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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텔미-마돌: "벩송(Bergson, 1967)",
닫힌 영혼과 열린 영혼 사이에 열려지는 영혼이 있다.
제8장 폐쇄에서 개방으로: 도덕의 두 원천 De clos à l'ouvert: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140
“금단의 열매에 관한 추억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처럼 우리들 각각의 기억 속에서도 보다 오래된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개인적 선사시대”는 인류의 선사시대와 하나이며, 부모의 금지사항은 우두머리(le Père) 통치하에 무리(la horde)의 금지사항들과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초기 과오는 원죄와 하나이다. 우리는 만일 “누군가 우리를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도덕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과 문화 Nature et culture 140
닫힌 사회는, 즉 인간의 문화적 첫 단계는, 자연의 주변들과 특성들을 받아들인다. 사회적 법칙들에 복종하는 자유 의지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비교의 범위에 따라 자연 법들의 질서와 모든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다. 사회적 질서와 자유들과 관계는 자연적 질서와 사물들과 관계와 같다. 우리들 각자를 위하여 습관은 현상을 위한 필연성의 동등가이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습관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탈[어긋남]이 났던 것을 다시 정립해야만 하는 감정은 아주 정확하게 책무(l'obligation, 당위)의 감정이다. 그 감정은, 마치 신자체의 초월처럼, 우리를 짓누른다. 왜냐하면 각자의 책무는 잠재적으로 모든 책무들로 조직화된 일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또 전체적 무게로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발에서부터 심리학적 설명에 사회학적 설명이 서로 섞여있다. 여하튼 윤리학은 이 수준에서 환원을 감당한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은 순간만, 즉 “닫힌” 순간만 윤리학을 합병한다. 심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다음 차례로 “개방”의 차원에 의해 합병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것과 심리학적인 것은 제2천성(une seconde nature)을 제안하는데, 이 제2천성은 생명의 본성과 단지 “유비(l'analogie)일 뿐이다. 제2본성은 자기 속에 문화의 기본적 형태를 함축하고 있다. 당위는 기계적 모델의 압력이며, 그러나 이 압력은 자유로운 존재들에만 볼일이 있을 것이다. 메카니즘은 과학적 세계를 참조한다. 그런데 자유는 정신적인 것에 대해 증거 한다. 따라서 당위와 법률이 자기들의 특성들을 서로 서로 소통하게 하는 것은 뜻밖의 것이 아니다. 당위는 법률에게 불가피한 것을 빌려준다. 법률은 당위에게 명령적인 주권을 빌려준다.
사회가 개별적인 의지들을 규칙성으로 귀착시킬 수 없을 때, 사회는 위선(l'hypocrisie)이란 덮개를 분비하며, 사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업었던 것처럼 지낸다. 그런데 그 사회는 비밀을 간직하며, 모범적인 말투(말씀씀)로 변장하여 제반 [의식적] 작동들을 쏟아 붓는다. 인류가 말한 것[전승된 것]은 너무 곧이곧대로 듣지 말자. 벩송은 문명이란 치장아래 남아있는 맹폭성에 관해 착각하지 않고 있다. 이리하여 이 자유들을 가지고 책략을 쓸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 자유들이란 벩송 의해 채택된(게다기 유보된) 자연적 모델을 터져 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종종 우리 스스로 복종하도록 밀고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그 자유는 정념들에게, 비판적 지성에게, 질서를 침범할 특별한 기획들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이 필연성에 감정은 이 필연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의식을 수반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필연성은 그래도 책무라고 부르는 것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되고 또한 가장 일상적인 책무를 수용한다 점에서, 책무와 필연성의 관계는 습관과 자연의 관계와 같다.”
