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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정맥8회차(진고개 - 구드래나루터)시간표
일 시 : 2010. 3. 28.
누구와 : 좋은사람들 외 차도인
산행코스 : 09:30 진고개 - 10:14 명덕재(감나무골재) - 10:52 가자티고개 - 11:26 신앙고개 - 12:13 송전탑 - 13:02 부여청마산성 안내판 - 13:07 청마고개(체마소고개) - 13:21 부여사비나성 장대지 - 13:33 석목고개 - 13:55 금성산 - 14:20 부여여고 - 14:30 부소산(105) - 14:39 반월루 - 14:47 사자루 - 14:51 낙화암 - 14:56 고란사 - 15:00 조룡대 - 15:12 구드래나루터(산행시간 5시간42분, 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거리 : 진고개 - 4.9Km- 가자티고개 - 4.1Km - 184.9봉 - 5.0Km -금성산 - 2.0Km - 부소산 - 1.5km - 조룡대(황포돛단배)0.7km - 구드래나루터(산행거리 18.2Km)
오늘은 금남정맥의 마지막 구간인 부여 땅을 산행하는 날이다. 부여는 1,500년여년 전 백제왕도로서, 천년세월 해를 맞고 달을 보내온 백마강, 부소산성, 낙화암 등 그 세월을 버텨온 정림사지 5층석탑(백제탑),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혼과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백제금동향로 등 소중한 역사문화재로부터 백제인의 굳은 의지와 절개를 보여준 계백장군, 삼천궁녀이야기, 백제무왕(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이야기, 나라의 재상을 등용 하기전에 하늘에서 알아보았던 천정대 등 진솔하고 흥미로운 천개의 이야기와 천년세월을 아우르는 조화로운 구간이 산이 강을 넘지 못하고 금강이 있는 구드래나루터에서 그 명맥을 다하고 끝이 난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계룡산 구간은 5월경 한다고 하니 그 때를 기약하며 구간의 높,낮이가 200m 정도의 나지막한 구간이라 특징보다는 이정표 위주로 시간표로 갈음합니다.
09:30 진고개(90m), 645번 지방도인 진고개 도착하여 외딴 집 우측 절개지를 가파르게 올라가 삼거리에서 우틀, 편안한 마루금을 따라 가자 지겨운 밤나무단지 지나 161.4봉에 도착합니다.
10:14 명덕재(감나무골재, 150m), 농로 길인 시멘트 포장도로 차량은 거의 안 다닐 것 같은 소로입니다.
10:27 262봉, 오늘 구간 중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 정상 에 도착하자 무명 묘 1기가 있는데서 우틀,
10:52 가자티고개(125m), 지난 구간부터 계속 이어지는 벌목지대가 펼쳐져 있어 여기에도 밤나무를 이식할는지는 몰라도 몇 년 후 밤 값이 크게 폭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벌목지대를 지나자 왕복 2차 포장도로 인 가자티 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 양쪽 절개지 사이에 난 포장도로에 돌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철망이 있어 순간 당황했지만 선답자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내려 가보니 철망 아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 현재님이 철망 문을 열어 쉽게 빠져 나왔습니다.
11:26 신앙고개, 절개지 좌측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내려서 오른 160봉에서 좌틀, 계속해서 이어지는 잔봉을 지나자 커다란 산벚나무가 서있는 신앙고개에 도착합니다.
