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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겨울집회
6.주여 나를 보내소서 (6)
“내가 누구를 보내며~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합하면 다 우리지만 또 개인적으로 하면 나 자신이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주님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아름다운 찬송이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이 필요한 자리에 어디든지 가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고 필요로 하시니까 내가 거기에 쓰여지기를 원한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찬송이다. 또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제사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가 세상에 쓰일 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쓰일 자입니다. 나를 불러주소서.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쓰여지기만을 원한다면 우리 문제는 저절로 다 없어지게 된다. 사사로운 우리 문제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 문제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 문제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문제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 문제를 저절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항상 자기 문제부터 해결하겠다는 사람은 평생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님 문제부터 해결해야 될 사람으로 안 사람은 자기 문제는 저절로 끝나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 협력자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흙으로 빚으신 것이다. 노아를 방주를 지을 판자로 부르신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 협력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을 한 씨의 아버지로 나그네로 부르신 것도 하나님이 협력이 필요해서다. 모세를 떨기나무로 부르신 것도 하나님에게 협력이 필요해서다. 예수님을 인자로 부르신 것도 하나님에게 협력이 필요해서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결국은 당신 자신의 몸이 필요해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몸이 필요하다. 당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협력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게끔 된다.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말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영광이다.
본체의 형상이시고 영광의 광채시라고 했다. 태양이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 없다면 태양은 전혀 영광이 없다. 태양에서 빛이 나오기 때문에 태양은 영광스럽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야 하나님이 영광스럽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영광을 비출 때만 우리가 영광스럽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인생이 고달파진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도 쉽게 생각하면 결국 자기 영광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자존심 세수는 것이 세상에서 얼마나 어려운가! 그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잘못했다는 말을 한 번 하면 될 것을 가지고 평생을 원수진 사람도 있다. 모두 자존심 하나 때문이다. 결국 자기 영광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가 하나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고통이라는 저절로 없어진다.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어디서든지 나는 하나님 영광만 나타나면 되겠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아주 간단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협력하는 일은 바로를 협력하는 일과 아주 다른 일이다. 바로를 협력하는 것은 바로의 국고성을 쌓아주는 일 뿐이다.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바로의 국고성에 아무리 금은보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 것이 아니다. 세상에 종노릇하는 것은 똑같은 이치다.
그런데 하나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은 내가 영광스러워지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협력자로 불렀는데 이것이 신약에 오면 마지막으로 그의 몸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이 나온다. 결국 흙이나 판자나 나무나 인자나 모두 다 하나님의 한 몸을 위한 것이었다. 그 표현을 위한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에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는 말이다. 주님 자신은 하나님의 몸이었다. 땅위에는 있는 하나님의 몸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따로 있고 내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내 몸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지 나만 여기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꼭 마찬가지다.
하나님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같이 왔고, 예수님께서 걸어다니실 때 걸어다녔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같이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하신 것이다. 따로 계실 수 없다,
옛날 옛적 태고 적에는 하나님이 혼자 계셨지만 당신의 몸을 얻으신 후에는 혼자 계시지 않는다. 출애굽기를 읽으면 이스라엘에 성막이 생긴 이후에 하나님은 그 영광이 성막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하나님이 항상 성막과 함께 있다는 말이다. 성막이 움직이는 것이 곧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널 때는 성막이 앞에 가고 물이 갈라진 이후에 백성들이 갔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간다는 뜻이다. 내가 앞서가리라.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가리라. 그런 뜻이다.
신약에 오면 이것이 예수라고 하는 한 육체 안으로 들어왔다. 예수님의 육체 자체가 하나님의 육체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생겼다는 뜻이다. 간단하다.
그런데 제자들의 관념 속에는 하나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자신은 또 어디에 있는가? 늘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생각이고 종교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길을 알지 못하겠는데 어디로 가야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길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이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또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고 하셨다. 제자들은 아직 종교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 따로 아들 따로 있는 줄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꼭 같다. 오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교회 안에 계신다. 교회를 보고도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교회 와서도 하나님이 따로 있는 줄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찾을 수가 없다. 성막을 놔두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예수를 놔두고 빼놓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빼놓고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내 몸을 빼놓고 나를 만난다는 것은 어렵다. 내 얼굴도 몸뚱이도 없는데 나를 만난다는 것은 차후의 일이지 지금 일은 아니다. 다음에 영원한 어떤 세계에 가서 내가 몸이 없을지라도 여러분이 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지금 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그렇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그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교회는 현재적인 것을 말한다. 천당 위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세계 위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땅위의 지금을 말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지만 사랑을 하자면 어떻게 사랑을 하시겠는가? 하늘에서 어떻게 사랑을 하시겠는가? 누구를 통해서 사랑하실 것이다. 그 누구를 통할 때 그 사람의 몸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몸이다. 내가 누구의 손을 잡고 싶을 때 악수를 하고 싶을 때 내 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다. 그 손을 잡을 때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 내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다. 말도 할 수 없고 눈도 깜박일 수 없고 손도 내밀 수 없다면 내 마음이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표현할 수가 도저히 없다.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당신의 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의 지체로 불렀다. 그 몸의 지체로 불렀다. 이 말은 그분 몸의 한 부분으로 우리를 불렀다는 뜻이다. 내 손은 내 몸의 지체이다. 그래서 내 몸과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 지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 부품처럼 부품 공장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붙어있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역할이 다른 내 몸이다. 발은 걸어다니는 몸이고 손은 잡는 몸이고 눈은 보는 몸이고 귀는 듣는 몸이고 입은 말하는 몸이다.
지체라는 말이 자동차 회사의 부품과는 다른 것이다. 여러 개의 부품을 조합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지만 여기서 지체라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이다. 그것은 손도 몸이고 발도 몸이고 눈도 몸이고 귀도 몸이라는 뜻이다. 전부가 다 몸이다. 자동차 부품은 하나하나의 부품은 자동차가 아니다. 누가 바퀴를 보고 자동차라고 하겠는가? 누가 엔진을 보고 자동차라고 하겠는가? 누가 문을 보고 자동차라고 하겠는가?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하지 않는다. 그 개념과는 아주 다는 개념이다.
