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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셨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천지창조에 동참하셨다(요1:1).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다(골1:15,16).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이미 계셨다(요8:58). 창1:1의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인데 복수형이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창1:3의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 이는 히브리어 아마르인데 이것의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원수가 된다. 여자의 후손 예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 뱀은 예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창3:15). 이는 장차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원시복음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영적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승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활한 뱀의 히브리어 명사는 나하쉬인데 마술을 행하다, 점을 치다의 뜻을 가진 동사 나하쉬에서 유래하였다. 창3:15의 머리를 상하게 하다에서 상하다의 히브리어 슈프는 분쇄하다, 박살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 예수께서 사탄의 머리를 짓눌러 부수는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탄이 치명적으로 패배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가인의 족속과 에돔 족속과 에서의 손자 아말렉 족속은 이스라엘의 대적자로 나타난다. 사탄은 배후에서 이러한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끊임없이 대적한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어 치마로 삼았다.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21). 짐승의 가죽은 피를 흘림으로 얻어지는데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실 것을 보여주는 예표이다. 가죽옷의 히브리어는 오르 케토네트인데 상형적 의미로 접근하면 오르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뜻을 가지며 케토네트는 십자가의 손 십자가의 구원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죽옷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고페르 나무로 만든다(창6:14). 고페르의 어원은 덮다, (죄를)가리다를 의미하는 카파르에서 유래하였다. 방주는 히브리어 테바인데 어원은 미워하다, 혐오하다의 뜻을 가진 바할에서 유래한다. 테바의 상형적 의미는 십자가의 아들은 생명이다 혹은 십자가는 생명의 집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심판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주의 안과 밖에 역청을 바른다. 역청의 단어 코페르는 덮다, 가리다의 카파르에서 유래했으며 몸값, 속전을 의미한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창8:4). 아라라트는 아르메니아 중부 지방에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이는 외국어에서 유래하는데 거룩한 땅을 의미하기도 하며 근원적으로는(아라르) 저주하다, 저주 받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9:13절은 노아의 무지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고 있다. 무지개는 히브리어 케셰트이며 활을 의미한다. 또한 케셰트는 덫을 놓다의 뜻을 가진 코쉬에서 유래하였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안전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올무와 덫이 될 것이다(사8:14-15, 사28:16, 롬9:32-33). 케셰트의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소망은 십자가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을 예표하는 인물이다(창14:18). 멜기세덱은 왕을 의미하는 멜레크와 의로운 뜻의 체데크로부터 형성되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그를 영접하였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시110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
모리아 땅에서 아브라함이 행하는 이삭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표하는 것이다(창22:2). 번제 곧 히브리어 올라의 상형적 의미는 위를 바라보며 손을 높이 드는 것이 생명이다 혹은 높이 달린 메시아를 바라보는 것이 생명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지명 모리아(모리야)는 바라보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라아와 여호와 혹은 주님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야흐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지시하신 땅은 주님을 보는 곳이며 여호와를 보는 곳이다. 이 곳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대상21:28). 오르난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예수의 진리가 있는 자라는 뜻이다. 오르난의 다른 이름은 아리우나인데 이는 ‘나는 기뻐 외치리라’의 뜻이다(삼하24:18).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년 만에 이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다(왕상6:1, 대하3:1).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수풀의 숫양 한 마리로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게 된다. 이는 예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실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방 민족의 구원을 내포하고 있었다(창17:4). 하나님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오는 열방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창12:3, 갈3:8). 창12:2에서 민족의 히브리어 고이는 열방민족을 가리킨다. 이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의미를 뛰어넘는 구원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는 열방 민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자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고 있다(이사야2:3, 미가4:2). 로마서는 9장에서 11장에 걸쳐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은 참감람나무인데 이방인은 돌감람나무로써 그것에 접붙임을 받았다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로마서 15장에서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말한다(창15:6). 아브라함의 행위가 특별하여 의롭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원리에 중요하다. 사람들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곧 십자가의 구속언약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롬4:2-3, 롬10:10).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창28:12). 사닥다리는 히브리어 술람인데 남성, 단수 명사이며 들어올리다, 높이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쌀랄에서 유래하였다. 