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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대척점에는 극사실주의가 있습니다.
(극)사실주의는 묘사를 매우 잘 활용합니다.
때문에 묘사의 달인이라 평가받는 김기택 시인의 시를 살펴봅니다.
그렇다고 아래의 작품들이 극사실주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소재로 어떻게 다른 시가 나왔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참고가 될 겁니다.
소 / 김기택
밤중에 누가 내 꼬리를 훔쳐갔다.
날씨가 더워져 두엄과 오물이 시멘트처럼 굳어붙은 엉덩이로 질긴 파리들이 꼬여들면 뿌리만 뭉툭하게 남은 꼬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 항문이 먼저 옴씰옴씰거리고 뜨거운 오줌이 나올 듯하다가 드디어 꼬리 밑둥이가 맹렬하게 꼼지락거리기 시작한다. 파리 한 마리 못 쫓는 내 엉덩이를 쳐다보는 웃음 소리. 나는 돌처럼 차갑고 딱딱한 힘을 엉덩이로 집중시켜 움직이고 싶어 안달하는 꼬리뼈를 단단하게 붙잡아 조인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느릿 되새김을 계속한다. 이젠 창자로 넘어가도 좋을 것들을 더 곱게 되새김질하고 또 새김질하여 귀를 기울이고 기다린다, 위장에서 맑은 소리가 흐를 때까지. 간지러운 내장의 감촉을 만지고 있는, 아아, 이 고요한 표정으로, 꿈벅꿈벅, 새벽의 산사에 가 앉아볼까? 막 그림에서 깨어난 새소리, 바람 소리를 나는 게슴츠레한 눈길로 바라본다. 꿈결같이······· 파리 날개에 몸을 기대고 출렁거리는 무거운 졸음. 감길 듯 누워 있는 졸음의 먼 끝에서 어떤 둔한 박자 하나가 심각하고 격렬하게 까닥까닥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거운 내 눈꺼풀 가물가물 웃음짓다가 갑자기 놀라 깨어난다. 그리고 쏘아본다, 분연히, 꿈벅꿈벅, 거친 숨을 몰아쉬며 꼬리 없는 엉덩이의 움직임을.
무엇인가 이것은,
코뚜레에 너무 오래 붙들려 무력해진 지금
아픈 코의 대척점에서 일어나는 이 느닷없는 힘은,
웃음거리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
들입다 흔들어대는 수밖에.
- 시집 [태아의 잠]
[시 읽기]
독백하는 형태의 話者중심구조로서, 화자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소가 되어 동물적 감각으로 관찰하고 느끼고 사색하면서 전개하는 언술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특히 ‘의성어’나 ‘의태어’를 포함한 ‘수식어’가 자주 눈에 띄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시어들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 중에는 소의 모습이나 행위 또는 생각들을 묘사하는 것에 활용된 언술로 이 시가 구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무기력해서 슬픈 소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것으로 블랙유머(black humour)의 효과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우선 “(날씨가 더워져) [두엄과 오물이 시멘트처럼 굳어붙은] 엉덩이로 질긴 파리들이 꼬여들면 뿌리만 뭉툭하게 남은 꼬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라는 2연의 첫 구절을 살펴봅니다. ( ) 속은 여름을 말하는 것이겠고, [ ] 속은 엉덩이를 수식하는 언술이지만, 오물이 굳은 형태가 실제로 시멘트처럼 된 엉덩이의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에 설명적으로 읽히지 않으며 또한 허무맹랑하거나 중언부언처럼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적절한 상관물을 찾아 시어로 활용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요.