내 손만 봐도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 눈만 보아도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지체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몸의 그 지체로 부름 받았다. 하나의 판자조각 조각이 연결되어서 큰 방주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주를 보면 방주 안의 많은 지체를 방주 안의 많은 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주로 설명해도 완전치 않고 흙으로 설명해도 완전치 않다. 마지막에 와서 몸으로 설명해야 완전하다는 뜻이다.
방주로 말하면 자동차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판자 하나하나가 다른데 모아놓으면 방주가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조직이다. 다른 모든 것을 모아 하나로 만든 것을 보고 조직이라고 한다. 자동차 부품들을 모아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곳을 조립하는 곳, 조립공장이라고 한다.
교회는 조립하는 곳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판자들을 조립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원래 한 몸이라는 것이다. 한 몸인데 그 몸에 여러 지체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하나의 판자로 어디서 굴러온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 자라서 그런 판자가 된 것이다. 전혀 다른 것이다.
손가락은 어디서 나왔는가? 내 몸에서 자라서 나온 것이다. 맨 처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손가락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손가락이 생겨났다. 발가락도 없이 두루뭉실하게 생겼는데 자라면서 발가락이 나온 것이다. 발가락이 나온 것, 그것을 보고 지체라고 한다.
방주를 얘기할 때는 이 개념이 불확실하다. 판자를 여러 개 모아서 배를 지은 것이니까 여러 개의 판자가 모여서 된 집이다. 여기서 몸이라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손과 발과 눈과 귀가 합해져서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한 몸이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눈도 있고 귀도 있다는 뜻이다. 점점 그 생명이 자라니까 그렇게 됐다는 뜻이다.
교회를 보자. 처음에 다 두루뭉실했다. 그래도 한 몸이었다. 임신 2개월정도라서 손가락도 확실하지 않고 발가락도 확실하지 않고 쥐새끼 같았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이 와서 보고 별 것 있냐고 말했다. 왜냐하면 쥐새끼 같이 생겼으니까 사람인지 쥐인지 잘 구별이 안 되었다. 점점점점 자라니까 눈도 생기고 코도 생기고 입도 생겨서 쥐새끼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완전히 우리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다. 각기의 기능이 특색있게 발휘되게 되었다.
지금은 교회가 여러 지체가 각기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각기 다른 독특한 기능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그 기능들이 자라난 것이다. 우리 몸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결코 조직이 아니다. 우리는 조직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자라나서 그렇게 된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활동과 어른의 활동이 다른 것은 어린아이들은 생명력이 왕성하다. 하루 종일 뛴다. 어른에게 그렇게 뛰라고 하면 절대로 못 뛴다. 아이들은 하루종일 뛰어도 지치지를 않는다. 생명력은 어른 보다 훨씬 왕성하다. 그런데 섬세하기를 말하면 어른 보다 섬세하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손가락으로 섬세한 것을 해보라고 하면 못 한다. 왜? 지체가 아직 완전하게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다음에야 손가락과 발가락이 섬세해지게끔 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젓가락을 들게 한다거나 섬세한 것을 만들게 하면 잘 못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힘은 왕성하게 있어도 그 지체의 역할이 두루뭉실하여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점점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을 보고 몸의 지체라고 한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지금 이 땅위에 있어서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게 표현된 그리스도다. 나타난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듯이 교회는 나타난 그리스도다. 이 나타난 데에서 보지 않고서는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데가 아닌 다른 데 보겠는가? 성막에서 나타났는데 성막 아닌 다른 데 가서 볼 수 없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는데 거기 아닌 다른 데서 볼 수 없다. 오늘 교회서 나타나시는데 교회를 빼놓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세계로 가면 하나님의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 새 예루살렘의 기초가 열 두 사도로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열 두 사도를 부르셨다. 이 열 두 사도는 처음에는 지체도 뭣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 생명이 들어가서 자라남으로 열 두 지체가 되었다. 열 두 지체로 만든 이유는 12라는 숫자는 3과 4를 곱한 숫자이기 때문에 무한한 확산을 의미한다. 곱하는 것은 계속 무한정 확산되어 나간다. 그리고 한 번 결합된 것은 다시 풀어질 수 없다. 더한 것은 빼면 되지만 곱한 것은 빼지지 않는다. 그래서 12라는 숫자가 사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12지파, 새 예루살렘이 12 기초석으로 되어있고, 12 문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영원한 세계에서의 무한한 확산을 말한다. 교회는 무한하게 확산될 것이다. 왜? 무한히 자랄 것이니까. 모집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란다는 뜻이다. 우리는 점점점점 자라날 것이다. 모집해 오는 것이 아니라 자라난다는 말이다. 열 둘 사도가 기초가 되어 그 위에 섬광이 쌓여진다. 쌓여진다는 말은 열 둘 사도가 건축된다는 말이고, 열 둘 사도가 점점 확장된다는 말이고, 열 둘 사도가 점점 아름답게 단장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천만명이 모인다 하더라도 열 둘 사도밖에 안 된다. 기초석이 열 둘이기 때문이다. 이 열 둘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하나에서 나왔다.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천만명이 모여도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는 열 둘 사도 안에서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열 둘 사도의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다. 이 열 둘 사도를 어디서 불렀는가? 바닷가에서 부르고, 세관에서 부르고, 다멕섹 길에서 불렀다. 성전에서 불러온 것도 아니고 총회에서 불러온 것도 아니고 교단에 가서 불러온 것도 아니고 캐톨릭에 가서 불러온 것도 아니고, 바닷가 고기잡는 곳에서 불러왔다.