서다 곧 히브리어 동사 나차브는 사역수동형을 취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로 사닥다리가 서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높이 매달리신 예수께서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신다. 아무든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 예수께서도 나다나엘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다(요1:51).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하는 인물이다(창37장). 요셉 곧 히브리어 더하다, 가산하다, 늘리다, 증가시키다의 뜻을 가진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를 차지하는 축복을 누린다. 그가 형들의 미움으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에 팔리는 것을 예표하며 형들로부터 마른 웅덩이에 던져지며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감옥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며 요셉이 애굽의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과 애굽 바로의 꿈을 해석한 것은 예수께서 성령의 지혜로 사역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가 형들의 미운 행동들에 대하여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며 또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통치를 말하고 있다. 요셉의 꿈대로 애굽에서 그의 형제가 총리 요셉에게 절하는 장면은 장차 이스라엘 지파가 메시아를 섬기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유다지파로부터 메시아가 오게 될 것이다(창38장). 유다 곧 히브리어 예후다는 신앙하다, 고백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야다에서 유래한다. 유다의 아들은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이며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다(창46:12).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은 성막에서 금과 은과 놋으로 언약궤와 등잔대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물두멍을 만들었다. 브살렐은 ‘하나님의 강한 보호 안에’의 뜻을 가진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게 될 것을 야곱은 예언하였다(창49:10).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계보에서는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어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임을 증거하고 있다.
2. 출애굽기
출애굽의 마지막 열 번째의 재앙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출12:13). 인방 곧 히브리어 마쉬코프는 상인방(창이나 입구 따위의 위에 댄 가로대)을 말하며 내다보다, 조망하다, 밖을 보다의 뜻을 가진 샤카프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모양은 네모가 아니라 히브리어 여덟 번째 글자 곧 생명을 뜻하는 ‘헤트’의 모양이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한 애굽의 장자와 초태생은 죽었지만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와 초태생을 죽음의 심판을 면하였다.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외면하는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은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하였다(출17장). 신광야는 진흙 땅의 광야를 말한다. 르비딤 곧 레피딤은 평지, 평원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다. 이에 모세가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치니 거기서 물이 흘러나왔다. 호렙산은 황무하고 메마른 땅을 말한다. 반석은 히브리어 명사 추르이며 돌, 바위의 뜻인데 함께 묶다, 포위함으로 압박하다, 도성을 포위하다, 자르다, 나누다의 동사 추르에서 유래한다.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반석을 치라’에서 치라 곧 히브리어 동사 나카는 치다, 때리다, 갈기갈기 찢다, 죽이다, 살해하다, 시들다, 말라 죽다의 뜻을 가진다. 이 반석을 치는 것은 로마군병들이 포위하고 압박하여 죽이는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을 연상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는 인생의 갈증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신비한 물이다. 우물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갈증을 느끼게 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이다(요4장).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따르던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전10:4). 또한 이사야는 시온의 돌이 메시야임을 말하고 그 돌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황급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사28:16).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출16:31). 만나는 히브리어 명사 만이며 무엇, 어떤 것, 무엇이든지, 왜, 얼마나, 무엇 때문에의 뜻을 가진 대명사 ‘마’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은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다. 엿새 동안은 만나를 거두었으나 일곱째 날 곧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었다. 아론이 항아리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였다(출16:34, 히9:4). 하늘에서 내려온 이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먹었다. 날마다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오는 이 은혜의 음식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하셨다(요6:51). 또한 성찬예식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이 떡은 내 몸이라고 하셨다(고전11:24).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신8:3, 마4:4). 인간의 노동의 수고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사십년 동안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가 입증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를 신령한 음식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0:3).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사는 자는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사역을 하신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그의 백성도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출20:8). 신명기에는 안식일의 의미가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안식일은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았던 때에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신5:15). 안식일 곧 샤바트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계명임이 분명하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12:8). 안식일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임한다. 