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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복음을 전파함(딤후4:9-18)
디모데후서의 마지막은 사사로운 일을 부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모두 버리고 떠났으나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한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다고 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세상에도 좋은 소식이 많고 성경 안에도 좋은 소식이 많지만 그 모든 좋은 소식의 결정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 나라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을 노예생활을 했고 예수님 이후에도 이천 년을 나라 없이 방황했고 나치 하에서 600만 명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역사를 겪었다. 나라 없는 설움을 이 땅 위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체험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인 것이다. 우리 역시 그들보다는 못할지라도 36년간 일제에 합병당하여 주권을 상실했고 그 결과로 이차대전후에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북이 분단되었으며 또 그 결과로 6.25 전쟁을 치르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이것이 나라 없는 백성, 즉 주권없는 백성의 비참함이다. 월남전 당시 티우가 이끄는 월남은 호지명이 이끄는 공산주의 와 사활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때 티우 정부는 심히 부패했기 때문에 월남의 지성인들, 종교인들은 전쟁 중에서도 그 부정부패를 몰아내려고 날마다 극심한 시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하자 그들은 맨 먼저 숙청당했고 국민들은 배를 타고 무작정 떠났으나 발붙일 땅을 얻지 못하고 기아와 추위와 파도에 싸여서 바다에서 사라졌고 겨우 소수의 사람들만 미국에 망명처를 얻었던 것이다.
우리도 나라가 없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소용없고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이 많아도 일제 36년 동안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의 자격과 위치가 없었다. 마라톤에 출전하면서도 일장기를 가슴에 붙이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너무 태평해서 나라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으나 나라가 없으면 아무리 개인이 잘나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나라가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임하게 하려고 오셨다. 애굽에서 아무리 잘살아봤자 종으로 잘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잘사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가 임한다.’, 이것이 복음의 최종 결정이다. 좋은 소식은 많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소식도 있고 의롭게 되었다는 소식도 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신다는 복음도 있다. 성경은 다 복음이다. 그런데 그 모든 복음들의 마지막 완성은 그 나라가 임할 때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다시 오시기를,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인생의 모든 문제가 완결된다. 에덴동산을 나와서 가시밭길을 방황하고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는 그 나라가 임할 때 끝난다. 나라가 임하기 전까지는 인생의 문제가 항상 있다. ‘나라가 임한다.’ 이 소식이 가장 좋은 소식이고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소식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나라가 임한다는 소식이다.
나라가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나라가 있어야 나라가 있다는 말도 할 수 있고 나라가 온다는 말도 할 수 있다. 씨를 가지고 있어야, 씨를 뿌려 놓아야 가을이 되면 열매가 열리니까 기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소식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이것을 잘못 알고 휴거를 하느니 어느 산으로 피해야 한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현실적인 나라다.
1.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스라엘로 성취하셨으나 미완성됨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라는 온전하게 성취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라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은 그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다. 열왕기상 10장 24절과 27절에는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고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다고 하였다. 여호와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왕국은 영화롭게 되었고 풍부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솔로몬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무너지고 말았다. 출애굽에서부터 왕국의 건설까지는 대단히 영광스러웠다. 누가 바로를 이기겠고 누가 홍해를 갈라내겠으며 누가 광야 40년 동안 그 백성을 먹여살렸겠는가!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그렇게 지극히 돌보셨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나라를 세웠고 솔로몬 때에는 그 영광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게 함으로써 막연했던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인 실재로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 왕국은 이렇게 영화롭다.’는 것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드러났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때의 영화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미리 맛본 것에 불과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기독교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그들의 나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미리 맛본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가? 그것은 더 좋은 나라가 왔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실재가 왔기 때문에 그것은 미리 맛본 것이고 그림자에 불과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2. 예수의 복음이 선포됨(막1:14-15)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었다. 복음 전파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다.
때가 찼다는 것은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때가 찼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니 그들은 그 나라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겠는가! 그런데 그 때가 찼다는 것이다. 때가 찾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돌아서서 생각을 바꾸는 것, 이것이 회개다. 마음을 바꾸는 것,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하려고 오셨다.
가.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활동으로 나타났음(요1:14)
이 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활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암시되고 나타났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인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될 수 없었던 궁극적인 인간의 목표를 그분 자신이 이루셨음을 의미한다.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아담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무리 해도 독생자의 영광이 되지 못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구나.’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구나.’라고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쓰여진 것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다 쓰여지고 난 후에 쓰여졌고 다른 복음서들은 서신서들이 다 쓰여지고 난 다음에 쓰여졌다. 성경에는 제일 먼저 나오지만 사실상은 사도들의 서신이 먼저 쓰여졌고 그 다음에 복음서가 쓰여졌는데 그 중에서 맨 마지막에 쓰여진 것이 요한복음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쓰여질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완전히 정리되었을 때였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정리하게 된 것이다.