인간은 사회 속에 있으며, 그런데 사회는 그 인간 속에 있다. 이 삼투 현상 속에서 감화들과 정념들의 왕복진자운동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하는 균형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면서, 인간이 아마도 [미래에] 발견할 다른 균형, 그리고 형이상학과 종교에까지 접촉할려는 다른 균형을 기대하기도 한다. 개인-사회 간의 공생(la symbiose)(삼투현상 보다 더 나은 개념)은 아주 내밀한 것이어서, 로빈슨 크루스의 섬[무인도]조차도 실제적으로는 보이지 않은 인류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키플링의 산림지기는 [혼자서] 저녁식사의 식탁에 참석할 때, 연미복의 차림으로, 자신이 구성원으로 있는 그 사회를 자기 식탁에 초대한다. 이들이 가는 또는 이들이 난파당한 어느 곳에서나, 사회는 그들과 함께 가고 또는 난파당한다. 반대로 범죄자는 인간적 목소리들로 소란한 도시에서도 혼자이다. 그가 잘 아는 사라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들이 그를 알면 알수록, 그는 더욱더 강화된 고독 속에 산다. 그것은[모습]은 그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이 그에게가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닌 순진한 자[범죄이전의 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고, 그는 대답한다. 실제로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이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는 살해범을 스스로 벗어버림으로써만이 그것[침묵]을 중단 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 범죄가 사형언도가 된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대화가 회복 되리라.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는 재판관의 집무실로 향하는 데, 그 재판관은 그를 사회 속에서 범죄자로 취급하려 할 것이고, 그가 죄인의 한사람이 될 것이지만, 그러나 [사회의] 진지한 구성원이 될 것이다. 단절들 속에서는 겉보기 현상들이 폭로되지만, 금지들 속에는 도덕이 나타난다. 게다가 저항들 속에서 책무가 소리 높여 말 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말하자면 사회에 자동적으로[거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저항들에 저항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장애물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긴장과 응축의 상태를 산출할 것이다. 우리는 의무(devoir)에 매우 엄격한 측면을 부여할 때, 우리가 외화하는 것은 바로 이 뻣뻣함(raideur)이다.”
근본적으로 의무가 더 이상 노력이 아니듯이, 신경통(류마티즘)환자에게서 걷기는 근육의 경직화에 저항으로 한정될 수 없다. 이리하여 습관 속에서 잠자고 있기를 그만 둘 때, 의무는 힘[권력]들의 투쟁 속에서 힘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 속에 일종의 잠재적이고 확산된 저항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저항은 사회적 질서의 신봉을 칭찬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기수는 출발에서 말의 안장 위에 올라타야 하는 정도에서, 그 다음에야 말이 기수를 태워가는 것이다. 따라서 벩송은, 의무가 고착된 습관의 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무의식적] 자동주의와 같은 용어들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le devoir)는 자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의무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il faut parce qu'il faut)’ 라는 정언명법인 한에서,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지 도덕성은 아니다. “여기[첫째 태도]에서는 ‘책무(obligation, 강요) 전체’라고 부르는 하나의 힘(une force)이 확고하게 된다. 그것[힘]은 우리가 사회생활의 수많은 부분적 요구들에 대해 복종하는 데 몸에 배서 생긴 수많은 특별한 습관들의 진수, 즉 집중화된 추출물인 것이다. 그 힘은 이런 것 저런 것도 아니다. 만일 그것이 행동하기를 선호할 때, 그때 그것이 말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il faut parce qu'il faut).”
[* 사진 143쪽: 벩송이 앉아 있는 모습, “두세 소장품”(Fonds Doucet, Seuil)의 자료] “그는 자신의 비물질성을 통해 벗어났다.”
여기서 벩송은 칸트와 의무를 만난다. “사람들은 어떤 순간에, 칸트적인 것이 전혀 아닌 어떤 의미에서, 기본적 책무가 ‘정언적 명령’의 형식을 취하는가를 본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점이, 도덕적 규칙이 자연법칙과 본능적 이성을 재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적어도, 승리한 본능이 개미에게 자기 일을 충실히 수행하게 때, 정언명법은 지성이 휴가 중이라는 점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이 개미는 [부연하자면, 그래도 지성이 본능에 어느 땐가 관여했을 수 있었을 때] 반성의 미광을, 그 경우에 심지어는 자유의 미광을 마주했었다. 간단히 말해서 [책무의 도덕 전체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개미로 되돌아 간 이야기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지성적이고 나중에는 본능의 길을 따르는 행동성(activité)은 인간에게서 습관이라 불린다.”
인간이 사는 도시는 군집(la fourmillière)장소이며 동시에 진보의 장소이며, 자연과 문화의 만남의 장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의 가차 없는 압력을 정언적이고 명령적인 담론으로 방어하며 산다. 문화는 그 자체로서 아직은 “말로 될” 수 없지만, 임시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자연을 정식화할 것을 수용한다. 문화는 말을 하지 않고 행동해야했던 것[본능]에게 말씀씀이[말투]를 빌려준다.
