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 전경
아흔아홉 칸집으로도 불리는데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 일제는 대문채를 잘라내고 철길을 놓았다
임청각은 멀리서 보아도 규모가 매우 크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긴 터에 조밀하게 집을 앉혀 가로로 긴 채가 돋보인다. 집이 하도 장대에서 아흔아홉 칸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도 이 정도이니 제대로 갖추었다면 그 위용이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안동 임청각(臨淸閣), 보물182호,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년)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용(用)자 가로 누은 듯한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부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출처:문화재청>
임청각의 평면도
안동 임청각(보물182호).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의 세거지가 많았던 안동지방에서도 그 규모가 돋보였던 99칸의 대저택이다. 비교적 지대가 높은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부근에 있던 칠층전탑과 함께 안동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이가옥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을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으로 국가현충시설로도 지정되어 있다
안동에서 동북 방향으로 길을 잡아 안동댐으로 가다 보면 길가에 안동 보조댐이 있고, 그 인근에 임청각 고택이 나타난다. 이 고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석주의 가문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이 고택 옆에는 고성이씨 소종가도 있는데, 집 앞에 통일신라시대에 전돌로 만들었다는 신세동 7층 전탑이 있다.
그런데 임청각 고택이나 신세동 7층 전탑 모두 일제강점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은 채 오늘까지 힘겹게 버티고 있는 문화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두 문화재는 일본인이 만든 철길로 인해 생겨나는 진동과 소음, 매연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지금도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왜인들이 왜 이곳 안동의 시골구석에 철길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가 아님은 물론이요 공출할 농수산물이나 광산물이 풍부한 곳도 아닌데 말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교통을 편리하게 해주겠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지만 그들의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으니, 독립운동가들이 유독 많이 배출되는 안동 지역을 직접 통치하고 관리하자는 것이 그들의 일차 목표였다. 이렇게 일제가 철도를 부설하고 그 옆에 다시 도로를 내면서 큰 피해를 당한 곳이 바로 임청각이다.
임청각 입구에 들어서면 도로 중앙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도로의 중앙선에 위치한 이 노거수는 사실 임청각 대문 바로 바깥에 있던 것이다. 아니, 임청각 대문 바로 앞으로 도로가 들어서면서 임청각의 전각들은 그 수가 줄면서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나무 한 그루만 도로 한 가운데 우두커니 남겨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축소된 이 가옥의 본래 규모를 이 나무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나무마저 최근 싹둑 잘리어 이제 사진에서 밖에는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소중한 것들도 많았다. 예컨대 현재의 철길은 임청각 행랑채 일부와 문간채, 중층 문루를 헐어내고 가설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전각들은 기록으로만 전할 뿐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임청각은 전체적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산 아래 경사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하여 지어졌다. 남서쪽에 정침을 두고, 중앙에 별당인 군자정을 배치하였으며, 북동쪽에 사당을 배치하였는데 사당의 축은 남향을 향하는 형태이다. 전면에서 보면 일자에 가깝게 배열한 형태로 크게 정침과 별당인 군자정, 사당 공간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 담장이 둘러져 있다.
자연스런 급경사 지형을 이용한 임청각의 건물 배치
도로에서 철길 뒤로 돌아가 보면 철길을 따라 평행으로 길게 선 담장과 긴 바깥 행랑채가 이어져 있고, 행랑채 끝 부분에 건물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단칸 맞배지붕의 대문이 하나 나타난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초라한 대문은 아니었다
규모에 비해 초라한 대문
원래는 장엄한 중층 누각형 대문이었는데 일제가 철길을 명분으로 철거하엿다 .
바깥 행랑채 전경
본래는 장엄한 중층 누각형 대문이었는데 이제는 철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이처럼 작은 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언덕 위의 군자정으로 오르는 일각문이 바라다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높은 언덕 위로 사당이 보인다. 그리고 왼편은 정침 공간으로, 역시 사랑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보인다.
