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삼각지대’는 평강, 철원, 김화를 잇는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넓은 평야가 발달했고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여 교통과 전략에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특히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 지역에 나진·성진·원산항에서 온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집결하여 남침의 본거지로 삼기도 했는데요. ‘철의 삼각지대’라는 말은 당시 미8군 사령관 밴프리트 대장이 “적이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철의 삼각지대(Irion Triangle)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군단급 11개군, 26개 사단을 투입하여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휴전에 임박할수록 방어선을 유리하게 구축하고 협상에서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삼각고지전투, 수도고지전투, 지형능선전투, 금성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오늘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일어난 전투 중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지구 전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6·25 전쟁의 최대 격전, 백마고지 전투
▲ 백마고지 전투장면 (출처: 나라사랑)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초 휴전회담 중에 발생했습니다. 포로문제에 대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철원군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중공군 제38군은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시켜 국군의 후방에 있는 역곡천을 범람시켰습니다. 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당시 백마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열 두 차례 쟁탈전을 반복했습니다. 일곱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 끝에 백마고지를 사수하였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공군에서는 10,000여명의 전사자, 부상자, 포로가 발생하였고, 국군도 3,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6주 간의 일전일퇴, 저격능선 전투
저격능선 전투는 같은 해인 1952년 10월 14일 김화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대치상태를 이어가던 중, 국군은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진격하였습니다. 국군은 첫 공격에서 저격능선을 점령하여 작전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중공군이 바로 역습하여 다섯 시간 만에 저격능선을 중공군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전일퇴의 공방이 11월 24일까지 6주 동안 지속되다가 국군은 고지를 완전히 확보하였습니다. 중공군이 한 발 물러서 방어태세를 취한 채 저격능선전투는 중단되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6·25전쟁의 2대 격전’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어 중공군은 2개 연대 규모로, 국군은 1개 연대 규모로 손실을 입었습니다.
정전을 앞둔 1952년, 금성지구 전투
▲ 1953년 7월 판문점 휴전회담 당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출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휴전이 임박해가던 1953년 7월, 금성지구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공군은 6·25전쟁에서의 승리를 전 세계에 과시하고 국군 전선의 위협요소를 제거하고자 7월 13일 12개 사단을 동원하여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김화의 금성지구를 차지했습니다.
국군은 진영을 재구축하고 7월 19일 반격을 개시해 금성지구 남쪽 일대를 탈환했습니다. 결국 중공군은 방어선에서 9km를 남하하였고, 이 상태로 휴전 맞이했습니다. 중공군에서는 약 2400명이, 국군에서는 약 27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 철의 삼각지대 전투 전몰장병 추모비 (출처: 국가보훈처)
한 뼘의 땅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 철의 삼각지대에는 그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묻어 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는 조국의 영토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다시는 비참한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참전용사들의 애국정신이 계승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