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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山寺의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혜룡스님
설날의 유래와 예절
음력 1월1일을 설날이라고 한다. 설이라는 말은 사린다, 사간다라는 옛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설날은 일년내내 탈 없이 잘 지낼수 있도록 행동을 조심하고,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매우 뜻깊은 명절로 여겨져 왔다.
설을 언제부터 쇠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중국의 사서에서 신라때 정월 초하루에는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일월신을 배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 된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한말인 1895년 양력이 채택되면서 신정과 구별되는 구정으로 빛이 바래기 시작했고, 일제시대에는 설을 쇠는 사람들이 핍박당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후 1985년에 설날을 민속의 날로 지정해 설의 명칭을 복원했고 사흘간 쉬기로 결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데, 농경의례와 민간 신앙을 배경으로 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인 만큼 이 날을 아무 탈 없이 지내야 1년 365일이 평안하다고하여 지극히 조심하면서 가만히 들어앉는 날이란 뜻에서 설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설은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한다. 설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한다는 뜻이다.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설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데,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설날의 세시풍속은 매우 다양하다. 설날이 다가오면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자마자 골목을 다니면서 이것을 사라고 외쳐댄다.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필요한 수량만큼의 복조리를 사는데, 일찍 살수록 좋으며 집안에 걸어두면 복이 담긴다고 믿는다. 새벽에는 거리에 나가 처음 듣는 소리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청참(聽讖)을 행하기도 한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옷으로 갈아입는데 이 새옷을 설빔이라 한다. 아침에는 가족 및 친척들이 모여들어 정초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모처럼 자손들이 모두 모여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께 순서를 따져 세배를 올린다.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신다. 세찬이 끝난 후에는 차례상에서 물린 여러 명절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이 마련된다.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나누고 한해의 운수대통을 축원해준다. 세배를 다니는 일도 중요한 풍습이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부녀자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문안비(問安婢)라 하여 여자종을 성장시켜 일가친척에 보내어 신년문안을 드리게 했다.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나게 되면 말로써 새해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는 식으로 설날인사를 한다.
벼슬을 하는 집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린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이는 새해 문안드린다는 뜻이며, 각 관청의 서리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리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했다.
이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나서는 성묘도 행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정초에는 여러 가지 제액을 물리치는 속신이 있는데, 삼재(三災)를 물리치는 부적이나 문에 걸어두는 세화(歲畵), 귀신이 신을 신고 가면 불길하다고 신을 감추는 야광귀(夜光鬼) 쫓기, 각 간지(干支)마다 금기할 사항과 해야할 일을 정해두는 속신이 있다.
이 날은 윷놀이·종정도놀이·널뛰기·연날리기 같은 세시 민속놀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 차림은 일반적인 상차림이며, 지역이나 지방풍습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설날과 떡국의 유래 설날의 유래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데, 농경의례와 민간 신앙을 배경으로 한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것입니다. '설' 또는 '설날'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무척 많습니다. "정초(正初), 세수(歲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신정,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느끼던 설날의 정취는 그 많은 한자어보다 '설'이란 토박이말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한자어와 설날 아침을 뜻하는 한자어 '원단(元旦), 원조(元朝), 정조(正朝), 정단(正旦)"등의 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어려운 한자어는 굳이 쓸 필요 없이 '설날 아침'이란 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하나는 '한 살 나이를 더 먹는'에서의 '살'에서 왔다고 합니다. 곧 '살'이 '설'로 된 것인데 그 근거로 '머리(豆)'가 '마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장이 선다."