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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루와 원지정사가 하회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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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에 가면 서애종택인 충효당, 옥연정(玉淵亭), 병산서원 만대루 등 불세출의 지혜로 임란을 극복케 한, 구국의 영웅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바로 충효당(忠孝堂) 근처, 같은 담장 안에 있는 연좌루(燕坐樓)와 원지정(遠志亭: 혹은 遠志精舍)은 서애가 고향에 내려오면 고요히 머물면서 학문과 국정을 사색했던 특별한 곳이다.
연보에 의하면 서애는 본래 30세 무렵 낙동강 서쪽 물가(西厓)에 서당을 지으려고 했으나 터가 좁아 실현치는 못했다. 이로 인해 자호를 서애(西厓)라 하고 그곳 물가 언덕을 상봉대(翔鳳臺)라 이름하였다.
35세 무렵 원지정사와 연좌루를 지어 틈틈이 이곳에서 학문과 저술에 힘썼고, 국가경영 대책마련에 절치부심하였다. 그가 만년에 이곳에서(옥연정사에서 함) 징비록(懲毖錄) 등의 글을 집필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서애의 학덕과 기개
서애는 항상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효와 끊임없이 도심(道心)을 추구했던 정통 성리학자였다.
그는 만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내 평생에 세 가지 한이 되는 일이 있으니,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이 첫째 한이요.
벼슬이 너무 지나쳤는데도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이 둘째 한이요.
道를 배울 뜻을 두었으나 이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다.
(吾平生有三恨, 未報君親之恩, 一恨也. 爵位太濫, 而不能早退, 二恨也. 妄有學道之志, 而無成 ,三恨也)"
28세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북경의 학자들과 당시 학계의 방향을 논하면서 "진헌장(陳獻章)은 도를 깨달은 것이 정밀치 못하고 왕양명(王陽明)은 선학(禪學)으로 얼굴만 바꾸었으니, 설선(薛瑄) 학문의 순정(純正)함만 못하다"고 평하여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서애 학문의 깊이에 탄복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훗날 왜적이 침입하자 이항복, 윤두수 등이 왜적이 북방까지 올라오면 선조 임금을 명나라 국경으로 피란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자, "임금의 수레가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난다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大駕離東土一步地,朝鮮非我有矣.)"라며 이를 강력하게 제지하고 자주적인 전란극복 계책을 세웠다.
선조 32년(1599) 관직에서 물러나 하회로 돌아와 전란 중 겪은 성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고찰하는 기록을 소상하게 남겨 뒷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대비했다. 시경에 "내 다친 바가 있어 경계할 줄 알았는지라, 훗날의 걱정을 삼갈까(予其懲, 而毖後患.)" 라는 구절을 빌려 징비록(懲毖錄)으로 명명하고, 16권으로 정리했다.
#연좌루와 원지정의 역사와 의미
원지정과 연좌루는 서애가 오칸으로 지은 작은 정자였다. 임란 때 불타면서 소장도서가 다 소실되고 왕양명 문집 등 몇 권만 남았다고 서애가 쓴 '서양명집후'에 전한다.
원지정과 연좌루에서 지은 시가 10여수 넘게 남아 있다. 연좌루(燕坐樓)의 연(燕)은 예기에서 '기쁘다, 편안하다'라는 뜻의 안(安), 혹은 희(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연좌는 '편안하게 앉아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예기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좌루에 올라가 앉으면 정좌존심(正坐存心)이 절로 되고 누(樓)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하회마을을 휘감으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강 건너편 부용대(芙蓉臺)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와 누구나 시심(詩心)이 발동된다. 서애가 지은 원지정(遠志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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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의 15세손인 유영하옹이 서애의 활동상 및 문화재보존과 관련한 얘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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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러하다.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門掩蒼苔竹映堂),
밤꽃 향기 한 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栗花香動午風凉),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
(人間至樂無他事),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靜坐看書一味長)'.
기문에 따르면 서애가 이곳에 머무를 당시 이 연좌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연좌루(題燕坐樓)라는 시도 남아있다. 현재의 기록에는 정조 5년(1781)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權應龍)이 썼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에는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처해 있을 땐(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벼슬을 할 때)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대답을 못한)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나타냈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이러한 것을 유추하여 그 뜻을 당겨왔다.…'라고 적고 있다. 한 시대를 경영했던 大學者의 겸양지덕(謙讓之德)에 다시 한 번 감복할 따름이다.
서애 종택 충효당에는 서애의 15세 종손 유영하옹(80) 내외분이 비교적 건강하게 종택을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차종손 유창해·이혜영씨 내외도 효성이 지극하여 열심히 전통을 잇고 있어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서애는 누구?
관찰사 입암(立巖) 유중영의 둘째 아들인 서애는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요 경세가이며 대 성리학자였다. 그는 13세 때 서울 동학(東學)에 가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니 강관(講官)이 크게 놀라면서 "훗날 큰 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퇴계 선생은 21세 때 자신에게 입문한 서애를 한번 보고는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此人天所生也, 他日所樹立必大)"이라고 말했다.
경학과 역사·천문·지리·병법·의술·예학·수학 등에 두루 박통해 하늘이 낸 인재라는 말에 손색이 없었다.
임란 때는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을 저술, 이순신에게 보내 실전에 활용케 하니 이순신은 "만고에 기이한 의론"이라고 난중일기에 쓰고 있다.
그의 저술은 문집 20권과 별집·속집 등에 전하고, 난후잡록 등 전하지 않는 것도 많다. 50세 때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서 가져온 국서를 보고는 일본의 침략기미를 간파, 형조정랑(刑曹正郞) 권율을 의주목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임명하여 왜란에 대비케 했다.
그는 임란이 끝날 때까지 외교·국방·민정 등 중책을 한 몸에 감당하면서 몸을 구부려 정성을 다해 진력하는 국궁진췌(鞠躬盡悴)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