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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1874년: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Ch. 8. 1874: Trois nouvelles ou Qu’est-ce qui s’est passé? pp. 235-252).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1980). P.1000.
[1874년, <바르베 도르비이이(Barbey d’Aurevilly, 1808-1889)의 단편소설 「진홍색 커튼(Rideau cramoisi)」(1874)에서 모든 것은 “뭔가가 일어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물음을 향해 있다.(236, 368)> - 이 소설가의 전공자가 있다. 고봉만(1963-, 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51MLG)]
1874년은 들어 올린 것은 철학사적으로보다 문화사적으로 흥미롭다. 단편소설과 콩트를 주제로 삼았는데, 두 저자는 바르베 도르비유(Barbey d’Aurevilly, 1808-1889)의 단편소설 「진홍색 커튼(Rideau cramoisi)」(1874)의 단편 소설과 모파상(Maupassant, 1850-1893)의 콩트 「속임수(Une ruse, 1882)」을 소개한다. 단편소설(la Nouvelle)이라는 단어가 소위 영어로 “뉴우스”와 같은 뜻이며, 게다가 복음서를 비유하여 “새소식”이라 할 때도 같은 단어이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서 지고, 파리코뮨이 일어난 바로 다음 시기에 “새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가 전파되는가? 그보다 자본주의 발달에서 새로운 상황 또는 문화패턴이 생겨나는 시기라고 보면, 그 상황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령은 시대의 선도자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의 경우도 그러하지 않는가?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의 ��목신의 오후(Apres-Midi d'un faune, 1876, Monologue du faune, 1865)��와 랑보(Arthur Rimbaud 1854-1891)의 ��지옥에서 한 철(Une saison en enfer (1873)��도 같은 시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단편소설을 주제로 삼은 것은 이 문학형식이 이 시기를 시작하여, 헨리 제임스와 피츠제럴드를 예로 들어 영미로, 그리고 현대 프랑스의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로 이어간다. 그리고 곁들여서 러시아의 단편소설의 등장에는 체홉(Tchekhov, en. Chekhov, 1860-1904)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1888년부터 1898년까지 익명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결국 종교의 복음과 같은 “새소식”을 전하는 단편소설은 프랑스가 원조라는 식이다. 그것은 상층에 매임도 아니고 현상에서 유연성을 넘어서 잠행성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처럼 소개한다. 그런 새로운 삶의 길, 그것을 고대 소크라테스 시중에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통해 실천하였는데, 새시대의 작가들은 글을 통해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럼에도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앵글로 색슨에서 언어의 서술이 대상과 일치 또는 표현의 내용의 의미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시기와 중첩된다. 즉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의 ��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 (1879)��(English: Concept Notation, the Formal Language of the Pure Thought like that of Arithmetics.)와 마이농(Alexius Meinong 1853-1920)이 있다. (1866년 파리언어학회: 언어기원에 대한 연구 중지 선언 / 파리언어학회는 자신들의 1866년 정관에서 언어의 기원에 관한 그 어떤 연구도 금지한다고 명기했다.) (51OKE)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뢰즈의 배치는 리좀이 탈영토화를 거쳐서 실질적 활용론으로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리좀 전쟁기계]
*** 연대순 배치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용
8장. 1874년: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Ch. 8. 1874: Trois nouvelles ou Qu’est-ce qui s’est passé? pp. 235-252).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pp. 365-394
Nouvelle et conte: le secret. - Les trois lignes – Coupure, fêlure, rupture. - Le couple, le double et le clindestin.
8장. 1874년: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365-394
§8.00. 1874: Trois nouvelles ou Qu’est-ce qui s’est passé. pp. 235-252.
8.00. R. F. Outeault, Buster Brown, le petit facteur[우편 배달부], Librairie Hachett.
아웃콜트(R. F. Outcault, 1863-1928)의 삽화[설명]: 통닭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이를 둘러싼, 임마 브라운(Buster Brown)은 “무슨 일이 일어났지?(Qu’est-ce qui s’est passé?)”, 순경 같은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걸”, 왈짜같은 청소년은 브라운을 주시하고, 여러 겹으로 된 오랏줄을 쥔 노동자 같은 이는 “정말이야‥…”라고 한다. - 왼쪽 하단에 만화가(R. F. Outeault)의 사인이 있다. (235, 365)
§8.01. Nouvelle et conte: le secret. 235. .