다음에서 “뿌리만 뭉툭하게 남은 꼬리는 어쩔 줄을 모른다.”라고 했는데 이는 1연에서 꼬리가 분실되었음을 언술했으므로 역시 가능한 표현이겠고, “항문이 먼저 옴씰옴씰거리고 뜨거운 오줌이 나올 듯하다가 드디어 꼬리 밑둥이가 맹렬하게 꼼지락거리기 시작한다. 파리 한 마리 못 쫓는 내 엉덩이를 쳐다보는 웃음 소리.”라고 언술한 2연의 두 번째 구절을 봅니다. “옴씰옴씰” “맹렬하게” “꼼지락”과 같은 의태어와 부사가 있지만, 파리의 간지럼에 대한 소의 반응을 과장된 우스꽝스러움으로 묘사하는 형태입니다. 이 시 외에도 동시인의 시에는 ‘의태어’ ‘의성어’ ‘수식어’등이 활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로인한 전체의 조화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즉 그런 시어들도 쓸 곳에 잘 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파리 한 마리 못 쫓는 내 엉덩이를 쳐다보는 웃음소리.”라는 부분은, 이 언술을 얻기 위해 첫 연을 배치했을 정도로 이 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이 언술로 인해 2연의 다른 구절들의 묘사가 역설적이게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동감으로 다가옵니다. 즉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은(분실된) 꼬리로 인해, 오히려 관련된 진술들이 리얼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이는 몹시 간지러울 때 긁지 못한 것을 경험한 독자의 학습효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꼬리의 기능을 상실한 치욕을 감추려 또는 잊어버리려 되새김을 여러 번 반복하는 등의 행위나 되새김의 행위로부터 파생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심지어는 “새벽의 산사”까지도 불러냅니다. 이런 일련의 진술방식에서 엉뚱하게도 우유부단한 ‘햄릿’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3연의 “아픈 코의 대척점에서 일어나는 이 느닷없는 힘은, / 웃음거리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라는 부분과도 밀접한 고리로 연결됩니다. 바로 이 시의 주제를 지탱하는 중심축이 되겠네요.
다시 첫 연을 보면 “밤중에 누가 내 꼬리를 훔쳐갔다.”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시에서는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이 ‘환상’을 바탕으로 전개되거나 ‘아이러니’나 ‘역설’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첫 연은, 역설적인 언술이 되겠네요. 이유는 소의 꼬리만 훔쳐갈 수 없는(존재하는 꼬리의 부재를 말함으로서) 내용적 모순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연의 무기력한 소(화자)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즉 파리를 철썩 때려서 쫓지 못하는 등, 꼬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상실된 사색이나 의지 그리고 힘으로 인해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꼬리가 되겠네요. 물론 이는 소를 말함이지만 화자 자신에 대한 또는 숨죽인 사회정의에 대한 통찰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는 그들의 상징이 되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1연의 언술을 상상에서 비롯된 진술로 본다면, 이 시가 도입부에 배치한 상상에 의해 또 다른 이미지를 그려내고 구축하는 구조이므로, ‘바슐라르’의 여가작용 4단계에 의한 시적 구성이라 해도 될듯합니다.
다음으로 3연의 배치가 이 시의 맛을 한층 더 살려줍니다. 특히 “무엇인가 이것은, / 코뚜레에 너무 오래 붙들려 무력해진 지금 / 아픈 코의 대척점에서 일어나는 이 느닷없는 힘은,”이라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언술은 소의 의지나 힘을 상징하는 꼬리가 '코뚜레'에 의해 지금은 무기력해진 상태에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도 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가끔 느낀다는 것이겠지요.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자의 억눌림에 의해 일시적으로 거세된 본성과 자아에 대한 재인식 욕구가 남아 있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 여 백
소 2 / 김기택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틈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시 읽기]
이 시 역시 동시인의 시집 [태아의 잠]에 수록된 ‘소’와 같이 독백형태의 화자중심구조입니다. 첫 행이자 첫 연으로 이루진 ‘소’의 첫 구절이 그렇듯 이 시도 첫 구절에 대한 작가의 의도가 눈길을 끕니다.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라는 것은 소가 된 화자의 시각으로 물과 소의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물을 집어넣는다.’라든지 ‘물을 먹었다’로 표현 했다면 강제적인 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화자의 감정이 실린 언술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화자인 소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물리적 생태적 변화를 일정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형태의 언술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건조시킨 언술이 되겠네요. 그러나 그럼에도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라든지 “물이 살 속으로”처럼, 표현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다음 행이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틈들을 /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이지만, 이는 첫 구절을 생각했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표현들로 보면 되겠네요.