생명 도약을 하지 못하고 후퇴한 닫힌 사회, 정언명법, 적응의 문제에 대한 평범한 해결 등이 우리를 창조적 진화의 계열 속에 자리하게 했다. 창조자가 원했던 것, 얼마나 자연이 능란했는지, 자연의 공훈들, 이러한 것은 신화적 이야기의 우여곡절을 겪는 사건들(les péripéties)이다. 벩송은 이 신화적 이야기에 대해 신화화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매료되고 있고, 또 독자를 매료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화는 스스로 신화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회화는 막시류 군집에서 그리고 인류에서 등록되어 있다. 전자에서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닫혀있고, 후자에서 예측 불가능이, 다시 말하면 호출(un appel)이 돌발한다는 조건에서 진보로 열려져 있다. (48SLA)
영웅들과 성자들의 품행에서 Sous la conduite des héros et des saints 144
만일 사람들이 음악 작품에 주석을 단다면, 사람들은 한 주선율에서 다른 주선율로 이행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순수 책무의 미묘하지만 건조한 분석 다음에, 이제 드라마적인 떠올리기(l'évocation상기), 말할 수 있다면 예외적 인간들의 무대 입장이 뒤이어 나온다. 이 인간들에서는 책무가 흡수되어 모습을 바꾸게 될 것이다. 만일 영웅들과 성자들이 호그들의 호출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지상의 잡사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벩송주의에서 닫힘[폐쇄]는 자신 속에 열려지는 무엇인가를 갖지 않는다. 폐쇄로부터 열림[개방]의 생성은 없다. 이 양자 사이에서 차이는 본성상이지 정도상의 차이가 아니다. 그래서 도덕의 두 원천이 있다. 사회적 구조들의 도식(le plan)에서, 개념적 단순 파악(l'appréhension)은 조작적이다. 특권적 인격성들의 도식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벩송 담론의 리듬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게 이루어져 있다. “나도 모를 무엇”이며 단어의 깊은 의미에서, 매력은 마술가로서 벩송이 작업해 놓은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마비시키기도 하고 매혹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세대들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중요한 계기들에 운율을 맞추어 놓은 철학적이고 동시에 시적인 문장들을 통달했다. 우리는 이 계기들 중에 하나에 속해 있다. 크리스트교의 성자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불교의 아라한들이 모범으로써 행렬을 지어 지나간다. 도덕은 구현되어 있다. 모범의 예는 모방하도록 제시되어 있다. 호소(l'appel, 부름)에 응답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정신적 에너지들[실행자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끌어당길 뿐이다. 정신적 에너지들을 발하는 자들은 명령하지 않으며, 요구하지도 않는다.
“왜 성인들에게는 이처럼 모방자들이 있으며, 왜 선행을 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 뒤에 군중을 이끌고 다니는가?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르는 자들을] 얻는다. 그들은 권고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단지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현존은 호소(l'appel, 부름)이다.” 이 호소는 인류의 앞에서 울려 퍼진다. 왜냐하면 성인들과 위인들은, 인류의 지속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또는 우주적인 지속이기도 한, 전적으로 완전한 지속에 현재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웅들과 성인들을 만났던가? 그들이 위대한 이름을 지니는 것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기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기사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은 그 어떤 이와도 공통분모가 없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억에 상의해 보자. 우리는 실재성 속에서, 내적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전적으로 감당할 만한 한 인간을 만날 기회를 가졌던가? 우리가 뜨거운 접촉과 대화에서 오직 그 [인간임을 감당할] 인간을, 즉 우리가 되고자 원했을 인간을 알고 있었던가? 우리들 각자에게는 자기 영웅들과 자기 성자들이 있다. 각자는 이들과 동일시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마치 어린이가 그림 책들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진실한 닮음이 조화로운 차이화(une différenciation)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며, 이미 닮음이 있는 데도 닮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를 환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자신이 생성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켈레비치가 말했듯이, 그들이 행했던 대로 행하라, 그들이 행했던 것을 행하지 말고. 이때에 영웅들과 성인들은 우리 의지를 진실로 흔들어 놓고, 우리 자유를 각성하게 한다