- 단편소설과 콩트: 비밀 367
문학 장르로서 “단편소설(la nouvelle)”의 본질을 결정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단편소설이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 주위에서 조직될 때이다. 콩트(le conte)는 단편소설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전혀 다른 물음으로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항상 뭔가 일어날 것이고 발생할 것이다. 장편소설(le roman)의 경우에도 항상 뭔가가 일어나지만,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 콩트의 요소들을 영구히 살아있는 현재(지속, durée)의 변주 속으로 통합시킨다. 이 점에서 탐정소설(le roman policier)은 특히 잡종 장르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탐정소설에서는 살인이나 절도에 해당하는 어떤 것=x가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은 앞으로 발견될 것이고, 그것도 주인공인 탐정에 의해 규정되는 현재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상이한 양상을 시간의 세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잘 못일 것이다. (235-236, 367)
그렇지만 이 세 가지 상이한 측면(ces différents aspects)을 시간의 세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뭔가 일어났다는 말이나 뭔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각각 아주 직접적인 과거(un passé tellement immédiate)와 아주 근접한 미래(un future tellement proche)를 가리킬 수 있다. 이것들은 각각 (후설이 말했듯이) 현재 그 자체의 다시 당김들(des rétentions) 과 미리 당김들(des protentions)과 하나일 따름이다. 하지만 현재를 활성화하고 현재와 동시간적인 상이한 운동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 사이의 구분은 정당하다. 그 운동들 중에서 한 운동은 현재와 함께 움직이지만, 다른 운동은 그것이 현존하자마자 이미 현재를 과거로 던지며(단편소설), 또 다른 운동은 동시에 현재를 미래로 끌고 간다(콩트). (236, 367-368)
모파상(Maupassant, 1850-1893)의 콩트 「속임수(Une ruse, 1882)」에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향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가? 구원자인 제3자 - 여기서는 의사 - 는 무엇을 발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바르베 도르비이유(Barbey d’Aurevilly, 1808-1889)의 단편소설 「진홍색 커튼(Rideau cramoisi)」(1874) 에서 모든 것은 “뭔가가 일어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물음을 향해 있다. 냉정한 젊은 여자가 실로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어린 장교에게 보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자인 제3자 – 여기서는 연대장 – 가 결국 일들을 수습할 수 있었는지 결코 알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을 모호한 채로 놔두는 편이 더 손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36, 368)
단편소설은 마지막 소식인 반면 콩트는 최초의 이야기이다. 콩트 작가와 단편 소설 작가의 “현재(présence)”는 완전히 다르다(장편 소설 작가의 현재도 다르다). 따라서 시간의 차원들을 너무 내세우지 말도록 하자. 단편 소설은 과거의 기억이나 반성 행위와는 별 관계가 없다. 반대로 그것은 근본적인 망각 위에서 작동 한다. 단편 소설은 “일어난 것”의 요소 안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인식할 수 없는 것 또는 지각할 수 없는 것과 관계시키기 때문이다(그 역이 아니다. 단편 소설은 우리에게 앎을 줄 가능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과거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236-237, 369)
단편소설은 근본적으로 비밀(발견될 비밀의 질료나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파악되지 않은 채로 있는 비밀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 콩트는 발견(발견될 수 있는 것과는 무관한 발견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단편소설은 주름들이나 감쌈들로 존재하는 몸과 정신의 자세들(des postures)을 등장시키는 반면, 콩트는 가장 뜻밖의 펼침들과 전개들인 태도들(des attitudes), 입장들(des positions)을 작동시킨다. 바르베는 몸의 자세, 다시 말해 어떤 일이 일어나서 몸이 놀랄 때의 상태들을 선호한다. ��악마 같은 여인들(Les Diaboliques, 1874)�� 서문에서 바르베는 이렇게 제안하기까지 한다. 즉 몸의 자세들에는 일종의 악마성이 있으며 이 자세들의 성(性), 포르노그라피, 분뇨담(糞尿談)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몸의 태도나 입장들도 성, 포르노그라피, 분뇨담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이다. 자세는 역전된 서스펜스와도 같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편 소설을 과거와 연관 짓고, 콩트를 미래와 연관 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편소설은 현재 자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의 형식적 차원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그 일어난 어떤 일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인식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단편소설과 콩트의 차이를 환상담이나 요술담 같은 범주들과 대응시키려고 하지 말하야 한다.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일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편소설은 다음과 같은 연쇄를 갖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양상 또는 표현), <비밀>(형식), <몸의 자세>(내용). (237, 370)
피츠제럴드를 보자 그는 천재적인 콩트 작가요 단편소설작가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라고 자문할 때마다 그는 영락없이 단편소설 작가이다. 오직 그만이 이 물음을 이런 강렬함의 지점까지 가져갈 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기억, 반성, 노령, 또는 피로의 문제가 아니다. 반면 콩트는 아동기, 행동 또는 도약에 관련된다. (237-238, 370-371) [나로서는 위하여(pour)에서 목적론이 그리고 콩트는 내재성의 도약으로 들린다.(51NMI)]
그리고 단편소설의 특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편소설이 보편적 질료를 다루는 특수한 방식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들(de lignes)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자의 선들은 삶의 선들, 행운과 불운의 선들, 글자의 선이 변주된 선들, 씌어진 선들 사이에 있는 선들 따위와 다른 선들과 결합되어 있다.(238, 371)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 1895-1970)는 대단히 절제된 방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즉 설화(le conte)는 설화 내부와 외부의 운동들을 통해 정의되어야만 한다. 설화는 이 운동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특성화하고 형식화하고 조합한다. 우리는 단편소설이 살아있는 선들, 살의 선들의 견지에서 정의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다. 단편 소설들은 그 선들에 관한 매우 특수한 계시를 보여준다. 마르셀 아를랑(Marcel Arland, 1899-1986)은 단편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근거 있는 이야기를 한다. “단편소설은 뉘앙스에까지 이르는 순수한 선들일 따름이며 또한 말의 순수하고 의식적인 힘을 따름이다.” (238, 372)
