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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특이 철학자: 박홍규와 들뢰즈.
2023, 2월 18일 토요일, 철학아카데미 4층, 줌 온-오프 강의.
- 줌 ID: 821 4367 2593, 암호 525283
- 이항대립에서 벗어난 사유의 두 철학자: 박홍규(朴洪奎, 1919-1994)와 들루즈(Gilles Deleuze 1925-1995)
0. ‘철학하다(philosopher)’ 그리고 철학(philosophie)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 쪽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까지 살아갔으며, 게다가 약간의 특이성을 지니고 비의적 사유를 한 두 철학자가 있다. 여기서 비의(秘義)적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에 관한 것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며, 과학과 새로운 발상을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들을 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읽으면, 또는 세상 사람들이 설명하는 용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뭔가를 중심을 가지고 철학을 설명하는 것 같은데, 그 내용의 중심을 잡았다고 하면 그 순간에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잡았다고 여긴 파도가 그 거품이 사라지고 손안에 소금기가 남는다는 웃음의 효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쓰여진 글들을 다 읽어보고, 그 읽었음을 기억으로 간직하고서, 한 권의 책이든 한편의 논문이든 다시 읽어보라고 말할 것 같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벩송이 “형이상학”이라고 말했던 “경험적 총체적 사유”를 실행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바로 제기될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 벩송이 말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는 왜 형이심학이라 부르고자 하는가. 나로서는 70년대 철학을 배울 때,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그 자체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다룬다고 하고, 달리 말하면, 사물로서 또는 대상으로서 현존하는 것의 배경에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는 그 자체로 불변하는 어떤 것이라 했다. 철학은 그 불변하는 또는 모든 현상적인 변화의 배경이 되는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이 세상의 현상 속에는 본질이 먼저 있었으며, 그 본질을 알면 현상의 다양한 변화와 미래의 예측도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배웠다. 그런데 어느 시절엔가 본질을 알면 모든 현상들을 안다 것이 허위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그 자체적으로 불변하는 어떤 것을 다루는 것으로 외우다시피 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박홍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철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치를 따져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한다. 노(老)선생님과 달리, 그 당시의 젊은이로서 생각은 깊어봐야, 아는 것만큼의 깊이일 수밖에 없었다.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더하기 인식론과는 구별된다. 형이상학은 어쩌면 기원과 원인을 탐구하고 그 자체로부터 세상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지혜는 이익과 편안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어쩌면 긴 구도(求道)의 과정이기도 하고, 기나긴 탐구여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존재론+인식론에서 세상사의 사물들을 다룬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즐기는 놀이, 레고 놀이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 일부 철학자들이 철학을 수학처럼 복수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을 때, 그냥 철학이 모든 학문분야에 관여하는 정도에서 여럿이라 할 수 있지만, 철학이 모든 자료들을 다루면서 분류하고 계열을 만드는데 있다면 꼭 복수로서 분과 학문들처럼, - 형이상학, 존재론, 인식론, 사회론, 예술론, 종교론 등등 -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철학하다”는 사물이든 영혼이든 기원 또는 근원에서부터 다른 태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기원이야 알 수 없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는 여러 방식의 사유 노력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라는 단초를 중요시하는 면에서 박홍규와 들뢰즈가 비슷한 사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하다는 지혜든지 지식이든지 뭔가 탐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라 한다. 사람들은 뭔가의 지식을 축적하고, 자신들에 제기된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새로운 창안을 하고자 노력하고 열망(희망)한다. 철학하다는 근본적으로 산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고, 보다 잘 산다는 것과 함께 즐겁게 살고,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되는 것보다 다른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면서 산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산다는 것에서, 대상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삶에서 사물들과 부딪힌 어려움의 해결을 위한 지식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업무)들의 불균형과 부조리를 해소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리고 올해의 삶만큼이나 내년의 삶도 중요하기에, 씨앗을 보관하거나 양식을 축적하듯이, 상대적으로 긴 기간을 살아가야하는데 필요한 여러 조치들과 처방들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점들에서 철학하다는 산다는 것 다음일 것이다. 살면서 터득한 또는 경험적으로 쌓은 지식, 지혜 그리고 삶의 대처방식으로 제도와 체계 등을 갖추어 가면서, 다음 세대의 계승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전승의 방식으로 도구와 언어 그리고 문자들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그리스 앞선 고대인, 구석기인과 신석기인들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했는지를 모르지만, 남겨진 유적과 유물에서 삶의 흔적과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흔적과 과정이 불연속이라고 해서 연속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벩송은 삶이 겉으로는 불연속적으로 보이지만 안으로는 연속적이라 한다. 이 내재적 연속을 19세기 후반에 기억으로, 20세기 초에는 유전에서 탐구되고 있다. 기억과 유전의 내용에서 각 현존들은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순간도 진동하며 지속하고 있다. 유물, 구전, 문자 등에서도 내적 연속성의 과정을 찾을 수 있고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움직이는 이미지들에서도 경계 바깥에 연속성을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재성에서는 부분들과 요소들로 한계 지워지지 않는다.
철학이 총체적 자료들을 다룬다고 할 때,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관점들에서 분류하고 배치하고, 이에 따라 계열을 만들어보고, 체계도 세울 것이다. 이런 총체적 자료들을 다루는 것을 필로소피라고 불렀다. 이는 학문일반이기도 하다. 그런데 삶의 영역들과 계열들의 차이들에서, 사람들은 각각이 총체적 연관에서 보다 개별적 또는 특수적 터전과 상황에 따른 연관들에 더 이해관계와 관심을 갖는다. 이 분화된 계열들에 따라 과학들로, - 언어 과학(논리학) 자연과학(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생물학 의학), 인간과학(사회학, 인류학 등) - 분화되었다. 그럼에도 철학은 여전히 지혜(지식)의 학문인가? 아마도 철학도 여러 분류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 존재론, 인식론(지식론), 인간론, 공동체론 등이 될 것이다. 철학하다는 자료들을 모으고, 분류하고, 차이들에 따라 계열과 위상들을 구별하고, 각각에서 고유성을 기반으로 체계와 이론을 만들어 보는 것이리라.
