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을 통해 알아보는 세계의 당구역사(4)-마이크 샤모스
⊙ 플레이어와 경기
당구 플레이어들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유명한 플레이어들조차도 그들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들이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으며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유명한 플레이어에 관한 전기가 쓰여진 일도 없다. 윌리 호프가 1925년에 쓴 <빌리아드 30년>과 <전설의 미스터 폰지>라는 책은 자서전적인 회고록에 불과하다. 호프의 사생활에 관해 읽은 독자들은 그가 1925년에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책에는 아내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그가 당구에 몰두하게 된 원인에 대해 그가 그것에 흥미를 가졌다는 사실 이외에는 나와 있지 않으며 프로모터와 매니저와의 관계(매니저 중 한 사람은 그의 첫 번째 장인이었다), 브룬스윅과의 좋지 않았던 관계에 관해서도 언급이 없다. 랄프 그린리프에 관한 자료는 이보다 더욱 찾기가 어렵다.
당구 플레이어들에 관한 신문 기사들의 내용은 그들의 토너먼트 경력에 그치고 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풀 토너먼트와 3쿠션 토너먼트를 차지한 알프레도 디오로에 관해 만약 쓴다면 장문의 전기를 쓸 수 있었겠지만 그에 관한 기사는 95퍼센트가 타이틀 매치와 애버리지에 관한 단조로운 기술뿐이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필름을 통해 찰스 피터슨이 전설적인 마세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가 왜 당구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그의 기술을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관해서는 알 방법이 없다. 다행히 플레이어들에 관한 여러 가지 그림과 사진 자료들이 남아 있다. 밍고드에 관해서는 그의 성이 확실하지 않고 그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겼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플레이어들의 프로 시합 기록은 그의 사생활보다도 훨씬 더 잘 기록되어 있다. 미국 당구 경기에서 토너먼트가 도입되고 이것이 대중의 흥미를 끌어들이기 시작한 1857년경부터 애버리지와 최고점수가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모던 빌리아드>와 같은 책은 상세하게 통계를 기록하고 있다. 1891년에 발간된 책을 보면 300페이지 이상을 경기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의 책들을 보면 성대한 토너먼트 경기와 이 경기에 관중이 몰려 들었다는 사실들을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19세기에는 토너먼트를 인가해 주는 기구가 없었다. ‘다이어몬드 큐’와 같은 유명한 타이틀이 수년을 두고 불규칙적으로 열리다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토너먼트를 관장하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을 할 수도 없었다. 신문에 기록되는 비공식적인 기록은 장비와 룰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때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경기 능력은 같은 규격의 볼과 포켓으로 같은 사이즈의 테이블 위에서 같은 형태의 경기를 할 때에만 경기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경기 방식이 챔피언십인가, 토너먼트인가 아니면 내기 경기인가 또는 시범 게임인가, 몇 점까지 득점하는 경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19세기 후반 50년 동안에는 다양한 핸디캡(경기의 우열을 고르게 하기 위해 강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지우는 것)이 적용되었다. 여기에서는 ‘디스카운트’ 및 ‘노 카운트’와 같은 방식이 사용되었다. 때로는 쿠션으로부터 8인치와 14인치 떨어진 두 개의 보크라인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강자에게는 14인치 보크라인을 적용하고 약자에게는 8인치 보크라인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테이블은 당구보다는 돌차기에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림40을 보면 흥미는 있어 보이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경기 기록을 하는데 장애 요인이 되었다.
⊙ 사회적 위치
당구는 좀 더 넓은 사회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당구 게임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당구는 왕실에서 오락을 목적으로 유래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라운드 당구가 시행된 때부터 당구는 신사와 일반 대중이 즐겼다. 그때부터 당구의 이미지는 존경과 오명의 대상 사이에서 변천을 거듭해 왔다. 일부 당구장은 거대한 미팅 장소가 되었다. 신사들은 우아한 카페로 집합하였으며 당구장에 식당이 설비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림41은 프랑스의 한 거대한 당구 광장이다. 1865년에 지은 이 당구장에는 벽 양쪽에는 식사 테이블과 관중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여기에는 깨끗한 목욕탕이 딸려 있을 가능성이 많다.