이들은 생업에 허덕이는 사람들이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해 내일은 굶게 생겼구나하고 있는 상태에서 부름 받았다. 내일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 것인가? 요즘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당시에는 이 사람들은 고기 잡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날 밤 망쳐버리면 다음날 먹을 것이 없는 것이다. 생업에 허덕이는 인생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세관에 앉아 있다가 부름 받았다. 당시에 세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다 남의 나라를 위해서 세금을 포탈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미움의 대상이었다.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서 부름 받았다.
다멕섹에서 부름 받은 사도 바울은 예수의 핍박자였다. 율법주의자고 십자가에 원수를 행하는 자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쫓아가던 도중에 만난 사람이다. 이렇게 여러 군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것들은 원래는 지체가 아니었다. 어부도 지체가 아니고 세리도 지체가 아니고 이 율법주의자도 지체가 아니었다. 다 원수고 무관한 사람들이고 허망한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기의 지체로 만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부름 받을 때 바닷가에서 부름 받고 세관에서 부름 받고 다멕섹에서 부름 받았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 만드신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이 확산됨으로써 우리가 당신의 지체가 되도록 만드시는 분이다.
겉으로 보기에서 모여진 것처럼 보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모여진 것이 아니라 자라난 것이다. 육신적으로 우리는 모여왔지만 영적으로는 자라난 것이다. 다멕섹에서 부름 받았던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원수를 행하던 자였지만 다음에는 십자가 외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가 되게 되었다. 그것은 십자가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신이 십자가가 된 것처럼 되었다.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사람 자신이 예수인 것처럼 된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그렇게 자라기 때문이다. 예수의 생명은 자라나는 생명이다. 교회는 자라나는 생명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의 일을 하지만 큰 다음에는 어른의 일을 한다.
우리가 누구든지 처음에 올 때는 바닷가에서 왔고 세관에서 왔고 다멕섹에서 왔기 때문에 바닷가 특색도 있고 세관의 특색도 있고 다멕섹 특색도 다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 와서도 여전히 고기 왜 잡히지 않느냐, 오늘 저녁에는 왜 허탕을 쳤느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도 여전히 세관에서 돈 계산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교회 와서도 여전히 율법주의자고 여전히 십자가에 원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생명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서 예수가 점점점점 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다 일과성으로 넘어간다. 어린아이들이 오줌을 계속 누다가 어느 날 가면 가리게 된다. 똥도 누다가 가리게 된다. 똥오줌을 한 번 가리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가는 법은 별로 없다. 우리가 오줌 싸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라나느라고 한 번 하는 것이므로 가다 보며 또 없어지게 된다.
세상에서는 오줌 싸는 사람은 영원히 싼다. 똥 싸는 사람은 영원히 싼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이 80까지 간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 사람은 커서도 그 사람이다. 젊었을 때 그 사람은 늙어도 그 사람이다. 계속 똑 같은 사람으로 변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달라지기 때문에 과거를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없다. 지금 40대가 된 우리 형제들을 보고 어렸을 대 오줌을 많이 싼 애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기억도 우리는 없다. 전혀 한 번도 오줌을 싸보지 않은 사람처럼 자기 자신도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에 와서 오줌 싸는 사람을 보고 왜 오줌 싸냐고 말한다. 자기도 오줌을 쌌는데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혀 기억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것은 이렇게 신기한 것이다. 죽어있는 것은 항상 영원히 똑같다. 몇 천년 동안 피라미드는 똑같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있다. 미이라도 옛날이니 지금이나 똑같다. 이 세상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미이라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똑같으니까. 10년 전의 친구를 만나보면 똑같지 하나도 변함이 없다. 20년 전 친구를 만나봐도 하나도 변함없이 똑같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똑같다. 어떻게 보면 처음 들어올 때보다 못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처음에 교회에 들어올 때는 대단히 뜨겁고 정열이 있고 사랑이 있고 눈물이 있다. 뭔가 세상에서 튀어 나온 다른 사람 같이 보인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생명이 자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죽어서 미이라가 되어 60되고 70되고 80되면 옛날보자 전혀 못하다. 처음 믿을 때만 못하다.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많이 한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할 텐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왜냐하면 처음 교회에 들어올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전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시간이 갈수록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정지되어 있다. 간증하라고 나오면 80먹은 장로나 60먹은 장로나 40먹은 장로나 모든 사람이 자기가 처음 예수 믿을 때의 이야기를 한다. 80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어서 그렇다. 자라나는 생명이 없어서다. 교리만 가득했고 법만 가득했고 지식만 가득했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이 먹은 교회를 가보면 앞자리 앉아계신 장로님들은 조느라고 바쁘다. 수십년 들었으니까 들을 것이 없다. 목사님께서 설교하려고 ‘가’자 꺼내면 저것은 무엇으로 끝날지 안다. 수십년 들어서 다 외우고 있다. 설교집에 자기 속에 다 들어있다. 뒷자리 앉으면 좋지만 뒷자리 앉으면 안 된다고 앞자리에 앉힌다. 왜? 졸릴까봐. 참 비참한 일이다. 변화가 생기지 않으니까 자라나지 않으니까 그럴 수밖에는 길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나고 있다. 몸이기 때문에 자라난다. 계속 자라나서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제 본 사람과 오늘 본 사람이 다르고, 작년에 본 사람과 금년에 본 사람이 또 달라진다. 자꾸자꾸 달라진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 변화를 보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교회가 날로 변화하는 것,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난 대구에 와서 20년이 지났는데, 언제 20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계속 변화하는 것을 보다가 이렇게 늙어지게 되었다. 신기한 것에 취해서 20년이 흘러갔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변화하는 나라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몸이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어디선가 생명의 공급을 받고 있는 몸이다. 여러 가지 가지들이 있어 그 가지를 통해서 생명의 공급을 받고 있다. 그 공급을 받음으로 계속 자라나는 것이다.
꽃은 연한 가지에서 공급을 받고 있다. 연한 가지는 굵은 가지에서 공급을 받는다. 굵은 가지는 몸둥아리에서 공급을 받는다. 몸둥아리는 뿌리에서 공급을 받고 있다. 계속 어디론가 흐르면서 공급을 받고 있다.