서양철학에서 필로소피라는 용어에서 인식론(지식론)에 앞서서 형이상학과 존재론이 있다고들 하다. 학문의 전개과정에서 이 둘은 계열의 선들을 만드는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다루는 방법에서 차히가 있을 것이다. 다루는 방법상, 인류라는 종차원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과 땅이 서로 사맞디 아니함’에도, 둘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이 둘 사이의 관계 또는 연관을 꾸준히 문제 삼고 풀어보려는 노력에 의해, 다양한 학문들의 줄기들을 형성하고 폐기하고 또는 체계화하고 제도화하려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동서양에서 간단히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문제제기에서 해결하려는 방식은 여럿이었다. 이 중에서 자연학에서 하늘의 운행과 지상에서 운동 사이의 불합리를 해결하려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하늘의 정신과 지상의 물질들 사이의 연관을 해소하려하기도 한다. 이런 연관에 대해 중간에 중계참으로써 인간을 두고, 인간 중심에서 하늘과 땅의 대비를 영혼과 신체의 문제로 간주하기도 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음(陰)과 양(陽) 또는 기(氣)와 리(理)로, 또는 브라만과 아트만, 범(梵)과 아(我) 등으로 비추어 보기도 한다. 당대의 상식으로 불가사의한 해석 방식을, 아마도 허구이지만, 실재적인 사실로서 믿고 살았으리라.
인류가 동시대 동일한 터전에서 같은 삶을 겪지는 않았더라도 공통적인 경험과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경험적 사실들과 사건들을 거치면서 일반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일반성의 기본은 신석기이래로, 자연재해의 난문제를 해결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웅과 같은 행동을 본받자는 이야기로 전승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민중들은 삶에서 영웅이 될 수 없고, 개미 쳇바퀴 돌듯 자연의 순행처럼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쳇바퀴가 하늘의 운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맑스주의 표현대로, 생산력이 발달해야 할 것이다. 민중이 삶의 터전에서 자기의 일과 공동체의 업무들을 구별하는 시기쯤에서, 도시라는 중심체와 전원이라는 외곽도 성립할 것이다. 도시의 중심이 상층으로, 그 밖의 삶을 심층으로 구별하는 것은 나중에 사고의 발달과 학문의 배열과 배치 상으로부터 나온 개념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 안에서 활동한다와 성 밖에서 산다는 차이는, 철학하다에서 하늘과 땅 사이의 연관에서 동일성이 없다는 문제를 넘어서, 삶의 과정(한평생)에 중요하게 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적 차원과 개인의 삶의 과정 등에서 문제거리들이 문헌적으로 게다가 계통적이고 순서적으로 전승되기 시작하여, 소위 말하는 철학 또는 학문의 탐구로 이르는 길은 고대 그리스 영역에서 이라고들 한다. 도대체 왜 동방의 인도와 동양의 중국이 아니라, 작은 도시들의 합종연횡의 식민지전쟁을 하던 고대 그리스가 문제거리를 더 많이 노출하였겠는가. 중국처럼 ‘평천하’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인도처럼 인과적 연관에서 계급제도의 수용과 내세에서 새로 태어남으로서 지위의 변화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고대 그리스는 왜 신들의 이야기를 성찰하고, 동방(중동)과 전쟁에서 스스로를 반성하며, 새로운 사유방식으로서 철학 또는 학문과 과학들을 창안하려했을까? - 간단히 인간이 자치와 자주를 통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또는 인간 각자의 노력으로 자기완성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인가? -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고급지식인과 삶의 터전에서 자유민이었기 때문에 반성도 하고 성철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성과 성찰은 유럽사회가 할 수 있었던 시기는 종교의 독단에서 벗어날 갈릴레이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데카르트의 주체의 정립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를 부흥하려는 르네상스에서 그 주체가 독단과 전횡으로, 정치경제적으로는 전유로, 자연과 세상(체제)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에 대한 고민이 19세기에 르네상스 다음으로 새로이 전개되는 시점에서 벩송이 등장했다. 물론 이 19세기에 인간의 탐만치(貪慢癡)에 빠진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낌새를 알아차린 키에르케골, 맑스, 니체, 프로이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대로부터 인류의 문제거리의 부조리와 착각을 규명하는 방식은 그래도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철학자는 20세기에 별로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낯설고 기이하게도 동서양에서 벩송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를 다시 성찰하는 철학자가 우리나라에 박홍규와 프랑스에 들뢰즈가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신기하게 생각한다.
이 둘은 우선 철학의 기원 또는 근원이 존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관점에서 철학하는 방법은 인간이 스스로 경험한 자료들에 대한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철학 또는 도학(유가 儒家)은 삶에서부터 그 자료들을 총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법적으로, 원리와 법칙을 요청하여 먼저 구성 또는 구축하여 승인(인정)하고, 이로부터 개별적 사물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다양성에서 어떻게 일반화를 만들었으며, 그 일반화가 삶에서 공감과 조화를 이루느냐는 것을 먼저 다루어야 하다는 것이다. 벩송 관점의 선상에 있는 두 철학자는 학문들이 철학과 다른 갈래를 만들어 가더라도, 각 학문들의 발달과 새로운 이론의 창안들이 경험적 실증성에도 부합해야 한고, 이런 점에서 철학과 나란히 간다는 본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독단과 해석에 빠지는데 이는 자신들도 모르게 종교적 맹신과 같은 길을 간다는 점이다.