대문에서 보면 별당인 군자정 담장 끝에 살며시 사랑채 대청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열세 칸의 바깥행랑채가 2단의 축대 위에 반듯이 서 있다. 특히 바깥 행랑채는 행랑방과 여러 개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는데, 벽을 지지하는 하인방과 중인방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동일한 크기의 넉살무늬 창틀이 주는 단조로움을 배제하려는 지혜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 창문들은 벽에 고정되어 광창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벽은 담과 나란히 하며 더욱더 선을 강조한 모습이어서 이 집에서 느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임청각으로 오르는 바깥행랑 마당으로 다섯 칸의 창고 널판문이 듬직한 머슴의 호위를 받는 듯하고, 안채 아래의 바깥행랑 마당으로 연결하는 2분합 널문이 또 다른 공간으로의 연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지붕 끝은 맞배지붕으로 간결함을 강조하면서도 균형감이 강조된 아름다운 표현 예술을 느끼게 한다. 하얀 벽에 두툼한 창틀을 두르고 넉살무늬는 촘촘히 구획하여 짜임새를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창틀의 느낌은 이곳에서 가까운 앞내마을의 의성김씨종택 행랑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청각의 바같 행랑채와 담장
집안사람들이 거처했던 안채와 행랑채. ‘用’형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아래쪽에 하인 등이 거처하는 행랑채가 있으며, 가운데 마당이 있는 안채와 바깥사랑 등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에서 본 바깥행랑채 -안채의 행랑- 작은사랑 일부 보인다
아래쪽에 위치한 행랑채.
바깥쪽으로 노출된 건물에는 광들이 있으며, 안채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바깥 행랑채와 중 행랑채 전경 -바같행량채와 안 행량채를 연결한 부분이 2층 구조다
2층 구조가 특이한 남자 하인들의 바깥 행랑 마당
정침인 안채는 用자형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평면을 하고 있다. 따라서 건물 가운데 몇 개의 작은 중정이 있는 셈이다. 이런 모양을 양택론에서는 길하다고 한다. 현재 동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먼저 행랑채의 옆면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맨 북쪽에 방 4칸, 마루 2칸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 난 쪽문으로 들어가면 안채 마당에 이른다.
매우 규모 있게 배치되어 있는 집으로, 좁은 안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널찍한 4칸 대청이 눈에 띈다. 방들은 그 양쪽으로 나란히 줄지어 있다. 그 안쪽은 안행랑채로서, 옛날에는 여자 노비들이 기거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루가 따로 없고 앞쪽으로 좁은 툇마루가 붙어 있을 따름이다.
안행랑채의 마당은 그대로 부엌이 된다. 이 마당에서 남쪽으로 난 쪽문은 헛간 마당으로 이어지는데 안행랑채와 바깥행랑채 사이의 공간이다. 지금은 밭으로 갈아 작은 텃밭을 이루고 있다. 바깥행랑채는 자그마치 13칸이나 되는 긴 건물로, 밖에서 보면 임청각 전체의 얼굴 노릇을 하고 있다.
하늘을 열어 젖힌 모습의 안행랑 마당
안행랑채
안행랑채 안마당 오른쪽으로 안채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안행랑채 쪽)
안행랑채와 안채 연결부(인채 쪽)
안채
임청각 구조는 남녀와 계층별 위계질서가 매우 뚜렸한 구분을 이루고 있다. 여자노비들이 기거하던 안행랑채는 마루가 따로 없고 앞쪽을 좁은 툇마루만 붙여 있을 뿐이다. 좁은 하늘이 겨우 숨통을 틔워준다.
양반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양반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노비여자들의 옥안인 안행랑채, 노비 남자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고 건물군이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두렸한 구분을 이루고 있다. 또 안태와 바깥채 사이의 놓이가 2.5m난 차이나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문명함을 알 수 있다.
고성 이씨는 본래 중국 당나라 때 난을 피하여 들어온 이경·이황 형제를 시조로 한다. 고려 때는 개경 송악산 밑에서 살았는데, 토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경상남도 고성땅에 가서 살게 되어 ‘고성 이씨’로 관향을 얻었다.애초의 임청각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 지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터전을 잡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건물을 지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인용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철길과 방음벽으로 볼품없는 전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명승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사대부가의 대표적인 건물이자 강이 내려다보이는 등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
장대석으로 된 군자정의 계단 옆에는 돌로 만든 물확이 있는데, 손을 씻는 곳이다. 실내로 들기 전에 손을 닦으라는 의미로, 청결을 위한 주인의 배려가 묻어 있다. 특히 계단은 기단까지는 계단돌을 사용하고 기단부터 누마루까지는 소맷돌을 갖춘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소맷돌의 기능은 높이 올라갈수록 불안정한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듯 안정감을 갖도록 하면서 고급스러운 계단의 의장을 보여주고 있다.