이는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는 참된 안식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다(히4:1-10). 예수께서는 자신이 참된 안식처임을 선포하고 계신다(마11:28). 여기서 ‘쉬게 하리라’는 헬라어 동사 아나파우오이며 소생시키다, 회복시키다, 쉬게 하다, 쉬다, 안식하다의 뜻을 가진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출26:1). 성막 곧 히브리어 미쉬칸은 거처, 천막, 장막, 성막, 성소를 말하며 정착하다, 휴식을 취하다, 거주하다, 살다의 뜻을 가진 동사 샤칸에서 유래한다. 언약궤, 법궤, 증거궤라고 불리는 궤에는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있다. 증거 곧 히브리어 에두트는 하나님의 계율, 율법, 십계명, 계시, 시편의 뜻을 가지며 반복하다, 다시하다, 되풀이해서 말하다, 입증하다, 훈계하다, 시험하다, 증거하다, 증인으로 부르다의 뜻을 가진 동사 우드에서 유래한다. 이 언약궤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1:1). 성막 안에 두는 등잔대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8:12). 떡상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6:48). 번제단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롬3:25). 향단은 중보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롬8:34). 히브리서에서 법궤 안에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와 십계명 두 돌판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히9:4). 법궤 안에는 오로지 십계명 두 돌판 만이 들어있다.
출애굽의 결정적 사건은 애굽의 모든 장자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구원을 받았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고전10:2).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신령한 음식이라 하였고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신령한 음료라 표현하였다(고전10:3,4). 신학자 칼빈은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를 성찬 예식과 관련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애굽은 세상의 모형이며 광야는 교회의 모형이며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다. 한편 모세와 아론을 비롯하여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교회시대에 죽는 자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는 구원에 관한 사건으로 가득하다. 나일강에서의 아기 모세의 구원, 애굽 왕의 바로에게서 이스라엘의 구원, 홍해로부터의 구원, 광야의 위험으로부터의 구원, 우상숭배로부터의 구원, 아말렉 족속으로부터의 구원 등이 그러하다.
3. 레위기
레위기의 5대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태우는 번제(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헌신을 말한다. 번제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높이 달린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곡식의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에 소금을 쳐서 드리는 소제(민하)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말한다. 민하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진리로 구원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수컷이나 암컷을 가리지 않고 소나 양이나 염소로 드리는 화목제(셸렘)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기능을 말한다. 화목제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십자가의 진리로 거룩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온 회중과 족장과 평민이 드리는 예물이 서로 다른 속죄제(핫타아트)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말한다. 속죄제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죄는 십자가에서 분리되고 해결된다는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해서 보상을 하는 속건제(아샴)는 상당한 죄값을 치루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속건제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진리로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일곱째 달 십일의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며 이스라엘 자손은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제사장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한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염소는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게 된다(레16:10). 아사셀 염소는 진영 바깥으로 보내어지는데 이는 영문 밖에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히13:12). 아사셀은 아잘(떠나다)과 아나(재난이 닥치다, 슬퍼하다, 애도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떠나도록 보냄을 받은 염소 혹은 떠나서 죽음에 이르는 염소로 이해할 수 있다.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낸다. 여기서 두 마리의 염소 가운데 하나인 아사셀 염소는 남성 단수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절기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레23:4). 절기 곧 모에드는 정한 때, 정해진 집회, 정한 장소를 뜻하며 정하다, 명하다, 지정하다, 일정한 장소에서 어떤 사람과 마주치다의 동사 야아드에서 유래한다.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던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페사흐)이다. 이는 장차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됨을 예표한다. 안식일 이튿날 초실절에는 보리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요제로 드리는 날이다. 이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초실절 이후부터 일곱 안식일의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일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 날은 칠칠절 혹은 오순절 혹은 맥추절이라 부른다. 오순절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교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활짝 열리게 된다. 일곱째 달 열흘은 속죄일(욤-킵푸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스스로 괴롭게 하여야 한다. 일년 중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유일한 날이다. 이 속죄의 행위는 해마다 반복되어야 했다. 속죄일은 무흠하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상징한다. 이러한 제사는 매년 반복되어야 하나 예수께서 오셔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다시는 죄를 위하여 반복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곱째 달 열닷새 날에 지켜지는 초막절(하그-숙카)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면서 누렸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이다. 이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의의 통치와 기쁨과 구원과 평화를 예표하고 있다.