11:53 (162m), 이정표에 감투봉 팔각정 2.01Km, 수자원 공사 4.02Km
12:03 (190m),
12:09 이정표에 감투봉 팔각정 3.05Km, 신암리 회관 4.09Km
12:13 송전탑, 송전탑 지나 약간 오르막을 오르는데 청마산성의 무너진 성 터를 지나 정상에서 우틀하여 잠깐 넋이 나간 사이 마사토에서 미끄러져 무릎에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12:26 206봉 분기점, 정맥길은 좌틀, 백제금동대향로, 부여군, 송곡리, 용정
리 2.3Km, 굿뜨래, 청마산(233)은 분기점에서 우틀
12:38 안부(183m), 백제금동대향로, 부여군, 용정리 2.9Km, 수자원 공사1.0Km, LPG 4.3Km, 굿뜨래
12:45 (154.3m), 진이 빠지는 고만고만한 봉우리 3개를 치고 올라가자 좌측으로 온통 벌목하여 황량하기만 하였습니다. 수자원 공사 2.6Km, LPG 2.7Km
12:57 현위치 번호 청마산성 01-04
13:02 부여청마산성 안내판(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때 산성으로 사적 제34호로 1963년 1월 21일 지정되었으며 명월산(明月山)에 있는 이 산성은 성주(城周) 약 3km의 흙과 돌을 섞어 만든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현재 서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높이 약 4∼5m, 폭이 약 3∼4m 정도이며, 동쪽 성벽도 이와 비슷한데 많이 무너졌다. 다른 성들과 같이 내부의 흙을 파서 축성한 관계로 내부는 자연적으로 호(壕)가 되었다. 이 산성 역시 백제 수도의 동방방위를 목적으로 축조된 외곽산성(外廓山城)이다, 두산백과사전 참조).
13:04 현위치 번호 청마산성 01-03
13:07 청마고개(체마소고개), 콘크리트로 포장된 소로
13:12 현위치 번호 청마산성 01-02
13:21 부여사비나성 장대지. 백제금동대향로, 부여군, 왕릉 1.0Km, 수자원 공사 4.4Km, LPG 0.9Km, 굿뜨래
13:25 현위치 번호 청마산성 01-01
13:27 백제금동대향로, 부여군, 석목리, 수자원 공사 4.9Km, LPG 0.4Km,
굿뜨래, 우측의 몇 개 무덤군과 좌측 표고버섯 농장 사이를 끼고 내려섭니다.
13:33 석목고개(95m), 4번 지방도로로 아직 공사가 덜 끝냈는지 버스 정류장 안내판이 통채로 길 가장자리 풀밭에 방치되어 있고, 차량 통행도 뜸하게 다녔습니다. SK LPG 주유소 맞은편으로 올라가자 좌측에 대리석으로 만든 의자가 있었습니다.
13:44 KT 통신탑(주먹밥으로 점심 대용)
13:55 금성산(121.2m) 정상, 팔각정의 현판은 통수대라 기재하였는데 아마
전쟁이 일어나면 장수가 통수대에 올라가 지휘했던 곳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통수대에 올라가 부여 시내와 백마강을 조망해봅니다.
13:58 성화대 250m, 통수대 250m, 조왕사 180m
14:00 무노정, 현판에는 부여군수가 백제 무왕을 그리는 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정맥길은 무노정에서 우틀
14:05 계백문, 아치형의 터널을 계백문이라 하고 위로 통과 합니다.
14:07 부여군민 헌장비
14:11 국궁장, 국궁장에서 우틀해야 하는데 직진하여 약간 알바
14:20 부여여고, 부여여고 정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 건물 뒤 화단 끝에서 약간 올라가면 부소산성의 탐방로가 나타납니다. 부여여고에는 팔각정이란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못 찾고 지나친 게 아쉬움이 남습니다.
14:30 부소산(105m), 아기자기한 산책로가 이어지는 탐방로에 많은 관광객
들이 편안하게 걷고 있어 산성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그래도 관광지라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어 쾌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탐방로 따라 조금 올라가자 영일루(=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 전한다. 1964년 5월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 세우면서 이름을 영일루라 하였다, 안내 간판 참조).
부소산성(= 사적 제5호로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500년(동성왕 20)경 처음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성왕이 천도할 무렵 개축한 뒤 605년(무왕 6)경 완전한 성을 이룬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테뫼식 산성은 현재 군창(軍倉)터가 있는 곳으로 둘레 1,500m의 성벽을 등고선을 따라 거의 토축했는데, 일부 석축한 부분도 있다. 이 성 안에는 1915년 불에 탄 쌀이 발견된 군창 자리와 백제식 가람의 방형 건물터가 있으며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 지점 사비루(泗沘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비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이 두 테뫼식 산성의 외곽선을 포곡식 산성이 연결하고 있어 백제의 독특한 산성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내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부소산성은 주위의 보조산성인 청산성·청마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무원마을 산행기 퍼옴).