“이 [사랑의] 노력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따르게 하는 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에서 사회적인 압력에 짝을 이루는 그 힘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본능과 습관 밖에서, 의욕하는 것을 향한 직접적인 행위로는 감성(la sensibilité)[pathos]의 행위가 있을 뿐이다.” 성인들과 영웅들은 우리에게 그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감동을 준다. 에너지는 우리를 진동하게 했고, 그런데 전체 우리 영혼은 승낙했다. 그 영혼은 새로운 음계의 반향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혼은 느끼고 듣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영혼은 이해된 음악의 리듬에다가 운동을 창조한다. 감동(une émotion)은 커다란 우발적 충격처럼 정신 안에 무질서를 흩뿌리지 않으며, 또한 미학적 쾌락처럼 시련을 겪게 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목적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정렬해 놓는 감동, 그것은 창조적 감동(une émotion créatrice). 여기서 이 감동은 자연 또는 예술처럼 움직이지 않는 형식들을 만들지 않는다. 이것은, 감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하여 도약을 다시 하는 공동-창조자들(co-créateurs)을 만든다. 따라서 도덕은 변형된 모습으로 된 생물학일 뿐만 아니라, 도덕의 효과는 생물학을 변모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을 예술에 비교할 수 없다. 도덕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이런 종류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림들도 조각들도, 심지어는 그 자체들로 매우 아름답고 또 그 자체들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교향곡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고정되어 있다. 살아있는 정령들인 한에서, 그리고 현실태로서 [다양한] 자유들인 한에서 인간들은 이제부터 창조된다. 닫힘(폐쇄)은 열림(개방) 안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자연적 사회는 스스로 사라질 위협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를 더 잘 완성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피상적 관점은, 우리가 점점 더 큰 무리로 증가함으로써 인류(l'humanité)에까지 통과한다고 믿게 할 것이다. 그러나 벩송의 가르침을 이해했던 사람이면 누구나 인류란 가장 큰 원이 아니라는 것이며, 가정과 조국으로부터 생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인류는 모든 인간들의 경험적 총체성도 아니고, 인류성이란 필연적이고 추상적인 보편 개념도 아니다. 인류는 순수 질적인 것이며, 그것은 그 이름으로 둘 또는 세 사람으로 거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간들 모두를 함께 재통합할 것이라고 할 때일지라도, 그것은 [전쟁을 보면] 인간들의 총체성(총체적 성질)을 저버릴 수 있다. 인류, 그것은 지속의 차원 그 자체이며, 그것이 이질성이기 때문에, 그것 안에서 우리는 전체에 참여할 수 있고, 동시에 이 동일한 운동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인격성] 속에 깊이파고 들어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창조자로서 우리의 첫 작품, 그것은 우리 자신이다. 인류는 운동과 마찬가지이다. 엘레아 학파의 제논(Zenon, 전335-264)의 논증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그(인류) 속에 단번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사랑에 의하여 거기에 들어간다 .
그러나 이 사랑(l'amour)으로 인류는 충분하지 않다. 벩송에서 사랑은 불붙이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이유가 없다. “이 영혼을 소유한 자에게 있어서 사랑(la charité, 자비)은 지상에 살아 있는 다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존속하리라.” 사랑은 인류를 관통한다. 그 사랑은 조국 또는 고향마을 관통했다. 그것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자아의 경계없이 개방을 표현한다. 대상이 없다는 것은 대상이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의 원천이 무상의 선물[무상보시]이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떠한 대상도 이 사랑을 멈추게 하거나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 자체는 대상일 수 없다. 우리가 신을 사랑한다(aimer)고 할 때,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신이고, 신비가가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두 작동의 통합이다. 블라디미르 쟝켈레비치는 그의 개인적 조망 속에서다가 “순수 사랑”(le pur amour)에 대한 벩송의 주제를 발전시켰다.
이리하여 창조적 감동은 표면의 동요가 아니라 오히려 심층들의 봉기이며, 이것을 감당한 어떤 생각과 어떤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념들과 행위들의 발생자이다. 산맥 앞에서 루소의 감동은 우리의 감동을 창조했고, 말하자면 풍경 그 자체를 재창조했다. 공사적 사랑은 종교적 사랑들과 연인들을 창조했다. 테레사(Sainte Thérèse d'Ávila, 1515-1582)와 이냐스 드 로욜라(Ignace de Loyola, 1491-1556)는 기사도 소설 탐독자들이었다. 도덕적으로 창조적 감동은 위대한 정신적 흐름들을 창조했다. 그리고 이들의 최상의 효과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정도에서 발명할 것을 그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하는 것이다. 이 창조적 감동의 도덕은 감정의 도덕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랑(Eros)으로 철학의 누룩을 만들었을 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철학을 욕망(le désir)으로 환원시키지 낳았다. 벩송은 아카페적 사랑 즉 복음에서 요한의 자비(caritas) 를 가지고 도덕의 원리로 만들었을 때, 그는 감정의 도덕을 만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적 감성은 수동적 감성과 대척점들에 있기 때문이다.