그런데 3행과 5행에서 좀 더 물을 많이 먹일 수 있는, 관찰된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잔인함을 말한 뒤, 6행과 7행에서는 그로 인해 나타나는 물리적 생체적 변화를 넘어 정신적 변화를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라든지, “깊고 가는 빈틈으로”라는 언술로 표현합니다. 8행에서 13행까지, 죽음이 엄습하는 과정을 거쳐 14행에서 19행까지는 소의 꺼져가는 의식을 만지는 ‘바람’ ‘공기’ ‘파리’ 등을 통해 죽음을 바라보는 주변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20행에서 22행에서는 죽음의 使者인 물의 마지막 역할을 통해 생명의 근원인 물의 오용을 비판하였지만, 23행에서 25행까지는 죽음에 반응하는 소를 통해 20행에서 22행까지 언술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 여 백
소 3 / 김기택
저 쇠가죽 부대 속에 한때는
풍선 같은 바람이 들어 있었다네
가죽 구석구석 팽팽하게 부풀어
뛰어다니기도 하고 쟁기를 끌기도 하고
목구멍으로 음매에 떨며 나오기도 하였다네
가죽 부대를 빠져나오려고
길길이 뛰고 발길질도 하였지만
결국 바람은 잔잔해지고 풀을 뜯으며 커갔다네
그러나 이제 바람이 빠져나갔다네
백정이 칼을 들어 한가운데를 가르자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네
바람 빠진 가죽부대 털레털레 실려가고
떠돌던 바람들이 모이고 자라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는 저녁
우연히 천막 안으로 들어간 바람 하나
천막을 들고 일어나려 하네
밤새도록 천막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들먹이며 그르렁거리네
마치 내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장의 어두운 통로마다
냄새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 비린 냄새를 진동시켜
울을 소리를 내고 있다는 듯이
그 떨리는 목울대 끝에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달려 있다는 듯이
-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시 읽기]
‘소’를 소재로 한 동시인의 前作들과는 달리 이 시는 話者중심이 아닌 話題중심 구조입니다. 또한 다른 세 작품은 소를 보고 쓴 시로 생각되지만, 이 시는 상관물을 먼저 보고 소를 끌어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특이한 점은 소의 肉을 바람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살아 있는 육에는 靈魂이 함께하는 상태이니 혼을 바람으로 인식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만, 후반부의 “그러나 이제 바람이 빠져나갔다네 / 백정이 칼을 들어 한가운데를 가르자”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육과 분리되는 ‘영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2연으로 넘어오면서 분리된 육과 혼은 흩어져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만, “떠돌던 바람들이 모이고 자라”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는 저녁”이 되면 전생의 野性이 우연하게도 가죽을 닮은 천막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답답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천막을 들고 일어나려”하지만 여의치 못하다고 합니다. 1연의 전반부 언술들에서 逆動 혹은 野性의 상징으로 생각되기도 한 바람이니 죽어서도 갇히는 것은 무척 싫었을 겁니다. 딴은, 타의에 의해 영육이 분리되는 경험을 했을 터이니 그 가죽이 더욱 싫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業報인지 죽어서도 살아생전 현실 같은 악몽이 따라다니나 봅니다. -- 여 백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시집 [소]
[시 읽기]
동시인의 네 편의 ‘소’ 중에서 현재로서는 이 시가 마지막 편이 되겠습니다. 話題중심 구조이며 기승전결을 확연하게 구분한 것이 前作들과는 다릅니다. 또한 몸과 관련된 비극적 특성, 또는 종말을 그린 전작들과는 소를 보는 시각도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種에 관련된 시인의 사유가 있습니다.
소의 커다란 눈에는 커다랗기 때문에 무슨 할 말이 많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 특유의 시선은,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와 같이 소통통로를 가지지 못해 할 말이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또한 슬픈 느낌이 다가옵니다. 하기는 등치가 커다란 소가 코뚜레에 묶여 말은 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이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슬픈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소의 눈은 이 시에서 되새김과 함께 중심 시어의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길까요? 결국 소의 되새김이 그런 이유라는 시인의 사유는 이 시에서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그것에는 적소에 배치된 시어나 언술들이 큰 역할을 했겠지요. -- 여 백
[시평 / 문태준 시인]
쟁기와 써레와 달구지를 끌던 소, 두꺼운 혀로 억센 풀을 감아 뜯던 소, 송아지를 낳아 대학 공부를 시켜주던 소, 추운 날 아버지가 덕석을 입혀주던 소, 등을 긁어주면 한없이 유순해지던 소, 코뚜레가 꿰어 있는 소, 우시장에 팔려가는 아침에는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
소에게 들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소의 쓸모는 이제 비육에만 있다지만 소만큼 오랫동안 농가를 살려온 짐승도 드물다. 일하러 갈 땐 강한 무릎으로 불끈 일어서던 소. 뿔이 솟아 있으나 뿔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는 소. 소의 느린 걸음걸이와 큰 눈과 우직함을 생각해본다.