1) 삶에서
그분의 삶에서는 성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육신이 되었어야 했다.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하나님 생명이다. 하나님 생명을 먹고 그 생명이 육신이 되었어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텐데 생명나무를 거절했기 때문에 빈껍데기 같이 되었다. 그 껍데기 속에는 생명나무 대신에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법을 그 마음에 두고 그 생각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다(렘31:33). 아담 때부터 모든 사람이 생명나무를 거절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명나무를 새기겠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생명나무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약속은 예수님에게서 성취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격의 승리인 것이다. 원래 사람은 이렇게 되도록 지어졌다. 예수처럼 되도록 지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지어진 인생이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것이 멸망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온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된 것이고 복음이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온다. 돼지들만 모여 있는 것은 돼지의 나라고 소들만 모여 있는 것은 소들의 나라다. 예수로 모여져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2) 죽으심에서 - 복종으로 아담(죄)을 청산하심(거역의 회개)
그분의 죽으심에서는 복종으로 아담(죄)을 청산하셨다. 아담을 청산하셨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어도 죽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이 죽는 것인가? 우리는 목숨이 끊어지면 죽는다. 공동묘지에 가 보면 다 죽은 사람만 있다. 그리고 죽고 나면 인생이 생각하는 모든 문제도 끝난다. 돈을 받을 일도 끝나고 돈을 갚을 일도 끝난다. 인생고는 죽고 나면 모두 끝난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간단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는 아무리 죽어도 도로 아담이기 때문이다. 죽어도 아담으로 죽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되어 죽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죽어도 아담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덤도 다 아담들의 무덤이다. 죽었다고 해서 아담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무덤에 간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생끼리의 문제는 끝나지만 하나님과 인생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는다고 하신 것은 생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 대신에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롬8:7).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성질이 다르고 길이 다르니까 낱낱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복종이 없이는 아담은 죽어도 청산되지 않는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생 문제는 끝나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복종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었기 때문에 영원한 숙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으면 순종할 기도도 있고 회개할 기도도 있지만 죽고 나면 회개할 기회가 없다.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죽고 나면 빚쟁이는 안 오겠지만 순종할 기회가 없다. 내가 미워할 사람은 없지만 순종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라고 하였다. 산 자의 땅에 있을 때 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지 죽어 음부에 내려가면 어찌 여호와를 찬송하겠는가? 찬송을 못한 사람은 음부에 내려가면 찬송할 기회가 없다. 순종을 못 하고 죽은 사람은 순종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죽음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 억울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억울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회개할 기회, 순종할 기회가 없는 것이 억울한 것이다. 불순종 그대로 죽었기 때문이다. 명태가 덜 자란 것을 코다리라고 하는데 명태로 잡힌 놈은 죽어도 명태고 코다리로 잡힌 놈은 죽어도 코다리다. 코다리는 죽어도 명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고 인생고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형상으로 지어져 그분을 나타내야할 인생이 그분에게 복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죄다.
옛날에 나도 죄 문제로 많이 고민했다. 나는 의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보통 사람이고 그 중에도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이 나를 위해서 죽어 줘야 할 만큼 죄를 지은 일이 없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이 계시는가? ‘내가 너무 죄를 지어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죽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다. 그런데 교리를 배우고 보니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 시어머니가 요리문답을 받아야 하는 데 며느리가 가르쳐 주기를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느냐고 물으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대답하세요.”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목사님이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까?”라고 묻자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죄가 없고 며느리는 죄가 많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부흥회에 가도 첫 날은 회개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얼마나 감사가 되고 은혜가 넘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분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울고 자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몸으로 사용되어야 할 사람 속에 거역과 불복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상당히 순한 사람이다. 싸워보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 거역도 해 보지 않았다.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라는 대로 했지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거역이 무엇인지, 어떻게 거역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고 하면 내 안에서 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전적으로 필요로 하시는데 내 필요가 생기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권을 잡으시려고 하는데 내 권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같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가 왜 관계가 되지 않았던가? 그것은 거역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역이 끝나야 한다. 거역이 끝나야 죽는 것이지 거역이 끝나지 않으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되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도 앞으로 죽을 것이다.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인 것이다. 욕심 낼 것도 아웅다웅하고 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으면 내가 아주 없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거기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고 능력을 받아도 내가 받는다. 무엇이든 다 내가 받는다. 모든 것은 연기이니까 자성(自性, 나)이라는 것이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문이 생긴 제자들이 “내(自性)가 없다면 열반에는 누가 들어가는 것입니까?”라는 재미있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우리도 내가 없다면 천국은 누가 갈 것인가? 그러므로 무엇을 한다 해도 ‘나’는 있다. ‘나’는 주권자고 주체자인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해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갔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소리를 듣고 자기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사6:3-5). 그는 아주 의로운 사람으로서 백성들의 불의를 보고 너무나 분통이 터져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부정한 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거역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거역을 알 수 없다.