과학도 마찬가지 이지만, 철학에서 형이상학, 지식론, 인간론 등은 삶(생명)을 기본 토대이라는 것, 즉 벩송이 말하는 삶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하다는 모든 자료들을 검토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개인이 자유롭기 위해 개인과 함께하는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하느냐에 관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생명에서 제도로 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감정, 미적 감성, 종교적 공감과 더불어, 인격이 각각 그리고 함께 자유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인민들 사이의 연대는 인민 속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의 감성도 포함한다. (56MKB)
1. 사유의 여정 – 뭣을 다루고자 하는가?
벩송의 저술들에서 보이는 사유의 여정은 저술과 출판된 논문을 총체적으로 읽으면 관통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그의 사유의 방식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철학사를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하다’의 따라야 할 방식이다. 나로서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두 가지를 밝히고자 했었다. 그러나 뭔가 미흡했다. 그래서 또 다시[] 출판물과 비출판물(강의록)들을 순서적으로 보았는데, 벩송에게는 말하지 않은(non-dit, 농디) 어떤 것이 있다고 느낀다. 그게 무엇일까? 그의 철학 입문자들과 연구자들에게, 벩송 본인은 출판물에서 할 이야기를 다했다고 말하면서 유언장에서 나머지 글들은 출판하지 말고 없애버리라고 했었다. 이 말은 한편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술에서 이미 다했다는 의미도 있고, 다른 한편 그가 연구 중에 있었던 이야기가 있다는 말도 된다. 게다가 쓰여지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했던 기록들도 있다. - 그 다른 이야기가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록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벩송이 말했던 것을 세심히 따라가 보면,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부터 마지막 저술(PM, 사유와 운동자)을 출판할 때까지 일관성이 있는데, 이 일관성 어떤 착상 또는 창안에서 오는 것일까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한편으로 자신의 철학적 전개를 한 두 번 바꾸면서 전환(전회)의 기회를 갖는다. 다른 한편 철학적 전개에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다른 사실들을 첨가하면서 확장하거나 또는 견고한 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벩송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유 전개과정에 대해 ‘뭣’인가가 그의 자신 속에 죽 있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사유 내면에 말하지 않는 것(농디)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벩송의 사유의 여정의 첫째의 것은 철학사라고 했다. 그가 보는 서양 철학사의 과정은 간략하게 표현하여 고대 상층의 철학에서, 르네상스 이래로 표면의 철학으로, 그리고 생물학의 논쟁 이래로 심층의 철학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는 꽁뜨가 말하는 학문 발달의 삼단계와도 다르고, 특히 그는 그 자신의 저술 속에 헤겔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헤겔의 철학의 역사관에서 자유의 확장과 변증법적 상승의 방법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고대 상층의 관념론에서, 르네상스에서 표면의 이원성을 거쳐서, 19세기 제반 실증과학의 발달로 심층(안으로)으로 출발하는 철학이라 했을까? 우선 그 답은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고대는 상식(5관)을 통한 사고였으며, 르네상스에서는 양식을 통한 추론의 지성(오성, 이성)의 발달이 있었고, 19세기 중반 이후의 사물(실재성)의 내부로 탐구로 이어지는데, 그가 나중에 고등양식[다음측정]이 있다고 한다. 이 셋째의 단계에서는 그는 인류학적 관점과 더불어 사회학과 정치경제학도 시도하면서, 류적 차원에서 종적차원으로, 더 나아가 종의 개체(개인)의 차원으로 더 안으로(심층으로)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 정태적으로 보아, 지식론의 측면에서 또는 인식론의 측면에서,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 전개는 철학이 모든 학문의 상위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따라서 원리(보편성), 법칙, 규칙 등으로 일반성이 개별성을 설명하거나 연역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여긴다. 벩송이 보기에 이런 방법은 간단히 공간화 된 사유이며, 이 공간화가 실재성에 부딪혀 해명되지 않는(부조리하다고 여기고) 부분을 배제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 19세기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던 내부로부터 탐구방법을 전개해 보면, 경험적 다양성을 분류하고 그리고 일반화[실체화의 세 가지]하여 공통교감과 공감화를 거쳐서 성립하는 개념 또는 항목들이 있고, 이 항목들로부터 철학을 하는 길은 앞에서 말한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오는 길과는 전혀 다른 상향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벩송은 간단히 두 방향의 차이를 “철학적 사유의 전도”라고 – 들뢰즈가 나중에 전복이라 표현할 것인데 - 말한다.
벩송이 철학하다는 기존의 방법과 체계가 전도된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사를 배우면, 상층에서 그 자체적인 것은 존재로부터 현전하는 사물들을 다루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이를 전도라고 하고서 말과 마차의 위치를 바꾸는 철학을 전개하는 것이 쉬울까? 서양철학사를 달리 읽으면 상층의 철학사관이 겉보기에 80%종도이고 심층에서 올라가는 방향이 20%이라고 보인다.특히 우리나라의 서양철학사 도입은 앵글로색슨의 인식론+존재론을 형이상학이라 설명하면서 거의 90%의 앵글로 색슨의 철학을 철학이라고, 내가 보기에, 착각하고 있다. 이런 ‘철학하다’라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풍토가 현재의 사회제도와 자본제국의 체제로 끌려들어가는 경향과 탐욕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와 달리 박홍규와 들뢰즈는 어떤 방향과 경향을 드러낸 것일까?
박홍규는 열여덟에 일본 유학을 가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예과를 다니면서 아테네-프랑세스 불어과를 수학했다(2년) 그리고 대학에서 독어학과 법학부를 다녔고 “신학대전”에 관한 졸업논문을 썼다고 알려졌다. 이 시기 스물둘에 아테네-프랑세즈의 희랍어과와 라틴어과에서 수학하였다.(3년 7개월). 그는 청년시절에 한편으로 제도 교육을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학문의 접근을 하였다. 그가 내재적으로 그리스철학에 대해 매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귀국해서 서울대에서 그리스철학에 전념했던 시절에, 그리스철학과 벩송을 강의했다. 그럼에도 그가 두 번의 전쟁 상황을 거쳤다는 것을 우선 언급해두자. 그런데 그가 왜 프랑스 철학에서 벩송을 선택지로 했는지, 나로서는 그가 플라톤보다 소크라테스에 활동과 문제제기에 대한 매력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에게서 플라톤과 벩송 사이에 시대적 간격이 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공통성과 차이점을 찾아내려 했고 또한 이 두 철학자를 관점에서 은연중에 우리나라의 현실에 접근을 시도하려 했을 것이다.