임청각 마당 중앙에서 샘솟는 안채 우물
안채는 가운데에 네 칸 크기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날개채를 이어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마루는 5량 집에 툇마루를 이어 마루의 공간을 확대하였다. 안마당이 좁아 안채에서 생활하는 여인들이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까봐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대청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 된다.
장귀틀을 네 줄 넣고 만든 비교적 긴 널판을 사용하여 만든 넉넉한 크기의 마루널은 널판의 모양에서 좁은 건물 폭의 답답함을 해소시키는 심리적인 멋도 느낄 수 있다. 사랑 대청이 3량 크기와 직각인 보아지를 사용하여 단출한 천장 가구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이 안채의 대청마루 가구 구조는 동자주와 툇보를 받치는 보아지에 부드러운 구름무늬 운공을 꾸밈으로써 안채는 아기자기하면서 여성스러움을 더하게 해준다.
특히 대청마루 뒤편을 막은 바라지창은 얼른 보기에도 듬성듬성 얽은 것 같은 작은 판재들을 연결하여 꾸며 놓아서 바람이 술술 세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한나절 햇살이 가득한 시간에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좁고 긴 대청마루에 조명이 비추는 것처럼 빛의 유입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대청의 천장 가구는 별당인 임청각과 동일한 형태의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종마루를 받치는 대공에 첨차를 두었다든지, 대들보를 연결하는 동자주에 구름무늬 장식을 조각하여 꾸미는 등 반듯한 사각 기둥에 곡선의 조각들을 어울리게 함으로써 안채만의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안채 대청
안채 대청과 안방
안채 대청 마루
임청각 현판
안채 부엌 아궁이
안대청에 시원스럽게 깔린 장마루
임청각은 가운데 안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을, 오른쪽에는 안행랑을 두고 있다. 그리고 전면으로는 바깥행랑이 단을 달리하여 배치되어 있다. 안행랑은 안채 오른편에 이어져 있는데, 가운데 두 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안채와 같이 좌우로 날개채가 이어져 있다.
안행랑 대청마루의 북편으로 있는 바라지창을 보면 하나는 채광과 통풍을 위한 창의 기능을 하며, 다른 하나는 뒤뜰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 하인들이나 안주인이 뒤뜰로 나가 화초나 채소를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안채의 날개채와 안행랑의 날개채는 기단의 높이가 다른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임청각 서쪽 끝에 해당되는 안행랑의 날개채는 창고와 헛간으로만 구성되어 안채에서 사용하는 음식과 생활도구의 저장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안마님을 보필하는 하인들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대청에서 마당 쪽을 바라보면 확연히 오른쪽으로 기단의 차를 나게 하면서 그곳에 헛간을 두어 바깥행랑과 뒤뜰로 연결하는 문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도록 하였으니, 한옥은 말하지 않고 느낌으로 표현하는 표현 예술임이 분명하다.
바깥행랑채는 일자로 연결된 긴 건물로, 남자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안채와는 기단 높이에서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안행랑채와 연결되는 문은 안행랑에서 닫고 열 수 있게 하여 안채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다.
또 바깥행랑채는 대문 방향으로 연결되는 문을 두어 하인들이 밖의 일을 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문의 위치를 정하였다. 바깥마당의 크기는 작으나 전면 세 칸을 벽 없는 헛간으로 꾸며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면서 폐쇄적인 느낌을 보완하고 있다.
소박한 단아미가 풍기는 안채 박공벽 무늬
안채의 건너편에 작은 행랑채가 돌출되어 있다
작은 사랑채 마당
안채 바깥쪽으로 돌출된 작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우물을 중심으로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돌출된 작은사랑채 방과 대청마루가 있고 대청을 통해 안채로 연결된다
안채에서 바깥으로 돌출된 작은 사랑채.
