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어 모으기 / 고정아 막달래나
'와르르, 차르르..쿠당탕탕... '
고철물로 가득찬 상자를 안고 계단에서 넘어졌다. 고철재가 나무 계단과 돌 바닥에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는 비명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음으로 높은 옥타브를 쳤다.
나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못과 나사와 녹슨 고물 사이에서 두 팔을 벌인 체 배를 깔고 누웠다. 다리는 다 내려오지 못한 계단에 걸쳐져 있고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뾰족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찌른다.
„젠장. 아이고 아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 만큼 아픈데 그보다 이 상황에서 혼자라는 것이 더 겁난다.
어디를 다쳤는지 감각도 없는데, 돌 바닥에 피가 고인다. 겨우 몸을 돌려 추스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흩어진 물건 사이를 기어서 전화벨 소리를 따라 거실로 갔다. 기어간 자리에는 붉은 피가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Hallo“
„Frau Kellerhoff? Sie....“
다다다 따발총처럼 남편이 있는 재활원 직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쏘았다.
30분 넘게 다발총을 쏜 요점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긴급 조치로 예정된 일정보다 먼저 퇴원 시킨다는 것이고 이틀 뒤에 데리러 오라는 것이다.
난감했다. 아직 다락의 쓰레기를 버리려면 일주일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은 뇌졸증으로 인해 재활 치료 중이다.
일 년 전 갑작스럽게 뇌졸증이 왔다.
'Schlganfall' 말 그대로 번갯불이 치듯 갑작스럽게 오는 병이라고 의사는 어원부터 설명했다. 평소 혈압이 조금 높다는 것 외엔 건강하고 자신의 사업에 긍정적이었다.
병원장은 당황하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물 한 컵을 따라 주면서 우선 심장 약한 것을 배려해 줬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받아 들일 것은 받아 들여야 한다는 통상적인 말인데도 병원장의 따뜻한 음성 때문인지 노래지던 하늘이 잔뜩 구름 낀 하늘의 느낌으로 되돌아왔다.
„우리의 검사 결과로는, 휠체어에서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중환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남편은 뇌 오른쪽 뒤 두정엽과 후두엽, 측두엽의 경계선과 왼쪽 전두엽(언어 기능)에 동시에 장애가 온 것이라고 했다.
MRI 사진과 인체 구조 사진을 놓고 열심히 설명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이명증에 걸린 것처럼 벽에 부딪쳐 파생된 음으로 메아리쳤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남편은 왼쪽 얼굴이 내려 앉아서 눈은 사파리 같고 밑으로 쳐진 입술에서는 침이 흐르고 왼쪽 팔과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자신의 상태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눈물과 침으로 번벅된 얼굴로 애써 말하는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
불가 두 시간 전만 해도 멀쩡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더 얻는다는 지론처럼 남편은 늘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했다.
그 날이 다르다면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 전에 나는 켬에서 성서 쓰기를 하고, 남편은 조간을 읽기로 했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이 암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우린 서로를 쳐다보면서 울기만 했다. 휠체어란 도구가 의미하는 것은 몸의 자유를 잃는 것이다. 뭘 잘못했나? 자학하기도 했다.
남편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컥울컥 울음을 쏟아냈다. 자유롭게 살던 나는 날개가 꺾이는 것이다. 그리고 병간호만 하면서 갇혀 살기엔 아직 젊다.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 이럴까? 재활을 위해 매스컴이나 책, 모든 정보를 최대한 얻어내고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분 앉기, 3분 앉기... 침대 끝에 걸터 앉기,일어 서 보기, 한 걸음 옮기기...우리는 체력의 한계를 측정하면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두 아이가 걸음마를 이렇게 배웠는가? 기억이 없다. 단지 아이들이 첫걸음을 떼었을 때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던 그 환한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된다. 남편이 어려워할 때마다 나는 의식적으로 아이들의 첫걸음을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했는지를 상기시켰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재활원으로 가기 전 병원 생활 6주 동안에 남편은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남편이 복용하는 한 주먹은 되는 양의 약 중에 '우울증 치료제'가 있었다.
나는 의사한테 항의를 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이성을 주시고, 희노애락의 인간사를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힘과 희망을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이 어려운 시기도 잘 이겨낼 것입니다. 우울증 약은 빼 주세요.“
의사는 여러가지 의학적 임상 결과와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게 상담해줬다.
병은 의사한테 맡기라고 했는데 말이다. 회복 과정을 봐 가면서 1년 정도 복용하기로 했다.
회복이 빨라지자 의사는 다시 종합 검사를 했다. 역시나 검사 결과는 처음과 같이 손상된 뇌의 상태는 심각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이라고 했다. 농담 같은 진담으로 말했다.
„당신들을 보면 신은 분명히 현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도 주일에 안 나가던 교회를 갑니다. 하하하”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겉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장애를 모를 정도로 회복됐다. 이렇게 나마 회복된 것에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사업도 정리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다. 남편은 사슴 같은 순한 눈을 꺼벅이면서 고마워했다. 아이들이 엄마도 이제 좀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1주일간 여행할 수 있도록 아빠를 돌봐줬다. 내겐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24시간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다가 일주일 만에 보니 조금 이상해 보였다. 즉시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미미하지만 재발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이 엄격해지던 2020년 3월에 남편은 다시 재활원으로 휴양을 떠났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전에 갔던 재활원을 선택했는데, 방역으로 완전히 갇힌 생활에 방문도 금지되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남편의 증세는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빠졌다. 보행기에 의존하여도 몇 백 미터도 못 걸었다. 그곳으로 보낸 것이 후회막심했지만, 이미 늦었다. 암담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문맹에 가깝고...