나는 거역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싸움판에 끼었을 때 딱 한 번 거역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분이 “그만 두라.”고 할 때 “예” 했어야 했다. 그분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나를 그쪽으로 파견해 보내신 분이시며, 내가 대학 등록금을 대 주신 분이시고, 나이도 아버지 같으신 분이셨다. 내가 그 때까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이다. 물론 그분은 좋은 마음으로가 아니라 나쁜 마음으로 분노해서 명령하셨다. 어떻게 속았는지 모르지만 대노하셔서 나를 쫓아내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이 그러하셨을지라도 나는 “예”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내 안에 거역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는 절대로 안되었던 것이다. 내가 인정할 수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시니까 끝까지 나는 그분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망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에게 복종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분이 옳았다고 생각했으면 복종했을 텐데 나는 그분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없다. 그리고 왜 그분이 그렇게 하셨는지 아직도 모른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왜 그러셨는지, 무슨 이유로 나에게 그렇게 하셨는지 아직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거역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인데 그때 거역을 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거역인 줄 모르고 그분이 옳지 않기 때문에 반항하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교단은 해방 전부터 있던 교단이었는데도 아주 약소했다. 그래서 ‘저렇게 하기 때문에 교단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젊은 동료들을 설득했고 같이 한 편이 되어 싸웠던 것이다.
나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사로이 항거했던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끼리 ‘교단을 살리려면 이번 기회에 부당한 일은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싸웠지만 결국은 역부족으로 지고 말았다. 숫자는 우리 쪽이 많았지만 현금을 잡고 있는 쪽은 그쪽으로 그 돈이 없으면 교단이 안되니까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그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졌던 것이다. 나는 지고 나왔다.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져서 할 수 없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거역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C.C.C.에 들어가서 비로소 그것이 거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준곤 목사님은 첫 자리에 간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군사로 다니는 사람들은 사사로운 일에 매일 수 없습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어디로 가라 하든지 그대로 가야 하고 언제든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왔는데 언젠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들을 마흔이나 마흔다섯쯤 될 때 그만두라고 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만두라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여기는 직장이 아니라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그만두라 하면 그만둬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데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우고 있었구나. 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전에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분이 잘 몰라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치사한 놈들, 현실에 야합하는 놈들’이라며 미워했던 것이다. 그쪽에는 돈을 잡고 있는 장로님이 있어서 그분이 돈을 거의 대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분이 아니라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때는 팔팔한 30대였으니까 그것이 비겁하게 보였다. 내가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내가 하나님과 싸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안에 있었던 거역의 본성이 이런 방법으로 고상하게, 남이 볼 때도 아주 그럴듯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보던 사람들도 나에게 용기 있다고 했고 잘한다고 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오셨던 장 목사님이 나와 같이 하셨던 분이다. 그때 그분은 집사님이었는데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전도사님이 옳습니다.”라며 전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아주 고상하게 거역을 했던 것이다. 치사하게 빵 쪼가리 하나 놓고 거역했던 것이 아니라 교단의 장래를 놓고 앞일을 해 나갈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거역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표면적인 그것이 아니라 내 속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당하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받아들이겠지만 지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것은 다 되는데 옳지 않은 것,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것에는 순하고 양보심도 많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는 좋은 사람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 우리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이사를 나올 때 여비라도 보태주자며 부녀회에서 온동네를 다니면서 쌀을 거두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아닌 것은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치에 맞지 않고 합리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예’가 안되었다. 옳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예’ 할 수 있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예’가 안되었다. 그분이 하는 일이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항거를 했던 것이다. 4년을 그렇게 하면서 나는 온갖 마음의 고생을 다 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이가 끊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셨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지금은 교리적으로 해석하니까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로서는 의인이 저렇게 죽는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같이 못박힌 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자 다른 강도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눅23:39-41).”고 했던 것이다. 그분은 진짜로 죄가 없는 분, 거역이 없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로 가셨던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셨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가 아니라 아버지 뜻이어서 십자가로 가셨던 것이다. 이것이 복종이다. 무엇으로 보아도,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 같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의인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구약의 약속이고 구약의 주된 흐름이다. 시편은 구약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편의 주된 내용이 의인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하나님은 의인에게 보상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이다. 그들은 이것을 믿고 여호와를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항의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왜 내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예수님도 죽으실 때 그분의 죽음이 이러한 파장을 일으킬 것을 모르셨을 것이다. 이럴 줄 아셨다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어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나 큰 교단이 된다면 죽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 죽을 사람이 많지 않겠는가? 나는 힘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 예수님도 다 알고 죽으셨던 것이 아니다. 아셨다면 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26:38).”고 하셨겠는가!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100% 이해할 수 없다고 알면 된다.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죽음은 어떤 것인가? 완전하게 죽은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복종의 완성이고 거역의 청산이다. 거역을 청산한 죽음이라야 완전히 죽은 것이지 공동묘지에 있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다. 죽으심에서 우리의 거역을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청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거역의 완전한 청산임을 알아야 한다. 그분의 죽음이 완전한 청산임을 모르면 우리 자신에게서 거역이 청산되지 않는다. 완전한 복종이 오기 전까지 우리 안에 불복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고 시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록 우리가 그분처럼 그렇게 순종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거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옛날에는 몰랐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왜 그러십니까?”라며 항의를 했지만 이제는 항의를 못하게 되었다.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복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향해서 “왜 그러십니까!”라고 항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왜 그러십니까?”라며 대든다고 한다. 키가 180Cm가 넘는 놈들이 “왜 그러십니까?” 하며 대꾸하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대해 “왜 그러십니까?”라고 항의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면 “왜 그러십니까?”는 말을 못한다. 이것이 구속이다. 제 위치로 돌아온 것, 우리의 주제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거역하는 자임을, 죄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3) 부활하심에서 - 하나님의 인정으로 삶(새 생명의 발아)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그분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 것은 소용없다.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 부활이다. 부활생명은 새 생명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생명이기 때문에 새 생명이다. 새 생명이라는 모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생명이 새 생명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생명이 옛 생명이다.