와 같이 쓰이는 '선다'의 '선'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설다(제대로 익지 않다)', '낯설다' '설어둠(해가 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때)'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 '섧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어원에 따르면 '설'의 의미는 새해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세번째 견해에서는 설날을 몸가짐에 그릇됨이 없도록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의 '신일(愼日)'이란 어휘로 생각 되게 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무렵을 흔히 '세밑, 세모(歲暮)'라고 부르며, 특히 설날의 전날인 섣달 그믐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까치 까치 설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옛말로는 " 셜"이라 하는데 ''셜은 '작은'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동지(24절기의 하나, 태양력으로 12월 22일쯤)를 '가리키는 '작은설'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동지는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해(태양)의 힘이 가장 약화된 날 입니다. 그 다음 날부터 낮이 시나브로 길어지므로 아마도 1년의 출발 기준으로 생각하여 '작은 설'로 삼았던 듯싶습니다. 또한 설날이란 명칭에 대해 육당 최남선(1890(고종 27). 4. 26 ~1957. 10. 10)은 그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designtime s p=2488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인 만큼 이 날을 아무 탈 없이 지내야 1년 365일이 평판하다고하여 지극히 조심하면서 가만히 들어앉은 날”이란 뜻에서 설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설날의 음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지방에서나 으뜸가는 공통음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흰떡국 입니다. 설날에 떡국을 끓이는 유래에 대해서는, 설날이 천지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인 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에서 깨끗한 흰 떡국을 끓여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날의 떡국은 흔히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는 떡국을 먹음으로써 나이 하나를 더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나이를 물을 때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느냐고 비유하여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설날이 오늘날과 같이 본명을 찾기까지는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수난을 겪었습니다. 한 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로 두 개의 설이 있었지요. 음력설은 전통적인 명절, 곧 설날을 의미하며, 양력설은 현재 일상력으로 사용하는 태양력에 의한 설이 있습니다.
1896년 1월 1일(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에 태양력이 수용되고도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은 이어 졌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에 의하여 설날과 같은 세시명절마저 억압했습니다. 일본 명절인 천장절(天長節), ·명치절(明治節) 등을 국경일로 정하여 갖가지 행사에 한국인을 참가시켰습니다. 광복 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려는 박정희대통령이 이중과세라는 낭비성만을 강조하며 설을 없애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아무리 신정을 강요해도 국민들은 설날을 진정한 명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설날은 급기야 ‘민속의 날’이라는 어색하고 이상한 이름이 붙여지고, 1989년 1월24일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어서야 구정을 원래 본명인 ‘설날’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때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70~80년 만에 설날을 찾았다며 떠들썩하기도 하였지요.
오늘날 설날 무렵이면 추석명절과 함께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인데, 설 명절은 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친지들 간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의 안녕과 새해의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하기를 기원하게 된다는 절대적인 시간으로 대단히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설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설날을 전후하여 성묘하는 세시풍속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는데, 또 다른 세시풍속과 전통 민속놀이는 일부 퇴색되거나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설의 세시풍속은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것이 일종의 ‘세시풍속화’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그리고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민속놀이판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찾는 가족들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떡국의 유래 설날 세시음식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어느 지역을 가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떡국' 입니다. 가래떡을 뽑아 납작납작하게 썰어서 육수에 끓인 설날 음식인 떡국은 설날이 천지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인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깨끗한 흰떡을 끓여 먹은 데서 유래되었고, 또 이 날 먹는 떡국은 첨세병(添歲餠)이라 하여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떡국의 유래에 대해서도 오래된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때를 가리지 못하지만,『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떡국을 ‘백탕(白湯)’ 혹은 ‘병탕(餠湯)’이라 적고 있는데, 즉, 겉모양이 희다고 하여 ‘백탕’이라 했으며,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 하여 ‘병탕’이라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나이를 물을 때 “병탕 몇 사발 먹었느냐.”고 하는 데서 유래하여 ‘첨세병(添歲餠)’이라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는 떡국을 먹음으로써 나이 하나를 더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나이를 물을 때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느냐고 비유하여 묻기도 한 것이지요.