이에 비슷하게 들뢰즈는 열여덟에 고등사범학교 준비반에 있었다. 아마도 이 시절에 이미 철학사와 벩송에 대한 관점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해 그의 형 조르쥬는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이송 중에 사망했다. 그는 스물에 고등사범에 낙방하였으나, 그 성적 덕분에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장학금’을 얻어서 파리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출간되지 않은 논문이 다섯 편이 있는데, 그 중에 「보편학, 과학, 철학(Mathèse, science et philosophie, 1946)」은 의학에 관한 논문이다. 여기서 학문의 토대로서 의학 또는 생물학으로부터 기원 또는 보편학의 토대를 삼아도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런 시각은 전쟁을 겪고 난 뒤 당대 프랑스에서 드문 사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수자격 준비에서 벩송을 준비하면서, 주변에서 “먼지 덩어리인 철학”을 왜하냐고 해서 포기하려하다가, 샤뜰레(1925-1985)의 격려로 교수 자격시험에 통과하여(스물셋) 삶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두 철학자는 생애에서 가장 민감한 시기에 전쟁을 겪었다. 박홍규 동경 폭격으로 목조건물이 다 타버려 거리의 지표를 찾을 수 없는 매끈한 평면을 보았었고, 들뢰즈는 형의 죽음과 레지스탕스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은 무엇일까? 벩송을 깊이 읽은 박홍규는 인간중심주의 사고가 정복과 전유를 통해 탐욕을 채우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들뢰즈는 가타리를 만나 “앙티외디푸스”를 쓰면서, 속좁은 이성의 자기중심주의는 타인을 배제하거나 타자들의 무화를 통해 상대편을 지배하는 방식에서 위협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사고의 배경은 상층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들이 상상과 공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 보았다.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MR)에서 사고의 우화적 기능이 만든 정태적 사고의 귀결로서 보았다. 들뢰즈는 어느 대담에 가타리가 말했다고 하면서, 정태적 사고의 기원이 가족관계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면서, 그 관계를 이어받은 삼신성 신앙의 유일신앙의 사고에서 유래 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박홍규의 전쟁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구의 전쟁 뒤에 종교가 꼭 따라붙는다고 한다. 그 종교가 정태적 종교로서 가족관계로부터 출발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홍규는 이를 벗어나는 것을 동태적 종교라고 하였지, 나로서는, 더 이상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박홍규의 MR 강의에서는 어떤 설명을 했을 것이나, 이에 대해 이창대, 윤구병, 이태수 등은 예전에 들었을 것이다. 두 철학자에서 전쟁이라는 사건에 대한 내재 의식 속에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과 고뇌를 어떻게 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고 플라톤도 전쟁을 깊이 생각했다. 난관(aporia,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한편으로 <ti esti(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한편으로 <poion esti(그것은 어떠한가)>로 물을 때, 전자에서는 행동과 실천의 탐색이, 후자에서 방법과 지식에 대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두 철학자는 삶의 터전에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했으리라. (56MKD)
2. 삶에서 앎과 함
삶의 극한은 죽음이다. 스토아나 에피쿠로스는 죽음 이후를 말하거나 논의를 하는 것은 거짓 또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현존하고 있는 여기서, 삶의 현장에서 난관이든 파라독스(또는 부조리, 모순)든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이뭣꼬”가 공동체에서 문제만은 아니었다. 신화의 전승에서 벗어나는 탈레스의 물음도 ‘이뭣꼬’일 것이다. 모순 또는 어려움은 자연과의 관계였을 것이기에, 자연에 대한 실천과 행동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대해야했기 때문에, 철학이 자연 또는 대상에 대한 인식 또는 지식처럼 알려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연이든 공동체이든 관계와 연관들을 다루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안다’는 삶에서 행위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과거의 중첩적 사실들과 사건들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는 일반화를 거치면서, 일반개념의 형성을 다루는 것은 양 측면(앎과 함)에서 마찬가지로 공통성을 찾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난관이든 어려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음번에도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의 체계를 어느 정도 갖추었을 경우이며, 이런 지적 체계에서 언어의 일반화 또는 사고의 일반화로서 수와 형태에 대한 체계를 세우려 했을 것이다. 여기서 체계를 위한 일반화가 철학의 중심이며 또는 기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벩송은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일반화의 두 종류를 설명한다. 하나는 지식체계의 일반화로서, 일반적으로 류와 종 차이처럼 항목을 개념화하고 그리고 항목들의 관계에서 논리를 전개하여 타당성과 부당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인식론과 지식론이라 불리는 인식체계의 이론은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상식(오관)을 종합을 통하여, 그리고 상식의 추정을 통한 일반화가 있다. 이런 일반화는 행위에서 즉 공통적으로 실행하는 차원에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좋다, 훌륭타, 용기, 행복(지복), 충만, 경건, 즐겁다 등과 같이, 사람들은 교감과 공감을 통해 일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벨송은 인류의 경험적 과정에서 후자의 일반화가 전자의 일반화보다 먼저 발달하였고 공유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언어의 구문론과 문법론을 통해서 설명하였다. 벩송이 말하는 일반성의 두 가지란 문법적으로 실체사(명사)와 성질사(형용사)인데, 현대에서도 성질사가 실체사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또한 강도가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 벩송은 “강의록” 중에서 성질사의 내용이 본능과 공감에 연관이 있고, 실체사의 내용이 지성과 주체(주어)와 연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이뭣꼬의 뭣은 대상이라기보다 성질사에 속하는 것으로, 어쩌면 영혼의 훌륭함이 뭣이냐를 탐색했다라고 할 수 있다. - 영혼의 훌륭함이라 구절에서 훌륭함이 영혼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의 훌륭함 중에서 신체의 훌륭함을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영혼이 훌륭한데, 왜 훌륭하게 신체를 통하여 발현하지 못하는가에 관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은 실천적 행위에 우선하고 그리고 도구를 다루는 것은 행위의 편리와 이익을 위한 것은 다음 차원이 아닐까. - 여기서는 이 영혼의 주제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안다는 것 또는 인식하는 체계가 성립하는 것은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뭣’에는 두 가지 방향 또는 경향성이 있다. 대상화하여 양식을 통해 사고(추론)하는 과정의 타당성을 찾는 경우가 있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반성을 인정하면서 상식을 통한 추정을 인정하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경우가 있다.