대청마루 2칸과 온돌방 1칸으로 되어 있다. 대청마루를 통해 안채의 방들과 연결된다
이 집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마당이 있다. 안마당 사랑채마당 행랑채마당 대문진입마당 그리고 헛간마당 등 다섯이다. 그런데 이 마당들은 각기 자기 기능에 알맞은 크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레벨을 몇단으로 나누어서 대문진입마당과 사랑채마당 사이에는 2.5m 정도 높이의 차이가 난다.
군자정 좌측면과 협문 - 작은사랑과 군자정이 연결되는 문
사당에서 내려다 본 군자정과 본채 지붕
별당인 군자정 오르는 길
임청각 정문에서 본 군자정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 건물로, 일각문에 들어서서 보면 정면 기단 위에 누상주와 누하주로 만들어진 웅대한 건물이 귀솟음이 날렵하면서도 당당하게 서 있다. 이 건물은 임청각에서 오를 수도 있고, 대문에서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도 있다.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이다.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동쪽으로 정방형 4칸 누마루가 있고, 서쪽으로는 정면 1칸짜리 방 네 개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형태이다. 앞쪽으로 연이은 두 개의 방 뒤에는 마루 1칸을, 다시 뒤에 방 1칸을 들였다. 방과 대청 주위에는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동쪽에 네모난 작은 연못이 있어 작은 즐거움을 준다
군자정의 정면과 일각문인 정문
군자정의 정면과 일각문인 정문
안쪽에서 본 일각문인 정문
군자정은 이집을 처음 지은 중종때부터 있었던 건물로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한옥이자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바깥주인이 손님을 접견하는 사랑채로 지어진 건물로 ‘丁’자 형태를 하고 있다
군자정(君子亭)의 측면
임청각의 별당으로 누각형식의 丁자 건물이다. 중앙선 철로가 집 앞을 가로막기 전 군자정에 앉으면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을 것이다
북쪽에서 바라본 군자정 전경
군자정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은 오래된 건물이다. 군자정 대청에는 이현보(李賢輔) 등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으며, 안동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자의 평면은 丁자 모양이며, 서쪽으로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두 개 연이어 있다. 다음 1칸 크기의 마루방을 두고 그 북쪽으로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일렬로 늘어선 방과 마루에 연이어 동쪽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큰 대청을 두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온돌방은 각주(角柱)를 세워서 굴도리를 얹었고, 홑처마이며 대청 기둥은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이익공계(二翼工系)의 공포(栱包)와 화반을 배치하였으며, 대청은 연등천장이다. 대청 주위에는 판문,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았고 벽은 회벽이다.
방과 대청 주위로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렸다.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맡면이 초각(初刻)된 첨차를 놓고 소로들을 얹어 굴도리 밑의 장여를 받쳤다. 보방향으로는 쇠서 하나를 내밀어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참방 위에 화반을 두고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게 되어 있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의 동자기둥에 첨차와 소로를 짜넣어 종보와 중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종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로 마루 밑이 사방으로 터진 누마루식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아래만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대청 서쪽의 온돌방과 마루 쪽에는 방주(方柱)를 세운 굴도리집으로 간결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처마도 대청 쪽은 부연을 단 겹처마로서 팔작지붕을 이루나 서쪽 방 쪽에는 홑처마로서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정자의 동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의 둥글게 다듬은 돌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세 개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의 몸채는 정자 서쪽에 있는데 정승이 세 사람이나 탄생하였다는 영실(靈室)이 있고, 그 평면은 양택론에서 길형으로 말하는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군자정 정면
군자정 툇마루와 난간 아랬쪽에 아궁이가 있다
군자정의 정면 - 계자난간과 돌계단 그리고 난간 아래 온돌방 아궁이가 보인다
군자정 돌계단과 군자정 현판이 걸려 있다
군자정 현판
군자정 오른는 돌계단
군자정은 ‘ㅏ’자 모양의 평면을 가진 건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정침 쪽으로 한 칸씩 온돌방을 더 내어 붙여 놓은 모습이다. 방 사이에 만든 마루는 정침으로 드나드는 출입문과 연결되며 정자형 별당답게 누마루 형식에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바닥에 내려서지 않고도 난간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특히 난간은 계자각에, 돌란대와 연잎의 양각을 생략한 부드러운 하엽 양식을 갖추어 그야말로 난간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편 누마루는 2분합 판장문을 삼면에 달아, 문을 개방하면 주변에 꾸며 놓은 화단과 석가산을 만든 연지가 보이고, 경사를 따라 잘 꾸며놓은 모과나무와 단풍나무 정원도 보인다. 전면에서는 안동댐에서 흐르는 강물과 강 너머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을 감상할 수 있다.