§8.02. Les trois lignes. 238
- 세 가지 선들 372
[정적 분할선 대 동적 분할선 그리고 도주선: - 절단, 파열, 단절Coupure, fêlure, rupture]
§8.021. Première Nouvelle 238
첫째 단편소설: 헨리 제임스의 「철장 안에서(Dans la cage)」, 1898 (372)
젊은 전신수인 여주인공은 많이 재단되고 아주 계산된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삶은 제한된 절편들에 의해 진행된다. 그녀가 매일 계속해서 기재하는 전보들, 이 전보를 받는 사람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회 계급, 개수를 에어야만 하는 단어들. 게다가 여주인공이 일하는 철장(cage)은 그녀의 약혼자가 일하는 이웃 식료품가게에 인접해 있는 절편(un segment)이다. 영토들의 인접성. (238-239, 372)
약혼자는 젊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절편들 사이에 있는 차이들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취향을 갖고 있고 또 비슷해.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야, 너는 전신수이고 나는 식료품상이야, 너는 낱말들을 세고 나는 물건들 무게를 재, 우리의 절편들은 서로 들어맞고(s’accordent) 결합되어 있어(se conjuguent).> 혼인(Conjugalité). 잘 결정되고 판이 잘 짜여진 영토들의 놀이 전체. 미래가 있을 뿐 생성은 없다. 이것이 삶의 첫째 선이다. 그것은 견고한 분할선 또는 그램분자적 분할선(une ligne de segmentarité dure ou molaire)이며, 결코 죽은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선은 우리의 삶을 차지하고 가로지르며, 마침내 항상 우리의 삶을 쓸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39, 373)
한 부유한 커플이 우체국에 들어온다. 그들은 젊은 여인에게 다른 삶에 대한 계시,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삶에 대한 확증을 전해준다. 암호화되고 가명으로 서명된 여러 전보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누가 누구인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전신은 이제 잘 결정된 절편들로 이루어진 견고한 선 대신에 유연한 흐름을 형성한다. 그 흐름은 양자들(量子, quanta)에 의해 표시된다. 이 양자들은 활동 중인 작은 절편화 작용과도 같으며, 달빛 속에서 또는 강렬한 등급(une échelle)위에서 태어나는 것 같다. 바로 이 때 양자들은 포착된다. 젊은 여인은 “비범한 해석술” 덕분에 그 남자가 지닌 비밀이 그를 위험에, 점점 더 큰 위험에, 위험한 자리에(en posture)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여자와의 연애 관계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239, 373)
우리는 차라리 젊은 여인이 약혼자와의 주목할 만한 대화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두 가지 정치(deux politiques)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거시정치이고 또 하나는 미시정치인데, 이것들은 계급, 성, 인물들, 느낌들을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또는 아주 다른 두 유형의 관계들(duex type de relations très distinctes)이 있다. 하나는 잘 결정된 집합들 또는 원소들을 작동시키는 커플들의 내부적 연관들이고(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이런저런 인물들), 다른 하나는 항상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국지화하기 힘든 연관들로 이는 차라리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이런저런 인물들을 벗어나는 흐름들과 입자들에 관련되어 있다. 이 후자의 연관들은 왜 커플 연관이라기보다는 분신 관계인가?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 다른 자아를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남자가 그녀의 다른 자아였던 것이며,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 남자였다” 어쨌든 여기서는 앞의 선과는 아주 다른 선이 있다. 그것은[둘째 선] 유연한 분할선 또는 분자적 분할선(une ligne de segmentation souple ou moléculaire)인데, 여기에서 절편들은 탈영토화의 양자들이다. 바로 그 선위에서 현재가 정의된다. (240, 374)
이 두 선들이 끊임없이 간섭하고, 서로 반응하고, 유연한 흐름(un courant)이 됐건 견고한 점(un point)이 됐건 간에 한 선을 다른 선에 도입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설에 대한 에세이에서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1999)는 영어권 소설가들에게 영예를 돌린다. 영어권 소설가들은 프루스트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시간을 되찾게 하거나 과거를 되살리게 하는 커다란 운동들, 커다란 영토들, 그리고 무의식의 커다란 지점들을 발견한다. (240, 375)
그녀는 대담 또는 대화가 고정된 절편성의 절단에 어떻게 복종하는지, [우리들] 각자의 태도와 입장에 맞는 규제된 분배라는 광대한 운동에 어떻게 복종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대담 또는 대화가 미시-운동들을, 완전히 다르게 분배된 미세한 분할들, 익명의 질료의 찾을 수 없는 입자들, 무의식 안에서조차 더 이상 동일한 심급들을 통과하지 않는 작은 균열들과 자세들, 방향상실 또는 탈영토화의 비밀스런 선들에 의해 어떻게 주파되고 또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그것을 대화 안에 있는 모든 하위 대화, 말하자면 대화의 미시정치라고 말한다. (240-241, 375)
이윽고 제임스의 여주인공은 그녀의 유연한 절편성 또는 흐름의 선 안에서 그녀가 그 너머로 갈 수 없는 최대치의 양자에 도달한다(그녀가 원해도 더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가로지르는 이 진동들을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범위 너머로 밀어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그 전신수와 전보 발신자 사이의 분자적 관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비밀의 형식 속에 용해된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각자는 자신의 견고한 절편성 쪽으로 밀려나게 된다. 남자는 미망인과 결혼할 것이고 여자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 여자는 새로운 선인 셋째 선, 일종의 도주선과 같은 어떤 것에 도달했다. (241, 376)
이 선[도주선]은 벽을 꿰뚫었으며 검은 구멍들로부터 빠져나왔다. 그 선은 일종의 절대적 탈영토화에 도달했다. “여자는 마침내 자신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줄 그림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섬광[une lumière crue]만이 존재했다.” 우리는 삶에서 제임스의 이 구절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비밀은 다시 한 번 그 본성을 바꾸었다. 분명 그 비밀은 사랑과, 그리고 성과 항상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비밀은 숨겨진 질료일 뿐이다. (241, 376)