한편으로 철학사적으로 이오니아의 탈레스가 문제 삼았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르케(이유, 기원)이며, 아테네에 와서는 아레테(훌륭함)로 이어져 온다. 삶에서 ‘왜’와 ‘어떻게’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을 위한 아르케와 아레테에서, 역사적(그리스적 의미에서)과정에서 민주정에 대한 관점이 생겨나고 또는 다양한 개인들의 단체 또는 제도화에서 조화로운 삶과 그에 대한 사유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앵글로색슨에서 철학은 주체와 대상이 따로 성립해 있거나 구성되어 있고, 주체가 표현하는 논리와 대상과 현상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에 의해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체계를 세울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계를 포괄적으로 갖는 사람이 심판과 제도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체제의 제도상으로 그 사람이 이익을 차지하고 또는 지도자가 되는데, 공동체보다 자신의 이익만 전유하는 경우에 참주(황제)제라고 한다.
벩송은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기보다 플라톤 이전에 자연의 성질사(변화, 생성)를 다루는 것이 이미 형이상학이라고 보았다. 즉 벩송은 안다는 것은 대상들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더하여 대상화가 잘되지 않는(말로 표현이 잘 안 되는) 상태와 변화과정들도 일반화할 수 있으며, 이를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총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대상을 다루는 것을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이라 부른다면, 변화와 생성을 보태어 변화에서 변화하지 않는 측면까지도 다루는 것을 우리는 형이상학과 구별하기 위해 형이심학이라 부르고 있다. 그는 진솔한 형이상학이 삶에서 아르케를 다루고, 공동체에서 아레테를 실행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라 보았다.
박홍규는 철학이 모순 또는 난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여러 번 말한다. 그런데 난관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까지 있었던 것을 없는 것으로 여기며 새로 세우자고 하는 것은 종교가 하는 것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비해 학문은 현존하는 항목들 사이에 관계를 조직(system, syn-tem)하여 체계를 세운다는 것이다. 철학은 개별적 사실들을 분류하고 여러 가지로 배치하고 계열로 순서를 정하고 나서야 체계를 세우려 한다. 따라서 철학은 사실상 체계 이전에 문제제기의 상황과 실재성에서부터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métaphysique)이란 용어는 자연의 배후, 즉 자연의 실재성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 문화적 상황과 주변의 정체를 포함하여 그리고 역사적 이야기를 보태야 한다. (56MKE)
3. 박홍규와 들뢰즈 닮은 점들
박홍규는 소크라테스의 활동과 추구에 대해 플라톤과 연결점에는 이르는 길을 잘 볼 수 없었다. 아마도 박홍규는 프랑스 문헌에서 로방을 참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삶의 내용을 보는데는 벩송이 중요하게 제시했듯이 푸이에를 읽었어야 할 것인데, 박홍규가 이에 대해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고대철학의 접근이 아직 미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해 들루즈는 플라톤을 깊이 연구했다고 볼 수 없지만, 프랑스 내에서 고대철학과 소크라테스의 참조 문헌을 볼 수 있는 여러 통로가 있었다. 꼭히 푸이에 저술과 논문이 아니더라도 그리스의 아테네에 접근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글들이 많이 있다.
소크라테스를 탐구하는 방식은 플라톤을 통해서 아는 소크라테스를 이해하는 길이 일반적으로 있어 왔다. 벩송의 고대철학에 관한 여러 편의 강의록들이 1999년에 나왔기에 박홍규도 들루즈도 읽지 못했다. 벩송의 고대철학을 대하는 관점에서 소피스트를 비하하지 않았고 또한 더 나아가 사람들이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퀴니코스도 일상적인 측면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성과 영혼의 관점에서, 다시 말하면 삶의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에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벩송의 이런 관점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구체적이고 실증적 행위가 새로운 철학을 행동하면서 탐구하는 방법을 창안하는 철학자로 보았을 것이다. 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박홍규는 짧은 소개글이 한편 있다. 그리고 그의 강의록에는 여러 곳에서 등장하지만,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거나 또는 재해석에 있다. 박홍규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벩송으로 갈라지는 가치치기의 분류를 정확히 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들루즈는 소크라테스의 철학하는 의도와 방식을 플라톤에서 찾더라도 이미 플라톤의 상층 중심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스토아학파에 대한 깊이있는 논문들에 대한 독해가 있었다.
두 철학자와 연관이 아니더라도,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사적 관점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서 두 철학자는 다르다. 박은 플라톤이 상층과 심층을 함께 고민하며 난제를 해소하려고 했다고 보는데 비해, 들루즈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여러 갈래가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플라톤, 크세노폰, 메가라학파, 퀴레네학파, 퀴니코스학파들이 있고 플라톤의 학설에 대립으로 퀴니코스학파의 후신인 스토아학파가 있다. 즉 플라톤이후의 아카데미아의 플라톤주의에 대해 스토아학파의 비판과 대립이 있다. 이런 대립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스토아주의의 대립보다 먼저이다. 이 대립은 형이상학에 대한 관점에서도 다르다. 즉 박홍규의 정지 대 운동의 관점으로 수평축과 수직축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비해 들루즈는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스토아주의와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가는 플라톤주의의 대립으로 보았고 두 방향의 차이를 보았다.