여러분 모두 어디 지점에 와있는지 아시겠지만 여러분 각자에게 필요한 자양분을 어디선가 섭취하고 있고 공급받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공급하고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디서 자라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성회로 모이면 늘 자라나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래서 1년 3차씩 성회로 모였던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자하여 성회로 모였다. 우리는 1년에 2차씩 성회로 모이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세계는 어떤 세계였는가? 그때는 가짜 성전이 있던 때였다. 가짜 성전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옛날에 있었던 성막이 솔로몬 때 와서 성전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외부의 침략을 받아 여러 번 파괴되어 다시 수축하고 다시 수축하였다. 그래도 그것은 그런대로 순수성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으로 정치적으로 지어진 성전이다. 헤롯이 민심을 사기 위해서 건축하고 있었던 성전이기 때문에 약 90년간에 걸쳐서 건축한 성전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약 45년 동안 건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것이 가짜 성전인가? 그 안에는 법궤가 없다. 법궤가 없는 것은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과 똑 같다. 머리에 뇌가 없는 사람과 똑 같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었다. 가짜 성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 성전으로 오시게 되었다. 진짜 성전이 있었다면 참 성전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에 있느니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진짜 성전이 있었으면 못한다. 가짜 성전이니까 그 말을 했다.
성전보다 큰 이라는 말은 저 성전보다 진짜라는 뜻이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 그것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이미 벌써 돌로 지은 성전의 시대가 지나가긴 했지만 그 안에 법궤마저도 없는 성전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가짜였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로 가짜 성전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된다. 법궤가 없는 성전이 오늘도 마찬가지로 있다. 법궤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게 되어있는 것인데 법궤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지 못한다. 우리 안에 심장이 있으면 피가 사방으로 전달되게 된다. 우리 안에 심장이 없으면 피가 전달될 수가 없다. 피가 전달되지 못하면 자라나지 못한다. 성장이 되지 않는다.
자라나지 않는 교회는 법궤가 없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자라게 하는 생명이다.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다는 것은 자라난다는 뜻이다. 그 지팡이가 법궤 안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법궤가 있다면 자라나는 것인데, 법궤가 없기 때문에 자라나지 않는 것이다.
5~6년 전에 생긴 교단은 지금 똑 같다. 한 치도 변화가 없다. 변화하지도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왜냐하면 변화하면 안 되기 때문에 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천년 전에 만들어진 교회는 천년 전에 만들어진 그대로 있다. 왜? 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변화하면 이단이니까 변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교단이나 교파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종교적인 이념이나 교리적인 특색에 따라서 교파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그 교리를 죽을 때까지 수호해야 된다. 그 이상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 범위를 넘어가면 그 교단에서는 이단이 된다. 그래서 변화할래야 변화할 수가 없다. 커질래야 더 커질 수가 없게 되어있다.
깡통을 하나 만들어놓으면 내용물을 더 이상 넣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깡통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가죽푸대라고 비유하셨다. 한 되짜리 가죽푸대로 만들어놓으면 한 되 이상은 들어가지 못한다. 새 술을 넣을래야 넣을 수가 없다. 터져 버린다. 사람이 조직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모두 이런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좋고 옳고 정통이고 해도 규격이 딱 정해져버렸다. 그 규격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500년 전에 생겼는데 지금도 똑 같은 것이다. 한 치도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다. 개혁이 불가능하다. 변혁이 불가능하다.
히브리서를 읽으면 예수님의 시대에 와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변혁되었다고 한다. 개혁되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세계화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이 개혁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돌로 지은 성전이 개혁되었다. 옛날에 종이에 쓰여진 율법이 개혁되었다. 옛날에 형식적으로 지키던 의식이 개혁되었다. 모든 것이 바꿔졌다.
히브리서에서는 변혁할 때까지만 다 임시로 놔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옛날의 법들은 언제까지 있는 것인가? 변혁할 때까지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리주의를 주장하게 되면 변혁할 때까지 놔두는 것이 아니라 천당에 갈 때도 가지고 가야 되기 때문에 변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변혁을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왜 예수님을 죽였는가? 변혁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죽였다. 만일 저 사람을 놔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파괴될 것이고 바꿔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예수를 죽이게 된 것이다.
결국 가짜 성전은 참 성전으로 바꿔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변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참 성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백성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 받은 백성, 육신으로 혈통을 가진 백성, 이 백성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 백성은 변혁할 때까지만 필요한 백성이었다. 영원한 백성으로 변화될 때까지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백성으로 변화할 때까지만 필요한 백성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까 예수를 죽이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 우리 자신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면 부득이 새로 오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서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오시는 분인데 우리가 푸대를 정해놓고 있으면 그 푸대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좀 크게 오시면 하나님을 잘라내어야 된다.
세상에 있는 메이커 옷을 사다가 아이에게 입혔다. 너무너무 좋은 것이다. 자기 아기에게 입힌 옷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년에 입히고 내년에 입히려고 보니까 아이가 커서 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옷을 버리면 되겠는가? 아기를 잘라내어야 되겠는가? 이 문제가 이런 문제다. 미련한 여자는 옷이 너무 아까워서 아기를 잘라낼 것이다. 랜드로바 신발 좋은 것을 사서 내년에 신게 한다고 놔두었는데 발이 커져서 안 들어간다. 정형외과에 가서 발가락 자르고 신기는 미련한 여자와 똑 같다. 신발을 바꾸어야지 어떻게 발을 바꾸겠는가?
가짜 성전을 바꾸어야지 어떻게 예수님을 바꾸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꾸겠는가!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라나시는 분이다. 자라나는 생명을 가졌으니까 하나님 자신은 그대로이시지만 그의 몸은 계속 변화하고 자라고 있다. 아담이 나왔다. 노아가 나왔다. 아브라함이 나왔다. 모세가 나왔다. 예수가 나왔다. 사도들이 나왔다. 계속 몸은 변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만 계속 몸은 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에 맞는 옷은 늘 변해야 된다.