보세요, 나는 나의 비밀 아래 굴복하고 있어요. 어떤 불가사의가 나를 괴롭히는지를 보세요. 흥미로운 것을 만드는 방식, 그것은 로렌스가 “더러운 작은 비밀”이라 불렀던 것이며, 어떤 종류에서는 나의 외디푸스이다. 한편 그 비밀은 어떤 사물의 형식이 되었다. 여기서는 모든 질료가 분자화되고 지각할 수 없게 되고 지정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과거 속에 있는 주어진 것(un donné)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주어질 수 없는 것(le non-donnable)이다. 하지만 셋째 선 위에는 그 어떤 형식도 없으며, 단지 순수한 추상적 선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감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없게 되기,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해체해버리기. 마침내 홀로 되기 위해 그리고 그의 선의 다른 쪽 끝에서 참된 분신을 만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자아를 해체해버리기. 움직이지 않는 여행을 하는 은밀한 나그네(Passager clandestin d’un voyage immobile). (241-242, 377)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 말대로 그 무엇도 신앙의 기사와 자기 집이나 우체국에 가는 독일인 부르주아지를 구분해 주지 않는다. 그는 어떤 특별한 전신 기호를 방출하지 않는다. 그는 부단히 유한한 절편을 생산하거나 재생산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짐작할 수조차 없는 다른 선 위에 있다. 어쨌건 전신의 선은 상징이 아니며, 또한 그것은 단순하지 않다. 적어도 세 개의 선이 있다. 견고하고 잘 구분되는 분할선, 분자적 분할선, 그리고 다른 선들 못지않게 죽은 것이고 또한 산 것인 추상적 선, 즉 도주선. 첫째 선 위에는 많은 발화와 대화, 물음과 답변, 끝없는 설명들, 수정들이 있다. 둘째 선은 해석을 요청하는 침묵들, 암시들, 함축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셋째 선이 섬광을 발한다면(fulgurer, 섬광을 발하다), 그리고 도주선이 달리는 기차와 같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기서 선형적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며, 마침내 우리가 그 무엇도 다른 것을 대신할 가치를 갖지 못하는 곳에 도달하는 자를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풀잎이건, 파국이건, 감각이건 그 무엇에 대해서건 “문자 그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선은 끊임없이 서로 뒤섞인다. (242, 377-378)
§8.022. Deuxième nouvelle 242
둘째 단편소설: 피츠제럴드의 「파열(The Crack Up)」, 1936, tr.fr. (378)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피츠제럴드가 “물론 모든 삶은 파과의 과정이다”라고 말한 다음에 끝에 가서 끊임없이 문제 삼는 물음이다. 이 “물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삶은 점점 더 견고하고 메말라가는 절편성 안으로 끊임없이 참여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작가 피츠제럴드에게는 여행의 잘 제단된 절편들과 더불어 여행의 마모가 있다. 각 절편마다 경제 위기, 부의 상실, 피로와 노쇠, 알콜 중독, 결혼 생활의 파국, 영화의 대두,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도래, 성공과 재능의 상실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순간에 피츠제럴드는 그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또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갑작스런 커다란 타격들(Des grandes poussées soudaines)” 그리고 매우 의미심장한 절단들에 의해 진행되는 갑작스런 커다란 타격들이 있다. (242, 378-379) [바깥으로부터 오는 타격, 숙명 같은 밀려남이 있다. 경제적 공황, 지불 유예(支拂猶豫: 지급 연기 支給延期, 모라토리엄, moratorium), 개인이 할 수 없는 밀려남... (51NMI)]
여기에 분할선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유연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거대 덩어리들을 작동시키는 견고한 분할선이. (243, 379)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완전히 다른 절편성을 따라 일어나는 다른 유형의 파열(un autre type de craquements)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더 이상 거대한 절단들이 아니라 접시위의 금과 같은 미시적 균열들(des micro-fêlures) 이다. 그것들은 보다 미세하고 보다 유연하며, 달리 보자면 오히려 일이 더 좋아질 때 생산된다. (243, 379)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실은 지정 가능한 어떤 것도, 지각 가능한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이 도래할 때 그것을 기다렸던 자아가 이미 죽거나 아니면 그것을 기다리던 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거나 하게끔 하는, 욕망의 분자적 변화와 욕망의 재분배가 있을 뿐이다. 이 경우에는 나무의 초월성에 의해 규정된 거대한 운동들과 거대한 절단들 대신에 리좀의 내재성 안에 있는 격동들과 파열들(poussées et craquements)이 있다. “균열은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생기지만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 (243, 379-380)
이 선은 모든 사물들을 작동시키지만 다른 단계와 다른 형식을 통해, 다른 본성을 가진 분할과 더불어, 나무의 방식이 아니라 리좀의 방식으로 분할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미시정치. (243, 380)
게다가 셋째 선이 존재한다. 이 선은 단절의 선과 같은 선이며 다른 두 선의 폭발과 충돌 등을 표시한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 “나는 살아남은 자들은 뭔가 진정한 단절(clean break)을 이뤄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며, 탈옥과는 상관이 없다. 탈옥의 경우 우리는 대개 새로운 감옥으로 가게 되든지 옛 감옥으로 강제 송환될 것이다.” 여기서 피츠제럴드는 이른바 기표작용 사슬 안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가짜-절단과 단절을 대립시킨다. (243, 380)
“저 유명한 <탈주> 또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망>은 덫 안에서의 소풍이다. 그 덫이 남태평양을 포함한다 해도 말이다. 남태평양은 그림을 그리거나 항해하길 원하는 자들만을 위한 곳이다. 진정한 절단은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243-244, 380)
그리고 멜빌(Melville)처럼 남녘 바다에서까지도 그럴까? 견고한 근육일까? 유연한 절편성 자체는 그것이 피해갔다고 주장하는 커다란 형태들을 현미경 아래 축소시켜서 재형성한다고 믿어야 할가? 베케트(Becket, 1906-1989)의 잊을 수 없는 문장이 모든 여행을 짓누르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우리는 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여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멍청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244, 380-381) [그래도 여행하지만 모르고 여행하는 머저리, 멍청이는 아니다.]