군자정은 4벌대 자연석 허튼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대청 전면에는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네모난 방형 기둥을 덤벙주초에 세우고, 내부 천장은 무고주 5량 집으로 공간이 장대하다. 연목과 부연을 갖춘 겹처마 형식으로 주두 위에 익공을 갖춘 재주두가 없이 물익공 형식의 이익공 가구방법을 사용하였다. 건축 기준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일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화반도 설치하였다.
정침 쪽으로 있는 온돌방은 2분합 덧문에 세살무늬 창과 조밀한 넉살무늬 광창을 달아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 넉살무늬 광창은 바깥 행랑채 창문의 형태로도 사용하는 형식으로, 이 가옥에서는 정침의 다락이나 군자정, 행랑채의 광창으로 사용하고 있어 창문의 다양화가 보이면서도 엄밀히 관찰하면 용도에 따라 통일성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 집의 멋스러움으로 볼 수 있다.
연속된 쪽마루의 계자난간이 멋스러운 군자정의 동쪽 옆 모습
군자정의 남쪽 모습
군자정의 서쪽외부 창호와 난간
대청 상부에는 반듯하고 날렵한 느낌의 대들보를 사용하고 있는데 둥근기둥과 장여를 받친 첨차와 창방 위의 화반은 하얀 회벽과 함께 더욱 고풍스러우면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팔작지붕 아래 내부의 가구구조는 충량과 만나 대들보에 얹혀 지고, 그 위로는 모서리의 연목이 모아지는 종대공과 만나는 곳을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반자틀을 만들었다.
반자틀의 두 기둥은 종보와 대들보의 가운데로 얹혀 지고 나머지 반자의 두 기둥은 공중에 떠 있는 형태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둥그런 기둥이 천장에 들려 있는 것을 달동자라 불렀으니, 이는 천장 위에 달이 떴다는 말이다. 참으로 자연친화적이요, 상상력과 멋, 풍류가 응축된 건축이자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집 달동자의 절단면에는 연꽃을 그려 넣고, 부재마다에는 아래쪽으로 가운데 주홍을 긋고 양변에 먹을 그려 넣어 단정하면서도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고결하고 강직한 선비 사상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이다. 지금은 단청의 흔적만이 보이나 선명한 단청 색이 보이던 시절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매우 아름답고 단정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특히 대청마루를 열어젖히면 사당 아래 연지에는 예쁜 배롱나무가 붉게 물들어 있고 연꽃이 활짝 피어 한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역할을 한다. 연지 가운데 있는 석가산은 맷돌이 대신 올라앉아 있는데, 약간은 어색하지만 조그만 연지 안에 커다란 석가산은 불가능하니 이것으로 가정해서 대신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또한 전면으로 있는 온돌방의 세살무늬 덧문을 열어젖히면, 지대가 높은 집의 영향도 있겠지만, 높은 산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후련하게 느껴져 도연명의 글귀에서 얻은 구절로 ‘임청각’이라 이름 지은 까닭을 알 듯 하다.