성인들과 영웅들은, 기원적 도약이 필연적으로 부동성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말하러 온다. 우리는 그들이 이해했고 우리에게 전했던 그 호소가 출발했던 그 점을 향해서 그들 뒤에서 행진하는 것이 거의 아닐 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간다는 점이 매력 있는 점이다. 생명도약 그 자체는 이 자체의 유한성 속에서 종의 법칙들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게 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 어떤 에너지가 나와야 한다. 그 도약은 의심여지 없이 에너지의 반영이며, 그 에너지는 다시 추락하지도 않고, 분할의 원인들(des causes de division)도 아니나, 통합 속에서 차이화하는 힘들어야 한다. 즉 그 에너지는 순수 지속이어야 한다. 만일 에너지가 우리를 앞으로 나가도록 부른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인류[애]는 미래로 향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생명도약과 신비적 도약의 관계는 물질과 생명의 관계와 같다. 신비적 도약은 생명 도약을 좀 더 멀리까지 인도하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것은 마치 생명도약이 타성적 물질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것을 자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양자는 이들이 자신들 안에서 수용한 것의 방향을 뒤바꾼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도약의 수준에서 도치(l'inversion)는 전향(la conversion)이다. 이로부터, 과거는 미래 속에 감싸여 졌다. 우리가 되돌아온 것[과거]은 우리가 가고 있는 싯구[미래]보다 훨씬 더 적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일 신비적 도약이 생명적 도약을 다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정신적 에너지가 이 후자 속에 또한 현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정신적 에너지는 불완전하게 현재하고 있다,
해방은 사회의 닫힌 틀을 파열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유행위(l'acte libre)가 피상적 자아의 구조들의 폭발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덕적 해방은 자유해위의 “의미(le sens)”이다. 시론의 작업들의 계기에서, 벩송은 심리학적 분석의 자료들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때 자유행위는 단지 자아의 개화(l'épanouissement)에만 전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제 “심층자아”가 다른 영혼들과 또 전 자연과 공감하는 한 영혼이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아의 고유한 한계들을 부수면서 영혼이 사회적 환경의 한계들을 깨뜨렸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 종에게 부여한 창조적 작동(l'acte)은 “하나의 정체(un arrêt)였다. 다시 앞으로 행진(la marche en avant)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정체를] 파괴하려는 결단마저도 파괴해 버린다.” 만일 누군가 모든 인간들을 이끌지 않았다면, 그는, 말하면서가 아니라(여기서도 또한 벩송은 언어에 대한 경멸이 있다) 앞으로 행진에 참여함으로써, 적어도 이들 중 몇몇을 이끌어간다. 장애물을 운동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지 단어들에 의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을 걷음으로써 증명한 철학자는 이와 같이 진행한다. 그 철학자의 작동(son acte)은 순수하고 단순한 노력인데, 간격의 점들을 하나하나 건너가기 위해서 필연적이라고 판단했던 [엘레아 학파의] 제논에게는 항상 다시 시작해야하는 노력이며 그 결과로서는 무능한 노력이다.” 영웅들과 성인들은 진실한 철학자들과 마찬가지이다. 진실한 철학자들은 정신적인 자들(des spirituels, 영적인 자들)이다. 그 운동 즉 사물들의 실체 자체로서 운동자(le mouvant), 그것은 여기서 앞으로 행진 이며 인류의 진정한 유일 실체이다. 영웅들과 성인들은 자연보다 더 노회(rusé)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속였다(trompé). 정신성은 비판적 지성이 시작했던 것을 완성한다. 즉 예속성들과 한계성들에 대한 단절이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성으로부터 인간적인 우애(fraternité)를 향해 나가면서, 우리는 어떤 본성(certaine nature)과 단절하지만 본성 전체(toute nature)와 단절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적 표현을 이들의 의미로 완곡하게 하면, 우리가 생산된(소산적) 자연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은 생산하는(능산적) 자연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8SLF)
“열린 영혼” "L'ame ouverte" 149
“복음의 도덕은 본질적으로 연린 영혼의 도덕이다.” [예수의] 산상 수훈(Le Sermon sur la montagne)은 책무를 변형시킨 교훈들(des préceptes)을 알린다. “현행 도덕은 폐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긴 진행 과중에서 마치 한 순간처럼 제시된다. 사람들은 옛날의 방법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책무를 변형한다는 것, 그것은 책무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며, 다시 말하자면, 인간적 수준에 한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대는 소크라테스가 나타났을 때, 열려질 뻔 했었다.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는, 그를 완전하게 환원하지 못하고서, 그 인간을 흡수 했는데, 그 인간은 신이 보낸 인간이며, 신탁에 의해 헌신한 인간이며, 그의 동시대 시민들로서는 지지할 수 없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글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은 그의 출현(sa présence, 출석)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조차 그 본질의 기호(le signe)일 뿐이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404)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의 담론보다 더 많은 이야기꺼리이다. 이 모든 특징에서 크리스트(le Christ, 메시아)가 앞선 모습이었다. 따라서 벩송이라는 크리스트교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라는 두 스승을 갖는다. “가르치기 위해서든, 모범으로 봉사하기 위해서든, 또는 단순히 자신의 내면의 완성 작업을 위해서든 간에, 이 철학자가 자신의 현명함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대다수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을 경우, 바로 그기에 있는 것은 살아있는 소크라테스, 즉 그 인격의 월등한 특질에 의해 활동하는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매력은 바로 그러한 것, 즉 세계는 한 순간(un moment, 원문 pendant un temps) “크리스트교인 될 것인가 신플라톤주의자가 될 것인가를 자문할 수 있었다. 예수에게 대들었던(tenir tête à, 공공연히 대립하다)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전적으로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는 예수에 대들기를 결코 끝내지 않았다.