단절(la rupture) 속에서 과거의 물질은 휘발될(se volatiliser) 뿐만 아니라 지나간 것의 형식, 휘발성 물질 안에서 일어난 지각할 수 없는 무언가의 형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조차도 않는다. 사람들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여행 속에서 지각할 수 없고 은밀하게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났을 수도 없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나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할 게 없다. 나의 영토는 잡을 수 있는 곳 바깥에 있다. 영토가 상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영토를 그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전쟁들은 끝났다. 항상 무언가를 뒤따르는 여행들도 끝났다. 더 이상 나는 아무런 비밀들을 갖고 있지 않다. 얼굴, 그 형식과 질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하나의 선일 뿐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추상적인 보편적 사랑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나를 선택할 사랑을, 맹목적으로, 자아를 갖는 동시에 갖지 않는 나의 분신을. (244, 381)
사람은 자기 위에 세상을 그렸지 세상 위에 자리를 그리지 않았다. 천재는 특별한 사람이라든지 모든 사람이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천재는 모든 사람들을 생성하게 만들줄 아는 사람이다(아마도 율리시즈, 이것은 조이스에게는 실패한 야망이지만, 파운에게는 반쯤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람은 동물-되기, 분자-되기, 마침내 지각 불가능하게-되기에 들어갔다. “나는 항상 바리케이드 다른 쪽에 있었다. 넌더리나는 무거운 느낌이 계속되었다. (‥…) 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동물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적당히 고기가 붙은 뼈를 던져준다면 당신의 손을 핥아줄지도 모른다.” (244, 381-382)
모든 경우에 피츠제럴드는 우리에게 우리를 가로지르며(traverser) “하나의 삶”(모파상의 책 제목)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절단선, 파열선, 단절선. 견고한 분할선 또는 그램분자적 절단선. 유연한 분할선 또는 분자적인 파열선. 추상적이고, 죽어있고 살아있는, 비절편적인 도주선 또는 단절선. .(MP 244-245, 382)
§8.023. Troisième nouvelle 245.
셋째 단편소설: 피에레트 플뢰티오의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Histoire du gouffre et de la lunette, 1976)」, 1976. (378)
어떤 절편들은 얼마간 인접해 있고, 또 어떤 절편들은 얼마간 떨어져 있다. 이 절편들은 심연을, 일종의 커다란 검은 구멍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다. 각각의 절편 위에는 두 종류의 감시자들(deux sortes surveillants), 즉 짧게 보는 자들(les courts-voyeurs)과 길게 보는 자들(les longs-voyeurs)이 있다. 그들을 감시하는 것은 심연 안에서 생산되는 운동, 돌출, 범법 행위, 소요, 반란이다. (245, 382)
하지만 두 유형의 감시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짧게 보는 자의 망원경은 단순하다. 이들은 심연 안에서 거대 세포의 윤곽, 거대한 이항적 나뉨의 윤곽, 이분법의 윤곽을, “교실, 병영, 서민 아파트(H.L.M.), 또는 비행기에서 본 교외”와 같은 유형의 잘 규정된 절편들 자체의 윤곽을 본다. 이들은 가지들, 연쇄들, 열과 행들, 도미노들, 줄무늬들을 본다. 때로는 이들은 가장자리에서 잘 못 만들어진 형태, 떨리는 윤곽을 본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광선만원경(Lunette à royon)>을 찾는다. 이것은 보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절단하고 재단하기 위해 쓰인다. 그것은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고, 거대한 기표작용적 절단이 도처에서 지배하도록 해주며 순간적으로 위협받은 그램분자적 질서를 복원하는 기하학적 도구이다. 재단하는 망원경은 모든 것을 덧코드화 한다. (245, 382-383) [상층은 표면을 재단하고 덧코드화한다.]
기하학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짧게 보는 자란 무엇인가? 이는 의미없는 물음이다(“나는 문자 그대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글이 아닌 선, 개인이건 집단이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의 윤곽을 따라 판단되고 교정되는 견고한 분할선을 효과적으로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45, 383) [소설을 읽고 분석 또는 설명을 보아야 하는데, 거꾸로 설명으로 소설의 내용을 구성하려는 이 상상, 서양철학 특히 라틴계를 하려는데 약점이다..] [짧게 보는 자는 예견이 정확한 것처럼 보인다. 길게 보는 자는 미래가 불투명하다. 인지론자는 미분적 결합인데 비해(요소들의 집합), 인식론자는 적분적 종합이다(너비와 부피들의 총합). 이런 후자의 이야기는 다음 문장에서..]