3. 민수기
모세는 바란 광야에서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다(민13:3). 바란 광야 곧 파란은 동굴이 많은 지역이며 그 위치는 아라비아의 페트라와 팔레스타인의 이두매 사이에 놓여 있는 미개한 산악지방이다. 또한 아름답다, 꾸미다, 장식하다, 영예를 얻다, 영화롭게 되다, 자랑하다의 뜻을 가진 파아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바란 광야는 동굴로 아름답게 꾸며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이며 모래 벌판과 모래 언덕으로 이루어져서 은신처로 적합한 땅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열 명은 가나안 땅의 정복에 불신앙으로 보고하였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보고하였다. 그 결과 열 명의 정탐꾼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생존하였다. 하나님은 불신앙에 대하여 심판하시나 믿음에 대하여는 은혜를 베푸신다. 마침내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은혜를 누린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으로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율례 곧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예표한다(민19:9). 붉은 암송아지를 진영 밖에서 죽이고 그 소의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그 암소의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되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아울러 태운다. 그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의 깨끗한 곳에 두어 간직하였다가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의 부정을 씻는 물에 사용한다. 암송아지의 히브리어 파라는 황소와 수송아지를 의미하는 파르에서 유래하였다. 암송아지 파라의 상형적 의미는 예수께서 진리를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죄 씻음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백향목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고 우슬초는 죄 씻음을 상징하고 홍색실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성문 밖에서 암송아지를 죽이는 것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예표한다.
광야의 장대 위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한다(민21:8).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상하였다. 이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하여 다수가 죽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면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하셨다. 뱀에게 물린 자 가운데 모세가 만든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았다. 불뱀은 히브리어 사라프인데 이는 맹독을 가진 뱀을 말한다. 놋뱀에서 ‘뱀’ 곧 히브리어 나하쉬는 마술을 행하다, 점치다, 예언하다의 동사 나하쉬에서 유래한다. 이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창3:15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한 불뱀 곧 사망의 세력이며 사단의 세력인 뱀은 치명적인 손상으로 장대 위에 매달린다. 8절의 보다는 라아인데 이것의 상형적 의미는 예수께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9절의 쳐다보다는 히브리어 나바트인데 이것의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는 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요3:1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놀라운 복음인 것이다. 이 놋뱀 사건에서 악의 세력은 심판하시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살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모압 산지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번째 축복 예언을 하였다(민24:17). 발람은 히브리어 빌암은 백성이 아닌, 외국인의 뜻을 가진다. 실패,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다, ~하지 않도록의 뜻을 가진 부정대명사 ‘발’과 실패하다, 사라지다, 쇠하다의 동사 ‘발라’와 백성, 민족, 족속, 지파의 ‘암’에서 유래한다. 또한 발람은 실패자, 쇠퇴자의 뜻을 가진다. 여기서 나타나는 한 별과 한 규는 일차적으로는 다윗이요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 별과 한 규의 출현은 모압 족속과 에돔 족속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모압과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나라의 대표이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받고 왔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을 네 번이나 축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세의 칼날에 죽은 점술가이며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였고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행음하게 한 자였다. 발람의 의미는 탐식자 혹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이다. 모압 왕 발락의 의미는 파괴자 또는 약탈자이다. 모압 왕 발락과 메소보다미아 점술가 발람은 이스라엘을 백성을 멸망에 이르게 할 자로 등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가나안 땅의 도피성은 죄악의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도피성은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여 복수할 자로부터 보호받고 죽지 않게 하는 곳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도피성은 모두 여섯 성읍인데 납달리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의 세겜, 유다의 헤브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고 르우벤 지파의 베셀,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 세 성읍은 요단강 동편에 두었다. 게데스는 거룩한 곳을 뜻하며 거룩하다의 카다쉬에서 유래하였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하는 세겜은 산마루, 어깨의 뜻을 가지며 아침 일찍 일어나다의 샤캄에서 유래하였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살았던 헤브론은 연합, 동맹을 뜻하며 묶다, 연합하다의 뜻을 가진 하바르에서 유래하였다. 베셀(베체르)는 요새의 뜻을 가지며 견고하다의 바차르에서 유래하였다. 라못은 높은 곳을 뜻하며 높이 들려지다의 라암에서 유래하였다. 골란은 포로, 망명의 뜻을 가지며 드러내다, 벗기다의 갈라에서 유래하였다.