군자정 내부의 방
군자정의 가구 - 군자정 천장의 반자틀과 석가래의 아름다운 질서
군자정에서 보이는 연지
임청각은 사랑채의 당호로, 군자정 별당과 나란히 산의 지형에 따라 펼쳐져 있다. 이 가옥은 평면 형태가 특이하다. 풍수지리에 따른 주택의 길지를 잡아 집을 짓는 데 있어 그 평면 형태를 일(日), 월(月)자와 같은 길자 형태로 하면 좋다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 안강의 양동 마을 향단(香壇)건물이 일(日)자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가옥은 일(日)자, 월(月)자 또는 그 합자 형태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용(用)자는 하늘을 나타내는 의미로,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랑채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마당 바닥으로 기어들어가듯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인 땅 위의 우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게다가 이 우물은 이 가옥의 혈이 있는 장소로, 훌륭한 인재 셋이 나온다는 전설이 깃든 특별한 우물이다. 지금도 항상 맑은 물이 우물 안에 가득하다.
하지만 외부의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사랑채 마당의 우물이어서 아녀자들이 빈번히 이용하기에는 불편했을 것이다. 따라서 별당인 군자정의 활용도는 또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사랑방에 별당 쪽으로 단 한 칸만의 온돌방을 두고 있는 것도 이처럼 아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이 가옥은 참으로 다양한 면에서 한옥의 예술적인 멋이 풍긴다.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부분도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사랑과 안채를 연결하고, 안채행랑과 연결된 건물의 아래에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넉살무늬 고정창을 만들어 사용하는 점이다. 그리고 대지의 높낮이를 건물의 높낮이로 표현하여 아래는 창고와 방으로 사용하고 위쪽은 다락으로 연결하여 장중함을 주면서 안채나 사랑채에 사는 사람들은 대지의 높이 차이를 느낄 수 없게 하였다. 목수의 기발한 배치 기술과 설계 방법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더욱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분리하면서도 회랑 같은 느낌의 통로를 건물 아래로 처리하고 2층을 받치기 위한 튼튼한 네모형의 방형 기둥을 두어 집 안의 장중한 분위기를 더한다
군자정 뒷편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저택에서 가장 놓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군자정 연지와 사당 측면
반듯한 돌계단과 경관에 어울리는 사당 입구
사당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로 대부분의 사대부집에서는 그 집에서 가장 놓은 위치에 배치하며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건물의 위치로 표현하였음, 이 집에서도 이러 ㄴ규칙을 따르고 있다. 사당은 별당인 군자정을 거쳐 왼쪽 언덕 위에 별도이 담장을 꾸미고 정면 한 칸에 측면 세 칸의 맞배 지붕 형식으로 지었다.
일각문을 두고 5별대의 다듬은 자연석을 허튼층쌓기 하고, 잘 다듬은 넙적한 주춧돌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사당문은 궁판을 하부에 꾸민 띠살무늬 분합을 두어 세 칸으로 나누었다. 사당은 또 1/3 크기의 툇마루를 전면에 두고 2/3에 해당하는 넓이를 재실로 꾸며 놓았다.
가구 기법은 사대부가의 절제된 기품을 느끼게 하듯 기둥에는 보아지가 생략되고, 풍판을 단 옆면의 모서리도 화려하지 않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특히 사당에서 바라보면 군자정의 지붕 위로 안동댐에서 흐르는 물과 임청각이 발아래 놓여 있어 조상님들이 항상 집안을 돌보아 주실 것 같은 배치 모양을 갖추었다.
가장 높고 양지 바른 장소에 자리한 사당 전경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는 재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반칸 정도의 툇마루를 두고 있다
전통 한옥을 답사하거나 감상할 때에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더하여 그 집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 그리고 정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가옥은 지어진 후 여러 인물들이 배출되고, 생활의 모범이 되어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문화재는 그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의 나무, 꽃과 뒷동산, 마을 앞 냇물 등 환경적인 요소들도 그 집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최근 안동시에 따르면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가는 길인 군자정 철길 건너편에 수령 3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사라졌다.
안동시민과 답사객들에게 이야깃거리였던, 사연도 많고 신령스런 나무로 사랑을 받아 온 회화나무가 누군가에 의해 베어졌다고 한다. 특히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나무를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 해서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다.
따라서 전국에 있는 많은 고택이나 향교, 서원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회화나무이며, 우리 민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나무 중 하나다. 단순히 한 그루의 나무가 사라져 버렸다는 의미로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다. 숭례문 방화나 낙산사 화재, 고택으로는 함양의 정여창고택 방화, 안의의 허삼둘가옥 방화 등 너무나 정신없고 어지러운 세상에 문화재를 사랑해야하는 우리들의 몸부림이 아름답게 전달되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었으면 한다.