박홍규의 벩송에 관한 논문이 두 축으로 설명하는 것을 플라톤의 이중성에서 빌려와 시론과 물질과 기억을 중심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들루즈는 벩송 작품 전체의 흐름에서 위의 두 편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종합하여 두 방향을 설명하였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다양한 가치기기에서 표면의 다양한 점들(순간, 현재)에서 미래에 예상참여하기 위해 다음측정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나아간다. 물론 박홍규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예전에 행했던 강의록이 있다면 다음측정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데 들루즈에서 특별한 것은 벩송의 상식, 양식, 고등양식의 세 단계의 상향하는 권능(능력)을 돋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내재적인 심층에서 상향하는 방향의 전개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는데도 벩송과 방향이 같다는 것이다. 들루즈에서 이런 방향의 이해는 프랑스 철학사에서 이어져 온 부분들 중에서 심층의 부분들을 따라가면, 벩송의 강의록을 읽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세기 두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의 독배[죽음]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철학사적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실천적 노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단초에 대해서는 두 철학자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철학은 현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에 탐구에서부터 경험적 축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이 지식의 추구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즉 현실에서 실천하는 도덕성에 대해서 고민했다는 것이다. 도덕성에 이어 종교성이라는 부분에서도 지식에 의한 일반화와 보편성이 아니라, 삶의 질에 의해(훌륭함, 경건함) 이루어지는 성질사와 같은 일반화가 기원적이고 심층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에 대해서도, 벩송 ‘삶이 먼저’라고 말 하듯이, 실천적 행위에서 상식, 양식, 이 둘을 넘어서 고등양식으로 찾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고민했다.
고등양식을 통한 삶의 길이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해서 추론하고 체계화(이론화 테오리아)보다, 새로운 생성, 창안, 발명, 변역[혁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두 철학자는 알았다. 이런 생성과 창안, 발명의 길을 가는 것이 “자유”의 길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그리고 두 철학자는 자유의 실현으로 가는 길에서, 난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유일신앙의 무화에서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생성은 “자연”의 자발성에 근거하며, 그 자발성을 기억과 유전을 통하여 전달되어 축적된 경험적 총체를 통해서 실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런 권능을 지닌 잘발적인 자연이 철학과 모든 학문의 터전이며 토대이라는 것이고, 마치 이데아와 같은 상징은 자연의 분출과 생성의 투사일 뿐이다. 자연의 자발성에 대해 서양 철학사 뿐만 아니라, 인류사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박홍규는 내비추었는데, 들루즈는 가타리를 만나 인류사의 과정에까지도 다시 검토하는 저술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규소의 시대를 두 철학자가 살았다. 박홍규는 이 디지털의 시대가 전체에서 부분이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부정적 견해를 비쳤다. 이에 비해 들루즈는 철기시대 다음의 규소시대에는 다른 대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올바로 문제제기 하면서 난제를 해소하기를 바랐다. 그 문제제기와 해소에는 벩송의 사유가, 즉 자연에서 사유가, 생성과 발현의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보기에 세계사는 AI를 통해 “자본”이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의 소멸을 주장하는 맑스-레닌주의를 넘어서 제국에 저항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고 고민하다가 세상을 떴다, 들뢰즈로서는 그 방식이 그리스로 돌아가자 인데, 그 그리스의 활동과 생명성은 소크라테스 것이라고 나로서는 생각한다. 참주를 거부하고 청년에게 새로운 사유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리라. (56MKE)
3-2 유럽인들의 고민: 영혼의 신체화(ensomatiser) ***
서양철학사가 어쩌면 파라노이아에 벗어나려는 노력일 수 있다. 그럼에도 빈 하늘 또는 천국에서 파라노이아(편집증)를 벗어나고 싶어하지, 지상의 우여곡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것 같지는 않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해결하듯이 단번에 풀어보자고 하지, 온갖 노력과 시간을 보내며 다 풀 수 있을지 모를 시간을 보내며 풀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파라노이아는 고대의 신화에서 그리고 참주제에서 보듯이 힘과 칼로서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을 오래 인정해온 관례였다. 그런 방식은 하늘에서 인간에게 영혼이 들어왔다는 설명만큼이나 쉽고 편하다. 게다다 신학의 신앙과 겹치면서 올림푸스든 천국이든 하늘에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다고 약간의 추론을 보태어 설명하는 것이 편했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축적의 사실들은 또는 기원적 사건들은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을 무수히 제시힐 수 있다. 이 증거들을 상식과 양식을 통해서 일반화하여 용어로 만들 수 있어도, 양식과 지성처럼 추리하는 개념으로 정립되지는 못했다. 감화작용의 일반화와 개념작업의 일반화라는 두 길 중에서, 후자의 일반화의 형성과정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그리고 중세의 우시아(실체)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징적 대상이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그 반대파들도 안다. 그럼에도 상층은 이익과 권위에서, 게다가 소유와 권력에서, 상징적 대상이 실재성이라고 끊임없이 주장되었고 사변의 길로서 추론을 전개했다. 이에 반대파들은 권력에 밀려 또는 맹목적 신앙(권위)에 밀려나 심층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도된 형이상학[형이심학]적 사고라고 밝힌 것은 벩송이었다. 그럼에도 두 번의 전쟁은 잉여와 소유, 권위와 권력, 그 위에다가 지식까지 카르텔(패거리)을 만들면서, 벩송의 사유는 표면 아래로 흘렀다. 그렇지 않다고, 벩송이 헛소리를 했다고, 여기는 세력들이 제국을 형성했다. 들뢰즈가 이에 대해 벩송을 가지고 전복의 철학으로 붉은 깃발을 들었다.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이라고. 벩송은 혁명은 간헐적이지만 폭발적으로 있어왔다고 한다. 철학사에서도 있었다.