떡국은 “멥쌀가루를 쪄서 안반 위에 놓고 자루달린 떡메로 무수히 쳐서 길게 만든 떡을 흰떡[白餠]이라 하는데, 이것을 얄팍하게 돈같이 썰어 장국에다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말하며 지방에 따라서는 떡국에 만두를 빚어 넣기도 합니다. 떡국을 먹는 풍속은 지방에 따라 다른데, 북한 지방에서는 주로 만두국이나 또는 떡만두국을 먹었지요. 떡과 만두는 형제 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쌀농사가 적은 북쪽 지방에서 만두국이 떡국 대신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풍속이었습니다. 이 떡국과 만두국, 떡만두국은 요사이에는 겨울철 계절의 진미로 꼽혀, 일반 식당의 주요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가래떡의 모양과 색깔에 담긴 의미
1. 흰떡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시작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주 최초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천지만물이 새롭게 탄생하는 새해의 첫날에 흰떡을 먹었던 것입니다. 또한 묵은 때를 씻고 흰색처럼 깨끗해지자는 뜻도 있습니다. 조선조 서울의 풍속을 열양세시기(1819년)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흰떡은 “좋은 멥쌀을 빻아 채로 곱게 친 흰가루를 쪄서 안반에 놓고 자루달린 떡메로 쳐서 길게 만든 가래떡을 돈짝만(엽전모양)하게 썰어 육수물(꿩고기, 쇠고기)에 끓인 음식이다.” 이렇게 끊인 떡국은 차례상이나 세찬상 등에 올려 졌으며, 설날에 떡국을 끓이는 유래에 대해서는, 설날이 천지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 인 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에서 깨끗한 흰떡국을 끓여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2. 가래떡을 왜 길게 뽑을까?
가래떡을 뽑을 때 길게 뽑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떡을 쭉쭉 길게 뽑듯이 재산도 그만큼 많이 늘어나고 무병장수 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3. 떡국 썰때 가래떡을 동그랗게 써는 이유는?
왕가에서는 가래떡을 썰 때 타원이 아닌 동그란 모양으로 썰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옛날 화폐인 엽전과도 같았습니다. 엽전처럼 생긴 떡국을 먹으면서, 맞이하는 새해에도 돈이 잘 들어와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조상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데 모양을 내기 위해 어슷하게 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에서 유래한 조랭이 떡국 역시 누에고치 모양의 조랭이가 재물과 풍년을 가져온다고 하여, 새해에도 집안에 재물이 넘쳐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먹었다고 합니다.
4. 설날에 떡국을 먹는 이유는?
설날에 떡국을 끓이는 유래에 대해서는, 설날이 천지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인 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에서 깨끗한 흰 떡국을 끓여 먹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떡'은 아무나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쌀밥 한 그릇도 어쩌다 먹을 정도로 쌀이 귀했습니다. 때문에 그런 쌀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환갑잔치나 명절과 같은 큰 의미가 있는 날뿐이었습니다. '떡국'은 떡이 갖고 있는 '잔치'의 상징성이 '최고의 즐거움'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따라서 설날 아침에 평소 먹기 힘든 고기와 함께 떡을 먹기 위해 고기가 들어간 떡국이 만들어졌으며, 명절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또한 “동국세시기”에는, "흰떡을 얄팍하게 똑같은 크기로 썰어서 장국에 넣고 쇠고기나 꿩고기를 넣어 끊인 다음 고추가루 친것을 떡국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차례상에 올려 제사도 지냈으며, 손님 대접을 하여 세찬(세배하러 온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속설(일반인들의 생각이나 믿음)에 나이를 물을 때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고 묻는 것은 그것이 세찬이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편,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은 떡국에 넣어야 제 맛이 나는 꿩고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대신 닭고기를 넣어 떡국을 끓였다는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적당한 것이 없을 때 그와 비슷한 것으로 대신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한국세시풍속사전(봄편)》, 국립민속박물관, 2005. 임동권, 《한국세시풍속연구》, 집문당, 1993. 《형초세시기》, 중국 양나라. 《동경몽화록》, 《세화기려보》,《열양세시기》, 《朝鮮常識問答》육당 최남선, ,《동국세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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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설 잘쇠시고 내내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