4. 신명기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내용이다(신5:12). 안식일 곧 샤바트는 노동을 쉬다, 땅을 경작하지 않고 두다, 어떤 일을 그만두다, 안식일을 지키다, 끝내다, 억제시키다, 그만두게 하다의 뜻을 가진다. 안식일의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출20장에서는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쉬었기 때문에 그의 백성은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명령이다. 신5장에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의 계명은 창조의 하나님에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그 강조점이 바뀌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에 창조의 하나님도 기억하고 구원의 하나님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안식과 예배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신5장에서는 남종과 여종에 대한 노동의 중지를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의 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출20장)을 받기 전에 이미 신광야에서(출16장) 만나와 관련하여 안식일의 존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엿새 동안은 만나를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라서 만나가 없다고 하였다. 안식일의 히브리어 샤바트의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집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거룩하게 지키라의 동사 카다쉬는 강조능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하여 신5장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차와)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신 처소는 하나님을 섬기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한 마음으로 섬기게 될 예루살렘의 중앙 성소를 말한다(신12:11). 가나안 땅에서의 우상숭배를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처소 한 곳에서 예배 제사를 드리는 것을 부탁하였다.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각각 자신의 산당이나 신전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겼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신론과 혼합주의에 매몰되고 만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중앙 성소를 세우고 한 곳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중앙 성소의 명령을 무시하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패망의 주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세웠던 이동식 성막은 가나안 땅에서 고정식 성전으로 바뀌었다. 광야에서와 가나안의 실로에 있었던 성막은 다윗 왕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 왕 제 사년에 시작된 하나님의 성전 건축공사는 제 십일 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 년만의 일이었다.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처소 한 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던 곳이며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다. 다윗은 이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예언하였다.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신18:15). 스데반도 공회 앞에서 설교할 때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모세가 말한 것을 증거하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15절에서 선지자는 히브리어 나비인데 대변인, 말하는 자를 말한다. 일으키다의 히브리어 쿰은 사역능동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일으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지자 제도는 일차적으로는 가나안에서의 우상숭배를 예방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가증한 행위를 행하는 자들 곧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가나안 족속들의 이러한 가증한 행위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므로 때가 차매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들을 멸하며 추방하신 것이다. 한편 호렙산에서의 여호와의 출현에 큰 두려움을 가진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책무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 중의 최고의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히1:1,2).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리라 예언하였으나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예언하였다(렘27장). 예수께서도 종말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출현을 경고하셨다.
6.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 예호슈아인데 예호와(자존자)와 야샤(해방하다, 구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을 가진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이며 가나안 땅 정탐꾼으로 활동하였다. 여호수아는 신광야에서 떠나 시내산 남부의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과 싸워서 이겼다. 여호수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