14:31 고란사 1600m, 낙화암 1350m, 태자천 330m, 궁녀사 980m, 반월루
570m, 수혈주거지 450m, 삼층사 630m
14:35 수혈주거지 200m, 군창지 200m
14:37 부소산성비 사적 제5호
14:39 반월루(=반월루는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네이트 퍼옴).
14:40 고란사 850m, 낙화암 600m, 궁녀사 200m, 사자루 470m
14:45 삼거리, 고란사 200m, 낙화암 200m, 궁녀사 200m, 사자루 70m, 광 장, 반월루 400m, 정맥길은 좌틀하여 약1Km정도 내려가면 구드래나루터이지만 낙화암과 고란사를 가기 위하여 삼거리에서 낙화암방향으로 직진하였습니다.
14:47 사자루, 잠깐 여유를 갖고 두루 조망을 하였습니다.
사자루(=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이다. 백제 때는 이곳에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사자루의 현판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며 건물을 지을 때 이곳에서 정지원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안내 간판 참조).
14:51 낙화암,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금강)의 물줄기가 오늘 따라 처연 하게 느껴져 잠시 회한에 잠겨 보았습니다. 낙화암에는 삼천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세운 정자인 백화정이 있고, 백화정 바로 앞에는 천년송이라는 소나무가 백제의 슬픈 아픔을 직접 목격하며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주고 있는 듯, 말없이 서있었습니다.
낙화암(= 1984년 5월 17일 문화재 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 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하며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 이라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두산백과사전 참조).
14:56 고란사, 고란사 약수를 마시면 1살씩 젊어진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있어 약수 마시기를 포기하고 절 뒤편으로 가 고란초를 제대로 구경을 못하여 지금도 가장 후회가 됩니다.
고란사(= 고란사(皐蘭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쌍북리에 위치한 절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언제 창건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백제 제17대 아신왕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초 때 창건돠었다는 설도 있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하며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 왔으며 현재의 법당건물은 조선정조 21년(1797년)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안내 간판 참조).
15:00 조룡대 도착, 선착장 앞에 있는 조룡대(조그마한 바위)에서 금남정맥을 종료하였습니다.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扶餘)의 백마강(白馬江)에 솟아있는 수중암(水中岩). 백제가 멸망할 때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중국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키자 갑자기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태풍이 불어 수백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침몰하였다고 한다. 소정방이 그 괴변의 까닭을 알아보니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면서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는 것이 좋다는 일관(日官)의 말에 따라 용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소정방이 앉아서 용을 낚은 바위를 <조룡대>라 하였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의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를 한자로 <어룡(魚龍)>이라고 적는 것으로 볼 때, 어룡이 용으로 잘못 전해져 전설로 굳어진 듯하다, 야후백과사전 참조).
15:12 구드래나루터 도착, 원래 정맥길은 낙화암에서 다시 올라가 사자루 맞은편으로 약 1Km정도 내려가면 금남정맥의 종착지인 구드래나루터인데 낙화암 중간 암벽에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落花巖이란 글씨가 암각 되어 있는 것을 보려면 배를 이용하면 볼 수가 있다고 하여 황포돗대를 이용하여 낙화암을 정면으로 보자 낙화암 중간 암벽에 빨간 글씨로 落花巖이란 글씨가 암각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우암 송시열이 암각한 것을 최근에 빨간 페인트로 덧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3,000명의 궁녀가 떨어졌다고 하는데 믿어야 할지? 황포돛배 이용료 편도 3,500원입니다.
2009. 12. 13.부터 2010. 3. 28까지 7차에 걸쳐 힘들게 걸어온 짧은 마루금이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미완성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계룡산 구간은 산방기간이 끝나는 5월에 하기로 하고, 4월부터 한남금북과 한남정맥을 병행하며 떠나겠습니다. 곧 날씨가 더워진다고 하는데 어차피 가야할 길 편안하게 떠나렵니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전 세구간이나 남았는데 기회 닫는대로 편안하게 할랍니다..
ㅎㅎㅎ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완주에 진심어린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