길게 보기, 길게 보는 자들의 상황은 모호(ambiguïté)하지만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수가 극히 적으며, 많아야 절편마다 하나이다. 그들은 섬세하고 복잡한 망원경(une lunette fine et complexe)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우두머리는 아니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사물을 본다. 그들이 보는 것은 미시-절편성 전체이고, 세부의 세부이고, 가능성들의 미끄럼틀이고, 가장자리에 이르기를 기다리지 않는 작은 운동들이고 윤곽이 생기기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히는 선들이나 진동들이고, 요동을 통해 발아하는 절편들이다. 리좀 전체(Tout un rhizome), 즉 재단 기계처럼 기표에 의해 덧코드화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형태, 그런 집합, 그런 요소에 귀속되지 않는 분자적 절편성. (245-246, 383) - [로트만(Lautman), vol 1, Les Schémas de structure, Herman, 1938, pp. 31-40. 이 제1장, 1절에서 「le local et le global」에는 미분적으로 보는 짧게 보기와 적분적 결합으로 보는 길게 보기 사이의 관계를 군론과 행렬로서 설명하고 있다. 적분적 결합 또는 총체적 종합은 리좀 전체인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생물학도 사회학도 아니고, 이 둘의 유사성도 아니다. “나는 문자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선들을, 글(écriture)의 선들을 그린다. 그런데 삶은 그 선들 사이를 지나간다. 유연한 절편성의 선은 해방되어 길게 보는 자들의 미시-정치에 의해 떨리는 방식으로 그려진 아주 상이한 또 다른 선과 뒤엉킨다. 그것은 정치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은 계단식이며 병치할 수 없고, 통약할 수 없는 형식으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각, 기호계, 실천, 정치, 이론은 항상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246, 384)
사람들은 말할 때에만 문자 그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지각하고, 문자 그대로 산다. 다시 말해 연결 접속될 수 있는 선이건 없는 선이건 선들에 따라. 그것들이 매우 이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때때로 그것들이 등질적인 경우에는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384-385)
길게 보는 자들(les longs-voyeurs)이 처한 상황의 모호함(l‘ambiguït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심연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가장 가벼운 미시-위반들을 쉽게 간파해낸다. 하지만 그들은 재단하는 <la 망원경(Lunette)>이 허울뿐인 기하학적 정의(正義, justice) 아래서 야기하는 끔직한 폐해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들은 예견하고 앞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눈에는 이미 일어났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247, 385) [주지주의의 기하적 판별은 미리 주어진 것을 존재라 믿고 예견하고 확신한다. 자연주의의 위상적 생성은 예견불가능하고 비결정적 상태로 활동성을 유지하는데, 전자는 이 활동성을 자신들이 재단했다고 믿는다. 이 경우에 통제와 억압, 그리고 지배와 질서 등을 유지했다고 한다. 후자에서 온사건은 항상 무엇인가를 생성하고 생산한다는 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길게 보는 자들도 짧게 보는 자들의 도구에 현혹될 수 있다. (내가 해석을 거꾸로 하고 있나?) (51OKD)]
그들은 가장 경직되고 가장 잔인한 통제의 기획에 가담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된[폭로된] 지하활동에 대한 모호한 공감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분자적 선의 모호함은 그 선이 두 개의 비판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어느 날(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떤 길게 보는 자(un long-voyeur)가 자기 절편을 버리고, 검은 심연 위에 걸린 좁은 가교로 올라가서 자신의 망원경을 부순 후 도주선 위에서 다른 쪽 끝에서 다가오는 눈먼 <분신(un Double)>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247, 385-386) [도주선을 가는 잠행자를 강조할 것 같은데, 단편소설은 분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 한계인가? ]
§8.03. Coupure, fêlure, rupture. 247
- 절단, 파열, 단절. 386
동일한 리듬 위에서 뛰놀지 않고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지도 않은 선들, 예컨대 자오선, 측지선, 회귀선, 방추선 등이 우리(집단이건 개인이건 관계가 없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구성하는 선들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선들을 말했다. 또는 선들의 묶음을. 왜냐하면 선들의 각 종류는 다양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선들 중에 특히 어느 하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아마도 결과적으로는 거기에 결정적인 선은 아니더라도 다른 선들보다 더 중요한 한 선이 있는 셈이다. ‥… 그것이 거기에 있다면 말이다. (274, 386)
화가 플로랑스 줄리앙(Florence Jullien 1967-)은 특히 도주선에 관심이 있다. 그녀는 사진에서 출발해서, 거의 추상적이며 형태가 없는 선들을 뽑아낼 수 있는 절차를 발명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것은 온통 매우 다양한 선들의 묶음이다. 학교에서 달려 나오는 아이들의 도주선은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는 시위대의 도주선과 같지 않으며 탈옥수의 도주선과도 같지 않다. 서로 다른 동물들의 도주선. 각각의 종, 각각의 개체는 자기 자신의 도주선을 갖고 있다. (248, 386-387)
페르낭 들리니(Fernand Deligny, 1913-1996)는 자폐증 아이들의 선들과 궤적들을 전사한다. 그는 지도들(des cartes)을 만든다. 그는 “방황할 때의 선들”과 “습관적인 선들”을 세밀하게 구분한다. 그런데 이는 산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들의 지도들도 있고, 습관적인 몸짓과 방황할 때의 몸짓을 동반하는 몸짓들(요리하기 또는 나무줍기)의 지도들도 있다.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248, 387) [가타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 같다.]
방황할 때의 선이 습관적인 선을 다시 절단했다. 거기서 [자폐]아이는 그 둘 중에서 어느 것에도 정확하게 속하지 않는 무슨 일인가를 한다. 아이는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거나(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니면 아이는 뛰어오르고 손뼉치고 작고 재빠른 운동을 한다. 하지만 아이의 몸짓 그 자체는 여러 선들을 방출한다(émettre). 요컨대, 나름의 독자성들[특이성들]을 갖고 있고 이미 복합적인 도주선이 있다. 그러나 또한 나름의 절편들을 가진, 그램분자적인 선 또는 습관적인 선도 있다. 그리고 이 두 선들 사이에(?) 분자적 선이 있으며, 이 선을 한 쪽으로 또는 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자기의 양자들(ses quanta)를 가진 분자적 선이 있다. (248, 378) [도주선과 습관선 사이에 분자선이 있다. 선의 탄젠트와 선위의 미분계수들 사이에? 선의 적분적 이질성(질료)의 하나의 선이라기보다 선들이 있다. 하나의 선이나 선들은 다양체이다. (51OKD)]