임청각은 영남산을 등지고 그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지난 1942년 일제가 집 앞마당과 집 일부를 철거하고 중앙선 기찻길을 내는 바람에 현재는 규모가 70칸 정도로 축소된 채 낙동강 풍경과도 단절되어 있다. 중앙선 선로와의 거리는 약 7 m이다.
이에 따라 임청각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2014년에는 1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임청각 주변 시설정비에 나섰으며, 2016년부터는 4억 3000만원의 예산으로 보수 사업 등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선 선로 역시 다른 쪽으로 내는 공사가 진행 중이며 안동역도 곧 이전할예정이다., 빠르면 2020년까지 임청각의 옛모습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일제의 철도 부설로 훼손된 임청각 복원된다 - 문화재청 복원정비종합계획 발표
임정 국무령 지낸 이상룡의 옛 집 - 독립투사 9명 배출한 역사적 장소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 등 훼손 - ‘미스터 션샤인’도 모티브 따와
문 대통령 광복절에 임청각 비극 환기 - 해방 70여년만에 복원 본격화
낙동강 기슭에 자리한 안동 임청각의 전경.
원래 집 경내를 일제는 1940년대 중앙선 철도를 깔면서 허물고 훼손했다
경북 안동시 법흥동 낙동강 기슭에는 우리나라에서 덩치가 가장 크다고 알려진 조선시대 양반 살림집 하나가 버티고 있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으로 중앙선 철로를 끼고 가는 길에 장대한 기와지붕들이 늘어선 전통 가옥을 만나게 되는데, 고성 이씨 큰 종택인 ‘임청각’(국가보물)이다. 길가에 가로로 10여칸을 죽 도열하듯 배치한 행랑채들의 모습만으로도 위용이 느껴지는 이 거대 가옥은 예사로운 집이 아니다.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냈으며 만주에 독립군 양성기지로 신흥 무관학교를 세운 석주 이상룡(1858~1932년)이 자랐던 집으로 독립지사만 9분을 배출한 한국독립운동사의 산실이다.
대가는 컸다. 일제는 집 경내를 허물고 건물들을 뜯으면서 중앙선 철도를 놓아버렸다. 99칸집은 50여칸으로 쪼그라들었고 수시로 지나가는 열차의 굉음이 종택의 기품을 헝클어뜨렸다. 이런 수난사를 겪으면서 곳곳에 상처를 안았던 안동 임청각이 해방 뒤 73년만에 마침내 일제 강점기 이전의 원래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를 맞게 됐다.
문화재청은 경북도, 안동시와 함께 내년부터 2025년까지 예산 280억 원을 들여 안동 임청각을 일제강점기(1941년) 중앙선 철로가 놓이기 이전의 옛 모습으로 가옥을 복원, 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을 최근 마무리했다고 22일 발표했다.
공개된 복원·정비 계획은 이상룡의 조상인 허주 이종악(1726~1773)의 문집 <허주유고>에 실린 임청각과 주변의 전경을 묘사한 그림 <동호해람>과 1940년을 전후해 찍은 사진과 지적도 등의 고증자료를 근거로 만들어졌다.
청은 계획안에 따라 임청각 주변에 있다가 사라진 분가(출가한 자식들의 가옥) 3동을 다시 짓고, 철도를 닦으면서 허물어진 주변 지형과 수목, 나루터 등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기로 했다. 임청각 들머리에는 석주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는 기념관을 세우고, 주차장·화장실·관람로·소방시설 등도 재정비할 방침이다.
임청각은 1000여년전 통일신라시대 큰 절터(지금도 옆에 국내 불교전탑의 대명사인 신세동 7층 전탑이 절터 시설로 건재하고 있다)였다가, 15세기부터 고성이씨 가문이 들어와 500여년간 터잡고 살아온 종택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살림집들 가운데 가장 장대한 규모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세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 이증이 처음 들어와 보금자리를 꾸렸고, 현재 남은 임청각 건물들은 중종 10년인 1515년에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이 지은 거대한 안채 살림집과, 정(丁)자 평면의 별당누각인 군자정으로 이뤄져 있다.
