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58. 【구회당】(경주최씨)
동고조 팔촌을 넘어 먼 종족까지의 친목을 도모하다
글·송은석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구회당
프롤로그
혹시 ‘동고조(同高祖) 팔촌(八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자로 된 용어는 그 한자를 잘 뜯어보면 웬만하면 다 이해가 가능하다. ‘동고조 팔촌’이라는 말은 한 고조(高祖) 부모 아래에서 퍼져나간 후손들로서 촌수가 팔촌 이내인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동고조 팔촌’은 사실 위로 고조라는 기준점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아래로는 증조, 조, 부, 나까지 결국 4대에 걸친 팔촌 형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이 동고조 팔촌까지를 한 집안의 범위로 삼았다. 다시 말해 고조할아버지·할머니를 꼭지점으로 하여 그 아래로 증조, 조, 부, 자신까지를 한 집안으로 보았다는 의미이다. 또 전통적인 표현 중에는 ‘유복지친(有服之親)’ 또는 ‘복(服)을 입는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상복(喪服)을 입는다는 표현으로, 전통적인 상례에서 상복을 입는 경우는 동고조 팔촌 이내의 친족이 상을 당했을 때이다. 그리고 기제사의 경우도 우리나라 전통 제례에서는 ‘4대봉제사’, 곧 고조부모까지로 그 제사의 대상에 한계를 정해두었다. 참고로 전통사회에서는 ‘팔고조도(八高祖圖)’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이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계, 모계 각각 여덟 분의 고조부모를 한 장의 종이 위에 계보로 모두 나타낸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예들을 참고해보면 우리네 전통사상에 기반을 둔 친척 또는 친족의 개념은 결국 ‘동고조 팔촌’ 이내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팔촌을 넘어가면 예법 상으로는 상복을 입을 필요도 없고,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으며, 팔고조도의 범위도 넘어가니 어쩌면 남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동고조 팔촌을 넘어 모든 종족들의 회합처, 구회당
앞서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위치한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의 대표 재실 ‘경운재(景雲齋)’와 ‘문창공 영당’ 등을 소개한 바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경운재와 영당이 자리한 도동의 경주최씨 광정공파의 한 종회당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향산(香山) 남쪽에 위치한 경운재 일대는 대구에 살고 있는 경주최씨 광정공파 후손들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봉안된 ‘문창공 영당’, 광정공파 1·2세의 제단과 재실인 ‘경운재’, 광정공파 입향조인 최맹연의 묘소 등과 함께 ‘구회당(九會堂)’이라는 종중의 종회당이 이곳에 모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구회당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12년경에 지어진 건물로 본래는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한 것은 1932년의 일로 당시 경주최씨 광정공파 주손인 시산(是山) 최경교(崔敬敎) 선생의 주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이 구회당은 대구지역에서 대대로 세거해온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중들의 화합을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봉선목족지소(奉先睦族之所)’ 이른바 ‘위로는 선조를 받들고 아래로는 종족 간의 화목을 목적’으로 하는 종회당이었던 것이다. 구회당의 회합은 구회당이라는 당호에 걸맞게 중양절(重陽節·重九日)인 음력 9월 9일에 행해졌다.
대다수 옛 건축물들의 이름이 다 그러하듯이 ‘구회당’이라는 당호 역시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구회(九會)’라는 말은 전통적인 친족의 범위인 동고조 팔촌을 넘어 구촌 이상의 먼 족친들이 모인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가까운 친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족친들에까지 ‘봉선목족’의 정신을 배양시킨다는 뜻이다. 매번 그러했지만 정말이지 너무 멋있고 수준 높은 작명법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구회당이라는 당호에 대해서는 「구회당 중건기」에도 그 유래가 잘 소개되어 있다. 해당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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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삼가 생각하건데 족(族) 그 자체는 맨 처음 한 조상에서 시작하여 둘이 넷으로, 여섯이 여덟으로 분류된 것인데, 옛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 그 복(服)을 팔촌까지 제한하였으니, 팔촌이 넘으면 친(親)이 소원(疏遠)해져서 자연히 족(族)이 되게 마련이다.
아! 족이란 참으로 소원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동족(同族) 사이는 절대로 소원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전 부로(父老)가 조상의 묘 아래 당(堂)을 지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돈목(敦睦)의 의의를 강론하는 곳으로 삼으면서, 이름을 팔(八) 다음에 구(九)로 정한 것은 족(族) 자체가 본시 친(親)에서 소원(疏遠)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 바이니, 이는 사실 서경의 ‘구족을 친히 하였다.’는 깊은 의의를 채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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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건축양식을 한 번 살펴보면 구회당은 향산 남쪽 사면 흙돌담 안에 세워져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뜰에 서서 바라보면 가운데 2칸은 대청이요,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방의 전면으로는 쪽마루를 내고 방 뒤쪽으로는 벽장을 넣었다. 현재 구회당 바로 앞쪽에 관리인이 살고 있는 관리사가 있는데 이 관리사를 통과해야 구회당에 오를 수 있다. 관리사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구회당의 관리 상태는 좋은 편이다.
에필로그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 말이 있다. 아마도 이곳 도동의 ‘경운재’와 ‘문창공 영당’을 이미 다녀간 사람들은 필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아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운재’와 ‘문창공 영당’까지만 둘러보고는 이 지역을 떠나게 된다. 아마 십 중 팔구는 다 그러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당 동편으로 불과 20-30여 미터 거리에 구회당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필자 역시도 한 동안은 구회당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말인데 경운재나 영당 옆에 구회당 안내판이 하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현재도 구회당 회합은 계속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 참고로 이 글의 끝에 「구회당 중건기」를 옮겨 놓았다.
2015.09.29.
풍경산방에서 송은석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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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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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당