새 생명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연합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나 혼자 살려면 옛 생명이나 새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데 혼자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옛 생명이면 어떻고 새 생명으로 살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새 생명은 연합을 위해서 필요하다.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새 생명이 필요하다. 나 혼자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혼자 살면 나는 옛 생명으로 살아도 잘 살 사람이다. 절에 가서 1년을 있었지만 나는 외로움을 몰랐다. 다른 사람은 그런 데 있으면 외롭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외롭다는 것을 몰랐다. 스무살 때 암자에서 주지 영감님과 상좌 한분, 그리고 할머니 보살님 한분하고만 있으면서도 외로운 줄 몰랐다. 나는 무인도에서도 먹을 것만 있으면 잘 살 사람이다. 그런데 왜 새 생명이 필요한가? 새 생명은 교회 때문에 필요하다. 교회가 아니면 새 생명이 없어도 된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연합, 하나님과의 연합, 사람과의 연합 때문에 새 생명이 필요한 것이다. 옛 생명으로는 연합이 안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른 사람과 연합하려고 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나의 옳음’이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한 사람도 자기의 옳음은 다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나는 좋은 사람이고 나 혼자 살아도 잘 살 사람이다. 별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부유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가난했을 때는 그날 그날을 간신히 먹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고민해 본적이 없다. 나는 그런 데 별로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죽음 앞에서 아! 이제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눈이 침침해졌고 배는 돌덩이처럼 굳어져서 등에서는 담이 끓었다. 그렇다고 겁이 나거나 불안하거나 공포에 쌓였던 것이 아니다. ‘이러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뿐이다. 그러니까 살아났어도 감사가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 불안하고 심각했어야 살아났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죽음 앞에서도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살아나서도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성질이 이런 사람이다. 그래서 감격적으로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다. 차라리 아주 못되게 살아서 감격적으로 회개하고 감사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면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나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상에는 별 것도 아닌 일에도 단장의 고통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큰일을 만나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 부활생명이 필요한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때문에 부활생명이 필요하다. 나는 부활생명이 없어도 편하게 잘 살 사람이다. 태평양 한가운데 빠져도 나는 수영을 하니까 둥둥 떠서 죽을 때만 기다릴 사람이다. 부활생명은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4) 승천하심에서 - 높여진 삶(통치적 권위)
승천하심은 높이 되셨다는 뜻이다. 하늘까지 올리우신 것은 우주를 통치할 권위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으로서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우리 대신 치르셨다. 그리고 그분의 대신 치루심 안에서 우리도 성육신했고 죽었으며 부활했고 높여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성육신도, 끝남도, 부활도, 하늘까지 높여짐도 그 안에서 된 것이니까 그 은혜를 감사할 뿐이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없다. 배가 비워져서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부활할 수도 승천할 수도 없는데 그분 안에서 지금 우리는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우를 받는데 60년 대에 해외에 나갔을 때와 지금은 전혀 대우가 다르다. 그것은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내 양심이 그때보다 좋아진 것도 아니고 더 특별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위상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우리도 그만큼 올라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 안에 새 인류가 들어 있다. 옛날에 짚신을 신던 한국 사람과 지금 한국 사람은 생각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 요즘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에는 짚신을 신고 게다를 신었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때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성육신의 삶 안에, 완전한 복종이 있는 세계 안에, 새로운 삶이 있는 안에, 그리고 높여지심 안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감사를 해도 옛날의 감사와 다른 것이다.
구약시대의 감사는 율법 안에서의 감사였지만 지금은 은혜 안에서 감사다. 전부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거나 무엇이 되어 보려고 하면 안된다. 내가 예수님처럼 죽기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울도 아직도 부활을 못했고 베드로도 요한도 부활을 못했다. 더 큰 부활이 있으니까 예수의 부활 밖에는 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부활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예수 안에서이기 때문에 나의 부활은 소용없다. 그분의 부활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쓸 때마다 마지막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데 바울은 이렇게 말했는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가 그분 안에서 누리는 것이다. 나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다 그분 안에서 누리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은혜를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이 나대신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 안에서 이것을 누립니다.”
