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산행일시 : 2018년 07월 08일둘째주 일요일
2: 산행지 : 경남하동 지리산 서산대사길
3. 산행코스: A:신흥교 옛길입구~의자바위~반달가슴곰 생테학습장~출렁다리~의신마을~대성리~대성골~대성리~의신마을~출렁다리 산행거리 약9.5km 4시간30분
B: 신흥교 옛길입구~의자바위~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출렁다리~의신마을~대성리~원통암~대성리~의신마을~출렁다리 산행거리 약6km 4시간
4. 차량탑승장소 및 시간 :염주체육관 07:00분~ 수완지구 하나로마트 앞 07: 20분~문예회관후문 07:35~ 비엔날레 주차장도로변 07:40분(차량이동시간 2시간)
5. 준비물 :점심,간식, 식수 ,.바람막이 ,우의, 이 외 산행에 필요한물품, 산행후 물놀이 있으니 여벌옷 준비해 오세요
6. 산행분담금:35.000원(아침조식.하산주.저녁식사.차량운영비)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길 의신계곡》
<지리산 智異山>은 글자 그대로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이라 한다. 지리산은 문수보사의산으로 여느 산보다 많은 은자(隱者)들이 도를 닦으며 정진하는 영산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민족 신앙의 영지(靈地)였다.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에는 1,000여년 전에 성모사란 사당이 세워져 성모석상이 봉안되었으며,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영기가 서리고, 계곡은 웅장하면서도 유현(幽玄)함을 잃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 능선의 거리가 25.5km로 60여리가 되고, 둘레는 320여 km로 800리쯤 된다.
지리산의 너른 품안에는 1,500m가 넘는 20여개의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개의 긴 능선이 있고 그 품속에는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 등 큰 계곡이 있으며,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나 계곡이 많다.
<지리산 옛길. 서산대사길>하동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옛길 구간 4.2km이다.옛 보부상들이 하동, 광양 등 남해안의 해산물을 함양 등 내륙으로 운송하던 길이다.
지리산 옛길은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머무는 동안 다니던 옛길로 서산대사길 이라고도 한다 서산이 16살 때 화개동을 유람하다 출가해 두 차례에 걸쳐 18년을 머물며 수행했다.
<의신 원통암>관음전이 있어 원통암이라 한다. 서산대사는 의신마을 위쪽 원통암에서 1540년 출가하여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얻었다고 한다.
원통암은 덕평남릉 끝자락에 위치한 자그마하나 암자로 의신마을에서 0.8km정도 비법정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찾아갈 수 있다.
<圓通의 이미>이르지 아니한 데 없이 널리 두루 통달한다. 또는 진여의 이치를 널리 깨닫는 수행을 원통이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살을 모신 당우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음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 아니라
그의 서원이 철두철미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이다.
관음전 내에는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다른 모습을 가진 십일면관음, 해수관음(海水觀音)·백의관음(白衣觀音)·용두관음(龍頭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신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양류관음도·백의관음도·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千手千眼觀世音菩薩圖) 등, 봉안된 관음상의 유형에 따라 봉안하게 된다.
관세음보살의 협시(脇侍)가 되고 있는 남순동자(南詢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은 조각상으로 봉안하기가 어려우므로 거의가 후불탱화에만 나타나고 있다.
<신흥마을>은 삼신동(三神洞)의 중심 마을로써 마을 입구 큰 바위에 ‘三神洞’ 각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삼신동이란 의신계곡 주변에 신흥사, 영신사, 의신사 등 신(神)자가 들어간 3개 절을 말한다. 원래 의신마을의 “神”자 유래는 지리산의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됐다.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과 덕평봉 일원의 “靈神”등 “神”자가 든 세 곳을 삼신동으로 풀이했던 것이다.
삼신동은 신라 정강왕 첫해(886년) 이곳을 찾았던 최치원선생이 마을이 있는 일대를 신선들이 살 만한 곳이라 신흥동마을 입구에 “삼신동”이란 각자를 친필로 새겨 넣은 데서 비롯되고 있다.
옛길의 시작 마을인 신흥마을의 푸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푸조나무는 최치원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세이암洗耳巖> 신흥마을 바로 아래쪽 계곡 암반에는 세이암(洗耳巖)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의 형상이
귀를 닮은 바위다.
이는 최치원 선생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속세에서 겪었던 온갖 번뇌와 망상을 씻어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의자바위>일명 서산대사의 도술 의자바위’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쳐들어와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쳐 가려는데,
그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던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범종을 의자로 바꾸어 버렸다는 그 도술바위는 단천교 건느기전 쉼터에 있다.
<의신義神마을>지리산 아래 첫 동네. 의신마을은 신라시대 의신사(義神寺)가 있었든 곳이다. 의신 마을의 유래다. 의신은 원래 한자로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의병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 되자 “神” 대신 “信”자로 지금은 “義信”마을로 고쳐 쓰고 있다.
하동 화개면 대성골 의신 마을은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하늘 아래 첫 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옛 문헌에 ‘전쟁이나 천재(天災)가 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가장 길지로 꼽힌다.
지리산역사관, 빨치산 루트 등이 있으며, 의신마을은 1950년 전란을 전후해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격렬하게 교전한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 위의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모두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의신마을 사람들은 당시 사상이나 이념에 물들거나 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의신마을의 터가 좋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의신계곡>에는 쿵쿵소·용소·어사바위의 천년송 등 계곡의 절경을 이룬다. 골짜기마다 기암괴석과 장쾌한 폭포수가
한 폭의 그림 같다.
대성골에서 만들어진 계류는 의신계곡의 계류와 합수하여 지리산에서 가장 크다는 화개동천으로 흘러 들고 다시 그 계류는 흘러 금빛 모래를 자랑하는 섬진강을 이룬다.
의신골에는 서산대사가 명상을 하였던 바위와 단아한 소나무송이 작가들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물소리와 함께 4월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는 수달래의 만개 모습을 볼수 있다.
<의신사義神寺>대성리 일대는 예부터 사찰이 많았는데. 의신마을은 신라시대 의신사(義神寺)가 있었든 곳이다.
의신사는 서산대사가 15세 때 초시에 낙방하고 동문과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다.화개동천을 따라 이곳에 오니 당시 주지는 법해스님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서산대사는 의신사에서 숭인장노를 만나 법문을 듣고 불가에 입문했다 한다. 현재 마을 뒤편 절터에는 법해선사의 부도가 남아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지리산에서 출가한 고승 서산대사 휴정은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휴정, 호를 서산. 청허라 했다.
9세에 부모를 잃고 훗날 임꺽정을 진압한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가 되었다. 15세에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영관을 은사로 승려가 되어 30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한다.
서산은 본래 묘향산의 별칭인데, 만년에 그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등을 두루 여행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 있으나 묘향산에 있으나 항상 1000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제자들에게 칼쓰기.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1592년 왜란으로 선조는 의주에 피난 하고 선조는 휴정을 찾았다. 선조를 만난 휴정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나라의 위급함을 앉아서 볼 수는 없습니다.
늙은 스님은 절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고 젊은 스님들은 나라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서산대사 하면 우리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이끈 스님으로, 그의 진정한 업적은 선가귀감의 저술이다.
<선가귀감>을 통한 선.교 양종의 융합을 시도한 종교적 측면에 있다. 시도 매우 잘 지어 불교의 깊고 신묘한 경지를
읊은 불교시와 애국시가 많이 남아있다.저서에는 <청허당집><선가귀감> 등이 있다
<서산대사께서 입적하기 직전 읊은 해탈시>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없어짐이오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것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죽고 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