“닫힌 영혼들과 열린 영혼들 사이에는 스스로 열고 있는 영혼이 있다.” 습관들의 하부 지식과 정신적 역동주의들의 상부 지식 사이에도 지식적인 것이 있다. 이 간격사이에 단순한 몸짓이 그것의 도약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도약이 중단되었더라면, 지성이 습관들을 지배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성은 이 습관들을 이해했을 것이고 합리화했을 것이다. 지선은 이것들을 부셔버리지도 뒤바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주지주의자와 합리주의자의 철학들은 이 간격들 속에 위치해 있다. 사람들은 여기서 결과물로서 어떤 정의의 전시(un déploiement)를 연구할 수 있다. 이 정의는 맹목적이지도 기계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합리적 투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행진을 계속해온 역사 속에서 1789년의 정의를 이끌어가는 역동성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교육은 열려있다. 교육은 한 존재[인격]을 그 자신에게 폭로하고, 교육은 그 존재 자신이 아직 몰랐던 가능성들을 그 자신이 현실화로 만든다. 교육은 존재들을 그들 자신들에게 자식[후배]을 생산하게 한다. 이것이 “산파술”(une maïeutique)이다. 산파술은 형성해야할 정신 속에 외적인 내용을 도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정신의 내부 작동을 대낮같이 밝혀준다. 그것은 모방을 불러오고 그럼에도 독창성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벩송의 모방은, 마치 영웅 또는 성인이 그러 했듯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은 소명을 탐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명을 생명의 선물(le don 천부적 재능)에 까지 담당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모방은 오늘날 학생에게, 총살당하거나 유배당한 어제의 학생의 모방을, 대학의 땅바닥 아래 쉬고 있는 어제의 학생의 모방을 제안한다. 우선 교육은 교육자를 참여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있다(Etre)는 말하는 것(le dire)을 합법화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151쪽 그림] 1940년 10월 [딸] 쟌느 벩송의 데상. [그의 나이 81살 때, 죽기 3달 전이며, 1940년 6월 14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으니, 점령 후 3달이 조금 넘었을 시절이다. 늙은 유태인 벩송이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무엇인가 글을 써야 하는 것이었을까? ]
이론과 지식이 이 영토들의 몇몇 영토에서 점점 더 도덕을 밝히러 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지하는 것, 즉 용기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통해 통과해야 한다. 시작의 덕목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용기에게, 마치 영혼에서 영혼으로 불꽃이 번지듯이 퍼져나갈 [천부의] 선물의 광채를 첨가한다. 그리고 표본적[모범적]인 작동은 그 선물에 의해 생겨나게 하는 덕목을 지닐 것이다. 사회적 압력의 도덕은 간략하고 엄격하며 제한된 정언명법들로 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준수했던 자는 정의로웠다. 그리고 이것들을 이해했던 자는
지혜롭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은 영웅들과 성인들로 연결되었다. 매력을 끄는 도덕은 책무에게 무한한 길을 그려 놓았다. 항상 행해야할 이 모든 것이 책무를 그에 맞게 다시 고려하는 미친듯한 요구 안에 있다. 이 책무에 대해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제례가 삶에 대해 말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삶은 변했고 제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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