당구는 궁중의 부녀자와 신사들 사이에서 높은 품위를 유지해 주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보면 당구장은 게으름과 추한 행동의 온상지가 되고 있으며 이 평가는 상당한 근거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당구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테니스나 골프와 같이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하지만 테니스와 골프는 상대적으로 오명을 갖고 있지 않다. 당구도 게임이 시행되는 장소를 제외하면 당구 자체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없다.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가 있다. “숫자가 있는 15개의 볼을 가지고 하는 게임은 악마의 장난인가?”1775년에 발간된 <당구 연보>에서는 플레이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내기에 건 돈이 증가함에 따라 영리한 플레이어는 경기를 질질 끌게 되며 이를 모르는 상대방은 맨 처음에는 형편없었던 상대가 나중에는 최고수임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간략하게 경기의 책략을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당구장이 오랫동안 도박의 장소로 이용되어 옴에 따라 갖가지 부조리를 수반하게 되었다. 그림42는 프랑스인이 그린 풍자 만화인데, 한 여인이 아이와 함께 당구장으로 남편을 찾아와 술을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간청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자는 끄덕하지도 않는다. 그림43에서는 프랑스의 카페에서 싸움이 벌어진 장면인데 부러진 큐대가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주인이 경찰을 불러 경찰이 방금 도착한 장면이다. 19세기 중반에 당구장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린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림44는 도미에르가 그린 회화이다. 이 그림의 제목은 ‘큐대로 하는 게임’이다. 이러한 장면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림에 따라 당시에 당구장 근처에도 잘 가지 않던 사람들은 당구장이 무서운 일만이 벌어지는 장소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당구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수세기에 걸쳐 이중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우아하게 비쳐지기도 하고(그림6과 그림45), 때로는 심각하게 비쳐지기도 하며(그림14) 때로는 매우 유혹적인 존제로 묘사되기도 한다(그림46). 그렇지만 여성들이 당구에서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책과 잡지에서는 여성들이 과연 당구를 해야 하느냐에 관하여 회의적인 글을 쓴 경우도 있다. 그들은 여성이 당구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신체적인 허약성과 당구장의 분위기가 여성의 델리게이트한 민감성에 맞지 않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대고 있다.
흑인들은 여자들보다도 더한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집에서 만든 장비를 사용하여 실력도 없는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그림47은 1883년에 솔 이틴지가 그린 악명 높은 판화로서 제목은 ‘블랙빌 빌리아드 클럽-비그노에 대한 위협’이다. 비그노는 당시에 세계 챔피언이었으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1906년에 비그노는 18.1 보크라인 세계 타이틀을 19세의 윌리 호프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1835년에 창설된 석판 인쇄 회사인 ‘Currier and Ives’에서는 “다크타운”시리즈에서 당구에 관한 몇가지 판화를 제작하였는데 흑인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장면만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작품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 당구에 대한 나쁜 인식이 당구 테이블의 판매에 영향을 미쳐 당구장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된다. 행정관료들은 이 게임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며 피선된 관리들은 당구를 완전히 없애 버리자고 주장하였다. 이미 당구장은 바(bar)보다 더 심한 단속을 받았으며 정치인들은 그처럼 악명이 높은 게임을 자신의 관리 구역에서 완전히 추방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당구는 이제 신선한 이미지를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먼저 ‘풀’(일종의 내기 포켓 당구)이라는 용어를 공공 용어에서 추방시켜야 했다. 새로운 언어로 ‘포켓 빌리아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1911년에 공식적으로 이를 채택하였다. 미국내 가장 큰 당구 장비 제조업체인 브룬스윅의 주도하에 ‘가정에서 당구를’이라는 공공 캠페인이 벌어졌다. 가정에 당구 테이블을 들여 놓는 것보다 아빠와 아이들을 더러운 풀홀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갑자기 당구장을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주부들에게 당구 테이블을 집안으로 들여 놓으라는 요구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48에는 당시에 사용한 광고문이 나와 있다. “하루 중의 가장 즐거운 시간은 당구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브룬스윅 캐롬 테이블 또는 포켓 테이블에서 당구를 치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당구는 가정 생활의 일부입니다.”이 말은 소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게재된 것이 아니고 1917년에 <내셔널 지오그라픽>이라는 잡지에 실린 광고문이다.
미국에서 당구의 인기는 계속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대중을 끌어모았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많은 플레이어들이 해외로 파견되었으며 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당구를 레크리에이션의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른 취미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당구는 장기간의 침체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1961년에 상영된 영화 <허슬러>는 당구장의 어두운 단면을 그린 것이다. 그 영화의 이미지가 어두운 것이었지만 이는 당구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1960년대 후반에 가면 당구가 다시 침체하게 된다. 현재는 <컬러 오브 머니>라는 영화로 인하여 당구가 다시금 부활이 된 것처럼 보인다. 현재는 광고문, 뮤직 비디오, TV광고 등 어느 곳에서든 당구를 볼 수 있다.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뉴욕시에 새로운 당구장이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당구 인기의 순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의심할 것 없이 장래의 역사가들에게 당구에 대한 연구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