모세가 입던 옷을 예수가 입을 수가 없다. 그때 당시는 모세가 입은 옷이 너무너무 좋은 옷이었다. 엘리야가 입은 옷은 너무너무 좋은 옷이었다. 권능의 옷이었다. 그것을 엘리사에게 물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옷을 예수님에게는 입힐 수가 없다. 예수님 몸에는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몸은 영원히 자란다는 진리를 알아야 된다. 그의 몸은 영원히 성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몸을 위한 표현은 온 만유를 들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이 없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방주로도 완전하게 표현이 안 된다. 떨기나무로도 완전하게 표현이 안 된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혁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하지 않으니까.
컴퓨터가 처음 나올 때 8비트짜리가 나왔다. 그때 컴퓨터 산다고 난리가 났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8비트짜리 컴퓨터는 장난감이 되고 말았다. 286이 나왔다고 사느라고 난리였다. 조금 있으니 286은 고물이 되고 386이 나왔다. 386 사느라고 난리였다. 또 486이 나와 버려 286, 386은 고물이 돼버렸다. 486 사려고 생각했더니 어느새 586이 나와 버렸다. 486은 아예 건너뛰게 생겼다. 완전하지 않으니까 계속 변혁을 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은 완전하지만 하나님의 표현은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늘 영원토록 변화해야 된다. 교회는 영원히 변화해야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때 늘 그렇게 변화해야 된다. 고정되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교회를 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어떤 것을 믿고 안 믿고를 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대기 상태에 있어야 되고 계속 기다려야 된다.
하나님이 오늘 어떻게 하실지 내일 어떻게 하실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빈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빈 형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보고 나그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나안땅 헤브론에 너를 거하게 하겠다고 말했으면 아예 처음부터 헤브론 땅으로 가버렸을 것이다. 가자마자 자기 묘지도 사놓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고 애매하고 막연하게 말씀하셨다. 지시할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니 갈 곳 있는 사람 같으면 못 간다. 갈 곳이 없으니까 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갈 데가 없으니까 막연한 말이지만 그 말을 믿어야 된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지시할 곳이 어디인지는 아브라함은 몰랐던 것이다.
세겜을 지나서 벧엘을 지나서 헤브론에 도착했다. 그래도 그가 헤브론이 자기가 영원히 살 곳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애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것이다. 그가 헤브론이 영원히 거할 곳이라고 안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도를 내놓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때그때 말씀하시는 분이니까 만일 아브라함에 세겜에 도착하여 그곳에 콘크리트로 집을 지어버렸으면 하나님이 다음에 벧엘로 가라고 할 때 못 갈 것이다. 집이 너무 아까워 갈 수가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담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천막생활을 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직 갈 길이 남았으니까 토담집, 벽돌집을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움직이면 움직일 수 있도록 조립식 집, 천막을 지으라고 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천막을 주섬주섬 챙겨서 둘러메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 딱 서면 거기에 천막을 얼른 치는 것이다. 편리한 집을 갖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움직인다는 것이다.
토담집을 짓는다는 뜻은 정착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정착하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직 갈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이 아직 갈 길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착할 수 없다. 장로교회다, 감리교회다, 천주교회다. 이렇게 정착할 수가 없다. 우리는 천막을 짓고 살아야 된다. 언제든지 움직이시면 우리가 같이 움직여야 된다.
이것이 가장 완전하게 된 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 손은 언제든지 대기하고 있어야 된다. 내가 명령하기만을 대기하고 있어야 된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같이 가고 어디에 있든지 같이 있으며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자고 걷기도 같이 걷고 밥도 같이 먹고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내 손은 항상 그렇게 한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것이다.
손이 자기의 일이 있을 수 없고 자기의 계획이 있을 수 없고 자기의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방법은 몸에 달린 것이니까 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손은 달라지기 때문에 백분의 일도 천분의 일도 손 자신은 자신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손에게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손이 자기의 계획을 갖고 있으면 내가 시킬 때마다 미안할 것이다. 나는 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손은 자기의 계획이 없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손도 마찬가지로 지루하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주인님, 나는 당신을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하여 못 견디겠다고 손이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몸이니까.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이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시대는 바로 이런 시대다.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 항상 나타나서 우리가 그 몸으로 자라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어제 것보다 오늘이 더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분명히 더 나을 것이며, 모레는 분명히 더 좋아질 것이고, 그 다음에 가면 왕국이 올 것이며, 그 다음에 가면 새 예루살렘이 올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분명한 노선을 따라 가고 있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이 최종적인 축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이 최종적인 축복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방주를 지을 때 큰 나무를 잘라서 통나무배를 지으려면 어려운 일이다. 산에 그렇게 큰 나무가 많이 있는가? 없다. 사람이 많이 탈 수 있는, 여덟 식구가 타고 생물도 다 태우고 40일 동안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는 통나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통나무를 구하려면 어렵다. 아마존에나 가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을 것 같다. 뉴욕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도 직경이 3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작은 판자조각을 연하여서 배를 짓는다면 얼마든지 크게 지을 수 있다. 100m로 할 수도 있고 200m로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크게 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배를 짓고 있는데 10만톤 20만톤 30만톤으로 짓고 있다. 그것은 쇳덩어리 하나로 지은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철판을 연결해서 짓고 있다. 여러 조각의 철판을 연결해서 짓기 때문에 얼마든지 크게 할 수 있다. 50만톤도 할 수 있고 100만톤도 할 수 있고 200만톤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교회도 얼마든지 커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쉬운 것은 아무리 적은 조각이라고 상관이 없다. 아무리 적은 조각이라고 붙으면 다 붙어진다. 용접만 하면 다 붙는다. 적은 조각이라도 많이 붙는 것이 낫지 철판 큰 것이 하나 있다고 해서 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적은 조각으로서 배가 되려고 한다면 너무너무 쉬운 길이다. 나 한 사람이 배가 되려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배의 한 부분이 되어, 한 판자가 되고 한 철판이 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쉬운 일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서 당신의 몸을 건축하는 시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구원이 쉬워지게 되었다. 왜 이렇게 쉬워지게 되었는가? 배를 건축하려니까 교회를 건축하려니까 이렇게 쉬어지게 된 것이다. 전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해져야 되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지금은 배를 건축하기 때문에 아주 쉬운 시대에 와있다.