상징이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은 고대에서부터 있어왔다. 이 단원은 나의 생각이지만, 길가메쉬의 전쟁후의 서방여행이나, 짜라투스트라의 별의 성좌로 향하는 것은 설화라고 치자. 아마도 인더스 문명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싯달다의 불교 동냥 승단은 다른 하나의 예일 것이고, 아테네에서 폴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데모스의 활동도 있었다. 그리고 문헌적으로 플라톤의 저술의 이데아를 따르는 플라톤주의자에 대해 스토아학파의 입말과 실천을 통한 플라톤주의 전복은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기에 메시아의 도래(재림)에 대한 아프로디지에우스와 호교론자들의 상징의 재생에 대해, 허구라고 보았던 플로티노스도 있었다. 이런 대립적 구도는 유대 사상에서 야훼와 육화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메시아와 앙소프를 생성의 차원에서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 중세는 신앙에 의해 개념화와 추상화의 방법(상식)이 우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왕권과 귀족권한 사이의 틈이 생기는 시기에 유명론의 논쟁에 불을 집혔었다. 그럼에도 아벨라르두스가 쫒겨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내부라는 의미에서 물질(또는 신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내보였지만, 학문적의 경향은 여전히 교권과 국가권으로 넘어간다. 상징에 대한 사유의 전복은 국가권이 절대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기에 여러 방향에서 제기되었고, 특히 언어와 수학의 통일성에서 역설들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런 19세기에 의학(생리학)과 심리학을 동원한 벩송은 상징은 실재성이 아니라고 한다.
수학과 언어에서 파라독스의 전개는 상징이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상징의 효과와 효능을 강조하고, 그 강조에 따른 확장된 이론을 전개한다. 이 이론의 전개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발발이다. 이 확장은 기술과 과학이 뒷받침한 것이다. 생산력의 확대와 노동력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와 안전을 그리고 평등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고 관념론자들은 말했지만, 그들의 제국주의는 전쟁 없이는 자본을 살찌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노동력이 부의 기원이며 실재성이다. 과학과 기술은 사용과 소비에 있을 뿐이다.
들뢰즈가 이런 과정을 겪어온 기원과 이유를 단편소설처럼 전개한 것이 “의미의 논리”이다. 이 논리의 과정이 벩송이 19세기 언어의 논리를 비판하던 방식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홍규는 영미(앵글로색슨)철학이 철학의 자료총체(총체성)를 읽지 않고 단어와 용어의 분석(해석 헤르메노이틱)을 위주로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들뢰즈와 박홍규는 벩송의 강의록(2017년 이후 출간)을 읽지 못했음에도 거의 동일한 문제의식, 즉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벩송은 올바른 문제제기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소 한다고 한다.
자료들의 총체, 기원과 원인에 대한 탐구의 방식은 벩송이 저술들과 논문 속에서 말했지만, 하나의 주제로서는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식, 기억, 생명, ‘산다’를 다루면서 “따라야 할 방법”을 강조했다. 벩송의 따라야 할 방법은 경험적 총체에 대한 내성적 사유 방식이다. 박홍규는 자료의 총체를 다루어야 하고, 분류해야 한다고 한다. 들뢰즈도 따라야 할 방법을 논문으로 썼으며, 철학사에서 상징적 사고를 뒤엎는 전복의 사유를 주장하였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야 한다고 한다.
창안(la Nouvelle, 새소식, 단편소설)의 다양한 전개도 다양체인 셈이다. 철학은 이론(테오리아)만이 아니라 이야기(히스토리아)를 발명할 것이다. AI의 이원성의 이론화와 체계화가 아니라, 21세기 히스토리아는 구강의 입말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쓰는 인격이 창안해 낼 것이다. 금수강산 유덕후일 것이다. (56MKI)
* 보태어 ...
박홍규의 플라톤을 탐구하는 바탕과 들뢰즈가 플라톤을 끌어들인 방식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나는 보았다. 게다가 두 철학자는 비슷한 점이 있다. 은둔지사와 같다.
들뢰즈의 사후 철학지 특집호에서 조사(弔詞) 겸 존경의 뜻으로 「수이다스(Suidas)」를 쓴 베르노(André Bernold, 1958-)는 들뢰즈를 “혈거인”(troglodyte)이라 표현하였다. 내가 알기로 선생님의 호가 없었는데, 그날 윤명로 선생님께서 고별강연(1984)의 사회를 보시면서 후배가 선배에게 호를 지어드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지 모르지만 호를 지어드리겠다고 하였던 것 같다. 소은(素隱)이라고. 소은과 혈거인은 의미상 닮았다. 출세간 하지 않았지만 학문을 깊게 탐구하였다는 의미에서 은둔지사들이다. 또한 두 철학자는 서로 몰랐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는데, 박홍규(朴洪圭, 1919-1994)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둘 다 ‘플라톤주의’에 빠지지 않고, 플라톤을 또는 그리스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였던 것 같다.(53OKI)
(12:13, 56MLE) (12:32, 56MLF)
# 덧 글: 표를 통해본 벩송의 관점에 대한 박홍규와 들뢰즈 ***
벩송의 저작 전편을 읽어보면, 그의 철학적 방향과 방법을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철학사적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사유방향이다. 그는 철학하는 이유를 “살다가 먼저, 철학하다는 다음”이라 한다. 이런 기원과 이유에서, 그는 사람들이 느끼고 자각하고 지각하고 추론하는 것은 경험의 총체 위에서 전개된다고 보았다. 인류는 삶의 터전과 토대 위에서 자신들의 문제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우려왔다. 그 노력에는 제반과학과 더불어 사유를 확장해 나갔으며, 그리고 이런 노력에서 인류는 터전에서 자유를 실현하여 훌륭한 인간으로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고 보았다. (56MLE)
표1) 벩송이 본 서양철학사에서 사유의 전개과정
__상층_____________
∖
∖_표면________
∖
∖__심층_____________
* 철학적 사유의 역사는 제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진화한다(창조적 진화).