들리니의 말처럼, 이 선들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지도 제작의 문제이다. 그 선들은 우리의 지도를 구성하듯이 우리를 구성한다. 그 선들은 변형되며 서로 옮겨갈 수도 있다. 리좀. 확실한 것은, 그 선들은 언어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반대로 언어야말로 그 선들을 따라가야 하며, 글쓰기야말로 그 고유한 선들 사이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그 선들이 기표나 기표를 통한 주체의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이다. (247, 387-388)
들리니는 절편들, 문턱들 또는 양자들(quanta), 영토성들, 탈영토화 또는 재영토화들뿐 아니라 이 선들도 함께 새겨져 있는 <공통된 몸체>를 내세운다. 선들은 <기관없는 몸체> 위에 새겨진다. 그 위에서 모든 것이 그려지고 도망가며, 그것은 상상적 형태도 상징적 기능도 없는 추상적인 선 그 자체다. 즉 CsO의 실재(le réel du CsO). 분열 분석은 다음과 같은 것 이외의 실천적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너의 기관없는 신체는 무엇인가? 너의 선들은 무엇인가? 너는 어떤 지도를 만들고 또 고치는가? 너 자신과 타인들(les autres)을 위해 어떤 추상적인 선을,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려고 하는가? 너의 도주선은? 그 선과 뒤섞이는 너의 기관없는 몸체는? (248-249, 388)
분열분석은 원소들, 집합들, 주체들, 관계들, 구조들을 다루지 않는다. 분열분석은 단지 선의 배치들(des linéaments, 다발들)만을 다루는데, 선의 배치는 개인들 뿐만 아니라 집단들을 가로지른다. 개인이 문제이건 집단이나 사회가 문제이건 욕망분석, 분열분석은 실천과 직결되어(immédiatement) 있고, 정치와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 이전에 정치가 있기 때문이다. ... 분열분석은 단편소설의 기예와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분열분석은 적용의 문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에 선택된 특정한 좌표계에 따라 삶의 선들, 문학 작품의 선들, 예술의 선들, 사회의 선들이 될 수도 있는 선들을 분간해 낸다. (249. 388-389)
견고하거나 그램분자적인 분할선(ligne de segmentarité), 유연하고 분자적 분할선(ligne de segmentation), 도주선(ligne de fuite), 많은 문제들이 제기된다. 우선[첫째] 각 선의 특수한 성격에 관한 문제가 있다. 견고한 절편들(les segments durs)은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또 미리 결정되며, 국가에 의해 덧코드화 된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반면에 사람들은 유연한 절편성을 내적인 활동(un exercice, 연습)으로, 상상적인 것(imaginaire) 또는 환상으로(de fantasme) 여기는 경향이 있다. (249, 389)
도주선에 관해서 보자면, 그것은 세상에서 도망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에 구멍을 내듯이 세상을 달아나게 만드는 데 있다. 각 절편들이 도주선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경화된다 할지라도, 호시탐탐 도망가지 않는 사회체계는 없다. 도주선에는 그 어떤 상상적인 것도, 상징적인 것도 없다. 동물에게든 인간에게든 도주선보다 능동적인 것은 없다. (249-250, 389) - [ 세상이 다음 탈영토화로 가게 하는 것이 도주선이다. 이는 주체만이 아니라 환경과 풍토도 마찬가지 인데, 영토화된 피폐된 풍토에서 벗어나게 탈영토화하는 것도 도주선의 일이다. 물질성의 변환이 시대의 의식을 전환하게 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계속된다. 이 둘 사이에 대응이든 평행 또는 역도 가능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 것은 지나온 흔적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쓰레기가 넘쳐난 것은 이미 쓰고 있는지 오래 되었기에 그 변환은 일어나고 있었고, 어느 변곡점에서 의식의 전환이라고 부를 뿐이다. (51OKD)]
그리고 <역사>조차도 “기표 작용을 하는 절단들”이 아니라 도주선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순간 무엇이(qu’est-ce qui) 사회에서 달아나는가? 사람들이 국가의 거대한 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발명하는 것은 바로 도주선 위에서 이다. “도망 갈 수 있지만, 나의 도주선 위에서 무기를 찾고 있다.” 유목민들이 자신들이 지나갈 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파라오를 놀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도주선 위에서 이다. (250, 389-390)
둘째 문제는 선들 각각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견고한 절편성(la segmentarité dure)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건 좀 더 쉽다. 그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유연한 절편성(une segmentarité souple)에 의해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리좀에 의해 어떻게 다소간 다시 절단되어 있는지를 본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도주선이 거기에 또 덧붙여지는지를 본다. 그리고 결연과 전투들을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도주선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일차적인 것은 도주선과 그것의 절대적 영토화일 것이다. (250, 390)
유연한 절편성이 다른 두 선 사이에서 포착되고, 한쪽 또는 다른쪽 선으로부터 흘러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유연한 절편성의 모호성(ambiguïté)이다. 게다가 다양한 조합들을 보아야 한다. 집단이건 개인이건 누군가의 도주선은 다른 자의 도주선을 그다지 두둔할 수가 없다. 반대로 그것은 그의 도주선을 차단하고 가로막고 심지어 견고한 절편성 안으로 몰라맬 수도 있다. 사랑에서조차도 누군가의 창조적인 선이 다른 이를 가둬버리기도 한다. (250,390-391)
셋째 문제로 선들의 상호 내재성이 있다. 선들을 풀어내는 문제도 더 이상 쉽지 않다. 어떤 선도 초월적이지 않으며, 각각의 선은 다른 선들 안에서 작동한다. 온통 내재성(Immanence partout). 도주선들은 사회의 장에 내재한다. 유연한 절편성(la segmentarité souple)은 견고한 절편성의 응고물을 끊임없이 해체하지만 자신의 층위에서 해체한 모든 것을 재구성하는데, 미시-외디푸스들, 미시적 권력 구성체들, 미시-파시즘들이 그것이다. 도주선은 두 개의 분할 계열을 폭발시키지만,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다. (251, 391)
로렌스(Lawrence, 1885-1930)가 멜빌(Melville, 1819-1891)을 비난한 것처럼,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그건 더 나쁜 일이다. 견고한 절편성 안에 있는 더러운 작은 비밀의 질료, 유연한 절편성 안에 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의 텅 빈 형식, 도주선 위에서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의 잠행성(la clindestininité). 이런 것들 사이에서 촉수를 사방으로 뻗치는 심급의 경련들, 즉 모든 것을 요동치게할 위험을 갖는 <비밀>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첫째 절편성의 <커플>과 둘째 절편성의 <분신>과 도주자의 <잠행자> 사이에 그토록 많은 혼합과 이행이 가능한 것이다. (251, 391-392)