이삭은 자기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누렸던 것이다. 성경은 그 아비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삭에게 축복하셨다고 하였다(창26:24). 그래서 이삭은 평생 동안 아버지를 통해서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는 것이다. 예수가 왜 은혜인가, 은혜와 진리가 왜 그 안에 있는가? 우리의 모든 것은 그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수 없는 것을 그분이 죽으셨고, 내가 부활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은 부활하셨다. 내가 높일 수 없는 것을 그분이 높이셨다. 나는 그분 안에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높여지기도 한 것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니까 나는 그분에게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고 내 공로가 없으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공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 우리에게 없던 것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사도들은 계속 예수만 말한 것이다. 그들도 다 훌륭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예수만 말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 이것이 은혜다.
나. 예수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루셨음
예수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루셨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복음을 이루신 것이다.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서 나를 성육신 안으로 불러들이셨고,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거역하는 나를 순종 안으로 불러들이셨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나를 새 생명 안으로 불러들이셨고 그분의 높여지심 안으로 부르셔서 내 위상을 높여주셨다. 이것이 본질적인 해결이다. 구약시대는 밥이 없으면 밥을 주는 것,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주는 것, 물이 없으면 물을 주는 것이 해결이었으나 예수님은 인생의 본질 속에 들어와서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해결이 안된다. 나로서는 아담을 끝낼 수 없다. 끝내는 것으로 보면 나보다는 부처님이 훨씬 낫다. 우리가 아무리 끝내도 그분만큼 끝내기는 불가능하다. 부처님은 뼈만 남을 정도로 고행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번쩍 ‘이것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유 한잔을 마셨다고 한다. ‘내가 끝나는 것, 내가 없는 것’으로 하면 나는 그분들을 따라 갈 수 없다. 얼마나 ‘나’가 없으면 ‘벽이 나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벽의 대상’이라고 했겠는가! ‘나’가 얼마나 비어 있고 얼마나 없으면 “내가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벽이 나를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 말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별짓을 다한다 해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예수는 따를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못따르지만 나는 예수를 따른다. 나는 그 사들을 이길 수 없지만 예수는 그들을 이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이긴 이기심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예수 편에 있다. 예수의 승리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구별하자. 나는 아무리 해도 부처님만큼 될 수도 없고 그의 제자였던 달마대사처럼 나를 완전히 비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대장은 그들과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주님 덕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함께 죽게 하셨다. 모든 사람을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모든 사람을 죽게 하심으로 아담을 끝내신 것이다(딤후 2:8-11 참조).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보니 나는 죽은 자다. 거역하고 불순종했던 자다. 나에게 죽으라고 하지 않고 그분 혼자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 안에서 죽었다고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2천년 후에 대구 땅에 있을 이현래를 아셨겠는가? 그런데 나는 그분을 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안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산다. 이것이 소망이다. 디모데후서 2장 8절과 11절에는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하였다.
예수가 없어도 되는 어떤 것도 복음이 아니다. 예수가 없어도 되는 것은 이 복음과 다른 것이다. 예수가 없어도 되는 것이 있다. 나는 예수가 없어도 잘살았다. 사소한 일로 고통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를 못했다. 나는 그보다 더했어도 고통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시한 것으로 원망하고 고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나 그것은 예수와 무관하다. 그래서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고 한 것이다.
3. 사도들이 이 복음(예수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세웠고 보조했음
사도들은 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의 선포가 더욱 더 분명하고 섬세해졌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두루뭉실하게 전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예수는 죽었다 다시 사셨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세상을 만나고 인간성과 접촉하면서 더욱 섬세하고 분명해졌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더욱 분명해져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던 것이 발견되고 나에게 없는 줄 알았던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에 거역이 없는 줄 알았고 내 사전에 싸움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거기서 나왔다. 나는 싸움이라고는 몰랐는데 4년 동안을 싸웠고 남을 미워해 본 적이 없는데 4년 동안을 미워했던 것이다. 내가 거기서 목회를 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영원히 묻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싸움도, 미움도 별로 모르고 잘 지낼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거기 넣어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점점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가지 않았다면 야곱의 본성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삼촌이 좋은 사람이어서 알아서 다 해 주었으면 그는 잘살았을 것이고 재수가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고약한 외삼촌을 만났다. 그래서 그의 본성이 드러났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고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저런 문제를 만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분명하게 해 준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된 아니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나도 처음에는 단순했는데 40년 동안 지나오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만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만 남았다. 마지막 남은 숙제가 그것이다. ‘예수, 그는 누군가?’ 나는 이것을 세상 앞에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알아듣도록 내놓고 싶다. 지난 여름집회 때 한 번 말씀드렸는데 금년에도 또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우리끼리는 여러분이 알아들으니까 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책을 쓰려니까 아직 확실하게 안된다. 그렇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알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책을 쓰다말고 놓아 두고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알게 하려고 기회를 주셔서 여러 가지 일이 생긴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언젠가는 ‘예수, 그는 누군가?’, 이것만 남기고 가고 싶다. ‘나의 복음’이라고 했는데(딤후2:8), 바울이 말한 ‘나의 복음’은 예수다. 사도들은 이 복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다.