* 상층은 고대 그리스에서 갈릴레이까지, 표면은 갈릴레이 상대성을 철학으로 바꾼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칸트의 형이상학 부정까지, 그리고 프랑스의 생명철학을 다룬 시기 이후 심리학의 도래의 시기이다.
박홍규는 이런 도식을 매우 간략하게 플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철학은 세 종류가 있다. 플라톤은 정지(상층)와 운동(심층)의 두 갈래가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지로부터 철학을 했고 벩송은 운동으로부터 철학을 했다. 이 세 가지 이외는 없다고 강의록에서 강조하였다. 이런 관점은 서양철학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들 중의 하나인데, 이런 관점을 서양철학사를 따라가 보면 분명히 두 갈래의 길을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중간 과정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들을 개별적으로 논하지 않고서도 볼 수 있었느냐는 나의 의문이다. 추측으로 한 가지는 그는 일본에서 한편으로 학교제도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공부했고 다른 한편으로 학교 밖에서 프랑스-아테네 학원에서 프랑스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갈래의 길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는 일본을 통한 철학사를 배우기보다 우리가 서양철학을 수용한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할 것인가를 평생 고민했다고 여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읽어본 강의록들에서, 그는 서양철학사를 모순 또는 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모순과 난문제를 해결하는데, 대상 또는 자연을 무로서 두고 신의 말씀이나 원리의 적용으로 해결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또는 너무 쉬운 방법이라고 보았다. 철학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소크라테스처럼 물음을 계속 물어 들어가, 이 뭣꼬(ti esti)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철학을 난제에 대한 해결일 진데, 그는 그 난제가 삶의 문제, 즉 현존의 문제인 것으로 보았기에, 원리 또는 본질로부터 잘라진 무에 무엇을 보태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종교에서 허무주의 해결이 아닌, 현존에서 생성의 출현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플라톤의 사유도 “티마이오스”편을 독해하면서 생성을 설명하는 우주론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과 전개를 설명하는 우주발생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가 서양철학사의 철학사적 과정의 변화에서 우주생성론으로 보는 경우에도 프랑스 실증과학의 발달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실증과학의 덕분에 벩송에 와서 자연생성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자연의 “자발성”을 중요시한 것도, 자연의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신과 연관없이 자기생성과 자기전개과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점을 강조하게 되면, 박홍규는 신학 또는 유일신의 관점과는 거리가 멀며, 어쩌면 신없이도 자연의 자발성과 발생론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생명은 물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파스퇴르를 인용하면서 생명의 기원과 근원에는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6MLE)
표2) 벩송이 본 철학적 사유의 발생과정(cosmogonie)
이 표 다음(표3)으로 MM의 회로도를 옮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상징계)
P
표면의 이중성 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일반화의 이중성
∕ ∖
∕ ∖ 추억들
∕ ∖
기억 총체(실재계)
* 사유의 발생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현실 세계의 활동으로 전개된다.
* 벩송에서 심층은 기억이다. 총체로서 일반화가 있고, 계열로서 일반화가 있다.
* 수평면 점(P)는 미래와 과거의 접힘(이중성)이다. 그리고 미래로 나감에서도 이중화 또는 다중화를 형성한다.
* 프로이트의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의 구별은 프로이트가 벩송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가 공상해보기도 한다. 라깡은 전쟁후의 인민들의 허무주의를 삼신성으로 옮기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라깡의 상상을 넘는 공상은 1968년 이후에 심해질 것이다. 파라노이아의 과다는 는 망상과 착란을 불러온다. 전쟁과 살육의 파라노이아에서 왔다. 우리나라가 50년 전쟁의 파라노이아 속에 있으며, 윤석열도 그 속에 있다. 교황을 포함하여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파라노이아 현현이다.
박홍규는 벩송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면서 수평축과 수직축으로 구별하였다. 수평축은 공간화의 방식이고 수직축은 시간 지속의 방식이다. 그는 안다는 그 ‘무엇’을 중요시하여 생각하다보니, 현존보다 존재의 본질과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벩송을 염두에 둘 때,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현존을 움직이는 기원과 이유에는 고대에서는 영혼이 개입하고, 벩송에서 생명이 개입하는 것으로 박홍규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설명에서 영혼과 생명이 물질 자체에서 생겨나왔다는 것을 말하지지 않고, 또한 그렇다고 신으로부터나 천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하니, 자연의 자발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싶어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박홍규는 맑스주의의 유물론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맑스주의의 유물론이 에피크로스로부터 왔다는 것을 멀리하고, 벩송처럼 스토아학파의 휠레를 수용하거나, 플로티노스의 일자 즉 누스를 수용했더라면 벩송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는,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벩송의 강의록들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맑스주의 유물론을 벗어나, 나로서는, 자연, 즉 생명으로 생각하는 영혼 또는 의식을 보려고 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박홍규는 현대 생물학과 연관하여 생명발생설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대로 여전히 물질(물체가 아니라, 아톰들이 아니라)에서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아마도 맑스주의에 거리를 둔 것이 아닌가 한다.
들뢰즈는 심층의 실재성 즉 온사건이 있다. 이 온사건에서 개별화 또는 특이화의 과정에서 여러 갈래의 생성이 있다. 이 생성이 현실이라는 표면에서 이중성을 드러낸다. 하나는 미래와 연관에서 행위의 효과측면을 보게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억 중에서 현실에 통용되는 부분의 현실화이다. 점(P)에서 이중화를 두 개의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56MLE) (15:05, 56M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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