이명의 17대 적손인 이상룡이 1911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전답과 임청각을 처분해 떠난 뒤 일제는 집의 정기를 끊으려고 행랑채 일부와 딸림채 등을 뜯고 마당 한가운데에다 철로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종택 살림집은 원래 조선 양반가 집으로는 최대규모인 99칸이었지만, 근대기 철도 개설 등의 훼손이 자행되면서 50여채만 남았다. 최근 구한말 국권침탈기를 배경으로 화제를 모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임청각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극 설정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친일파 이원익이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인 ‘애기씨’(고애신)의 할아버지 고사홍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씨 가문의) 집은 철도공사를 위해 나라에 귀속되었으니 집을 비우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근대화’를 내세우며 임청각을 훼손함으로써 조선인의 항일 의지를 짓밟은 일제의 만행이 겹치는 대목이다
임청각에 살았던 고성 이씨 가문의 선조인 허주 이종악(1726~1773)의 문집 <허주유고>에 실린 <동호해람>. 당시 임청각과 주변의 전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복원정비계획에서 중요한 고증자료로 쓰였다
임청각 복원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이 각별한 의지를 표명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와 지난 7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에서 임청각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99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대통령의 관심을 배경으로, 지난해 11월 종손, 문중 대표, 지역 전문가, 문화재위원 등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수차례의 논의와 문화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종합계획이 확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당장 복원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장애물인 중앙선 철로를 임청각 앞에서 걷어내는 철거이전 공사가 2020년께나 끝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쪽은 “우선 복원 대상터를 사들이고, 기본설계와 실시설계, 발굴조사 등을 한 뒤 2021년부터 분가와 나루터 등의 본격적인 복원사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사진 문화재청 제공]
[출처] : 노형석 한겨레신문 기자 : <일제의 철도 부설로 훼손된 임청각 복원된다> / 한겨레신문,2018.10.20.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초명은 이상희(李象羲)이나,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이상룡(李相龍)으로 개명하였으며 계원(啓元·啓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58년 지금의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안동 유림의 명문가인 이승목(李承穆)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가인 임청각은 왕의 궁궐이 아닌 사대부 반가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 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임청각의 옛 모습
학문적으로는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인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어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종고모부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친족인 평담(平潭) 이전(李銓)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특히 19세에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여 안동 지방의 거유(巨儒)로 성장하였다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50세 무렵인 1907년경 부터 교육을 중시하는 애국계몽 운동으로 방향 전환하여 안동 임하면의 협동학교 설립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하고 시국 강연을 벌렸다.유인식, 김동삼이 이때 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동참하여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석주 이상룡의 거국음
칼끝보다도 날카로운 저 삭풍이
내 살을 인정 없이 도려내네.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애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중략)
차라리 이 머리 베어지게 할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되지 않으리라
집을 나선지 채 한 달이 못 되어서
벌써 압록강 도강하여 건너버렸네
누구를 위해서 발길 머뭇머뭇하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나는 가리라
(「二十七日渡江」, 국역 석주유고)
1월 27일, 신의주를 뒤로 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이상룡은 참담한 마음을 시로 달랬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 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숙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경학사 취지서
이상룡은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 조직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서간도지역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치에 청년들 훈련에 주력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백서농장(白西農庄)이란 병영을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무장 항일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扶民團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만주에 군사 기구인 군정부를 설립했다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했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서로군정서 책임자로서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통군부를 수립했다.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룡의 유해는 소과전자 마을 뒷산에 임시 매장되었다. 5년 뒤 이상룡의 조카 이광국과 이광민이 다시 이곳을 찾아 유해를 수습해, 흑룡강성 취원창으로 옮겼다. 취원창은 1920년대 이후 만주에 남은 이상룡의 조카들과 경북인들이 개척한 농장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 묻혔던 석주 이상룡은 1990년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고국으로 돌아왔다. 1990년 9월 하얼빈에 있던 유해를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왔고, 1996년 다시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안장하였다.
저서로는 아들 이준형이 정리하여 필사한 『석주유고(石洲遺稿)』가 전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