가. 이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했던 것임(롬1:2-4)
이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미리 약속하셨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라는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라는 약속들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구절은 없는데 예수라는 한 사람을 놓고 성경 전체의 내용과 흐름을 볼 때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은 다 이 사람을 두고 했다고 보는 것이 사도들의 관점이다. 성경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사도들은 이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해석되고 이 해석이 아멘이 될 때 우리는 그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있는 것이다.
나. 이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행2:36)
사도행전 2장 36절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것은 천지개벽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한 것이다(행2:38).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새로운 인류의 창시자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전하는 것은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주인이고 창시자이며 이를 위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라고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이미 있는 세상에 가서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신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죄사함이나 병 고침의 복음을 전하면 되지만 진짜 예수를 소개하려면 예수를 더 분명히 알아야 한다.
4. 새 인류를 위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선포함
복음의 목표는 예수께서 새 인류를 위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선포함으로써 교회 하락을 막고 새 예루살렘을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하나인 것, 이것이 교회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증거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다른 것을 증거하면 다 분열이 된다. 이 주님만 증거해야 한다.
5.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자를 도우시고 보존하심
하나님은 이 복음을 선포한 자들을 도우시고 보존하신다.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는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구원’이라는 말에는 ‘보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천국에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사자의 입에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으니까 이 사람을 하나님 성분의 왕국에 보존하실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 왕국을 위해서 자기일생을 다 드린 사람, 예수로 산 사람을 하늘의 성질이 있는 왕국 안에 영원히 보존하시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대한민국의 영광과 함께 보존된다. 주께서 힘을 주셨고 위험에서 보호해주셨으며 온갖 악에서 구출해 주셨듯이 또한 하늘에 속한 왕국 안에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6. 예수만 전함(씨를 뿌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만 전파하자.
이삭은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삭은 씨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12).”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두 가지는 씨와 땅이다. 씨는 이삭이다. 아브라함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다. 이삭을 보면 그 씨가 어떤 씨인지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았다는 것은 그 씨가 인간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적인 능력으로 된 씨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씨는 곧 예수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 이것이 씨다. 구약의 이삭은 신약의 예수다.
이삭이 씨가 되어 열두 지파의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 씨에 달려있다. 이스라엘은 이 씨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이 씨가 아닌 다른 것이 나오면 망하는 것이다. 다른 씨가 들어와서 퍼진 것, 역성혁명이 일어난 것은 그 나라가 아니다. 이 씨가 야곱을 통해서 열두 형제가 되고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로 확장되었듯이, 예수는 전파자들인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가 되었고 새 예루살렘이 된다.
이 씨는 어떠한 씨인가! 얼마나 좋고 완전한 씨인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씨이기 때문에, 아담을 다 처리하고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삭은 훌륭한 씨고 거룩한 씨인 것이고 거룩한 씨로 났기 때문에 그 백성은 거룩한 백성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씨인가?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여자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부딪혔던 사람들이다. 사사로이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면 안되는 데 부딪혔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낳은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과 같다.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자리에서 이삭을 낳았다. 그래서 예수는 마귀를 이기셨다.
가. 마귀를 이긴 씨
예수님은 어떻게 순전하게 자기의 인격으로 마귀를 이기셨는가? 이것이 석가모니와의 차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님과 석가모니의 큰 차이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성인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할 때는 어떤 시험을 거쳤듯이 석가모니도 수도를 할 때 마왕은 미녀를 보내 쾌락으로 유혹하려고 했는데 석가모니는 미녀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한다. 수양을 할 때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은 전혀 차원이 다른 시험이었다. 그 시험은 나라를 두고 한 시험이지 마왕의 딸을 두고 한 시험이 아니었다.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였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천사들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고 하였다. 간단한 것 같아도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한쪽은 완전히 인간적이다. 그냥 사람의 범위 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인간적인 범위 내에서 나온 시험이 아니라 우주적인 전쟁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사탄사이의 우주적인 전쟁이 있는데 그 전쟁의 시험이었다. 시험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우주적 전쟁의 시험이었다. ‘사람이냐, 천사냐?’의 문제였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가 이 우주의 지배권을 갖게 되는가?’하는 시험이었다. 나는 이 시험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우리의 대장, 우리의 주님, 나의 주님은 이런 분이구나! 마왕과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우주적 전쟁을 하신 분이구나! 이 전쟁은 인격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런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 행복하다.