김기택(51) 시인은 소에 관한 시를 네 편 썼다. 꾀는 파리를 쫓아내지도 못하는 무력한 소, 무게를 늘리기 위해 강제로 물을 먹인 소, 도살되는 순간 바람이 빠져 나가서 빈 쇠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소에 대해 썼다. 시집 '소'의 표제작인 이 시는 소에 관한 그의 네 번째 시이다. 전작들이 소의 비극적인 몸에 관한 시라면 이 시는 소라는 종(種)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시선이 있다. 한마디의 말도 사용할 줄 모르고 다만 울음이 유일한 언어인 소. 오직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의 눈. 우리가 최초에는 가졌을 혹은 오히려 우리를 더 슬프게 내내 바라보았을 그 '순하고 동그란 감옥'인 눈. 당신에게 내뱉으면 눈물이 될 것 같아 속에 가두어 두고 수천만 년 동안 머뭇거린 나의 말….
김기택 시인의 시는 무섭도록 정밀한 관찰과 투시를 자랑한다. 그는 대상을 냉정하고도 빠끔히 묘사한다. 그는 하등동물의 도태된 본능을 그려내거나 사람의 망가진, 불구의 육체를 고집스럽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원시림'을 복원시켜 놓는다.
시 '신생아 2'에서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라고 그는 노래했다. 이런 시를 한껏 들이쉬면 어지럽고 시끄럽던 머리가 맑아진다. 선홍빛 아가미가 어느새 새로 생겨난다.
-- 시평: 문태준 시인
[참고] 극사실주의 [極寫實主義, hyperrealism]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와 조각의 새로운 경향.
슈퍼리얼리즘 ·포토리얼리즘 ·라디칼리얼리즘 ·샤포포커스리얼리즘 ·포토아트라고도 한다. 같은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며, 아무 뜻없이 장소 ·친구 ·가족 등이 다루어진다. 또한 감광제(感光劑)를 캔버스에 발라 직접 프린트하는 경우도 있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리얼리즘으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따라서 극사실주의는 팝 아트와 같이 매일매일의 생활, 즉 우리 눈앞에 항상 있는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지만, 한편 팝 아트와는 달리 아주 억제된 것이어서 아무런 코멘트 없이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만 취급한다. 그러나 감정이 배제된 채 기계적으로 확대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육안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추악함, 이를테면 모발에 가려진 점이나 미세한 흉터까지도 부각되어,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현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잔혹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극사실주의는 미국적인 즉물주의(卽物主義)가 낳은 미술사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종래의 추상미술과 사진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로는 작품제작에 슬라이드를 직접 ·간접으로 이용하는 C.클로스, H.캐노비츠, M.몰리 등과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연의 풍경이나 모델만을 대상으로 하는 P.펄슈타인, S.틸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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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현실주의 기법을 택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기법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반 독자라면 이렇게 살펴볼 이유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먼저 잠시 초현실주의를 살펴본 이유는 역시 시를 쓰기 때문입니다.
모든 님들 좋은 시 많이 쓰십시오. ^^
많은 도움이 되는 시와 시평에 감사드립니다. 여백 시인님.
김기택 시인의 "소" 네 편은 극사실주의 시고, #12 "고등어 ..."는 초현실주의 시인가요?
앞에 나온 신춘문예와 신인상 시도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 시인가요?
압축 대신 장황하게 부연되는 느낌입니다.
김기택 시인의 위 4편의 소는 극사실주의가 아닙니다. 다만, 사실주의나 극사실주의 기법에는 묘사가 많이 활용된다는 겁니다. 카메라로 풍경을 찍은 것처럼(감정 개입이 배제된) 보이는 것이 극사실주의입니다. 완벽한 극사실주의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고등어는 화자가 초현실주의 기법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신춘문예와 신인상은 초현실주의와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다만, 소개된 신춘문예와 신인상 작품을 읽으면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살펴본 것은 더 어려운 시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편의 시를 읽고 감상한다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라는 글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백선생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참고가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위의 본문에서는 이 카페 “시창작 강의실”에 있는 임보 선생님의 시작 이론도 활용되었습니다.
여러번 읽고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감히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시 감사드리며 김기택 시인님의 소, 기억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