구회당 후면 벽장


구회당 편액

구회당 중건기

구회당 선영각위묘전유사분정기


관리사 바깥에서 바라본 구회당
구회당 중건기(九會堂 重建記)
「경운재낙성고유첩」 중에서 인용
구회당은 우리 최씨가 선대를 받들고 종족(宗族)이 회합하는 곳인데, 구(九)는 그 회합하는 날짜를 뜻한다. 대저 일 년의 일수(日數)는 삼백육십 여일로 날마다 날짜인데, 어찌 꼭 구일만을 회합하는 날짜로 택했단 말인가.
가절(佳節)로 말하면 삼월 삼일, 오월 오일, 칠월 칠일이 다 그 유(類)이고, 높은 숫자로 말하면 십, 백, 만이 다 그 위이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데 족(族) 그 자체는 맨 처음 한 조상에서 시작하여 둘이 넷으로, 여섯이 여덟으로 분류된 것인데, 옛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 그 복(服)을 팔촌까지 제한하였으니, 팔촌이 넘으면 친(親)이 소원(疏遠)해져서 자연히 족(族)이 되게 마련이다.
아! 족이란 참으로 소원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동족(同族) 사이는 절대로 소원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전 부로(父老)가 조상의 묘 아래 당(堂)을 지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돈목(敦睦)의 의의를 강론하는 곳으로 삼으면서, 이름을 팔(八) 다음에 구(九)로 정한 것은 족(族) 자체가 본시 친(親)에서 소원(疏遠)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 바이니, 이는 사실 서경의 ‘구족을 친히 하였다.’는 깊은 의의를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아! 비바람의 침해가 거듭되고 동우(棟宇)가 퇴락하여 오래 유지될 수 없으므로 이번에 경교군(敬敎君)이 온 종족을 모아 놓고, 새 재목과 새 기와로 다시 중건할 것을 의결하여 옛터에서 동쪽으로 반 마장쯤 떨어진 곳에 새 터를 정하였으니, 이는 그 지세의 회포(回抱)가 옛터에 비해 약간 나은 때문이다.
이에 사칸(四間)의 집을 지어 중앙의 두 칸은 당(堂)으로, 동서의 두 칸은 실(室)로 정하였는데, 이는 옛 구조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다만 실뒤에 벽장을, 전퇴에 협청(夾廳)을 들인 것만이 새로 곁들인 구조이다.
준공을 보고나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해왔지만 아! 나 같은 사람에게 진정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나는 고향을 떠난 외로운 몸으로 가끔 조상의 묘를 참배하지 못하였고 또 이번 공사에도 직접 현장에 참여하여 조금의 도움도 주지 못하였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조상이 있는 사람이라 이르겠는가? 이 같은 나를 나무라지 않고 도리어 현판(懸板)할 글을 짓게 하니, 이 한 가지만 보아도 본래부터 돈목을 강론해 온 그 훈습(薰習)이 이미 깊어 세도(世道)가 저하되어도 끝내 인멸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모든 우리 종족이 다 같이 조상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서, 이 다음 자손에게 욕먹지 않을 도(道)를 힘쓴다면 언제나 상하 좌우에 있는 조상의 영이 반드시 우리를 도와 번창하게 할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노(怒)하지 않아도 위리를 매질하는 견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 당(堂) 아래 있는 국화가 평소 손질하고 가꾸지 않았어도 오늘을 기하여 저 혼자 활짝 핀 것은 이 땅에 모인 종손(宗孫), 지손(支孫)이 수백 대 내내 번창할 증거이기도 하다. 본당(本堂)의 규칙은 이전부터 전해오는 성안(成案)이 있고, 이번 수고에 대한 전말은 임원 명단에 기재되었으므로 여기에 덧붙이지 않았다.
임신년(1932) 본회일 후손 국술(國述)이 삼가 기록하고 종팔(鍾八)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