나. 아담을 끝낸 씨
이 씨는 아담을 끝낸 씨다. 우리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다. 끝났는가 하면 또 있고 끝인가 하면 또 있다. 한없이 있다. 그런데 예수는 아담을 완전히 끝내셨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함으로써 완전히 끝내셨다. 스스로 죽은 것도 아니고, 자연사한 것도 아니며 자살한 것도 아니고 시험을 받아 죽은 것도 아니다. 온전한 복종을 통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거역을 완전히 끝내셨다. 이 씨는 거역을 완전히 끝낸 씨, 거역의 유전인자를 끝낸 씨다. 요즘 유전자변형식품이 문제가 되는데 아담은 유전자가 변형된 콩과 같다면 예수님은 토종 콩과 같다. 예수님은 원래의 콩을 회복하신 것이다.
다. 새 생명을 가져온 씨
이 씨는 새 생명, 부활생명을 가져온 씨다.
부활생명 만으로는 헷갈릴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도 부활생명 같은 것이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비운 ‘텅 빈 충만’을 말한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충만하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다는 역설적인 말로서 대단히 고상하고 놀라운 것이다. 부활생명과 비교하면 헷갈리고 확실하게 구별되기 어렵다. 그래서 십자가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려면 꼭 십자가가에, 갈보리 산에 서있어야 한다. 십자가가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 인간은 십자가가 없으면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 씨는 왕국을 건축하는 씨고 연합을 이루는 씨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하였다(엡4:5-6).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연합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해도 나는 한 사람, 한 인격 안에 있으니까 연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따로 된 것이면 연합될 수 없다. 도를 통한 것도 다르고 어떤 경지에 이른 것도 다르다. 사람마다 가는 것이 다르니까 같을 수 없다. 은혜를 받는 것도 다 같을 수 없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이는 방언을 하고 어떤 이는 예언을 하고 어떤 이는 선지자 노릇을 했다. 병을 고치고 은사를 받는 것도 각기각색이고 자기 나름대로였다. 우리대로 놓아두면 다 분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주신 이는 한 분이다. 병 고치는 은사든 방언하는 은사든 무엇이든 간에 주신 이는 한분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성령도 하나라고 한 것이다. 받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주님은 한분이다. 주신 분이 한 분이니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분이 쓰실 데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이 사람에게는 이것을 저 사람에게는 저것을 주셨는데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다르게 보았다. 고린도 교회가 그런 교회였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다. 주신 이는 보이지 않고 받은 것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볼펜을 받고 어떤 사람은 노트를 받았다. 그래서 누가 주셨는지는 모르고 볼펜을 받은 사람은 볼펜이 은혜라고 하고 노트를 받은 사람은 노트를 은혜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고 한 것이고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한 것이다(고전12:4). 그 씨 자체가 하나니까, 근본이 하나니까 성육신하신 분도 한분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도 한분이다. 부활하신 분도 한분이고 승천하신 분도 한분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뿐이다. 한분뿐이니까 우리가 하나인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분뿐이니까 하나가 아닌가! 우리가 받은 은사와 은혜가 달라도 주신 이는 한분이다.
회사에는 총무과도 있고 재무과도 있고 인사과도 있다. 회사를 고루고루 하려니까 필요해서 사장이 임명해 놓은 것이다. 직임을 맡겨서 인사과, 재무과, 총무과로 임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직임을 맡기신 이는 한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지만 다 하나다. 대기업에 얼마나 많은 부서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주인이 한분이기 때문에 다 하나다.
이 씨가 왕국을 건축하는 씨가 된 이유는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 씨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씨가 없다. 비슷한 씨가 없다. 이 씨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씨이기 때문에 하나다. 이 씨 이외의 다른 씨는 없다. 만일 다른 씨도 있다면 다르겠지만 한 씨밖에 없으니까 하나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2:2).”고 했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전1:23-24).” 하였다. 바울이 오직 십자가의 죽음만 말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은사와 받은 것 때문에 시끄러웠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십자가로부터 시작한다. 새 인류도, 부활도, 승천도,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십자가가 없이 된 것, 십자가와 관계없이 된 것은 왕국건축이 안된다. 모든 것은 마지막에 결론이 난다. 밀과 가라지는 처음에는 같은 것처럼 보여도 점점 달라져서 마지막에는 열매가 달라진다. 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언도 좋고 예언도 좋고 다 좋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싸우고 서로 다르다고 하거나 자기만 옳다고 하면 건축이 안된다. 왕국 건축이 안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의 목표는 건축이다. 삼성의 직원들은 다 삼성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있다. 목적은 부의 창출인 것이다. 그 회사에는 수위도 있는데 수위는 사무실 앞을 지키고만 있지 돈을 한푼도 만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위가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삭이라는 씨를 주셨는가? 땅위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그런 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씨는 육신의 씨였기 때문에 아무리 정제되고 정제되어서 나왔어도 유전될 수 없었다. 이삭이 그런 사람이라 해서 야곱도 그런 사람인 것이 아니다. 이삭이 아기를 낳고 보니까 야곱과 에서가 나왔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았으니까 분명히 아무 결함이 없다. 그런데 이삭에게서는 야곱과 에서가 나왔다. 이삭 속에서 사냥이나 좋아하는 호걸과 간사한 사람이 나왔던 것이다. 육신 안에서는 영적인 것이 유전될 수 없다. 육신으로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육신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실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었고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인류의 주가 되게 하신 이유는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나라 때문인 것이다. 예수는 왕국을 건축하는 씨다. 그러므로 이 씨를 사사롭게 개인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삭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주신 것인데 육신적인 이스라엘로는 안되니까 새로운 씨를 주신 것이다. 이 씨가 예수다. 그러므로 이 씨는 유일한 씨다. 이삭이 둘일 수 없고 예수가 둘일 수 없다.