편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안타깝고 후회되었다.
어떻든 삶은 지속되는 것이다. 복잡한 독일의 사무적인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무슨 서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서류를 찾기 위해 남편만 들어가는 방엘 갔다. 그곳은 '출입금지' 표지판이 없음에도 우린 철저히 지켰다. 무거운 마음으로 방문을 여는 순간 난 기절할 뻔했다. 겨우 모로 지나갈 수 있을 공간만 남긴 책장에는 묶은 서류철, 수 많은 책, 아이들의 유치원 시절의 그림까지 온갖 물건들로 가득했다. 감히 우린 그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조차 못하도록 단속한 곳이다.
그 많은 물건을 살펴보니 내 눈에는 다 쓸 때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휴지 조각 하나도 아주 정결하게 잘 놓여져 있다.
그는 왜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쓰잘 데 없는 물건을 나른 것일까?
이것저것 필요한 서류를 찾아 내고, 작은 장에 가득히 모아 놓은 우표를 발견했다. 그 우표들은 남편이 편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아래층에 있는 서재에 장을 마련하고 앨범을 구입했다.
그 외엔 아무리 뒤져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 많은 물건이 정성스럽게 차곡차곡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모든 것들은 남편에게는 특별한 물건일 것이다.
그 방 뿐만 아니라, 넓은 다락에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그것을 지켜 보다가 아이들과 육체적인 장애로 인해 계단 오르내르기도 어려운 남편의 상태를 감안하여 동네 언니와 함께 묶은 서류를 정리하고, 분리 수거하기로 했다.
남편이 재활원에 있는 6주 동안 버린 쓰레기는 재활용 노랑 봉투 89개, 봉고차로 5번 분량의 책과 종이, 철재 고물은 5톤의 차로 3번이나 가져갔다.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이 많은 물건들을 들고 오르내리던 마음을 읽어 보려고 노력했다.
왜....
생각이 깊어질수록 들고 나른 그의 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워서 명치 끝이 아파져 왔다.
35년 동안이란 세월을 같이 살았는데, 왜 몰랐을까?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물건들, 쉽게 버린 물건들이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소유물이었다는 것을...
왜 진작 그이 마음을 읽어 주지 못했을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쓰러졌을까?
남편은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신의 것이란 없었다고 했다. 카톨릭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가업을 운영하면서 멀어져 갔다.
나이가 들어가며 신부가 되겠다는 꿈은 멀어졌지만, 수도원에서 조용히 기도 생활을 하고픈 소망도 어머니의 죽음과 싶게 정리할 수 없는 가업 때문에 주저했다. 이를 지켜 보던 영적 지도 신부님의 주선으로 우린 사제관에서 선을 보았다. 두 아이를 낳아 성장 시키고 35년이란 생을 함께 했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르고, 가업에 충실하고, 두 아이에게 다 내어 주고, 문화 다른 나와의 생활도 내가 이중 문화에서 겪는 혼란처럼 힘들게 살아왔을 것이다.
부부 싸움을 할 때 난 늘 따졌었다.
„우리가 부부냐?. 수도원보다 더 엄격한 작은 수도 공동체지.“
고요한 눈으로 먼 산을 봐라 보는 것 같은 그의 정적과 애써 감실 앞에 앉아서 성체 조배를 하지 않아도 늘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그의 엄숙한 모습이 수도자를 떠 올리게 했다. 그는 악다구니 같은 내 말에 늘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되는 거야. 너처럼 동네 방네 돌아다니지 않아도 신앙 생활은 가능해. 그렇지만 외향적인 내 성격도 이해해.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사는거니까.
'안된다.'라는 표현은 말이 아니라 그의 눈이 사슴 눈처럼 깊어지는 것이었다.
일명 '알아서 해'.
나는 어떤 소소한 일이어도 늘 알아서 해야 하는 눈치를 봐야 했다. 내 고집대로 튕길 것인가? 스스로 내려 놓을 것인가? 고민하고 고심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그것이 고문이기도 하고 잔소리 안 들으니 좋기도 했다.
그가 지닌 톨레란츠하고 겸손하고 순한 내면에 숨은 강한 절제는 '안 된다.' 라는 표현보다 더 단호하고 엄격하여서 아이들마저 눈빛 하나로 제압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허전하고 외로왔던 것일까? 소중한 것은 다 내어주고, 안으로 쌓인 헛헛함을 하찮은 것들을 모아 들이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늘 깨어 있으라' 란 성서의 말씀이 생각난다.
천년 만년을 살아 갈 것처럼, 그날이 그날일 것처럼 살다가, 이 엄청난 고난을 겪고서야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으니 부족하기만 내 자신에 고개 숙인다.
당신이 없는 동안,
당신의 보물에 질리고 찔리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다음에, 나는 당신이 비로소 하느님이 맺어준 진정한 배우자임을 알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돌아오면,
당신이 '걷어 모으기'한 것들을 몰래 정리한 빈 공간은 진정한 가족의 사랑으로 채워주리다.
첫댓글 그때 그 시간이 지나가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맴돌고 있으면 어떨까요?
살아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시련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 막달래나님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 사 합 니 다 ✡✡✡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감동글 잘읽었어요.