을 몸 밖으로 내놓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 표현력(문장력)을 갖춘 경우이고, 그 표현력은 독학으로도, 제도권 고등교육으로도 가능하다.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라이프스타일이 결정한다. 나는 공부/글쓰기/업무 능력/정치적 입장(민주주의 의식)은 모두 ‘캐릭터’라는 개인의 몸의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치열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캐릭터다. 글을 빨리 ‘쉽게’ 쓰는 이유는 평소의 생각하는 노동 때문이지 재능 때문이 아니다.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생각이 ‘쉽게’, 깊게 되는가?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말, “생각하지 않음이 폭력이다”는 맞는 말이다. 동시에 생각하는 행위는 폭력적인(violent)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대상과의 갈등(against)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격렬하고 불편하고 신경증적이고 괴롭고 긴장되는 마음의 분란을 동반한다. ‘마음의 평화’는 공부와 가장 거리가 멀다. ‘대중 인문학’의 문제는 공부하려는 사람이 대중이냐 ‘대학원생’이냐, 공부가 이뤄지는(?) 공간이 학교냐 길거리냐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유동식으로 입에 넣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공부하기 싫을 때, 생각하기 싫을 때 하는 말이 무엇이던가. “모든 것을 잊고 마시자”라든가 “일단, 생각은 끄고!”
생각의 시작은 불편함이다. 자신의 일상과 기존 언어가 일치할 때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 경험과 규범(이데올로기)이 불일치할 때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든 타인을 설득하든 새로운 생각을 찾아야 한다. 갈등은 현실과의 불화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이다. 만족과 평화, 안락은 무지의 첫 단계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인생의 상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성(포지션)에 대한 탐구와 그로 인한 차별의 고통이나 상처에서 사유가 시작된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건물 밖에서만 건물이 보인다. 자신, 사회, 타인의 생각을 분리할 줄 아는 능력은 자신만의 사회적 위치성에서 사물을 볼 때 가능하다. 이때 고통과 상처는 약자의 상징이 아니라 타자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흔히 예술가들이 창작열이 고갈될 때 연애를 하는 것은 사랑만 한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 습득으로서 공부와 생각으로서 공부의 결정적 차이는 정치적 입장(standpoint)의 유무다. 결과론으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생산성이다. 습득으로서 공부는 생산력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없다. 기존을 반복할 뿐이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진보 진영이나 예술가, 작가, 학자보다 자본이 더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독특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아야 할 사회운동이나 학계에서 오히려 왕따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너무 슬픈 일이다.
같은 책을 A는 3번 정독하고, B는 대강 훑어본다. 그런데 B가 A보다 텍스트 장악력, 이해력이 훨씬 높다. 독후감을 A의 5배 정도 분량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생각(창의성)이 많은 경우가 있다. 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현상인가. 실제 내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한쪽은 그냥 읽는 것이다. 저자의 생각과 지식을 따라가며 책을 ‘읽는다’. 독자는 텍스트라는 길잡이를 따라가기 때문에 자기 위치도, 저자의 위치도 모른다. 흔히 통용되는, ‘개념이 없다’는 말은 맥락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쪽은 자기 관점을 저자와 충돌시키면서, 자신과 저자의 차이를 읽는다. ‘저자는 죽었다.’ 이 말은 텍스트가 독자의 프레임에 갇혀 독자가 저자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의미다.
전자의 공부 방식은 정보 습득을 위한 것이다. 쉽게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후자는 텍스트를 매개로 자기 생각을 구체화(mapping)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 구체화하는 능력은 현실 적용력, 즉 창의력의 토대가 된다. 자기 프레임이 있는 사람은 저자의 전제를 질문한다. 그 때문에 공부란 ‘잘하고 많이’ 하는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생각하는 육체적 운동이고, 주지하다시피 생각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공부가 삶이고 삶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공부라면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맞다. 다만, 이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정치학이 전제돼야 한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같은 타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