나는 하나님 건축의 한 부분이다. 나는 하나님 건축에 협력하기 위한 한 파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쉬워지겠는가! 형제와 연합하여 나는 한 배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나는 형제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나는 형제와 연합하여 완전해질 것이다. 이러면 얼마나 쉬워지게 되겠는가!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이 사라지게 되고 없어지게 되고 온전한 것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제는 우리가 완전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냥 하나의 조각만 되면 된다. 하나의 파편만 되면 된다. 그러면 배가 지어진다. 그러면 몸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위대해질 필요가 전혀 없고 자기가 높아질 필요도 전혀 없고 자기가 잘날 필요도 전혀 없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요구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몸을 건축하는 데는 작은 돌멩이들이 필요하니까 이 작은 돌멩이들이 모여서 작은 파편이 모아져서 작은 지체가 모아져서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쉬운 시대에 왔다.
나를 써주옵소서라고 할 때 여러 방면에서 쓰여질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을 벌어 헌금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못해도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니까 입술이 둔해서 안 되겠다. 돈을 벌려고 하니까 재수가 없어서 안 되겠다. 다 안 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연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아무 것도 못해도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불렀는가? 아무 것도 못해도 그 한 가지는 할 수 있는 그 자리로 불러놓았다. 형제의 아름다운 간증을 받쳐주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간증도 못하고 뭐가 되겠는가? 잘하는 간증 받쳐주면 된다. 간증 잘한다고 웅변 잘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간증이 나올 때 내가 받쳐주면 되고 아멘하면 된다. 그것도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가 된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나가다가 한 마디 해주고 영원히 오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교회 건축에 일조를 하고 갔기 때문이다. 천당에 가면 그 사람 이름도 있을 것이다. 몇월 몇일에 지나가다가 협조했다고 되어있을 것이다. 간단하다. 하나님이 목표가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누구든지 일조하면 된다.
하나님 목표가 그 사람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에 어쩌다가 어떨 결에 불려 와서 환한 빛을 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한 번 하고 영원히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 올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오지 않았다. 그 사람 때문에 교회는 얼마나 올라갔는가! 우리의 계시는 얼마나 밝아졌으며, 우리는 얼마나 확신에 갖게 되고 분명해졌는가! 생전 모르는 그 사람이 오히려 순수하다.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세상이 되게 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찬송하지 않으면 이 돌들이 일어나 찬송할 것이다. 그 돌 하나가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영화롭게 하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말이 하나님 교회를 건축하는데 큰 힘이 되게 된다. 긴가 민가 하던 사람이 이 안에 있으면서도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던 사람들도 교회 ‘교’자도 모르고 하나님 ‘하’자도 모르던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냐고 지나가면 그때 힘을 받아서 옳지 그렇구나. 이렇게 된다. 그 사람은 천 마디 설교를 듣는 것보다 이 한 마디가 낫다.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능력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얘기해도 안 되는데 한 마디 하고 간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개개인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건축하는데 있다. 당신의 사회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당신의 나라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오른편에 있는 강도가 죽으면서 예수님에게 마지막 한 말이 있다. 당신이 행한 일이 옳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 한 마디가 자기가 살려고 한 말 같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이 말이 엄청나게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지금 예수를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판에 십자가에서 숨이 똑 끊어져가는 사람이 당신이 행한 일이 옳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증거했다는 것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겠는가! 그 힘든 예수님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한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때 예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힘을 드린다는 것, 예수님에게 힘을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교회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아무리 잘 나고 아무리 깨끗하고 완전해도 세상이 있다. 사탄이 구상하고 있는 사회가 있다. 그 사회 앞에 가면 아무 것도 안 돼버리고 만다. 그런데 교회는 비록 바닷가에서 불려왔고 세관에서 모여왔고 다멕섹 도상에서 끌려왔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사회를 이루고 있다. 사회는 사회로 밖에 이길 수 없다. 개인은 개인으로 싸우는 것이지만 사회는 사회와 싸우는 것이지 사회와 개인은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하다.