- 끝으로[넷째] 가장 불안한 마지막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각 선들에 고유한 위험들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 선의 위험과 개선될 것 같지 않은 그 선의 경직성에 관해서는 말할 것이 없다. 둘째 선의 모호함(l‘ambiguïté)에 관해서도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도주선은 왜 그렇게 특별한 절망을 품고 있는 것일까? (251, 392)
단편 소설의 위대한 창조자인 체홉(Tchekhov, en. Chekhov, 1860-1904)에 대해 셰스토프(Chestov, 1866-1938)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긴장했다. 이 점에 관해 의심할 수는 없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이런 긴장의 원인은 어떤 고된 노고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힘을 넘어서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요컨대 이것은 부조리한 사고(事故)였을 뿐이다. 그는 헛디뎠고 미끄러졌다. (‥…) 새로운 인간이, 어둡고 음울한 인간이, 한 범죄자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체홉의 모든 인물들에게는 여전히 이것이 문제이다. 사람은 긴장하거나 나아가 무언가가 부서지게 되면 고통과 모래의 검은 구멍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 우리를 구성하는, 그리고 <단편소설(la Nouvelle)>의 본질을, 가끔 <복음(la Bonne Nouvelle)>의 본질을 구성하는 선 위에서 쉬운 것이란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 (251-252, 392-393)
§8.04. Le couple, le double et le clindestin. 252
- 짝쿵(커플), 분신, 잠행자. 393
커플들이란 무엇인가? 너의 분신들이란 무엇인가? 너의 잠행자들(les clindestins)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의 혼합물이란 무엇인가? <내가 너의 눈에 있는 광기의 번뜩임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입술에 있는 위스키의 맛을 사랑해다오>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합성되는 것은 어떤 선들이며, 반대로 공존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어떤 선들인가?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친구들과 친지들 가운데 50%는 젤다를 미치게 만든 건 나의 술이라고 진심으로 말할 것이고, 다른 절반은 나를 음주로 몰고 간 그녀의 광기라고 당신에게 확언 할 것이다. 이런 판단들 그 어느 것도 큰 의미가 없다. 양쪽 다 우리들 각각이 서로가 없었다면 더 잘 살았을 거라고 말하는 데는 만장일치일 테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인생에서 지금보다 서로에게 더 반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 입술 위의 알코올을 사랑한다. 나는 극도로 기상천외한 그녀의 환각을 지극히 사랑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아주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서로를 파괴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252, 393) [부부가 살면서, 원수 같다고 할때도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각자는 수렁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수렁에 빠져 나오는 것이 좋은지 옳은지를 각자는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수렁은 수렁일 뿐만이 아니라, 여느 삶과 같은 삶의 질료이며, 질료를 떠난 삶, 이데아의 삶은 여기에는 없다. 저승보다 개 똥밭이라도 이승에서 산다는 소리가 수렁이라도 삶의 질료없는 삶은 없다. “나도(moi aussi)”의 인지적 전개는 질료없이 미분화된 점으로서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다. 관계상 사회적 범죄는 범죄, 미분화된 점이 선분 속에서 위치하는 적분적 총합과 연관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가 수렁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수렁을 수용하면서 벗어나려고 다른 점들을 동원하는 것이 문제를 만든다. 문제를 해소하는 길은 다른 삶, 다른 환경, 다른 풍토를 만드는 탈주가 아닐까? 답은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만 가지인데 그 점(특이성)에만 속하는 해소의 길은 그 점만이 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타인에게는 난제로 보인다. 고통과 죽음처럼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51OKE)]
여기서 알콜 중독자와 미친 여자는 서로의 입술과 눈에 입 맞추면서 견딜 수 있는 극한까지 분신의 증식을 이끌어 낸다. 자신들의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내적인 소식 역할을 하는 암시들을 가지고서, 하지만 또한 도주선도 있다. 그들이 떨어져 있을수록, 아니면 반대로 그들 각각이 상대방의 잠행자일수록 도주선은 그들 공통의 것이 된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을수록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수록 그 분신은 더욱더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파괴되었지만 서로 상대방을 파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회상(le souvenir)에 의해 통과하지(passera, 지나가다)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선들 위에서, 선들 사이에서, 선들을 지각할 수 없게 만드는 <그리고(ET)>안에서, 한 선과 다른 선 안에서 통과했다(est passé)지나갔다. (252 393-394)
그것은 분리접속도 접합접속도 아니고, 오히려 새롭게 수용되기 위해 끊임없이 그려지는 도주선이다. 이것은 포기나 단념과는 반대된다. 이것이 새로운 행복 아닐까? (252, 394) [오늘, 한 인물이 자연인-되기 한다. 좀 일찍이 간결하게 시인하고 넘어갔으면 .. 모양새가 좋지 않았나. 인지론이 질료론을 이긴 게 남녘의 역사잖나. 그리고 아제 토굴인-되기, 리좀-되기. <그리고(ET)>란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수록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성공적인 것은 분신(double)이다.”(252, 394) / 정보상으로는 인지론이 앞선다, 이에 비해 달리 말하기, 달기 살아가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질료론이 중요하다. (51NMH)] [생성 또는 되기가 있는 한, 삶은 소중하고 새로운 것이다. 행복은 이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아제에서 찾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만들어가는 과정자체도 행복이지만 부풀어져 가는 과정, 생성 또는 되기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닌가? (51OKE)]
(노트: 3:32, 43PKK) (11:40, 51OKC) (15:31, 51OKE) (16:19, 51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