그리고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유일하지 않으면 하나가 안되는데 그분이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다. ‘그분은 유일하다.’ 이것만 모든 기독교가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교리가 중요하고 제도가 중요하고 은사가 중요하니까 다 갈라져 있는 것이다. 이분이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만 아니라 실제로 안다면 분열될 수 없다. 왕국밖에 나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왕국은 시금석이다. 예수의 생명의 시금석이 왕국이다. 만일 왕국이 안되고 실패하면 왕국이 안되는 씨는 버리고 유일한 씨를 가져야 한다. 한 해 농사를 실패했으면 그 씨를 버려야 되지 또 그 씨를 심으면 되겠는가! 열심히 했는데 씨가 잘못되었다고 알면 다시 유일한 씨로 돌아와야 한다.
농사는 씨의 문제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지어도 씨는 일본에서 들여온다. 참외 씨도 수박 씨도 일본에서 들여온다. 아직 육종학이 일본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사는 씨에 달렸다. 씨가 잘못 되면 농사를 망친다. 그러므로 건축이 안되는 씨는 바꿔야 한다. 어떤 씨가 들어와서 자기는 좋은데 남과 연합이 안되거나 남이 판단되면 씨가 잘못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마지막 목표는 건축이고 하나님 나라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너와 나는 다르다.”고 하면 안된다. 예수 안에서 보면 온 인류가 하나 아닌가! 나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도 예수 안에서 보면 하나다. 우리는 이것을 전한다. “당신이나 나나 하나입니다.” 왜 하나인가? 예수 안에서 보니까 하나다.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이 씨만 전파해야 한다. 이 씨 이외의 다른 것들을 전파하다가 문제가 생겼다. 교리나 제도 같은 부가적인 것을 전파하다가 분열된 것이다. 인류의 문제는 씨의 문제다. 아담이냐, 그리스도냐의 문제다.
인류의 소망은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잃어버린 에덴보다 더 나은 새 예루살렘으로, 그분의 왕국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초월이 아니다. 천당에 가듯이 초월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의 은혜로운 돌파다. 우리에게서 이것이 이 땅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은혜로 돌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왕국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왕국을 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 개인주의가 떠난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초월이 아니고 은혜다.
씨는 하나뿐이다. 죽음도 하나고 부활도 하나고 승천도 하나고 오직 하나다. 모두가 하나고 하나에서 나왔다. 이 씨를 전파함으로써만 교회하락을 막고 교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이 씨가 아닌 다른 것이 전파되었다. 희랍세계에서 다른 것이 되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되었으나 레너드 박사의 말처럼 예수 결핍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레너드 박사가 “오늘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볼 수도 없고 기도를 볼 수도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진짜 이 씨를 보고 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성경말씀을 볼 수 있고 기도를 볼 수 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가, 기도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다. 그는 둥지는 보았는데 알을 잡지 못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씨를 전파해서 교회하락을 막고 하나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 될 수는 없다. 씨에 의해서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씨가 있어야 한다. 온전한 씨는 오직 한분 그리스도뿐이다. 혹시라도 이현래 복음을 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유일한 씨가 아니다. 예수만 전해야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다른 것을 전하면 다 분열되고 만다. 무엇을 전해도 분열되고 만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한 씨만 전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유일하신 분 예수를 알기 위해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앞 사람을 보고 갔고 뒤에서는 그 사람을 보고 갔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유일한 씨밖에 없다.
이 씨만 성경에 기록된 것이 너무나 다행이다. 사도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 이유가 있다. 왜 자기는 부활하지 않고 예수만 부활했다고 했는가? 자격으로 보면 바울도, 베드로도 부활할만 한데 왜 예수의 부활만 말했는가?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혼란한 세대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 안으로 이끄셔서 유일하신 생명 안으로, 유일하신 씨 안으로, 유일하신 업적 안으로 우리를 연합시키시고 통일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고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을 당신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당신 안에서 그 은혜를 찬양하고 오직 당신의 어떠하심을 선전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어떠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의 나라가 되어 당신이 오시기를 재촉하고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고 당신이 속히 오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