공산주의 세계와 왜 무역하기를 꺼려하는가? 공산주의 사회는 무역회사가 간판만 있지 사실은 없다. 다 국영으로 국가 것이다. 개인과 개인이 무역을 해야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이다. 현대중공업이 무역을 한다는 것은 법인이지만 개인이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무슨 주식회사와 무역을 한다는 것은 북한이라는 나라와 거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거래가 안 된다. 만일 그곳에서는 총칼을 갖고 있는데 현대중공업은 총칼이 없다. 전쟁이 안 된다. 돈을 떼어 먹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북한에 투자한다고 하는데 떼어먹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서 김정일을 엎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서 나는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무 책임도 없다. 그래서 무역을 못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는 사회로 밖에는 서로 설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사회를 필요로 하다 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다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한 군대를 구성하기 위해서 사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다 필요하다. 행주산성에서 전쟁을 할 때 여자들이 앞치마에 돌멩이를 넣어서 주었다고 한다. 그 아낙네들이 앞치마에 갖고 온 돌이 몇 개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전쟁을 하려니까 그 돌이 다 필요하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정복하려고 하니까 당신의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신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비록 부족할지라도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도 생각은 맑으신 분이니까 우리가 속으로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다 아실 것이다. 거울처럼 다 들여다보고 앉아서 ‘이놈!’하면 꼼짝도 할 수 없다. 다 알지만 하나님이 급하시다. 당신의 전쟁을 위해서 급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제쳐놓고 주의 이름을 부를 사람만 있으면 다 내 백성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구원받기가 참 어려웠다. 모세 시대에 구원받기 참 어려웠고 아브라함 시대에도 구원받기가 너무너무 어려웠다. 그 많은 사람 속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이 구원 받았다.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노아 시대에 구원 받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노아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었다. 그만큼 구원이 어렵다는 얘기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너무 급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급하기 때문에 아주 기준을 낮추어 버렸다. 커트라인을 500점을 설정해두었다가 노아시대에 와서 100점을 깎았다.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 또 100점을 깎아내고 또 모세 시대에 와서 100점을 깎아내고 예수 시대에 와서 100점을 깎아내고 사도 바울 시대에 와서 100점을 깎아내고 지금은 0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교회 시대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나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났는가 못났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얼마나 됐는가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작은 벽돌 하나가 전체의 집을 받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비록 작을지라도 큰 건물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는 한 교회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한 벽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큰 건물이라도 밑에 있는 벽돌 하나가 빠지면 이 집이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벽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나님 당신은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게 하실 것인가는 하나님 자신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우리는 모른다. 자기가 보기 싫으면 좋게 할 것이다. 자기가 불편하면 편리하게 만들 것이다. 좌우지간 우리는 교회만 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보기 싫으면 좋게 만드실 것이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니까 우리가 할 일이 전혀 아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한다. 우리가 만일 노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영락없이 멸망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아브라함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영락없이 멸망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모세 시대에 태어났어도 역시 불순종한 사람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 시대에 태어났다하더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가서 데모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여라~ 죽여라~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20절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도의 자격이 간단하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면 된다.
베드로는 별 것 아닌 사람이다.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사람이니까 여러분 보다 학력이 없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고등하교 나오고 대학교 나오고 했지만 베드로는 아예 문교부 혜택을 못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공회에 있는 사람들은 놀랍고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공회 앞에 서서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보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보고 들은 것이니까 아무리 무식해도 할 수 있다.
사도가 되는 일은 간단하다. 보고 들은 대로 말하면 된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들은 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쉬운 것이다. 눈만 바꾸어지면 누구라도 볼 수 있고, 귀만 바꾸어지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결국 사도는 증인이다. 무슨 증인인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증인이다. 우리에게 논문 쓰라는 얘기도 아니고 우리에게 연구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우리에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제자들 같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메시야가 될 줄 알고 쫓아다녔다. 뒤로 가다보니까 십자에서 죽더라. 우리는 바닷가로 도망가서 고기 잡고 한숨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또 찾아와서 우리가 할 수 없이 왔다고 말하면 된다. 사실대로 말하면 쉽다.
나는 전에 이러저러한 사람이었지만 이러저러하여 아무개가 오자고 하여 왔다. 와서 나도 많이 헷갈리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된다. 간증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간증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보고 들려주신 것을 듣고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수의 증인들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면 막연하니까 오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의 증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나는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니까 어렵지만 나는 보고 들은 것의 증인이라고 하면 된다. 나는 어느 형제가 우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눈물의 증인이라고 하면 된다. 아주 쉽다. 알고 보면 다 그리스도다. 공연히 미쳤다고 울겠는가? 그냥 울겠는가? 보고 들은 것의 증인이다.
그것을 괜히 각색하여 예수를 봤다고 하면 잔소리가 많아져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어버린다. 자기가 잘 모르니까 성경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만 잘 맞지 않아서 말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런데 본 대로 말하면 아주 쉽다. 나는 아무개가 우는 것을 봤다. 나는 아무개가 변화된 것을 봤다. 나는 아무개 인생이 이렇게 이렇게 바꿔진 것을 봤다. 이 모두가 증인이다.
우리는 증인 못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졸다가 가시는 분도 증인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나는 잠이 오지만 여기를 떠날 수 없어서 앉아있었다. 잠이 오면 자기 집 안방에 가서 자지 왜 거기서 잤을까? 의문이 생긴다. 이상하다. 그것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는 징조가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 가지를 섞어서 여러 말을 하려고 하면 헷갈려서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가 된다. 아주 간단하다. 졸리면 뭣하러 집에 가서 자지 여기에 있었냐고 물으면 그때 뭔가 자기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면 된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앉아있었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아들이 얼마나 좋아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내 아들은 이렇고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쫙 나올 것이다. 증인이라는 것이 간단하다. 진실하기만 하면 다 증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도 차려오는 사람이 많으니까 잔치에 참여할 수 있고, 또 내가 많이 있어서 배급해서 줄 수 있는 데가 있어 좋다. 음식 많이 했는데 음식이 쉬니까 먹을 사람 없으면 그것도 큰 골치다. 음식 많이 한 사람은 먹어줄 사람 많아 좋고, 음식을 준비 못한 사람은 차려주는 사람 많으니 좋다. 그러니 교회생활이 얼마나 좋은가!
우리는 참 편리한 시대에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회를 필요로 하시니까. 당신의 떡을 나눌 사회를 필요로 하고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많은 사회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별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이 필요가 있어서다. 우리가 하나님 필요를 깨달을 때, 그때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 필요! 하나님 필요! 하나님 필요는 교회구나. 하나님 필요는 그 나라구나. 하나님 필요는 그 백성이구나. 하나님 필요는 그 백성이니까 애기도 필요하고 어른도 필요하구나. 하나님 필요는 절름발이도 필요하고 앉은뱅이도 필요하고 다 필요하구나.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필요하구나. 이것을 알게 되면 내 인생이 쓰일 데가 생긴다. 아무 데도 쓸데없는 사람도 교회에 오면 쓸 데가 있다. 아무 할 일이 없어도 교회에 오면 할 일이 있다.
이것은 완전하게 실업을 구제하는 곳이다. 완전하게 인생의 절망을 구제하는 곳이다. 다 할 일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돈벌이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잘 버는데 죽도록 노력해도 못 버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도 교회로 오면 된다. 하는 것마다 재수없어 안 되는 사람도 교회로 오면 된다. 왜냐하면 자기 할 일이 따로 있다. 어디를 가든지 욕만 얻어먹는 사람도 교회로 오면 된다. 그러면 다 환영 받을 수 있다.
교회 밖에는 더 좋은 데가 없다. 이것이 예수 부활이 시대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런 시대가 왔다.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세계 안에 살기 때문에 이런 시대에 왔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이 다시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런 시대를 볼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담도 다 헐어버렸고 인종도 헐어버렸고 국경도 헐어버렸고 율법도 헐어버렸고 모든 것을 다 헐어버렸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 있게 했다. 하나님 필요만 딱 남게 만들어놓았다. 그 전에는 여러 가지가 지저분하게 복합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필요와 다른 것이 섞여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서 우리가 그 기준에 맞추기가 너무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주님께서 음부에까지 내려갔다 오시면서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고 부활의 몸으로 올라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부활의 시대 안에 와서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그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옛날에는 유대인이 아니면 은혜를 입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유대인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그때는 율법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 백성이 될 수가 있다.
그때는 기준이 많았다. 부활하신 이후 기준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기준이라는 것은 다 우리 육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역사와 육체 때문에 기준이 생긴 것이니까 역사와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는 우리의 기준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쉬워졌다.
개인적으로도 역사를 가지고 있고 주장을 가지고 있고 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살기 불편하지만 다른 사람도 살기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념도 죽어버리고 주장도 죽어버리고 고집도 없어져버리고 내 생각도 없어져버리면 나도 편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편하게 한다. 내 주장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한 것이지 내 주장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일이 없다.
십자가에서 이것을 다 못 박은 후에는 우리는 기준이 없어져서 주님이 어디로가시든지 그대로 갈 수가 있고, 하나님이 어디로 운행하시든지 그대로 운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된다. 아주 쉬워진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살고 있고, 교회에서 이런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점점점점 담이 없어지고 점점 간격이 없어지고 기준이 없어지고 주장이 없어져서 우리가 모두 한 떡 덩어리가 되게끔 진다. 밀을 통밀로 놔두면 절대로 연합이 안 된다. 방앗간에서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하나가 되고 만다. 부활은 가루를 만드는 것과 똑같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자랑, 고집, 주장, 생각, 이것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부활 이후 시대 안에는 이런 기준이 전혀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보고 들은 것만 말하면 되는 그런 세계로 우리는 인도하신 것이다. 교회의 한 일원이라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다. 옛날에 혼자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할 때 대단히 어려웠다. 아침마다 기도해도 왜 그렇게 안 되는지~. 기준을 놓고 기도하니까 기도가 되는가? 안 된다. 나를 이러이렇게 하게 해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면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 것 같다. 만일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주었으면 나는 영락없이 그대로 가버렸을 것이다. 내가 원하고 기도한 것은 하나도 해주시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이 야속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나를 사랑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네가 왜 쓸데없는 것을 기도하느냐고 하셨던 것 같다. 나는 네가 필요한데 너는 뭐가 필요하다고 하느냐고 하셨던 것 같다.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하여 어떤 신앙적인 경지에 이르고자 할 때, 어떤 수준에 도달하고자 할 때, 그때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른다. 그 수준에 도달이 안 된다. 역사의 기준을 정해놓고 맞추어보려고 하니까 안 맞는다. 아무개 같은 사람이 돼보려고 해도 안 되고 피곤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나를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교회 안에서 교회를 섬기도록 하니까 내가 내 있는 대로 섬기면 된다. 없는 것을 끄집어다 할 일이 아니고 내가 있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대로 하면 된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이 주신 대로 했지 내가 짜낸 것이 없어 쉽다. 안 될 때도 있고 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대로 하니까 나에게는 부담이 없고 쉬운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대로 하면 쉬운 것이다. 억지로 하늘에서 끌어내리겠는가? 땅에서 파오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대로 살면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한 사회를 이루기를 원하고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각자가 받을 것을 가지고, 한 사회를 완성하기를 원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에 지체가 많으나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는 흙이고 방주를 지을 판자이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나그네고 광야에 메말라 있는 떨기나무고, 여러 강한 짐승들 속에 끼여 있는 인자이다. 한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내 설 자리를 찾게 되고 그 안에서 내 일도 찾게 된다. 나는 거기서 내 행복을 찾게 되고 내 소망을 찾게 되고 내 장래를 찾게 된다.
나의 장래도 빤한 것이 이 교회 안에서의 장래니까 내가 이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은 이 교회 안에서 맡은 지체대로 내게 주어진 지체대로 지체의 역할대로 하고 다른 사람이 다른 역할을 하면 한 몸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다. 전에는 나 혼자 다하려고 생각했는데 혼자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게 주신 것만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내게 주신 것만 하면 하나님이 또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내게 없는 것을 주신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없는 것을 하게 한다. 그러니까 완전해진다.
이제는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량대로만 내놓으면 되고, 분량대로만 살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렇게 되어서 하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고 하나의 몸으로 완성되어져가고 우리가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한 사회로 발전해가기를 원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우리를 다 당신의 지체가 되게 해서 당신의 몸을 이루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려고 우리고 부르시고 지으시고 구원하셨는데 우리가 거기서 홀로 서기를 원하고 거기서 잘 돼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주께서 주의 영원한 계획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넓어지고 그 안에서 자라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 당신의 몸이 이 땅위에서 절실하게 필요하고 영원토록 그 나라가 확장되어 당신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이 절대적인 필요를 우리가 깨닫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이 쓰시는 자리에 쓸 수 있는 자리로 발견했고 당신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주 앞에 우리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한 줌의 흙으로 하나의 작은 판자조각으로 받으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데 우리가 사용되기를 원하고 그 속에 우리가 묻혀있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